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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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사람들 : 신발 밑창 같은 인생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 정의 내려지는 빈곤과 본인이 느끼는 빈곤간의 간극은 분명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 타인들의 시선에 분명하게 구별되는 빈곤의 척도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입에 풀칠 할 여력도 없는 첨예한 상황이 가장 큰 빈곤이라 일컫어질 것이다. 남루한 형색, 무지함에서 오는 불손 혹은 선천적인 비루함은 분명 가난한 죄인에게만 주어지는 상징들이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가 <가난한 사람들>에서 대립시키고자 하는 타인과 구별되는 가난의 인식은 '배우지 못한 자들의 지적 빈곤'이다.

  신분의 제약을 받은 채 궁핍함 속에서 뭄부림 치더라도 배움의 정도에 따라 진정한 빈곤함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지적 빈곤과 기근은 분명히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까르 제부쉬낀은 하급 관리인으로 살아가며 더 이상 가난할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하지만, 본인의 진정한 가난이란, 배우지 못함에서 비롯된 무지몽매함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박약된 채로 바르바라만을 무조건적으로 사모하여 그녀에게 모든 순정을 바쳐 헌신 한다. 중년의 늙은이로 그려지고 있는 마까르 제부쉬낀은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근성의 소유자로 매우 번잡스럽고, 자기 비하에 사로잡혀 권력 앞에 맹신하게 되는 나약한 인간임으로 묘사된다. '저는 높으신 분들에게 발이나 문지르는 걸레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제 목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함, 사람들의 수근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 입니다.' 본인이 자초해서 가난한 자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비루함을 선택해 버린 것이다. 그에게선 고귀한 인간의 자존심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지만, 그 내용은 두서 없고, 장광한 연설만을 늘어놓을 뿐이며, 그녀에 대한 맹몽적인 집착과 헌신만을 강조하는 특유의 상투적인 내용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바르바라는 그런 제부쉬낀에 대한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바르바라의 첫사랑 뽀끄로프스끼는 가난하지만 매우 지적인 문학 청년이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자신 내면에 숨겨져 있던 알 수 없는 욕망에 이끌려 책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짝사랑 했던 청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책을 접했을지도 모르지만, 뽀끄로프스끼가 죽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책과 더불어 살았던 점을 비추어 볼 때 분명 지적 유희가 주는 쾌감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사이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그려내고자 했던 정확한 지적 능력의 차이에 따른 '빈곤의 척도'가 뚜렷이 구분된다. 작가가 영향을 받았던 뿌쉬낀과 고골리의 작품을 은연중에 나타남으로써 가난조차 막을 수 없었던 문학으로의 해방구를 발견할 수 있다. 서신체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의 수 없이 많은 서신들을 읽어보면서 신발 밑창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그 선택을 자초한 인물의 어지러운 맹목이 선사하는 앞으로의 영향들을 가늠해 보았다.


※ 분신 : 가면을 쓴 두 자아의 충돌

  <분신>은 도스또예프스끼가 그의 작품 평생토록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갈 '자아 분열'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인간의 양면성을 리얼하게 분출한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는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의 속 뜻을 일일이 헤아리기 쉽지 않다. 선과 악, 권력 앞에 헌신 하면서 뒤로는 욕을 해대는 이중적인 간신들의 이율배반적인 음모, 그리고 자기 혐오와 오만한 자존심들이 가학과 피학성으로 대치된다.

  <분신>에서 골라드낀씨는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 작은 골랴드낀을 만나게 되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의 인생으로 침범한 그 남자로 인해 점점 황폐해져 가는, 그리고 점정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더욱 크게 파괴되어 나가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골랴드낀은 상위 계급에 대해서 질투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본인 역시 자신의 하인에게는 윗사람들이 대하던 의례 그 무례함으로 일관한다. 신분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 비열하게 행동하지만 작가는 그의 인간적인 면에 치중을 두고 악인의 이미지 보다는, 다소 어리석은 행동등으로 주변에서 소외되는 나약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분신>이 발표될 당시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혹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두 자아가 총돌해서 갈등을 겪는 혼란속의 심리묘사가 아주 압권이었다. 마지막 장의 의사 끄레스찌얀의 또 다른 분열된 자아의 분신이 등장할 때는 오싹한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양면성, 그리고 닮고 싶어하는 내면의 은밀한 속삼임이 투영되어 나타난 자신의 분신을 섬뜩하게 재연해 놓은 작품이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던 골랴드낀이지만, 자신을 흉내낸 '분신 골랴드낀'은 모두가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들고 복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은 골랴드낀이 바라던 이상 세계의 분열에 대한 표출이었을 것이다. 비록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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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시커 1 - 별을 쫓는 아이
팀 보울러 지음, 김은경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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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소리, 풀 벌레 소리, 맑은 시냇물 소리, 별들의 진동 소리, 다른 세계에 들려오는 듯한 파도 소리,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숲의 노랫소리……. 들을 수 없는 소리의 파장을 듣는 루크는 아버지로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물려 받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감지 할 수 있는 천재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루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고 만다. 2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공황 상태에서 방황하게 되는데, 뜻 모를 반항아가 되어버린 루크에게 세상은 그저 권태롭고 따분한 일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자신에게 아버지를 빼앗아 가버린 세상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스타 시커>는 복합적인 판타지 소설이다. 성장 소설이기도 하면서, 음악의 천재를 다룬 매우 예술적이면서 감상적인 소설이다.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흘러가는 부드러운 느낌의, 마치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가득하다. 서정미 넘치는 이 청소년 소설이 주는 치유력은 부모님의 부재로 인해 상처 받고 살아가는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대신 할 수 있을 듯 하다.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시거나, 두 분의 이혼으로 혼자가 되어버린 소년. 그리고 원래 부모님이 아닌 사람을 가족으로 맞아들여야 할 때의 아픔과 상실감은 사춘기 무렵 가장 예민하게 작용하는 모순으로 각인된다.

