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페이스
아미티지 트레일 외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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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들은 말을 쏘았다>와 <스카 페이스>는 동명의 영화가 원작으로 탄생되었으며, 철저히 미국적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초창기 아메리칸 갱스터 무비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소설은 그다지 친숙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만나본 두 작품은 영화의 원작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설들이다. 범죄 영화의 전범으로 꼽히는 <대부>시리즈나 <스카 페이스>는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자본주의의 절정을 치닫고 있을 무렵, 세계의 중심 미국의 암흑가라는 무대를 장악해나가는 갱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때나마 궁금했던 것은, 미국은 왜 그토록 범죄자들을 좋아하는가? 라는 아리송한 문제였다. 수입되는 미국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범죄 영화나 드라마는 단지 오락성만 짙음에도 그토록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잔인한 오락, 상업적인 재미만 따지기에 묘하게도 중동석이 강하다. 그 이유는 소수의 권력자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결코 상위 1%에 근접할 수조차 없는 일반인들이 뒷골목의 제왕이라도 되어보고 싶다는 일종의 자기투시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범죄들 중에는 다수의 의리파가 존재하고, 넥타이부대 보다 인간미가 강하게 발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떳떳한 불법이나 비도덕 한 합법이나 어차피 누군가의 눈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기 마련이니까. 공권력을 행사하는 부패한 정부 관료나 뒷골목 양아치가 어차피 우리에겐 매 한가지로 보일 뿐이다.
 
  <스카 페이스>의 토니는 기존의 1세대 건달과는 확연히 다른 상징성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간다. 구세대 갱의 전형이 고리타분하고, 촌스럽고, 투박하고, 오로지 돈에 혈안이 되어서 그 어떤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토니는 그러한 완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갱들을 증오했고, 새로운 갱의 전형을 창조해 나갔다. 말쑥하게 차려 입고 사무적인 일처리로 불가피한 폭력을 최대한 피해가는 방식의 점잖은 사업을 구사했다. 비상한 동물적 감각으로 돈맛을 알아가며 결국은 자신의 야망대로 권력의 최상층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이 높을수록 적들은 많아지는 법.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세력을 넓혀가기가 그리 호락호락 하지는 않다. 암흑가 갱들의 세력다툼과 영역싸움, 그리고 주인공 토니가 보스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웅장하게 다루고 있는 소설 <스카 페이스>. 내 기억에 유일하게 남은 토니 ‘알 파치노’의 그 때 그 시절 모습을 새롭게 회상해 볼 수 있었다.

  대공황을 지나는 시키고, 뉴욕의 갱들의 활약을 담은 소설이 <스카 페이스>라면,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새로운 전형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미국 실존주의 소설이라는 극찬이 쏟아졌다고 하는데, 미국의 평론가들이 등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두 주인공 로버트와 글로리아는 번듯한 직업 없이 막연한 미래만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로, 우연한 기회에 만나 함께 댄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댄스 마라톤은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춰야 하고 최후의 1팀을 가려내기 전까지는 절대 멈출 수 없는 마라톤이다. 누군가가 탈락해야만 본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죽음의 레이스인 셈이다.

