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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슬립 - 전2권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우연찮게 3월 1일 쯤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 민족사의 아픈 날이기에 1940년대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책을 읽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3.1절 특집 다큐멘터리로 위안부 문제나 일본 자국과 우리의 상반된 역사의식을 시청 할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어쩌면 이 소설에서 묘사된 대로 그 때 그 시절 강력하게 주입받게 된 과잉된 조국애를 이용한 영웅심리 탓도 일본 제국주의의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역사문제의 문화 관점과 입장이 너무나 다르다 보니 소설 하나를 읽어도 기타의 상념들이 뭉글뭉글 솟아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불필요한 개인감정은 접어두고 책 속으로 들어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이 책은 기대만큼 만족을 주는 작품이었다.
<타임 슬립>은 시간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인생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발견해 나간다는 판타지 소설이다. 상반된 시대의 두 사람, 어떠한 운명으로 인해 서로의 몸이 뒤바뀌는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구성이지만, 내용만큼은 아주 탄탄하고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21세기에 사는 19세의 ‘겐타’는 서핑이 취미로, 서핑을 타다가 시공간을 이동하게 된다. 바다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시대는 쇼와 19년. 한창 2세 세계대전의 물이 올랐을 무렵이다. 위기일발의 전시 상황에서 사방에 폭격기가 날아다니고, 폭탄이 투하된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해군부대에 끌려가게 되고 생전 처음 보는 전투기를 조종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닥친다. 그리고 같은 시각, 20세기의 해군 부대에서 21세기로 날아온 ‘고이치’가 눈을 뜬 곳은 사방이 새하얀 병원의 침대다. 생전 처음 보는 요상한 물건들과 이상한 차림의 사람들을 보고 온갖 억측과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하는데…….
겐타와 고이치는 똑같은 외모에 똑같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어, 갑자기 변해버린 두 사람을 그저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겐타와 고이치는 점점 자신이 속한 시대에 적응해 나가기위해 노력하면서 괴롭던 심경을 해소가 나가기 시작한다. 60년이 넘은 세월의 변화에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다가 점차 익숙해져가는 두 남자의 모습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시간이 만들어 낸 그 놀라운 과학의 발전 앞에서 그리고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생명의 소중함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기는 고이치. 15살 안팎의 소년들이 군대에 끌려와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전투를 치르는 소년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겐타. 원래 그들의 세상이 아니었던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 시대의 아픔과 혼란은 새삼 현재의 삶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소중했던 것인지, 커다란 의미를 되새겨 준다.
살인 병기가 되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겐타는 괴로워한다. 원래 자신이 살던 21세기에서는 뭐든지 불평하고, 인내심도 부족하고, 그저 가볍게 하루를 살 뿐이었는데, 과거 생사를 넘어서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을 보며 진정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진정 죽어야만 하는 걸까. 어차피 일본이 항복하게 될 텐데…. 그리고 미래로 날아간 고이치 역시, 예절도, 자부심도, 검소함도 모두 망각한 채 살아가는 21세기 일본인들을 위해 죽을 결심까지 했던 자신과 전장의 동료들을 생각하며 새삼 환멸을 느낀다. 고작 이런 꼴을 보기 위해서 반세기 전, 모든 이들이 목숨 바쳐 나를 구했던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각자 두 사람이 느끼는 과거와 미래의 모습은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아니, 과거는 어떨지 몰라도, 미래의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들은 모두 잊은 채 배불리 먹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살 뿐이다.
세대가 달라서 이해할 수 없었던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선조들이 겪었던 고통과 피부로 느꼈던 혼란들은 지금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지금은 너무나 풍족하게 살아감에도 늘 불평, 불만이 끊이지 않는 우리가 아니었던가. <타임 스립>은 이렇게, 우리가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과거의 고통들을, 순간 이동 한다는 설정으로 독자들에게도 직접 느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후미코와 겐타의 운명적인 만남이 긴 여운을 남겼다. 그녀가 사랑을 가득 담아 바라보고 있던 사진을 찍던 인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이야기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얽히면서 비밀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내면서 놀라움을 선사하는데, 각자의 시점이 교차되는 이야기지만, 겐타와 고이치 부분만 따로 떼어 읽어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