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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우연히 우울한 소식을 두 가지나 접했다. 하나는 시에 관한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관한 소식이다. 시와 역사라는 말을 듣고 어쩌면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떻든 시에 관한 소식은 유형진 시인이 쓴 '현대시학 10월호를 보며 드는 심정'이란 글을 통해 접한 것이고, 역사에 관한 소식은 경향신문에 실린 '역사 과잉의 시대, 어느 젊은 역사학자의 죽음'이란 글을 통해 접한 것이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시와 역사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의 일만이 아닌 있을 수 있는 일까지 그려내는 시의 미덕을 보고 한 말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에 비해 유연한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가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일까지 그려낸다면 역사는 해야 할 바를 일깨우기에 나는 역사는 시보다 사회적이란 말을 하고 싶다.


서론이 길었으니 각설(却說)하고 말하자면 시인의 수와 내 삶이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착잡한 마음마저 든다는 말을 우선 하고 싶다. 나는 시인들의 가난과 그들의 수적 포화가 연관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난감한 마음이 든다. 두 이야기라 했으나 시의 필자는 엄연히 당당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 역사 이야기의 당사자는 글의 제목을 보고 알 수 있듯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시 이야기의 필자인 유형진 시인은 출간 5년만에 첫 시집인 '피터 래빗 저격사건'(2005년 5월 출간)을 재쇄(再刷)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재쇄한 책이 거의 재고로 남아 처치곤란한 애물단지가 되어 그 시집을 절판시키고 복간을 하고 싶어 다른 출판사에 문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확인한 사실은 재고를 모두 떠안고 출판권을 정지시켜야 절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아는 시인은 기껏 50여명이고, 가지고 있는 시집은 300여권이란 말을 하며 그 많은 7만명이나 되는 시인들의 시집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요?란 질문을 던졌다. 시인은 최근 문제가 된 남성 시인들의 성추행(또는 폭력)에 관해 심경을 밝힌 글이기도 한 '현대시학 10월호를 보며 드는 생각'이란 글에서 성추행 당사자 중 한 명이 낸 힛트 시집과 자신의 시집이 같은 출판사를 통해 같은 날 나왔으나 분명하게 엇갈린 길(명성, 판매 등에서)을 걷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신춘문예 투고자들은 그 남자 시인의 문체나 시어를 따르고 추종했고 문단의 원로들은 그를 극찬했다는 부분이다. 시인의 도덕성을 문제삼은 글은 이미 한 번 썼기에 생략하고 말하면 우리의 쏠림을 돌아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는 유형진 시인의 다음의 말과도 관계있다. "저는 제 시가 '여장남자 시코쿠'에 실린 시들보다 못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벤치에서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대기 선수 취급 받은 것은) 오랫동안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승자독식을 만들어주는 쏠림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그렇기에 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반면 역사학도의 죽음에 대한 글은 더 딱한 사정을 전한다. 41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뜬 고구려사(高句麗史) 박사인 그는 연구가 아닌 과중한 행정업무에 시달리는 등 매일 야근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는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계약직 연구자였다. 기자는 지금 우리 시대를 연구자들에게 '왜 우리나라에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시대로 정의했다.


왜 우리나라에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느냐는 말은 한 국회의원이 실제 한 말이다. 나는 시에 관한 글에 대해서는 나 역시 명성에 휩쓸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역사과잉이 역사학자의 죽음을 불렀다는 글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덧붙일 것은 우리가 너무 역사를 재미에 치우쳐 대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을 품는다는 점이다. 내게는 두 개의 날개 같은 시와 역사! 문외한이기에 누구보다 바람직한 습관을 들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설사를 꿈꾸는 사람인 나에게 시인과 계약직 연구자가 겪은 일 모두 남의 일 같지 않다. 고난(苦難) 과잉(過剩)의 시대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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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불교의 관계는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이슈이다. 잘 알려졌듯 조선은 숭유억불을 공식화한 나라였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막내 아들 부부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교에 매달렸다.(‘조선왕조 스캔들’ 98 페이지) 여기까지 읽으면 세종이 숭유억불이라는 대의(大義)를 어기며 사익을 위해 기복신앙에 매달린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종에게 신하와의 투쟁에서 늘 불리하게 작용했던 두 가지 이슈가 있었다. 하나는 형인 양령대군과 관련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관련 문제이다. 물론 그럼에도 세종은 불교를 둘러싼 신하들과의 논쟁에서 만만찮은 면을 보였다.(이한우 지음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97 페이지)