  댄스 마라톤 속에서도 모든 삶이 투영되어 있다. 돈이면 다 해결되는 물질만능주의, 상대팀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철저하고 지독한 이기심, 관계자들의 비리와 그들의 보이지 않는 폭력, 생존자를 기다리는 처절한 더비 경주 속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던 글로리아는 반복해서 죽고 싶은 말만을 되풀이 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잘못 태어난 것이며, 살아가는 이유가 없었다는 게 바로 오래 전부터의 그녀의 생각이다. 너무도 비관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글로리아를 로버트는 상당히 지겨워하지만, 결국 로버트는 가련한 글로리아의 소원을 대신해서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죽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죽을 용기는 없었던 그녀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로버트는 생각한다. 마치, 모든 뇌 기능을 상실해서 안락사 당하는 한 마리의 말처럼. 비록 타락한 운명에 던져졌더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끝장낼 자유는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무엇이 옳았는지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겠지만, 만일 내가 배심원이었더라면 로버트의 입장을 옹호해줬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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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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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과 질서가 마구잡이로 훼손되고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는 21세기에 대한 경고일까?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로 서문을 시작하는 이유는 책의 내용과도 의미가 깊다. 도리를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귀속된 젊은이들의 방탕에 결국 노인들을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자신도 한때는 젊은이였지만, 오랜 추억으로 잠겨버린 패기와 열정은 결국 급속도로 무기력이라는 자신감의 결여와 함께 점잖게 사그라진다. 이 책에 등장하는 보안관 ‘벨’이 그토록 약해 보이는 이유는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릴러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힘은, 가혹한 운명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발악 내지는 무시록적인 조언이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 그리고 이들을 추격하는 추격자 삼인방은 각자의 방식으로 스릴러라는 토대를 만들어 가지만, 단순히 재미를 위해 열거되는 서사의 방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극도로 말을 아끼는 사람들 간의 퉁명스러운 대화와 간혹 끼어드는 현 상황의 설명이 전부다. 과도한 수사적 문체를 배제하고 오로지현재진행형만을 위해 달려가는 호흡이 매우 빠른 소설이다. 이런 형식의 문장을 처음 접하기에 상당히 곤욕스러운 것이 사실이었으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작가 고유의 매력적인 문체가 접목된 색다른 시도로 비춰진다. 호흡이 매우 빠른 소설이기에 줄거리를 쉽게 이해하며 따라가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다. 게다가 대사 부분에 모든 구두점을 생략한 채 혼혈일체가 된 하나의 대사와 지문들은 매우 이색적이면서도 투박한 어려움을 선사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인물들의 감정 표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향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극악무도한 살인마 ‘시거’는 동전던지기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돈 가방을 손에 쥔 모스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점잖게 의식하며 정의 내렸다. 수십억을 손에 쥐고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발악을 하기 보다는 다소 관조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가혹한 운명을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서 발생하는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마치 표면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남기며 모든 이들의 운명이 물 흐르듯이 조용히 흘러간다.

  이미 걸었소. 당신은 당신의 인생 전부를 걸었지.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이 동전의 제조 년을 아시오? 1958년. 22년을 떠돈 끝에 여기에 온 거요. 앞면이거나 뒷면이겠지. 그리고 지금 여기 있소. 나도 여기 있고. 내가 지금 손으로 덮고 있소. 앞면이거나 뒷면이겠지. 당신이 말해 보시오. (중략) 무엇이든 도구가 될 수 있소. 아주 작은 거라도. 심지어는 당신이 알아차릴 수 없는 것도 있소. 그것들은 손에서 손으로 떠돌아다니지만 사람들은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 그리고 어느 날 결산이 이루어지는 거요.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똑같지 않지.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지. 겨우 동전 아니냐고. 행위와 사물을 구분하면서 마치 역사의 한 순간을 다른 순간과 손쉽게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듯이. 물론 이건 그저 동전일 뿐이오. 맞소. 하지만 정말 그럴까? 67~69p

  이 장면이 바로 그 유명한 동전 장면이다. 시거에게 모든 이들의 목숨은 한 낱 남루한 동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그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정확히 무엇을 얻기 위하여 그 험난한 레이스를 즐기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목숨의 가치보다 더욱 중요시 되는 게 그에게는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스쳐지나 가버릴 사소한 물건으로 생사를 가늠할 만큼 모든 이들의 목숨을 어쩌면 그렇게 사위어 갈 런지도 모르겠다. 마치 역사가 그러하듯 마이다.

  커다란 산탄총을 메고 찌는 듯한 황야를 질주하는 두 남자. 무겁고, 텁텁하고, 다소 불쾌한, 입 안에 쓴 맛이 잔뜩 감도는 메케한 연기에 휩싸인 소설이다. 몇 십 년 전 미국과 멕시코의 경제, 마약, 보안관, 산탄총, 거액의 돈 가방이 등장하고 피를 부르는 광시곡의 질주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단지 영혼의 모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 치고는 너무도 무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그렇기에 가능할 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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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on the Pink
이명랑 지음 / 세계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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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와 어른의 중간 단계, 그 어정쩡한 생물학적 위치에 서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고등학생'이란 신분이다. 너무 어리지도, 그렇다고 완전한 어른도 아니면서 때로는 세상을 다 살아본 것처럼 읖조리는 이도 바로 '고등학생'이다. 내가 그랬다고 모두들 그랬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내 나의 17~ 18살 무렵엔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며 살았다. 지금도 썩 철이들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때, 그 무렵은 한마디로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미쳐 날 뛰던 시절이었으니……. 돌도 씹어 삼킬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체력과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뒤로는 온갖 불법을 서슴치 않는, 한 마디로 철부지의 객기 어린 난동이 절정에 다다랐단 순간들이었다.

