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합적 민주주의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유용민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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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로 있는 저자는 한양대에서 신문방송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취득하고, 연세대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저자에 대한 이력을 찾기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많은 정보가 잡히지는 않았는데요. 그럼에도 김해시 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선거방송토론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것이나, 요즘 여러 방송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준희 교수와 2019년에 '미디어오늘'에서 주최한 '포스트 진실' 시대와 관련한 토론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여러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언론에도 꾸준히 얼굴을 알리고 있는 듯 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미디어학을 전공한 학자가 누구보다도 방송에 참여해, 우리의 언론 지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비판할 점은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그의 이러한 활동을 충분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의 이 책은, 2015년 5월에 분량이 적은 소책자 형태로 출간되었고, 전문적인 전공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일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정립 시키는데 어느 정도 유익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이 책의 구성과 말하고자 하는 점을 요약해 보자면,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대안 모델로 주목 받고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 agonistic democracy'를 기반으로 그동안의 무페의 논저들을 살펴보고, 이 경합적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개선점이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페의 민주주의에 대한 선연한 주장은 경합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급진 민주주의 radical democracy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여기서는 유용민 교수의 경합적 민주주의를 대표적 주제어로 사용해 보겠습니다. 더불어, 저자의 이 글은 샹탈 무페의 최근 번역된 '경합들'의 해설서로 읽혀질 수도 있고 그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무페의 생각을 담은 다른 논저들의 개론적인 이해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보이는 논증이 전반적으로 첨예하게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독자들에게 개념을 숙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만큼 저자의 이 글이 비교적 실용적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꽤 오랫동안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적 원칙이 정치 전반에 있어서 무력한 상황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대한 개념도 무엇보다 다원주의적 원칙이 우선적으로 기반 되어야 했는데요. 카를 슈미트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자유 민주주의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치부 되고, 물론 이러한 인식적 결과의 총체는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나치가 사회를 인종적으로 '균일화'시키려고 했던 것도 '전체주의에 이르는 길'을 정치의 개선의 어떤 방향으로 생각했던 슈미트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슈미트의 이런 인식을 마크 릴라가 비판했던 것처럼 그저 자신의 '드러낼 수 없는 과거 이력'을 학문적으로 모호하게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어느 정도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슈미트가 내 편과 남의 편으로 규정하는 정치에서의 대결 구도가 과연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를 전반을 이런 식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이미 이 글 4장에서는 우리 정치의 모든 문제 혹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 바로 "정치의 형식과 내용이 불일치하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는데요. 이것은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소위 정치적 효능감' 제대로 충족시키기 어려운 문제이고, 이와 관련해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 전반이 정치가들과 정치 환경에서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정치 무대에 올리는 시민들의 책임도 전혀 없을 수 없다는 식의 논리적 전개를 보이고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주장에 십분 동의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대다수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표리부동'한 태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평가한 바와 같이 현대 사회에 '겸허한 도덕적 중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있어서 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엘리트 계층조차도 그 지위에 걸맞는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사적 이익'에 치중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치인들이 더 이상 겸허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며, 다니엘 코엔이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시민이 '새로운 공공선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과 유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합리적인 개인'과 반대로 민주주의가 너무나 혼란스런 상황을 잉태하기 때문에 과연 시민들에게 정치가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도 안되는 질문을 던진 바가 있습니다. 무페 역시, 신자유주의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도 개인의 합리성을 너무 과신한 바가 있다고 못 박고 있는데요. 그녀가 주장하는 경합적 민주주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정치 전반을 토론과 합의로 이끄는 힘에 있습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적 기반이 우선 되어야 하는 증거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우리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다른 분들과 같이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민주를 놓고 다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무페의 평가대로 이 자유주의적 기반이 우선시 되는 정치적 환경에서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초래된 점은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글쎄요. 