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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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스등’에 나오는 ‘비폭력의 폭력’을 사례를 들어 인간관계의 불안을 설명하고 있는 <가스등 이펙트>는 ‘당신’과 ‘나’ 오직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라도,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보이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는 행위는 실제 폭력이 아닌, 언어라든가 점잖은 행동만으로도 가능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나를 통제하려고 들고, 자기 멋대로 이기적인 행위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나는 매우 낙담하거나 큰 상처를 받거나,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갈등으로 인한 의견 대립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정의 내릴 만큼 가스등 이펙트의 가해자가 보여주는 심리적 문제는 대단하다.

  물론 나 역시 이러한 경험이 수차례 있다.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혹은 교사나 매장점원으로부터 자신만의 독단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나를 지배하려 드는 경험을 해왔다. 물론 그 수치가 이 책에 등장한 1단계 선량한 가해자일 경우라도 불쾌함이나 불안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사회적 지위나 성별, 역할에 상관없이 가스등 이펙트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심리적 문제다.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누구나 지니고 있는 정서, 인간 본연의 성품에 더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선천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우선은 철저히 공부해 본다면 대인 관계에서 오는 불만을 조금은 개선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의 취지와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인지하겠으나, 기대 만큼 만족할만한 수준의 책은 아니었기에 아쉬움이 크다. 알기 쉽게 몇 차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인물들의 사례를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한 것이 이해하기에는 쉬웠으나, 그 연출이 다소 엉성했다고 할까. 상황극대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가벼운 말싸움처럼 느껴져 나에겐 전혀 현실감과는 동떨어졌다. 다른 문화의 외국인들의 모습이기에 더욱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언변이 갈등고자가 실생활에서 적용될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본대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 때 그 때 절박한 상황을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위기일발의 생활 속을 실제로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예시보다는, 보다 정확한 이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으면 더욱 더 신뢰감이 가지 않았을까 싶다. 

  형식상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배제하고, <가스등 이펙트>는 다른 누군가로 인해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한지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배우자, 가족, 친구, 친척, 애인, 직장 동료나 상사 등. 생활하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루는 구도 속에서 겪게 되는 갈등, 그 원인을 철저히 짚어 보면서 알맞은 대처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가학적인 횡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더라도 격양된 언어로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상대방이 전적으로 원하는 바를 탐구해보면서 자신의 문제 역시 돌아봐야 한다. 책에서 숱하게 나온,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의 종료를 알리는 말,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해요. 지금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생각이 달라요.’ …글쎄……. 실생활에서 과연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마인드 컨트롤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자 몫이기에 다시 한 번 더 서로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며 격양된 감정을 제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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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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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평소 뉴스를 즐겨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문을 즐겨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김앤장’이라는 의혹의 이름을 가진 법률사무소가 낯설 수밖에. 평소 사회면이나 정치, 경제, 시사 분야와 친숙하지 않다보니 자연히 이런 분야의 책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 새삼 잠자고 있던 사회 정의에 대한 피 끓는 신념이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가나 경제, 법조인들의 비리는 이제 놀라울 것도 없는 기정사실이지만, ‘김앤장’의 실체에 희미하게나마 접근한 지금은 솔직하게 경악스러울 만큼 놀랍다. 웬만한 영화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고, 또 말도 안 될 만큼 드라마틱한 서사시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권력이, 이제 신화가 되어버린 그 역사가 마치 숨 가쁜 한 편의 영화였다.

  그러나 김앤장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 멋진 명함을 가지신 수많은 분들에 비해, 많이 배우기는커녕, 그들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기만 할 일개 서민 일 뿐이지만, 그래도 무엇이 옳고 그런지는 안다. 아니, 최소한 이 책을 읽고, 어떤 행위가 법의 남용이며,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의 한도를 초과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한 건가?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운 법률 용어보다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도록 만드는 모든 제도와 관료들의 부패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참 어렵고 어렵다. 정말 어렵다. 돈에 얽힌 명분 찾기. 또 돈인가? 지겹지만 어쩌겠는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이 모든 권력의 핵심인 것을.