  누구를 향한 분노이고, 무엇을 향한 증오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세상이 싫어져서 선의와 타협하고 싶지 않은 불안정한 청소년의 갈등을 잘 포착되어 있다. 흔들리는 열 네 살, 소년의 이마 위로 외로움이 흘러내리지만, 이내 인생의 경험을 곱절이상 겪은 어른들과의 조화가 시작된다. 루크의 개인사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리틀 부인과 그녀의 손녀 나탈리에게로 초점이 옮겨가는데, 여기서부터 알 수 업는 긴장감이 감돌면서 우리의 주인공은 미스터리한 사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불량 소년들의 괴롭힘과 리틀 할머니와 나탈리에 대한 묘한 긴장감으로 루크는 점점 혼란스러움이 가중되지만, 뜻밖에 알게 된 사건의 진실로 닫혀졌던 루크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함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을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숙제이다. 음악으로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은 후부터 달라지기 시작하는 루크처럼,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불안의 씨앗들을 거두어 들인다면 한층 더 세상이 밝아 보이지 않을까? 아직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루크는 많이 어릴지도 모르지만, 감추어져 있던 신비로운 재능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미 세상은 그의 것이다. 혼탁한 어둠 속을 밝히는 별처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모든 청소년들이 이해해야 할 삶의 과정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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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의 시간 - 빈센트 반 고흐 편
김충원 지음 / 진선아트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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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며 채색한 고흐의 그림들입니다. ^^)


  정말 좋아하는 화가인 고흐의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그저 눈으로 보는 것으로만 만족했었지, 감히 모작을 그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그의 명화들을 보며, 쓱싹 쓱싹 색연필로 색칠하는게 의외로 어렵지 않고 재미있기만 했다.

  진선아트북의 감충원님 그림 시리즈를 즐겨 보는데, 마침 '채색의 시간- 빈센트 반 고흐' 편이 출간되어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색연필부터 들었다. 색연필은 누구나 쉽고 부담 없이 그릴 수 있는 최상의 미술 재료이다. 잘만 그리면 수채화나 유화보다 더 아련한 맛을 자아낼 수도 있다. 이번에 수록된 12점의 그림은 너무 유명해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고흐의 명화들이다. '의자, 아를의 방, 해바라기,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저화상, 노란 집, 아를의 여인, 밤의 카페 테라스, 씨 뿌리는 사람, 귀를 자른 자화상, 별이 빛나는 밤, 붓꽃, 오베르 교회' 이 중에서 특히나 좋아하는 작품은 '귀를 자른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이다. 이 그림들은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답다.

