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 목동, 비평가 - 디지털 거대 기업에 맞서 인간적 삶을 지키는 법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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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州)의 졸링겐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현재 니더작센 주 뤼네부르크에 있는 공립대학인 류파나 대학의 철학 명예 교수이자 베를린에 소재한 한스 아이슬러 음악 대학의 철학 및 미학 명예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데요. 그는 독일에서는 꽤 유명한 대중 지식인이자, 철학자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독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2007년 출간작,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로 큰 명성을 얻게 되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독일 내에서는 2004년까지 문학 잡지인 '리리터멘튼'의 칼럼니스트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WDR의 방송 프로그램인 '타게스자이헨'의 프리랜서 사회자로서 방송에도 얼굴을 알리게 됩니다. 그는 '도덕과 사회'라는 주제로 여러 글을 기고하고, 몇몇 논저의 주요 소재로 자신의 철학적 관심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도 하는데요. 특히, 프레히트는 현대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지속적으로 현대 자본주의와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추인 되는 사회적 디지털화에도 비판적 인식을 갖고 꾸준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원제, "Jäger, Hirten, Kritiker: Eine Utopie für die digitale Gesellschaft"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앞선 저자의 소개를 통해, 그의 학문적 지향점에 관해 잠시 소개를 해 드렸는데요. 마찬가지로 그의 이 책은 앞으로 높은 확률로 진행될 가능성이 다분한 기술 만능의 '사회적 디지털화'에 대해 강한 의구심과 불확실성을 논하면서, 이러한 기술경제적 진행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비판적인 논증을 수행합니다. 그는 앞선 부분과 동일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 한 가지를 던지고 있는데요. "인간이 소비 행태를 의도적으로 조종하려고 개인 정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판매하는 사람은 어떤 측면에서 국민 경제에 이익이 되는가?"라는 반문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세계의 디지털화를 주도하고 있는 거대 디지털 기업 4곳 - 구글 Google, 애플 Apple, 페이스북 Facebook, 아마존 Amazon, GAFA - 의 상대적 이익은 분명 이런 디지털화에 달려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자 역시 기술 만능의 디지털 혁명이 소수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는데요. 더불어 이러한 디지털화를 경제적 이익만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논증을 통해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분별한 디지털화가 시장 규범을 위해 사회 규범의 범위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에 기인하는데요. 현재 많은 정치인들이 시장과 기업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의 앞날을 더욱 우려스럽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레히트는 글 중간에서 전통적인 보수주의에 대해 잠깐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익히 에드먼드 버크를 통해 세대를 걸쳐 내려온 기존의 보수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요. 물론 많은 독자들을 위해 제가 다시 굳이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많은 보수주의 정치는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입니다. 소위 진보적 가치나 기존의 경제적 만능과 안일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전 지구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자유주의의 적"임도 분명한 사실인데요. 이에 저자는 아주 짤막하게 경제적 합리주의에 따른 개인주의적 사고관에 대해 그러한 역사적 맥락은 언급하고는 있었습니다만 현재의 시장 만능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합리성과 개인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강요하고 사익 추구를 그러한 도덕적 근거로 삼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사회 재개조'에 대해 별반 진술이 없는 점은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독일이 클라우스 오페의 언급대로 아직은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동 간의 대화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어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급'을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회적 디지털화가 기존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큰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레히트는 '레트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2040년의 디지털 시대를 예측하고 있었는데요.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자동화가 더 진행이 된다면 현재 시민이 곧 노동력이라는 수식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포드주의자들에게도 매우 반가운 소식으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자의 우려대로 사회가 붕괴될 우려까지도 고려해야 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과거 시대의 유산이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수사를 철썩 같이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요. 저자도 이러한 암울한 예측에 대해 약간 상반되게 보일 수도 있는 오스카 와일드를 제법 많은 곳에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와일드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가는 수많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공장의 기계들이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계는 일하고 노동자는 노래한다!"는 대목이 등장한 것이겠죠. 사실 와일드가 희망했던 계급이 없고, 자유가 충만한 사회는 결국 자본주의가 만들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쇠퇴'라는 것조차 기대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전체를 자본주의에 걸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저자가 줄곧 우려하고 있는 이런 '이행'을 고려해 본다면, 앞으로의 우리가 맞이할 '디지털화'도 단순히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발걸음과 행동이 너무나 미적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집어 삼킬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어쩌면 아주 망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이런 기술 만능의 디지털화가 초래할, 비인간화, 계몽주의의 몰락, 도덕성의 결여, 자율성의 몰락 등을 상세히 논증하고 있는데요. 