  우선 이 책은 론스타 게이트로 유명한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실체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김앤장이라는 거대 기업 수준의 로펌의 사무실에서부터 핵심 세력, 베일에 가려져 있던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김앤장이 얼마를 버는지 살펴보았고, 그 방법도 찾아보았다. 기업 사건이나 재벌 총수 사건을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김앤장에게는 공저인 영역도 사업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정위와 국세청과 은행의 해외 매각, 공기업 민영화, 심지어 정부에 대한 법률자문도 사업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얻은 엄청난 수익으로 대법관과 고문들이 거액의 급여를 받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민간근무휴직 제도나 국세청의 표창과 같은 작은 제도들이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 138p'

  김앤장은 사무실에서부터 의혹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흔한 간판 하나 없이 건물을 소유하여 수우한 엘리트 변호사단을 구축하고, 공직자 윤리법에 구멍이 숭숭 뚫려 공정거래 위원회, 국세청, 금융감독 위원회 등 조사, 감사권이 있는 기관에서 퇴직한 고위 공직자들이 줄줄이 로펌으로 몰려가는 실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전관예우의 법칙에 따라 흔들리는 공직자의 권력 남용의 살벌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김앤장의 비밀주의, 비가시성, 천문학적인 수익료를 고액의 보수를 받는 형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명백한 비논리의 현실이 그야말로 참담하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최대 규모의 전직 판, 검사들이 기수별로 모두 근무하고, 고시 동기나 연수원 동기 또는 같은 법원이나 검찰에서 상하관계나 동료로 근무했던 촘촘한 그물망에서 나온다. -173p'
  ‘김앤장 모델’이라고 부르는 성공의 이면에는 바로 이들 퇴직 고위 관료들이 있다. 고위관료를 고문으로 채용해서 로비스트로 쓰고 국내.외 거대 투기자본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활용하고, 국가권력을 포섭해서 사적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성공의 비결인 것이다. 이들은 성공을 위해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한다. -187p'


  학연, 지연에 목숨을 거는 한국인의 특성상 김앤장이 마피아 같은 거대 기업의 형태로, 법을 이용한 하나의 사업 모델로 성장할 수 있었던 놀라운 신화는 당연한 이치다. 비록 일반인들의 논리에는 어긋나더라도 말이다. 높으신 분들의 눈치를 살피는 정부, 모든 법률을 통과시키는 법원. 비자금이나 탈세 의혹을 법망을 피해 달아다는 대기업의 횡포, 과연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는 것일까?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가나 법조인을 찾을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한 것일까? 언론에서조차 함부로 화자시되어 접근할 수 없는 김앤장의 위력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국민들은 과연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이 책은 김앤장의 보이지 않는 권력의 형체를 차근차근 되짚어보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 받지 못한다.’라는 격언처럼 우리 모두 스스로의 권리를 인식하고 행사해야 한다. 나 같은 무지한 사람도 이 책을 읽는데 큰 무담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책은 법을 다룬 책 치고 그리 어렵지 만은 않은 책임에 분명하다. 평소 뉴스나 시사프로그램과 친숙하지 않은 분이라도 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가장 무서운 형태의 권력 남용의 실체를 고발하는 이 책만큼은 반드시 읽어 볼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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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 2008-03-11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법률사무소 김앤장』 저자 간담회가 3월 15일(토요일) 오후 2시 서교동에서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블로그에 들려서 신청해주세요. 광고성 댓글을 남겨서 죄송합니다.

http://blog.naver.com/humanitas1/30028666122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안토리오 솔레르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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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한 작은 바닷가 마을, 함께 어울리기 좋아하는 네 명의 젊은이가 있다. 청춘이 이유 없는 반항을 즐기기 위한 특권이라면, 각자에게 내려진 반항의 이유가 무시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야심찬 젊은이도, 황폐한 젊은이들도 아니기에 저마다의 불안정한 삶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 했을 때 옆 침대의 남자가 성서 마냥 섬기던 책 단테의 ‘신곡’을 얻게 된 미겔리토는 그의 연인이자 천국이었던 여인 룰리를 만나게 된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 어린 연인들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회전하며 그들의 작은 세계를 비추어 준다.