  우선 가장 첫 그림으로 등장하는 의자를 채색 해 보았다. 생각보다 쉽게 그려져서 놀랐는데, 역시나 다음 장으로 넘어 가면서 갈수록 난위도가 높아진다. 감충원님이 그린 그림과 나의 그림은 왜 왜 이다지도 다르단 말인가? 애꿎은 색연필 탓만 하다가 울상이 되어 버리곤 했지만, 그마저도 행복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흡사 내가 고흐라도 된 듯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회색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까지 채색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너무 재미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색칠 공부를 하는 기분이다.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고흐를 흉내내 그의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뒷부분에 따로 스케치가 마련 되어 있어서 나와 있는 순서대로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되니까, 제 아무리 그림의 초보자라 할지라도 무리 없이 흉내낼 수 있으리라 본다. 고흐의 작품을 따라 채색해 본다면 그의 색감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더 없이 귀중한 경험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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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효,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 - 옷 짓는 남자의 패션라이프 스토리
장광효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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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거나 미개척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현재의 위치에 안주 하지 않고 언제나 더욱 더 높은 곳을 향햐 이동한다는 점이다. 좀 더 먼 미래가 될 수도 있는, 혹은 까마득하게 먼 훗날이 될 수도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끝을 향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 나간다.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햐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러한 장인, 혹은 광인들은, 보다 멀리 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것 같다. 매일 꿈을 그려 보다 보면 언젠가는 그 꿈과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의 희열은 과연 어떨까. 성공하기 위해서는 운도 필요하지만, 그 만큼 노력이 없다면 운 역시 따라주지 않는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듯이, 첫걸음의 도약이 무엇보다 귀중한 자양분이다. 디자이너 장광효 선생님이 성공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투철한 장인정신과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 다양한 이력에 있다.

  당당할 수밖에 없는 성공적인 디자이너 삶의 이면에는 인간 냄새 나는 그가 있었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패션 디자이너지만 좋아하는 것과 생활하는 방식이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여행을 좋아하고, 도스또예프스끼를 좋아하고, 스타일의 중요성과 에술의 깊이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장광효 선생님은 나와도 코드가 잘 맞는 것 같다. 한 세대를 훌쩍 뛰어 넘는 분임에도 이토록 젊음을 윶하는 이유는 국제적은 감각과 열린 사고 방식의 자유로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쓰디 쓴 실패도 맛보고 다시 재기 할 때까지 겸손을 배우며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솔직한 문장들에 많은 공감이 갔다.

  유독 한국 남성들은 패션, 뷰티 분야가 선진화되지 않다고 느꼈는데, 장광효 선생님이 개척한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의 성공으로 인해 남성들의 기성복 고르는 안목 또한 많이 상슴했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틀에 박혀 옷을 입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살리고, 단점을 보안하는 고유의 스타일 감각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손석희씨처럼 단벌 신사를 고집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불어닥친 메트로 섹슈얼 열풍으로 자신을 가꾸고 단장하며 패션에 관심을 높여 가는 남성들이 많아졌다. 지나치면 물론 독이 되지만, 나 역시 멋진 스타일 감각을 지닌 센스 있는 남성들이 좋다. 부디 앞으로도 대한민국 남성복의 틀을 깨는 과감한 패션으로 여성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남성들에게는 자신감을 가져다 주는 디자이너 장샘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루게 될 그의 꿈, 청담동 한복판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드림을 실현 하시게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인물 자서전을 읽었지만, 패션 디자이너의 자서전은 처음이었다. 유익하게 배울 수 있는 패션 용어나 패션계의 일화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지만, 디자이너 장광효가 살아왔던 순간들의 기쁨과 슬픔, 아름다운 생애를 필름처럼 스쳐지나가며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불어 명품 만을 최고로 대접하기 일색인 한국 패션 시장이 일본이나 홍콩처럼 보다 많이 성장하여 세계화 되는 그 날을 꿈꿔본다. (장광효의 밀리터리 자켓을 모방한 입생로랑처럼 더 많은 해외 브랜드가 우리 대한민국 패션의 위대함을 알고 모방하기도 하면서 영감을 얻는 그 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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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인가 고정관념 Q 8
빅토르 퀘페르맹크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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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사실의 여부를 떠나 오랜 공동체 생활에서 비롯된 하나의 관념들은 집단 이기주의를 형성하고 자문화중심주의의 또 다른 배탁적 대중심리로 타민족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본능적인 뿌리 찾기는 나라마다 큰 차임점이 없어 보인다. 상황이 다소 안전하다 뿐이지, 본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이 상당히 대단한 유럽이나 제국주의의 열망에 사로잡힌 막강의 미국, 그리고 유럽에 오랫동안 지배 받아온 아시아나 아프리카 역시 민족주의의 위세는 대단하다. 하물며 오랜 종교 갈등으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중동은 미래조차 암담할 만큼 상황이 위태롭다.

  21세기 최대 사건으로 꼽히는 9.11 테러로 인해 중동 지역이나 이슬람 문화권 나라에 대한 재인식이 시작되었다. 그간 테러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지만, 이 사건으로 세계인의 고정관념은 더욱 확고해 진 듯 하다.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른 탓에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게 사실이었으나,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서 아랍문화권의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랍, 이슬람 문화에 대한 며확한 정의는 불투명 하다.)