따라서 이 부분 만을 놓고 봤을 때는 '철학이 추구하고 긍정하는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한 철학자의 바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 거대한 디지털 시대에서 과연 저자의 바람대로 정치가 과연 귀환할 수 있는지는 꽤 불명확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사회가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고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부채질 했습니다.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간단하게 '저급한 이상론'으로 매도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 조차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무엇을 '보수'하는지는 매우 명확해 보입니다. 저자의 강조대로 디지털의 범람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글 중반부에서 언급되는 시민들의 '기본 소득'에 대한 필요성은 시민의 삶에 대한 통제와 자율성을 답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민주 사회의 시민들인 만큼 앞으로 열렬한 토론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기존의 복지 국가에 대한 담론 자체가 시장 우선의 자유주의가 벼랑 끝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더 이상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놔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포스트 민주주의'라는 디스토피아가 한낱 허구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로서는 발리바르보다는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가 더욱 익숙한 편인데요. 어떻게 보면 디지털화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한 예측도 독자들이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이 글을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지침서 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앞선 디지털 거대 기업들의 사업 확장은 특히, 미국 정부의 용인 아래 더욱 수월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겁니다. 이미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정보 당국과 이들 기업들 간의 유착을 폭로한 바가 있는데요. 단순히 기업들이 정부에게 협조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니라 악어와 악어새처럼 거의 공생 관계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헌법이 제대로 규정하지 않는 '안보'라는 문제가 이처럼 사회와 시민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와 같은 전방위적인 디지털화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와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다방면에서 소중한 정보들을 취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프레히트 역시, 디지털화를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매우 어려운 것이며, 현재로선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소 명확하지 않았는데요. 사회의 변혁이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 정치가 무능하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단정해야 하는지 저로서도 큰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저들과 결탁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은 조지 오웰의 절망보다도 더 암울한 것이기에 아직은 그런 지경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겠지요. 앞으로 10년이 우리 사회와 시민권, 그리고 주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가 '레트로토피아'라는 단어로 겨우겨우 위안을 삼고 하루하루를 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문제 많은)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후반부의 진술은 논증이 매우 명료해서 거의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제1차 산업 혁명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뒤엎고, 예전에는 교회와 귀족이 지배하던 곳에 시민 민주주의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 모델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이익을 목적으로 인간들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는 것이 비안간적이라는 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조종 가능성의 시대를 맞아 과연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정치인들은 정말 미련할 정도로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안달하고, 가능한 한 누구도 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통치란 믿을 만한 숫자와 통계의 위에서만 가능하고, 정부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통계적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양극화 사회는 돈을 잘 버는 소수 계층과 경제적으로 종속된 수많은 사람들로 나뉜다

이 새로운 정보의 군주들은 강력한 친구나 우군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에 곧 지금까지 축적해 온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각자 고향 땅의 정보기관들과 상시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현재 서구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비록 자유로운 선택이기는 했으나 동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세계 혁신가들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영국에서 탄생한 사고 유형의 자식들이다. 이 사고는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에서 이데올로기, 즉 요지부동의 일반적인 인간상을 품은 세계관이 되었다

모든 사회적 진보는 개별 국가에서 출발하고, 그 국가들의 행동이 도미노처럼 다른 나라들로 파급될 것이다

인간 존엄에 관한 우리의 복잡한 관념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그런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 디스토피아의 나락으로 급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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