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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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바트 호네프 출생의 얀-베르너 뮐러는 정치사상사와 정치이론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그는 베를린 자유 대학을 거쳐 옥스포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는데요. 또한, 그는 최근 베를린에 설립된 바드 자유 예술 대학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이에 독일 같은 경우는 2차 대전 당시 파시즘의 영향으로 현재까지 독일 학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미국보다도 더 사회내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한데요. 이와 관련해, 뮐러 역시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위기, 즉, 우익 포퓰리즘의 선동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내고 이를 어떻게 정상적인 민주주의와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학자로서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정치학자로서의 풍부한 인용과 더불어 정확한 논증과 결말로 마무리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요. 그저 제법 잘 쓴 학술서로서가 아니라 이 책은 모든 시민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건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훌륭한 해답이 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은 원제, "Democracy Rules"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참고로, 국역된 것으로 보이는 책의 부제에 대해 저렇게 자극적인 표현으로 정했어야 했나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출판사의 책 판매고를 위해 저리 쓴 모양인 것 같지만 책을 구입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미 책 내용은 저런 묘사가 없어도 너무나 좋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는데 있어 적잖은 어려움을 느낄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동안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 샤츠슈나이더 등과 같은 훌륭한 정치학자들의 글을 통해,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인류에게 정지체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규명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지지 파파차리시가 언급한 민주주의의 대한 명료한 정의로서,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권리"라는 문장을 계속 되내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이 글의 저자인 뮐러 역시 2장에서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문장에서 파파차리시와 거의 동일하게 이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평등한 자유'라는 단어의 울림은 꽤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에 저자는 작금의 '우익 포퓰리즘의 왜곡된 선동 정치'에 따른 민주주의의 혼란에 있어 대의의 측면에서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모든 시민이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입지를 누려야 한다"는 매우 중요하고 침해 당할 수 없는 테제입니다. 저자가 이렇게 강조하게 된 연유에는 "시민은 정당과 언론의 혁신 방안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가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제가 강조했던 대로 오늘날의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와 건전할 필요가 있는 정치체의 왜곡은 바로 '우익 포퓰리즘 내지는 극우 포퓰리즘의 발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네덜란드의 저명한 포퓰리즘 연구자이자 정치학자인 카스 무데보다 더 실용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글의 1장과 2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꼽는다면 서두의 두 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의 소위 고인물 정치로 많은 시민의 불만으로 점철된 현재의 우리 정치는 다분히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공격 거리가 되었습니다. 저 포퓰리스트들이 정치 체제 전반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 역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마땅히 발언할 수 있는 권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고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여기에서 시민들이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는 부분은 우익 포퓰리즘과 그 안에 있는 포퓰리스트는 스스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을 뿐이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정치적 선명성을 갖고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적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 표면적으로는 항상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왜곡된 보수주의와 그 맥락이 유사합니다. 이를테면 보수적 권위주의라든지 과거의 매카시즘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많은 시민들이 일종의 정치적 딜레마로 여길 수는 있겠지만 저자의 의견대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이상 건전하지 않다는 점은 사실상 진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어처구니가 없게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적 이익이라는 숨겨진 의도를 갖고 기존 체제를 심지어 악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이들 포퓰리스트들이 전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행태일텐데요. 그럼에도 저 포퓰리스트들 역시 비난해 마지 않는 소위 엘리트 지배체제와 다름없이, 저들 역시도 좋은 교육과 사회적으로 많은 인맥을 쌓아 돈과 권력을 동시에 얻은 기존의 기득권 엘리트들과 하등 다를바가 없다는 점이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에서도 거의 가감없이 언급되는 도널드 트럼프의 충실한 대변자였던 스티브 배넌의 전반적인 발언들을 통해 저자는 포퓰리즘 정치의 실체를 가감 없이 밝히는데 노력하고 있는데요. 트럼프는 펜데믹 초기 워싱턴의 실패와 관련해서, "이런 실책에 대해 사과하기는 커녕, 국민에게 어떤 종류의 공감이 애도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었다"고 2장에서 그의 행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일독하고 들었던 생각은, 과연 도널드 트럼프가 전염병에 희생된 국민들에게 애도를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다고 느꼈는데요. 이미 여러 논저들을 통해 트럼프가 일반적인 공감 능력이 결여된 극도의 나르시스트로 그려진 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전반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듯한 1장 초입의 등장 인물들, 즉, 오르반 빅토르, 에제프 아이이프 에르도안, 야로스와프 카진스키, 나렌드라 모디, 도널드 트럼프, 베냐민 네타냐후, 자이르 보오소나루 등은 사뭇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푸틴의 이름까지 넣는 것이 마땅하겠죠. 이들 포퓰리스트들의 여러 해악들 가운데 가장 큰 해악은, "저들의 진짜 국민과 가짜 국민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 논리"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엘리트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이미 우월하기 때문에(자신들은 기존 엘리트 지배 체제에서 만연된 정치 부패와 무능과는 일절 관계가 없다는 식입니다) 마땅히 다수 시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규정하면서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은 다수의 국민들을 적이나 다름 없는 비국민 논법으로 치부하는데 이르는데요. 이 포퓰리스트들이 얼마나 카를 슈미트를 섭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러한 논법들은 파시즘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여기에 증오를 더 부추겨, 이주민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 발산은 앞선 우리의 국민이 아니라는 극악의 이분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런 표면적인 정치적 상황 만으로 시민들이 파시즘을 지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진지하게 단언하는데요. 물론 이 글 3장에서도 짤막히 언급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철회할 생각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논리일겁니다. 이렇게 사회에는 반민주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지만 이들이 주요한 정치 세력이라고 보기에는 실상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요.