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중도 - 한없이 나약하고 터무니없이 가벼운 중도정치의 민낯
알랭 드노 지음, 클레망 드 골작 그림, 권희선 옮김 / 인문결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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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노는 캐나다 퀘벡 주의 아우타우아이스(지명의 독음이 정확한지는 불확실합니다)에서 태어나 독일에 소재한 마크 블로흐 연구 센터에서 연구 박사를 수여받고, 자크 랑시에르의 지도하에 파리 8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의 독특한 연구는 프랑스 철학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게오르크 짐멜에 집중되어 있기도 한데요. 너무나 의외이긴 하지만 국제 금융이 주도하는 세계화와 초국적 기업의 조세 피난처와 관련된 주제로 여러 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는 점은 저로서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이력을 보면서 지식인의 진정한 의무와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고심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가 집필한 여러 논저들이 왜곡된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다루고 있어, 하루빨리 다른 글들도 역시 국내에 번역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Politiques de l'extrême centre"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알랭 드노의 이 글이 주는 인상은 흡사 타리크 알리의 대표적 논저를 떠올리게 합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다소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등장한 이 중도라는 개념은 드노의 말마따나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명확한 정치적 의견 없이 그저 현실을 오도하는데 일정 부분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가히 영속된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자본주의에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제 사회적 변수에 어떠한 통제권도 없다는 점을 중산층을 포함한 다른 계층들이 미처 생각도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기득권층의 숨겨진 의도"가 명확하다고 저자는 10장에서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단순히 좌우파의 구분과 진보와 보수라는 설명은 그저 자본주의가 이 정도로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마찬가지로 우파의 정치가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힘있는 자들을 위한 정치라는 점에서 이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유주의'라는 관념의 진실된 정체를 저자가 중도를 비판하는 논증 가운데서 얼마간 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현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동하는 일련의 강고한 이행은 진정한 중도 따위는 이미 의미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명백하게 극우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보수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스스로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실상 어떠한 공동체적 이익에도 관심이 없으며,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전무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를 다시 풀어본다면 현재의 자유주의적 기조로 쌓아 올려진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개인주의적이고 보다 이기심을 용인하는 분위기로써,  이것을 신자유주의이든 자유지상주의든 뭐라 부르던 간에, 변형된 보수주의와 아주 밀접하게 결탁해 이들 전부가 각국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는 건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와 비슷하게 저자도 글 3장에서, "신자유주의자와 초자유주의자는 서로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적 형태의 발전이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신자유주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미지 문제 때문인지 이런 약탈적 이론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으나 제대로 된 본질은 앞선 점을 거의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드노가 비꼬는 듯한 언설로 소개하고 있는 "나는 우파이긴 하지만.."이라는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우파들과 구분하는 듯한 논법이 얼마나 허망한지 입증하고 있었는데요.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던 그해부터 많은 미국의 리버럴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투신한 것은 이를 잘 설명한다고 여겨집니다. 그저 솔직하게 "나는 시장 자유와 개인주의, 인간의 이기심과 이를 바탕으로 다수의 능력 없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구조를 그저 감내하는 것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설득력이 높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물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러한 노골적인 논법에 전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글 13장에서는 "좌우를 가르는 스펙트럼 자체가 너무나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중은 이러한 좌우의 근본적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민주주의가 도식적인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주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수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의견을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에 다소간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부정하기 어려울 점일텐데요. 여기에는 시장 자유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영화와 급격한 복지 축소를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몰아가 이 글에서 보여지는 중산층의 유명 무실과 더불어 시민들의 '정치적 의지의 거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구조적으로 강고하게 이식되는 과정에서 상위 기득권층을 제외한 다수의 일반 계층들에겐 별반 이득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애초에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일갈하기까지 했습니다만 굳이 수십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루소의 사회계약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종교적 맹신과도 같은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대한 믿음을 과도하게 정치화하고, 이외에는 전혀 어떠한 대안도 없다는 식의 그릇된 신념을 공익과 공동체주의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을지 시민 사회가 의견의 공유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드노의 언급대로 중도라는 정치적 개념 자체가 현재의 극심한 불평등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명확합니다. 그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 사회의 모순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에 기대 숨지 않도록 비겁한 신념보다는 최소한의 정치적 선명성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시민이 지켜야 할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많은 시민들이 중도 놀음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결국 과두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전에 다시 한번 극우 파시즘이 도래해, 정치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라는 이들 극우주의자들이 나날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 참으로 우려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데요. 이 글 16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이성과 균형,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표방하며 좌우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겠다"는 일부 극중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이처럼 설득력이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체제에 대한 순응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너무나 강고한 것이 현실이고, 철지난 이념적 구도를 바탕으로 반대의 비판적 의견을 묵살하는 것도 현재의 단면이기도 할텐데요. 무엇보다 조지 소로스와 같은 자가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한 국가의 경제를 투기로 절단 낼 수 있는 상황을 우리가 용인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를 통해 조세 피난처 문제를 비롯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관련된 시급한 문제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노정은 앞선 과두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다수의 시민들이 극단주의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개인 활동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자들을 흉내 냄으로써 완성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와 초자유주의자는 서로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적 형태의 발전이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서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자명하다. 현대 정치 시스템이 민주주의 무덤을 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폭압적 연대 행동에는 강력하다 못해 폭압적이까지 한 공권력의 진압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민중이 결집하여 조직화되면 어디에서나 그렇듯 카리스마적 권력이 출현한다

‘자유주의자이긴 하지만 좌파‘들은 모든 정치적 요구를 이상하다 못해 뒤틀린 방식으로 다룬다

그런가 하면 조지 소로스는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도 한 나라의 경제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외환 투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도대체 어째서 현대 금융 시스템이 이를 용인하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비정상적인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상적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중도층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가능성에 기초한 분석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자유주의 정책이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음은 어린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신성한 가치로 떠받드는 자유주의자들과 사유재산 축적에 집착하는 초자유주의자 및 정치 활동의 의미를 신적 대상과 연계시키는 종교적 광신도 같은 ‘보수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분하려 할 때에는 그 명칭을 쓰지 않는다

전통주의자들은 국가가 집행하는 폭력에 대해 현실론을 내세우며 적극 찬성하지만 그들이 그러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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