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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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독일계 유대인으로써, 전세계에서 인정받는 사회심리학자, 사회학자, 인본주의 철학자 그리고 사회 민주주의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여기 프롬 만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면밀히 연구한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1900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정통 유대교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거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은 이후, 여느 유대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미국에서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게 되는 정신 분석과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동일 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에 이릅니다. 이 책은 원제, "On Disobedience : Why Freedom Means Saying 'No' To Power"로 지난 198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프롬도 이미 장 자크 루소를 접했을 수도 있겠으나, 단편적으로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되어 떠오른 것은 루소의 "인민은 자신들의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문구였습니다. 물론 프롬의 이 책이 시민들의 일반적인 야생성을 단순히 고취시키고자 쓴 글은 아니었는데요. 그가 버틀란드 러셀을 줄곧 인용하면서 우려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무분별한 핵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의 절멸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첨예한 종말을 위해 대결하는 사실상의 맹목적 군사주의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심도있게 고찰해 보는 것이 그의 일관된 학문적 목적이기도 할텐데요. 그의 확신대로 러셀이 단순한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누구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무엇보다 긍정하고 중요시하게 여겼던 휴머니스트로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삶을 위해 모든 시민들이 최소한의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명확히 한 것이 바로 이 책의 꽤 숭고해 보이는 목적이라고 판단됩니다.

글의 2장에서 프롬은 과거 한정된 자원으로 인한 견고한 계급주의적 체제에 어떻게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억압하고 제압해 왔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의 '복종'이라는 관념을 넘어서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만연된 복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분의 개념적 도출은 다음 3장에서 드러나는,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사색하고 생각을 진행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과연 이를 자본가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단편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기도 한데요. 프롬은 논리적 전개 과정에서 과거 자본주의적 관리 체계와 공산주의적 관리 체계의 양대 관리 체계가 실상은 많은 인류의 삶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인 3장의 시스템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는 더 부유하지만, 덜 자유롭다"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배타적인 시장 자유에 경도된 자들은 오늘날 이룩한 자본주의가 아무런 결점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8년의 대몰락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자본주의가 '합리주의라는 만능의 잣대로 시민들을 세뇌'시킴으로써, 과거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들의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불복종과 저항을 거세시켜 버린 비극적 작용을 추동한 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그따위 사회 정의와 불평등의 개선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과 같은 주장들 말입니다. 이에 프롬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은 우리의 불복종의 정신이 너무나 터무니없게 죄악시 된 것을 '권위주의적 양심'에 빗대고 있기도 한데요.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19세기의 공공연한 권위주의를 극복했다고 자랑스러워 한다"고 비꼬고 있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권위주의를 극복했는지는 그 실상에 대해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프롬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크나큰 애정을 갖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관리주의자들이 마땅히 누려할 시민의 자유와 권리들을 사회를 통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계층들을 위해 적절하게 관리해 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오늘날 우리의 사법제도가 과연 모두의 시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오늘날 심지어 내면화 되었다고 판단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사법제도가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모두가 다시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대다수의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사회에 대해 혹은 체제 전반에 대해 인간이 지닌 이성의 권리로써 마땅히 사색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또한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지만 프롬의 우려대로 인류와 인류 문명 전반을 절멸에 이르게 하기 충분한 핵무기의 위협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를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초로서, '시민의 불복종'이 매우 시급한 상황입니다. 단언코 미국을 포함해, 순간 감행될 수 있는 군사주의적 모험을 얼마나 견제할 수 있는지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할텐데요. 이렇게 암울한 냉전의 시기에서도 모든 인간의 삶과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경주했던 러셀과 프롬과 같은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정도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저자인 프롬은 3장과 4장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질 경색된 시장 자유가 초래할 사회의 양상을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순히 노동자들이 자본을 제어하는 것에 이르는 것을 추종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질적 목적이 삶의 주요 관심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삶이 해방되게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언급하게 되는 것이지만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던 화두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시민들의 불복종 정신이야 말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건전해지는 선결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지금도 특히, 최상위에 위치한 자본가들과 엘리트주의자들이 시민들이 스스로 사색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견실히 학습하고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적인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는 저들의 인식론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자본주의가 어떤 집단의 이해 관계에도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속성 자체가 공익과 별반 상관없이 배타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자의 번역이 거의 군더더기 없이 좋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향후 5년에서 10년 안에 인류가 인간 문명을,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절멸시킬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도 상당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복종한다고 할 떄 대개 그것은 권위주의적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자유와 불복종의 역량은 분리될 수 없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소수에게 돌아갈 만큼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스러기만 가질 수 있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칙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가끔씩만 나타난다, 그들은 죽은 뒤 메시지를 남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사상은 대중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에게 악용되기 쉽다

지난 150년 동안 우리는 정치 사제들을 넘치도록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을 관리하고 집행했다

대부분의 사회체제에서 복종은 최고의 미덕이고 불복종은 최고의 죄악으로 여겨진다

버틀란드 러셀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깊이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산업 시스템이 지나온 경로를 그대로 계속 밟아간다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할 것이며 인간은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거대 기업은 피지배자들에게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생산물이 우리 위의 객관적 요인들과 결합해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의 기대를 꺠뜨리고 우리의 계산을 무력화한다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책임을 두려워하고 그저 배불리 먹는 로봇 같은 노예가 되고 싶어 한다

연대와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원칙, 인간의 의지와 비전과 계획이 아니라 비인격적 메커니즘인 시장이 사회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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