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파시즘과 저자가 미헬스의 입을 통해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는 과두제는 매우 친숙한 관계라는 점은 이 글을 일독하는 모든 분들이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은 작고한 역사학자인 토니 주트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너저분하고 짜증나는 민주주의를 증오했던 카를 슈미트는 생전에 그렇게 자신을 위해 자기 변명에 나섰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극단주의자들의 사상적 매파가 되었습니다. 나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전부 적이라는 개념의 이식 내지는 확대는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의 위기에 놓여 있는지 실로 가늠하게 합니다. 일전에 많은 인용을 했던, "리버럴을 포함한 진보주의를 격멸의 대상으로 삼았던 티파티"의 존재와 현재 미국 내의 극심한 인종 차별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봐야 하는 BLM Black Lives Matters 운동과 이와 유사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멸 등은 마치 "선거에 패한 패자들이 마땅히 어떠한 보복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언급하는 이면에는 어떠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있는지 대변하고 있는 듯 한데요. 이와 동일하게도 우리가 포퓰리즘을 지지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인 시민들을 절대 대적하지 않아야만 하는 당위가 바로 앞선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설득력 있는 주장대로 포퓰리스트 편에 선 시민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을 선동한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더러운 의도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선동을 당한 많은 시민들에게 결코 그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여기는데요. 어쩌면 거듭 진지한 논의로서 민주주의의 필요불가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3장의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 인프라"는 무엇보다 시민들 서로 간에 "광범위한 토론'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서로 검증하여 토론하고 더 나아가 리처드 번스타인이 새롭게 규명했던 '가류주의'와 거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나 주장이 오류나 터무니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때, 그것을 즉시 철회하고 올바른 사실과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민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합법적인 불복종 운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더불어 '주민 소환제'를 추천하고 싶은데요. 저자의 강조대로, "서로 다른 두 정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하는 것 만으로는 우리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약간의 참고로 추첨 민주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제기된 그런 민주주의가 실효성이 있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투표를 통해 정치 권력을 교체하는 시스템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전형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제도적 문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매개라고 볼 수 있는 언론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자유와 평등은 명문화된 헌법의 보장만으로는 이 절대 가치들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는 먼저 언론이 제 일을 다하고 있는지 견제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고 싶어하는 언론 사주'를 어떻게 언론의 중요한 기본적 의무와 분리할 수 있을지 먼저 고심해 봐야 할 텐데요. 아마도 이 지점에 시민들의 합법적인 불복종 운동이 명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선출 권력의 소환'이라는 주민 소환제 역시 구상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데요. 현재의 우리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게 된 연유에는 산업 자본주의가 근 백 년 동안 자신들이 투입한 돈으로 언론을 통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기 떄문입니다. 물론 자본가들이 민주주의를 길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 보장과 안전망 구축을 위해, 그리 나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불행하게도 현 시점의 언론은 자본의 광범위한 통제를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부(富)로서 사회의 맨 꼭대기에 자리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지속적인 부의 창출과 되물림을 위해, 신자유주의와 언론, 가용할 수 있는 자본의 삼위일체로 발화된지 오래인 상황입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사적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 마땅히 중요하지만 정치 전반이 자본주의에 종속된 상황으로서 근본적으로 시민 다수가 용납할 수 없는 불평등한 자유를 거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점이 정확한 현실 분석일 겁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민주주의의 실체적인 축소화 혹은 경량화는 대의 민주주의가 내재한 정치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반대만을 위한 투표가 전세계에서 횡행하고 있는 상황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일텐데요. 좀 더 최악인 상황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맹점만을 교묘히 공격하여 정치적 이익화에 나서고 있는 전세계의 포퓰리즘이 저자가 우려하는 데로 오로지 반대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혹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치를 제외하면 현질 정치에서 어떠한 것도 남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울며겨자 먹기로 권위주의적 과두제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인데요. 그럼에도 저자는 아직까진 우리의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다고 역설합니다. 아마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그렇게 쉽게 으스러지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러한 심각한 불평등의 상황에서도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고 다른 건 몰라도 정당의 비민주주의화와 대의제 민주주의 전반을 어느 정도는 감시하고 있기 떄문일겁니다. 물론 버틀란드 러셀의 아주 찬란한 희망대로 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정치 체제가 시민들에게 나타나는 것도 좋은 일일겁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더이상 우리 민주주의가 누더기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감시에 나서야 할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동안 우리와 같이 세상을 살다가 간 사상가들이 무엇보다 정치적 분별력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존 듀이의 거친 희망대로 우리가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논저를 정말 완벽하게 번역한 역자에게 자리를 빌어 감사하단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개 독자로서 역자들의 숱한 노고를 익히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만, 과거 일제 치하에서 대다수 노예주와 같은 일본인들은 너희와 같은 조선인들을 천황 폐하가 가엾게 여겨 제국의 신민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이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조선인들은 대부분 이등 국민이었죠.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진짜 국민 가짜 국민의 논법이 저런 일등 국민 이등 국민의 논법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다 겉으로는 꿀을 바른 듯 사탕 발림으로 현실을 현혹하려 들지만 내포한 실상은 화자의 이익을 위해, 여지없이 휘둘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이래서 극우 포퓰리스트의 선동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증오와 분노 정치에도 결코 눈을 돌려서도 안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그 어떤 오래된 시민교육 교과서를 봐도 ‘권력자를 잘 감시하는 것이 훌륭한 민주 시민의 덕목‘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도 요즘은 그런 행태가 바로 ‘포퓰리즘적‘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와 법치에 해롭다는 것을 우리 모두 끊임없이 주입받고 있다

