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법과 질서가 마구잡이로 훼손되고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는 21세기에 대한 경고일까?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로 서문을 시작하는 이유는 책의 내용과도 의미가 깊다. 도리를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귀속된 젊은이들의 방탕에 결국 노인들을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자신도 한때는 젊은이였지만, 오랜 추억으로 잠겨버린 패기와 열정은 결국 급속도로 무기력이라는 자신감의 결여와 함께 점잖게 사그라진다. 이 책에 등장하는 보안관 ‘벨’이 그토록 약해 보이는 이유는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릴러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힘은, 가혹한 운명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발악 내지는 무시록적인 조언이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 그리고 이들을 추격하는 추격자 삼인방은 각자의 방식으로 스릴러라는 토대를 만들어 가지만, 단순히 재미를 위해 열거되는 서사의 방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극도로 말을 아끼는 사람들 간의 퉁명스러운 대화와 간혹 끼어드는 현 상황의 설명이 전부다. 과도한 수사적 문체를 배제하고 오로지현재진행형만을 위해 달려가는 호흡이 매우 빠른 소설이다. 이런 형식의 문장을 처음 접하기에 상당히 곤욕스러운 것이 사실이었으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작가 고유의 매력적인 문체가 접목된 색다른 시도로 비춰진다. 호흡이 매우 빠른 소설이기에 줄거리를 쉽게 이해하며 따라가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다. 게다가 대사 부분에 모든 구두점을 생략한 채 혼혈일체가 된 하나의 대사와 지문들은 매우 이색적이면서도 투박한 어려움을 선사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인물들의 감정 표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향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극악무도한 살인마 ‘시거’는 동전던지기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돈 가방을 손에 쥔 모스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점잖게 의식하며 정의 내렸다. 수십억을 손에 쥐고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발악을 하기 보다는 다소 관조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가혹한 운명을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서 발생하는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마치 표면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남기며 모든 이들의 운명이 물 흐르듯이 조용히 흘러간다.

  이미 걸었소. 당신은 당신의 인생 전부를 걸었지.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이 동전의 제조 년을 아시오? 1958년. 22년을 떠돈 끝에 여기에 온 거요. 앞면이거나 뒷면이겠지. 그리고 지금 여기 있소. 나도 여기 있고. 내가 지금 손으로 덮고 있소. 앞면이거나 뒷면이겠지. 당신이 말해 보시오. (중략) 무엇이든 도구가 될 수 있소. 아주 작은 거라도. 심지어는 당신이 알아차릴 수 없는 것도 있소. 그것들은 손에서 손으로 떠돌아다니지만 사람들은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 그리고 어느 날 결산이 이루어지는 거요.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똑같지 않지.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지. 겨우 동전 아니냐고. 행위와 사물을 구분하면서 마치 역사의 한 순간을 다른 순간과 손쉽게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듯이. 물론 이건 그저 동전일 뿐이오. 맞소. 하지만 정말 그럴까? 67~69p

  이 장면이 바로 그 유명한 동전 장면이다. 시거에게 모든 이들의 목숨은 한 낱 남루한 동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그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정확히 무엇을 얻기 위하여 그 험난한 레이스를 즐기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목숨의 가치보다 더욱 중요시 되는 게 그에게는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스쳐지나 가버릴 사소한 물건으로 생사를 가늠할 만큼 모든 이들의 목숨을 어쩌면 그렇게 사위어 갈 런지도 모르겠다. 마치 역사가 그러하듯 마이다.

  커다란 산탄총을 메고 찌는 듯한 황야를 질주하는 두 남자. 무겁고, 텁텁하고, 다소 불쾌한, 입 안에 쓴 맛이 잔뜩 감도는 메케한 연기에 휩싸인 소설이다. 몇 십 년 전 미국과 멕시코의 경제, 마약, 보안관, 산탄총, 거액의 돈 가방이 등장하고 피를 부르는 광시곡의 질주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단지 영혼의 모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 치고는 너무도 무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그렇기에 가능할 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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