세종은 당시 7종이었던 불교 종파를 천태종과 조계종 등 2종으로 통합하고 전국의 사찰을 양대 종파에 18사씩 총 36사만 남기고 모두 없애며 상당한 사찰 재산을 국고로 환수했다.(이근호 지음 ‘궁금해서 밤새 읽는 한국사‘ 193 페이지) 불교에 의거(依據)했지만 사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왜 세종은 불교 책을 읽었을까'의 저자 오윤희 씨에 의하면 세종은 우리말 불경 주석에 유학자들에 대한 불평을 담았다. 언해불전은 세종이 불교 책을 쉬운 우리말로 옮겨 널리 보급한 결과 탄생한 책이다. 오윤희 씨는 (훈민정음과) 언해불전은 세종이 성리학 지배층을 겨냥해 이념 및 계급투쟁을 하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 세종과 불교의 관계는 결국 세종과 유교 즉 세종과 지식권력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세종은 25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성종 다음으로 많은 20년간 하루도 경연(經筵)을 거르지 않은 임금이다.(이향우 지음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 경복궁‘ 120 페이지) 경연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시간을 말한다.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 유교(儒敎)적 가치관을 주입받았지만 지식(성리학)권력에 대처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지? 아니면 “주자학을 비켜가 잡학에 몰두하기보다 주자학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돌파”(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한 다산(茶山)처럼 지식권력을 정면으로 돌파했다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관련 저서(읽기)를 부르는 세종, 대단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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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과 균형은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두 개념의 차이이다. 어거스틴이 시간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할 때면 말문이 막힌다고 말한 것처럼 설명을 하려 하면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 대칭과 균형의 차이이다.(물론 각각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제 이런 답을 들었다. 대칭과 균형의 차이를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칭은 균형을 낳고 균형은 질서와 조화를 낳는데 단 대칭과 균형이 계속되면 지루함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복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심 영역들과 문들은 대칭을 이루게 했지만 기타의 내전들과 행각들은 자유롭게 배치해 전체적으로 안정감 속의 역동감을 느낄 수 있게 한 건축물이 경복궁이다. 금동대향로 복제에 참여한 금속공예가가 백제 사람이라도 된 듯 빠져들며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는 말을 한 것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분과 나는 차이가 분명하다. 그 분은 제작(복제)을 맡은 것이고 나는 경복궁을 배우는 기회를 얻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공예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한 일이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런 하나 하나의 배움의 시간들을 갖는 것이 전문성을 갖추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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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기자의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를 읽고 있다. 10년 전 책이기에 내가 그의 저서 중 유일하게 읽은 ‘슬픈 공자’(2013년)의 출간 기록은 책 날개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한우 기자는 군주(君主) 열전(列傳) 시리즈물로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외에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숙종, 조선의 지존으로 서다’,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을 썼다. 저자에 의하면 세종은 조선의 화신(化身)으로 영조니 정조니 하는 이야기는 조선의 에피고넨에 관한 모색일 뿐이다. 이 말을 다소 희극적으로 비틀면 세종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 영조, 정조를 사랑하는 것은 순서와 개념이 없는 경도(傾倒)라는 말이 가능하지 않을지?

 

지금 읽고 있는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는 오늘 도서관에서 빌린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와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중 한 권이다.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는 지난 2003년 출간된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의 개정판이다. 인용이 너무 길고 문체도 다분히 논문 스타일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자평이다.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를 구해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나에게만 필요한 것) 어떻게 인용을 간결하게 하고 (어렵고 지루한) 논문 스타일에서 벗어났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중뿔나게 어렵고 재미 없게 쓰는 나에게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중뿔나다: 분수에 지나친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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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丹靑)의 문외한으로서 조금씩 아니 하나씩 의미를 알아간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색만 칠한 가칠 단청, 가칠 단청에 선을 그은 긋기 단청, 모서리에 무늬를 그려넣은 모로 단청, 가운데를 화려한 문양들로 채운 금단청 등... 아무리 복잡한 단청 문양도 결국 이 네 범주에 포함된다. 물론 세부로 들어가면 현란하고 미로(迷路) 같은 단청의 깊이가 우리를 현혹한다. 그런데 최근 (내가 설명해야 할) 경복궁 근정전의 단청을 제작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단청은 무명의 누군가가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뜻 밖이어서 반가운 한편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왜일까? 결국(?) 이 분은 불에 탄 숭례문의 단청 복원 공사를 맡아 값싼 화학접착제를 사용해 수억원의 공사 대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된 단청장(무형문화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놀라운 일이다.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신비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단청의 세계가 확 눈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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