  상고에 재학중인 일명 날라리 여학생들의 공통점은 왜, 전세계 어디를 가나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한 것일까? 정의 내리기가 너무나 쉬워서, 오히려 이제는 식상할 지경이다. 날라리의 종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가지로 나뉜다. '자칭이냐, 타칭이냐.' 나의 경우는 물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전자에 속했으니, 이 책의 화자 '이정아'양의 캐릭터와 어느 정도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타인들의 시선이 어떠하던간에 본인은 극도로 민감한 문제를 지니고 있고, 반항을 하며 자신을 정당화 한다. 서글픈 십대가 거니는 질풍노도의 계절이 따분하다기 보다는 서글픔의 극치, 그 불안정의 연속이었으니…….

  여하튼 전국의 여상과, 여고와 <날라리 온 더 핑크>의 귀여운 다섯 악동들의 키워드는 대략 이렇게 정의내릴 수 있겠다. 무관심한 부모, 혹은 지나치게 간섭하며 구속하는 부모, 문제 많은 가정 환경, 외모에 대한 관심의 극대화에 따른 자신감의 결여, 이성간의 불건전한 연애, 친구간의 트러블, 질투, 의리, 반드시 '개'나 '독'이 포함된 별명을 지니신 학주의 횡포, 보충수업 땡땡이, 가출, 술, 담배, 좀 심하면 본드나 마약의 유혹, 참고로 아이돌 가수에 목숨거는 일은 대부분 중학교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기 마련이다.

  판에 박힌 소재들이지만, 이명랑 작가는 이름처럼 명랑하게 다섯 소녀들의 일탈을 조리한다. 저마다 소소한 사연들을 품고 살아감에 따른 질곡들은 다양하지만, 성인보다 더욱 강하고 드세게 자극적인 인생을 탐하는 것은 전국 어느 여고생을 막론하고 동일한 현상이리라. 보기에 안쓰럽고 위험스러운 모험도 등장하지만,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만 하는 모험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준비도 필요한게 아닌가 싶다. 누구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한 클럽 <싸우고 싶다>의 모토처럼, 세상과 치고 박고 뒤엉키며 자신을 만들어 갈 때 누구나 더욱 강해지는게 아닌가 싶다. 설사 인생에게 배신 당해 얻어터지기만 할지라도 계속 맞다보면 어느 정도 맞는 요령까지 터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잘했다거나 잘못 했다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우리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미처 배울 기회를 갖기도 전에 우리는 금 밖으로 내몰렸다. (중략) 우리는 실수와 상처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벌써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체념 해버린 우리에게는 우리를 표현 할 그 어떤 방법도 없다. 우리의 말은 변명일 뿐이고, 우리의 행동은 반항일 뿐이다. 억눌린 감정을 표현 할 그 어떤 수단도 갖지 못한 우리에게는 상처 낼 몸과 움켜 쥔 주먹만이 유일한 언어다.' -207~208p