  우선 미겔리토의 친구들이 있다. 키가 작고 동양인처럼 생긴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아마데오 눈니(멧돼지라는 별명이 더 친근한), 아버지의 화려한 사교로 유명한 바람벽 파코, 그리고 평온한 가정에서 자라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친구 아벨리노 모라타야. 이런 죽마고우들과 대비되는 반대 그룹, 혹은 철천지원수들도 있다. 자기 과시욕에 몸부림치는 난쟁이와 사이코 라피 아얄라, 탐욕스러운 루비로사까지. 마치 실제로 스페인의 작은 마을을 탐구하기라도 하듯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저마다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시작된 사랑의 인연과 겹겹이 쌓인 우정, 질투와 증오. 다양한 형태로 흐르는 감정들의 놀라운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다.

  막연하게 바라는 미래의 자신을 향해 외쳐보지만 이렇다 할 변화 없이 결국은 같은 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엉터리 시인 미겔리토도 그렇고,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 룰리 역시 무용을 하고 싶어 하지만 가정 형편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파코도 살덩이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로 인해 변호사라는 길을 걷게 되고, 부모로부터 두 번씩이나 버림 받은 멧돼지 역시 자신은 간절하게 무엇을 갈망했지만 결국은 이룰 수 없었다. 꿈은 바람에 실려 온 햇살 마냥 그들의 여름을 핑크빛으로 물들이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족쇄처럼 운명은 매번 그들을 잔인하게 배신한다.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으레 낭만과 정열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풍요롭지도 않다. 아름다운 미소가 퍼져나가는 매혹적인 젊은 소설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약간은 따끔거리고 가슴이 아프다. 멧돼지의 고모 라나 터너양이 현실을 외면하고 허상을 쫓듯, 저마다들 무언가에 미쳐있다. 미칠 수 있는 중독의 아픔이 그 해 여름, 아직 미성숙했던 그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피로 얼룩진 가련한 사랑, 저물어가는 괴로움들 속에서 복잡하기만 한 네 명의 우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의 사소하고 파란만장했던 그 해 여름을 먼 훗날 회상하던 이 글의 화자는 말한다.

  ‘나는 생각했다. 내 삶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별이 죽기 전에 내뿜은 빛은 아직도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찬란함은 잃어버렸을지 모르나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살아 있어 내 길을 계속 비춰줄 것이다. 333~334p’

  시인이 되고자 했던 아마추어 미겔리토처럼 이 소설은 시적인 언어들로 가득하다.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예쁜 문장들 속에 서글픈 운명의 자화상이 감추어져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그리 즐기지 않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한 소설이 될 수도 있다. 어지러운 플롯과 수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했던 소설이지만, 익숙해 질 무렵엔 조용히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흡입력이 있다. 이 작품은,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젊은 한 때의 꿈 이야기다. 각자가 원했던 삶. 바라는 삶. 꿈은 비록 거짓말처럼 나타났다가 거짓말보다 더 슬프고 잔인하게 사라져버렸지만, 어딘가에 있을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향했던 별은 항상 그를 희미하게나마 비춰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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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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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보더라도 자부심을 가질만한 번듯한 직업을 가진 네 명의 남자들은 한 여자를 공유 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삶은 언제나 그렇듯, 뜻밖의 전환점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 네 남자에겐 바로, 그녀 '몰리'의 죽음이 그러하다. 매력적인 여인 몰리의 현재와 과거를 각각 공유했던 네 남자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장례식장이라는 엄숙한 장소에 모이게 되고,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은 가슴 깊숙이 숨겨져 있던 본인들의 상처와 얼룩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상처의 근원은 어디이며 무슨 이유일까? 각자의 결점을 커버하려는 그들의 자기 합리화는 정당성과 대비되며 양심의 치졸한 부재를 더욱 더 야기시킨다.

  클라이브, 버넌, 조지, 라머니, 이 네 사람은 모두 삶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중년의 남성들이다. 몸의 노화는 젊은 날의 추억을 갉아먹고,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나이듦의 서러움에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본인들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보다 더 높은 고지를 향해서 달려가지만 체력과 나이는 이미 한계점을 보이고, 고갈되는 아이디어의 부재로 서서히 변화의 시점을 간파하지만, 아직도 한계라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한다. 발버둥 칠수록 더욱 옹졸해 질 뿐이지만, 각자가 증오했던 상대들과 닮아가는 본인들의 모습은 차마 눈 감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다.