또 항상 대비책으로 투표 억압 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실질적으로 소수 독재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이는 공화당이 존경한다고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면서 깊이 우려했던 시나리오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오르반이나 트럼프 부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이렇게 과두정 체제의 지배 계급이 우익 포퓰리즘 정당에서 긍정적인 점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정당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나라 잃을 공포‘를 부추기면서 자기 생각에 ‘진짜 국민‘이 아닌 이들을 정치 체제에서 퇴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반면 포퓰리스트는 ‘누가 국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언제나 하나뿐인 답을 이미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정답은 정해져 있는 것, 반박 불가한 팩트라고(어쩌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정답이라고)여긴다

우익 권위주의 포퓰리스트는 모든 시민이 진짜 국민이 아니라는 늬앙스를 풍긴다. 어떤 구성원은 아예 국민에 속하지 않고, 잘해봤자 이등 시민이라는 것이다

나쁜 점은 진정한 ‘비존중‘의 평범한 무교양보다 훨씬 더 민주 정치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거는 정부를 상대로 집단적 찬성 또는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주도해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발언이나 전례 없는 정치 조직 등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회인 것이다

스티브 배넌은 2016년 대선 당시, 혹시 상대 후보가 승리하면 "완전히 엿을 먹여서 통치 행위라고는 할 수 없도록 하는 게 백업 전략"이라 선언한 바 있다

실제로 일부 동료 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시민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이고 식견이 부족한지를 계속해서 증명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듯 하다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정당은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에 따라, 여러 나라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마침내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관점부터 ‘페이스북은 파시즘‘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의 영향력에 대한 의견이 양극단을 오가는 광경은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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