  그렇다. 그들이 세상을 대하는 방법이 아직은 서툴렀을 뿐……. 아직은 무엇을 원하는지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기에,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서며 한계를 만들어 갈 때, 비로소 그것이 반항이 아닌 정당한 연습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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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 빈센트 반 고흐 아트 픽션 2
쥐디트 페리뇽 지음, 성귀수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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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형 빈센트 반 고흐>는 빈센트의 동생 테오도뤼스가 형이 사망한 직후부터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6개월 동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자서전도 아니고, 전기문도 아니고, 빈센트 사후 몇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다룬 독특한 구성이다. ‘쥐디트 페리뇽’의 상상력에 빗댄 팩션이라고 하기엔 매우 현실감 있고, 긴박한 당시의 상황을 회상해 볼 수 있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 1세기 전 마치 그림이라는 광기에 휩싸여 모든 생을 불태워 버린 채 짧은 나이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동생 테오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그림들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혹은 금전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테오의 헌신이 눈물겹다. 마치 알고 있는 주소가 하나뿐이라는 듯 빼곡히 써서 동생에게로 보내졌던 그 무수한 편지들을 추억하면, 지금도 우리는 빈센트와 테오라는 끈끈한 두 형제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예술가의 깊이를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지금은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정착한 ‘고흐’라는 존재를 당시엔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고, 그 외면당한 고독의 슬픔을 유일하게 헤아려 주던 상대가 테오였기에 빈센트는 그토록 동생에게 의지를 했던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은 단지 형제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부족한, 뭔가 더욱 깊은 유대감이 깃들어져 있었다. 베일에 싸인 듯 신비롭고, 때로는 맹목적이며, 때로는 따끔한 질책과 충고도 아낌없이 토로할 수 있는 영혼의 반려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참 이상하다. 초록빛으로 테두리를 둘러 한층 응집되어 보이는 눈동자, 잿빛 머리카락, 탁한 장밋빛이 감도는 안색과 청춘이 너무 일찍 도망가버린 이미의 주름들... 이것이 바로 빈센트이고 또한 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대하던 사람들에게서 나는 마치 거울을 볼 때와 같은 감정만을 느낄 뿐이다. 글쎄,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고... 147p

  빈센트와 테오의 죽음은 여러면에서 동일시되는 묘한 메시지가 있다. 지나치게 무거웠던 삶이 주는 중압감과 고통의 무게를 감내 할 수 없었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아름다움의 근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상처받은 자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동일한 엔딩만을 선사하나 보다. 형이라는 한쪽 팔을 잃어버린 테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살아갈 가치와 의미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던 빈센트와 테오.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주었던 끈끈한 형제의 사랑이 부럽기도 하고, 마냥 슬프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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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타 행진곡 - 제86회 나오키 상 수상작
쓰카 고헤이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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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타 행진곡>의 긴짱과 야스의 구도는 ‘스타와 엑스트라’라는 신분적 차이에 의해 뚜렷이 대비된다. 그러나 야스에게는 보다 높은 신문의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거나 존경을 표시하는 것과는 뚜렷한 차이점이 내포 되고 있다. 스타에게 보내는 일반인들의 선망보다 한층 더 높은, 맹목적인 헌신과 과도한 찬사는 마치 긴짱이라는 존재가 세상 모든 권력의 정점인 듯 신격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권력의 최상에 도달한 긴짱은 제멋대로 아랫사람을 부리며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라지만, 이러한 권력계층의 구도는 본인들이 전적으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 마냥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글의 배경은 1980년대 시대극 촬영지인 교토이다. 특정한 시간적 배경은 무시할 수 있지만,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를 빗대어 표현한 피해자와 지배자, 혹은 권력자와 그 아래 군림하는 충성스런 하인들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리얼하다. 과거에는 천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수많은 국민들을 빗대었을 것이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권력자와 그들의 추종자를 적절히 빗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작가는 재일교포 2세로서, 능력이나 인격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차별을 받아야만 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심도 있는 문제의 제기도 불가능 할 만큼 본능적으로 차별의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어진 신분이라는 낡은 제도의 세습으로 고통 받는 세월이 겹쳐진다. 이 소설의 주제와,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메시지만큼 무거운 소설은 아니지만, 코믹하게 현상화 된 캐릭터가 주는 평자와 해학은 제법 서글프다.

   긴짱, 야스, 고나쓰 세 인물을 중심으로, 각자의 사연과 두렷한 성격, 인상 깊은 심리 연출을 훌륭하게 표현한 것 같다. 주제와 분수를 알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 이기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허영에 물들어 또 다른 억압자로 변하기도 하는 사람들. 누가 강자인지, 누가 약자인지는 이 소설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똑같이 불향한데, 그리고 똑같이 한심한데, 누가 누구를 질타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영화로 만나본다면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소설 속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를 그리는 작업이 조금 더 자세히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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