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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널드 위니콧이 말한 정신세계와 외부 세계가 만나 변화가 일어나는 과도(過渡) 공간이다.(레진 드탕벨 지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 80 페이지) 책 한 권을 읽고 다음 책을 손에 들기까지 많지는 않지만 책들로 들어찬 내 방에서 시간을 보내면 완전히 책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몰입해 읽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 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 상태 역시 일종의 과도(過渡) 또는 이행(移行) 상태라 할 수 있다.

 

인류학자/ 영장류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의 신간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읽어야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어떻게 인류로 진화했는지에 대한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논의를 펼쳤다고 한다. 어떤 분야 이상으로 새로운 주장을 담은 내용들로 북적(book積)이는 분야가 인류학/ 고고학 분야인 듯 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직 지질보다 인류학/ 고고학 분야가 더 재미 있다.

 

올해 1.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발레리 트루에), 2.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리사 펠드먼 배럿), 3. ‘인류, 이주, 생존’(소니아 샤), 4. ‘역사에 질문하는 뼈 한 조각’(마들렌 뵈메) 등 네 여성 저자가 쓴 책을 흥미 있게 읽었는데 이제 세라 블래퍼 허디의 책을 올해의 대미를 장식하듯 읽어야겠다. 이런 읽기도 어떤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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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의 '던바의 수'에 소수에게만 허락된 우유라는 챕터가 있다.(던바의 수는 150명으로 그 수를 넘으면 진정한 인맥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상희 교수는 '인류의 기원'에서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유당분해효소 지속증이 문제라고 말했다. 

 

심리학자 앤드루 슈툴먼은 ‘사이언스 블라인드’에서 우유는 19세기에 소크라테스의 헴록(hemlock; 독미나리)이었다고 말한다. 루이 파스퇴르(1822 - 1895)에 의해 저온살균처리법이 발명되기 전까지 우유를 마신 아기들이 모유를 먹은 아기들에 비해 사망률이 몇 배 높았다.

 

프랑수아 자콥(1920 - 2013)은 파스퇴르에게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건너뛰게 만든, 기병대의 기습과도 같은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화학에서 결정학으로, 이어서 생물계에서 가장 덜 알려진 분야의 연구로의 전환이다. 자콥은 파스퇴르가 없었다 해도 전염병에서 세균의 역할을 틀림없이 알아냈겠지만 아마도 크게 다른 조건에서였을 것이라 말한다.

 

자콥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이 없었다면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진 그 무엇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다윈이 없었다면 진화론과 유사한 무엇이 생겨났을망정 같은 이론은 아니었을 것이라 말한다. 자콥은 조지 오웰의 경구를 인용해 예술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작품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더 독특한 것이라 말한다.(‘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 196, 198 페이지)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번역서가 나온 것이 1999년이니 적어도 20년 이상이 되었다. 그 사이 과학론에 분명 변화가 있었겠지만 자콥의 저 말은 그대로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독특함, 그것이 핵심이리라. 산업조직심리학자 케이트 머피가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 당신의 관점을 두고 '독창적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당신이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단점이라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당신의 고유한 관점을 칭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말을 괴짜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취약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 말의 의미를 더 낣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고 상대의 진의를 섣불리 단정지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171 페이지) 

 

나는 어떤가? 나는 독창적이라는 말이 설령 괴짜라는 의미로 전해진 것이라 해도 좋게 들을 것이다. 김상환 교수는 창의적인 상상력은 천부적인 재능이지만 평범한 인간에게 창의성은 학습을 통해 획득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말을 했다.('이야기의 끈' 235 페이지) 김상환 교수는 새로운 것을 기괴하거나 일탈하는 것과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새로운 것은 이전의 것과 다르되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면 된다.('이야기의 끈' 237 페이지) 

 

나는 새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일본의 이론 물리학자 무라야마 히토시의 말이 생각난다. 우주 생성 초기에 물질과 반물질의 비율은 1;1이었으나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의 경우에만 10억개 중 하나의 비율로 차이가 남으로써 (다른 물질과 반물질은 소멸했지만) 그렇게 차이나는 하나가 악간의 물질로 남아 별과 은하를 만들고 우리를 만든 것이라 한다.('왜,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가' 104, 105 페이지) 