  평소 궁금해 하던 차에 <이슬람>, <유대인>, <팔레스타인>에 대해 간결하게 농축해 놓은 책이 출간 되어 반가운 마음에 세 권 모두 읽었지만, 거미줄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그들의 민족사를 한번에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가장 큰 원인은 종교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탓에 너무 많이 흩어져 뿌리 내린 종파를 일일이 헤아리는 것조차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오랜 관념 속에 박혀버린 이해할 수 없는 문화의 수용의 한계이다. 그리고 익숙치 않은 시대를 대포하는 지도자들의 이름들을 암기하는 것 또한 상당히 곤욕이었다.

  우선, 평소 굉장히 궁금해 했었던 <유대인>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점이 가장 큰 수확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을 빼놓고는 역사를 논하기 힘들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민족이다. 서구나 아시아에 이들 민족은 대체로 좋지 않게 인식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대교를 믿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 선택 받은 민족이라 여기는 다소 오만한 사상으로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는데, 물론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대에는 종교적인 이유가 강하고, 유대인들은 워낙 자신들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투철한 탓이다.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디아스포라'로 인해서 더욱 자신들의 옛 왕조를 찾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들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또 다른 통념들이 생겨났다. 팔레스타인과의 영토 분쟁으로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언론에 장식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더욱 부채질 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억압 받아온 민족이고, 2차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로 전쟁의 희생양이 된 모멸감을 감당 해야 했던 울분이 모든 유대인들의 가슴 깊숙이 숨겨져 왔던 원인이 클 것이다. 이러한 반 유대주의는 유대민족을 더욱 단결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수의 과격 유대주의자가 민족 전쟁을 주도한다면, 근대성의 영향으로 보다 개방된 사고방식으로 세계 곳곳에 업적을 남기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은 세계인의 통념을 바꾸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점점 더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으로 넘어가 보자. 1919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권한으로 중동의 이해 관계에 따라 국경선을 그어 나갔다. 사막처럼 황폐하고 척박한 땅일지라도 석유로 인해 여전히 입지가 굳은 편이기에 미국은 여전히 중동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게 된다. 이스라엘도 1948년에 건국된 신생국가지만, 영향력 만큼은 대단했기에 각종 정치 관계의 복잡한 수로 역활을 하게 되는데, 그 후 수 많은 전쟁을 이끌고 테러와 전쟁을 자행했지만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에 비하면 그 파장이 미미하지 않나 싶다. 이슬람, 아랍 문화권의 나라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로우면서, 동시에 위협적임에는 변함 없는 사실이다. 이슬람 문화라고 부르는 것도 그 경계가 상당히 애매모호 하고, 문화적 경제적 차이나 발전 정도가 각양각색이다. 특히 이슬람은 수 많은 종파로 나뉘기 때문에, 지정학적 위치나 정치권의 견해에 따라 정의 내리기가 더욱 어렵고 껄끄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살펴 본 팔레스타인은 20세기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과의 영토 분쟁에 휩싸이고 있다. 억압적인 점령 치하에 살아야 했던 팔레스타인들이기에, 이스라엘에게 점점 빼앗기고 있는 영토에 대한 집착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전쟁에서 이기고 있으나, 테러나 오랜 민족 갈등의 최종 모습은 과연 어떤지, 그 끝은 그다지 낙관적이만은 않다. 부패한 정치가들의 권력과 무장 세력의 탄압, 그 중간에서 갈 길을 읽은 난민들은 미래조차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한 입장이다. 왜 21세기에 이런 민족적 갈등을 지속적으로 되풀이 해야만 할까? 평화주의자들의 입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것일까?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원래 약속 되었던 자기 땅을 되찾았을 뿐이지만, 영토를 잃고 방황해야만 하는 팔레스타인들이 갈 곳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의 영토 분쟁은 마치 세계 모든 민족들이 겪어왔던 역사의 한 장면을 되풀이 해서 보고 있는 듯 상당히 가슴이 아프다.

  대체로 살펴본 <이슬람>,<유대인>,<팔레스타인>은 이도교를 배척하기 위해 피를 부르는 살생을 서슴치 않는 전쟁귀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신만이 유일하고, 위대하며 자신들의 민족만이 선택받은 혈통이라니. 종교를 빙자해서 정치 권력을 넓혀 가고, 그들이 만든 이념의 문제를 타인들에게 전가시키는 이기심만 가득할 뿐이다. 물론 고정 관념으로 자리 잡은 사고들이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책을 읽은 후에도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이 생겨났다. 솔직히 나는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지 모르겠다. 겹겹이 쌓인 종기가 결국은 피고름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일까? 그들이 '믿는 싶어하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신들은 인간들의 이기심이 관용을 허락치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위태로운 사상만을 강요 당하고 있을 뿐이다. 맹몽적인 종교의 헌신 후에는 과연 무엇이 남겨질지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알게 되는 날이 올까? 신을 향한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나기 전에, 우선 인간이 되는 법부터 먼저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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