  우정과 사랑, 믿음의 이면에는 이렇게 파괴되고 몰락해 가는 자아와 대비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각자 깨달아 가는 그들. 저마다 부와 명예를 쌓아 올리며 성공의 축을 이루었지만, 세월의 변화에 따라 타인에 대한 분노와 경멸, 증오, 그리고 열등감은 깊어져만 간다. 누구보다 친했고 스스럼 없었던 클라이브와 버넌조차 두 사람 사이에는 변화하는 세월과 함께 피해의식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면 알수록 믿음이 분노로 변모해가는 중년의 기진맥진함을 탁월하게 표현한 소설이다. 차분한 듯 하면서도 수다스럽고, 고상한 듯 하면서도 치졸한 인간상의 비리를 파헤친, 매우 감각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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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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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을 읽는 동안의 감정적 혼란과 전율을 결코 예상하지 못했었다. 요즘 흔히 등장하는 잘 짜여진 팩션이나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빗댄 미스터리 음모론을 주장한 책이려니 지례 짐작 했는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먄약 이 책이 폭로하고 있는 일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전 세계 역사가 뒤집어 질 것이다. 충격과 혼란 속에서 셰익스피어라는 가면을 쓴 인물과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비운의 인물, 그리고 영국의 튜더 왕조가 다시 쓰여질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진실이고 거짓인지 아무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이어지는 놀라운 의혹들 속에서 진실 규정의 필요성 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매력적인 인물에의 탐미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 또한 커다란 수확이다.

  너무나도 도발적이고 위태로운 반항이다. '실제로 셰익스피어란 사람은 없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 일컷는 그의 작품의 실제 주인은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당시의 철학자 겸 사상가, 작가였다.' 이러한 진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분명 혐오감으로 물들고, 믿을 수 없는 짧은 가십으로 치부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사실을 처음 접한 후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역사상 가장 위대했다고도 볼 수 있는 한 명의 혁명가이자 위트 넘치는 천재를 만날 수 있다. 아니, 이 책을 읽은 독자라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과 한 명의 주인공의 미스터리한 삶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책에는 사람의 마음을 현옥시키는 묘한 마법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마치 종교처럼.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왜 이토록 큰 파장이 지금까지 잠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대영제국 자국민들의 자긍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진실을 논할 가치도 없는 음모 투성이라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의 사후 5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작품인데, 어디까지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숨겨진 암호해독의 놀라움은 오히려 설득력을 잃었고, 프랜시스 베이컨의 미스터리한 삶이 주된 이유이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가면을 쓴 '윌 샥스퍼'란 인물은 정규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었던 평범한 서민으로서, 절대 셰익스피어가 남긴 수준높고, 아름다운 시적 희곡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수 없이 많이 출판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평전들은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무지하게 혼란스럽다.

  많은 의혹이 있지만, 과연 어떤 쪽이 진신일지는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시대 상황과 출판이란 매체가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수려한 문장과 뛰어난 작품이 탄생했다 하더라도 단 한줄 등재되어 있는 작가의 이름에 어느 누가 타인의 명의로 장난을 가한다 하더라도 독자들은 결코 알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토록 무지하며, 심지어 평론가라는 사람들조차도 익명의 상태에서는 글쓴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로맹 가리가 그렇게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대게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안다. 보이는 것이 언제나 옳은 진실은 아닌데 말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 되었든지 간에 이 책은 놀라운 의혹을 제기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의혹의 불씨에서 시작하여,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의 진위 여부, 여왕과 제임스 1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왕족들과 귀족들간의 뜨거운 신경전은 과히 압권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사싱가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은밀한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소설보다 더욱 더 파란만장하고 격정적인 일대기로 전율을 만들어 냈다.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흥분 속에 빠져드는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암호와 관련된 사실들이 너무나도 신핑성이 있기에 진위 여부가 궁금하여 미칠 지경이었을 작가의 심정을 백번 이해한다. 부디, 내가 죽기 전까지는 이 놀라움 가득한 스캔들의 진위 논란의 여부가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의 중심에 있던 그들은 이미 모두 사라져버린 이상, 어쩌면 진실은 영원히 은폐되어 미스터리로 남게 될런지도 모르지만, 혹시라도 직접적인 사실에 근거한 자료가 나타난다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의 마법이 풀어지며 셰익스피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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