이를 그저 혼란스런 민주주의의가 잉태한 정치적 후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의 모습인데요. 이들 반동 세력들이 그저 도식적으로 민주주의의 환경에서 일어난 점을 민주주의 제도 자체의 몰락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큰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무페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공화주의적 가치'가 재정립 되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우리가 너무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그동안의 '공동선'에 대한 개념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더불어 민주주의에 대한 극심한 회의론에 내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지지 파파차리시가 도출한 개념처럼 아직은 이 세계에 무엇보다 진정한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그룹들을 건전한 개방성으로 이끌 수 있는 정치는 민주주의 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무페의 이 핵심 제안이 큰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여기에서 인용된 클로드 르포르의 단정대로, 민주적 사회가 최종적으로 완성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역사 속으로 밀어낼 수 없는 것인데요. 이 지점에서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점은 만약 우리에게서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그저 '과두제'이거나 아니면 히틀러의 재림을 한 번 더 눈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카를 슈미트가 자유주의적 정치를 나약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저 강력한 힘에 의한 주도적인 사회 통합을 진실로 자신의 이상으로 그려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편적인 '시민권의 붕괴'를 예상할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의 대두에 따른 극단주의를 그가 살아 있다면 나약한 모든 것들의 실로 살아있는 대안으로 취급했을까 어느 정도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제가 마크 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슈미트에 대한 다수의 해석과 비평에 의구심을 갖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슈미트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민들에 의한 '반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 아닌가 지레짐작을 하게 됩니다. 사실 무페가 정립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건들이 꽤 이상주의적으로 여겨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극심한 이유이기도 하고 정치가 신자유주의에 점령 당한 것은 물론 이제는 거의 '쇼비즈니스'와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티비에서 여야 국회의원들 간의 정치 논쟁이 나중에는 양 진영 간의 인신공격으로 귀결된 것은 그만큼 저 '직업 정치인들'이 진영 논리가 아닌 진실로 건전한 토론이 가능하게 되는 환경을 우리가 목도 하게 될 것인지는 거의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겠죠. 더욱이 오늘날처럼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고등 교육을 받은 시대가 없었다고 본다면, 이런 아이러니는 더욱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위르겐 하버마스는 적대하는 두 정치가 진정으로 화해를 해야만 정치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헤겔이 진정으로 원한 역사적 사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 마무리 되는 이 시점에 있어 무페의 정치적 대안이 그저 철지난 이상주의로 매도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정치에서까지 합리적 이성과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정치가 쓸모없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정체성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분노와 경멸 또한 이런 분위기를 부추겨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에 있어서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을 현실 정치에 내보내지 못하고, 우리가 스스로 '진실의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점'도 큰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미흡한 마음으로는 진정 건전한 경합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 사회에 정착하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19세기 오귀스트 콩트와 허버트 스펜서로부터 발전한 근대적 사회관은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통합되어 있는 유기체로 간주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사고한다

20세기 후반 많은 사람들은 자유, 인권, 평등, 평화의 시대가 번영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회에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주장을 도그마적 진리와 정의로 내세우는 한편 이념적 극단성과 선명성을 추구하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 및 집단을 근본적으로 적대시하는 정치 세력, 담론들이 난무하고 있다

무페는 자유주의자들이 인간 이성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과도하게 기대하고 민주주의를 절차주의적으로 한정해 버림으로써 정치를 초정치적인 중립지대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실제 현대인들의 정체성은 개인이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종교, 성 등 다양한 영역과 조건들에 다층적으로 처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이고 우연적인 연관을 통해 구성되어 가는 것이지, 어느 한 요소로 채워지거나 확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슈미트는 자유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내적 모순을 지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근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내적 모순을 파악하고, 그 위기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자유주의 정치 이론은 정치적 주체들을 합리적, 이성적, 개인주의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슈미트는 적대하는 집단들의 투쟁으로 야기되는 사회 혼란이 의회나 선거등 대의적 의사 결정 장치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도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지점이 존재한다는 인식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열망을 품는 신념 체계에 이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논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세계에 늘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무페의 자유주의 비판은 극우파의 부활, 극단주의의 범람, 민족주의 부흥 등이 가져올 위기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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