 

새로움은 이런 미세한 다름에서 비롯되는 결과가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새로움을 별 것 아닌 것으로 환원해 말한다고 하겠지만 차이는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싹트는 것이 아닌지? 문제는 이런 자연과학적인 의미가 아닌 내가 얼마나 일상에서 새로움과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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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까지 가서 연천에 관한 자료를 얻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산도서관에도 들러 몇 권의 연천 관련 자료를 대출했다. 알라딘 건대입구점에서도 책 한 권을 샀다. 그간 준비가 부족한 채 연천에 대해 말할 때마다 느끼던 부끄러움을 씻을 기회를 마련한 셈이다. 물론 연천에 대한 자료도 방대해 다른 분야에서는 또 오늘 같은 분발이 필요하다.

 

공부가 깊어지면 자신의 빈약한 생각을 부끄러워하게 마련이다. 자료를 충분하게 섭렵하지 않은 채 해설을 하는 것에도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자료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하면 생각 자체가 얕을 수밖에 없고 아울러 자신의 독창성도 담보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자신의 독창적 생각을 갖추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자기성찰에 근거해 비판적 시각으로 공부한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의 숲에서 표류하지 않을 것이다.

 

세미나 발제를 한 번 하면 공부가 부쩍 늘 것이다. 질문하는 능력을 갖추려면 세미나 발제를 하면 된다.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것도 좋지 않은 습관이다. 일상에서 틈나는대로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한 습관이다. 다만 집중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13일 함께 모일 네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오늘의 분발은 그분들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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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예보된 바다. 그렇다 해도 추위가 아닌 것이 아니고 갑작스러운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추워지면 잠에 더 이끌리는 것 같다. 근력이 좋지 않아 일이 끝난 후 바로 눕고 싶은 것을 추위 탓으로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성철 스님 기일인 11월 4일을 그냥 지나쳤다. 이 날을 말하는 것은 당사자를 추모하는 것보다 성철 스님에 대한 추모의 글을 쓴 일지 스님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일지 스님의 기일은 8월 23일이지만 나는 매번 11월 4일이 되어서야 당사자를 기억한다. 43세라는 이른 죽음은 여름에는 기억하고 추념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일까? 이 스산함(몹시 어수선하고 쓸쓸함, 날씨가 흐리고 으스스함,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뒤숭숭함)을 음악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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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란 무엇인가? 먼저 태어나 오래도록 살아 남으면 어른이 되고 선배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나이가 벼슬이고 자랑인가? 본인이 잘 나서 먼저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들은 나이 많음을 남을 가르치고 자신과 관계 없는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권력으로 여기는 것 같다.

 

"박**이는 계집애도 아니고 뭐야?" 얼마전 나이든 남자들이 나에 대해 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분명 여자를 가르치려 들고 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신이 기준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미덕을 가진 여성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과 두루 잘 지내며 감사합니다, 최고입니다 등의 말을 아끼지 않는 내 모습을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여성들이 불편해 하는 성적인 말을 불편해 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이의 말에도 귀기울이는 내 모습을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여성적 가치관을 동경하지만 외모나 목소리로 그런 주의(主義)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진심어린 태도다. 지인 박 샘은 "좋은 말이네요"라고 했다. 맞다. 하지만 내가 불편해 하는 것은 자신의 주제를 아랑곳 하지 않는 자들의 오지랖이고 계집애란 말에 깃든 여성 차별적 인식이다.

 

뒤틀리고 꼬인 의식의 산물인 그들의 말을 번역기에 넣어 여과하면 박**은 여성에게 유연하고 소탈하고 겸허한 사람이란 말이 될 것이다. 그들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대화 상대로 여기는 나를, 당당하고 사려 깊은 여성에게서 배우고 공감하고 그들을 응원하는 나를 아는 것 같다.

 

문명화될수록 남성은 여성화하고 여성은 남성화한다는 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말을 음미한다. 화낼 일도 아니고 어이없어 할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 정체성을 확인시켜준 그들이 감사의 대상은 아니다. 이래저래 세상은 재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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