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복권을 살 때는 언제나 눈에 핏대를 올리며 약간의 희망을 걸어보곤 한다. 그러나 몇 초 후면 그 희망은 작별의 손짓을 하며 언제나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다. 로또 1등에 당첨 되면 하고 싶은 일들과 사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읊어보곤 하지만, 주말이 지나면 로또 종이는 언제나 휴지통으로 직행하기 마련이다. 내 희망과 꿈을 짓밟은 부질 없는 종이 조각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갈갈이 찢겨져서 말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 복권이나 도박, 퀴즈쇼는 성질은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1등을 한 사람에게는 억만금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지만, 수많은 낙오자들에게는 탈락의 아픔과 빼앗긴 희망의 서글픔 마음만 남게 되니까. 그래서 나는 이런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가 한 명 있다. 이름은 람 모하마드 토마스. 인도 소년. 퀴즈쇼에 참가해 12문제를 맞췄고, 이제 곧 억만장자가 될 화려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벅찬 기쁨도 잠시, 그는 퀴즈쇼 우승으로 경찰서에 구속되어 버리고 만다. 사기 혐의를 둔 퀴즈쇼 관계자들의 횡포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말이다. 이때부터 '람'이란 이름을 가진 소년의 기나긴 인생 여정이 펼쳐지면서 결백이 하나씩 하나씩 그의 입을 통해 입증되는데,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우리는 이야기 속으로 질주할 수밖에 없다.

  퀴즈쇼에서는 지독한 행운아이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람의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난한 고아로 태어나 학교조차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었고, 온갖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고통을 다스리는 법부터 배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악한 사람들을 만나면 특유의 기발한 채치로 응징하면서, 착한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며 살았다. 람이 퀴즈쇼에서 우승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스스로가 정직하고 착실하게 살아가면서 행운을 창조해 나간 것이다. 총 12개의 퀴즈가 진행되는 동안 밝혀진 12개의 꼬리는 무는 사건들. 그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절실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지나친 한탕주의에 빠져 있다. 복권이나 도박, 사기, 등으로 일확천금을 노리지만 행운은 언제나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람처럼 묵묵히 현재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정직을 삶의 모토로 삼는다면 언젠가는 행운의 여신도 우리에게 다정히 손을 흔들어 줄 날이 오지 않을까? 처음으로 읽어 본 인도 소설인데, 그들만의 색다른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시종일관 유머러스 하면서도 핵심의 깊이는 잃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믿음과 신의, 그리고 가진 자들을 향한 은근한 냉소와 풍자. 기발하고 재치있는 글에 한껏 매료 되었다. 능력있는 작가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울 속의 아이들 - 인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 이야기
김정연 외 지음, 김준영 그림, MBC W 제작진 / 아롬주니어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되물림 되는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인구가 늘어가고 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라고는 하지만 자수성가해서 잘 살아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빈익빈 부익부는 선진국보다 후진국에 속하는 나라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심한 경우 상위 2%가 나라전체의 이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되물림 되는 가난 속에서 아이들은 더욱 고통 받고 있다. 당연히 어른보다 모든 면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은 배움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돈에 팔려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한창 배울 나이에 일터로 나가 험한 일을 하는 어린이들을 보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거울 속의 아이들」은 3명의 세계 각국의 아이들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건조한 설명문이 아니라 소설 형식으로 쉽게 쓰여 져 더욱 감정 이입이 쉬웠던 것 같다. 인권을 빼앗긴 채 기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음에 거리로 내몰린 가려한 아이들. 그들의 작은 몸짓이 너무도 큰 절망을 야기 하는 것 같아서 어른으로서 너무 부끄러웠고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나라 돈 2만원이 없어서, 빚을 지고 채석장에서 돌을 깨야만 했던 어린 손을 보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대만, 새삼 배부르게 먹고 편히 쉬고 있는 내 모습이 더욱 불쌍해 보일 수밖에.

  무지로 인해 마녀 사냥이라는 악습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 가나 공화국의 아힌, 어른들에 의해 자행되어져 위험한 도로가에서 꽃을 팔아야만 하는 태국의 아이들, 조혼으로 인해 열 살도 채 안 된 나이로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야만 하는 케냐의 어린 소녀들……. 꿈과 희망으로 미래를 설계해 나가야 할 아름다운 꿈나무들이 이토록 슬픈 생을 보내야만 하다니. 차라리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가슴 아픈 이야기들 투성이였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전 세계에는 얼마나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작은 생명들이 많을지……. 남미 쪽에서는 어린이들의 매춘과 마약 남용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고 하는데, 이 모든 악행의 불씨를 어른들이 피워놓은 시작에 불과하다.

  가슴 아픈 이야기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그나마 작은 위안을 얻었다.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감동 실화는 잔잔하게 가슴을 울려주었다. 그 아이들처럼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운명은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원하는 한 모든 것은 가능하다. 한계는 네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Impossible Dream’을 ‘Possible Dream’ 으로 바꾼 쥬린다처럼, 모두들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만 않다면 투박한 현실도 가슴 아픈 낭만도 없을 것이다. 살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외부인의 일시적인 도움으로 순간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만, 모든 가능성은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이런 마음가짐을 지니고 강하게 세상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인 오스틴 - 세상 모든 사랑의 시작과 끝
존 스펜스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누군가의 전기를 읽는다는 것은 항상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게 되는 듯하다. 유명인의 사생활은 항상 화제를 물고 다니고,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시대의 이슈가 되지만, 정작 본인의 사생활이 언론에 노출되어 적나라한 모습으로 세상 위에 펼쳐질 때 본인들의 불쾌함은 오죽할까.「Becoming Jane Austen」을 읽으며 불연 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고인의 편지들과 유서의 내용까지 속속들이 들추어내어 생활사를 폭로할 때는 나도 모르게 괜한 사죄의 마음이 들곤 한다. 특히 이번 책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제인 오스틴의 삶을 유추하 나갈 때 반드시 필요한 문서들의 내용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200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사생활을 침해하면서까지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의도로서가 아닌 순수한 팬들과 독자의 교감이라는 입장일 뿐이라는 면죄부를 쓰고 시작해야겠다. 상상했던 것 마큼 파란만장하다거나 격정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이번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친근하게 느끼게 된 제인 오스틴의 생애는 역시나 그녀다웠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제인 오스틴 역시 자신만의 꿈을 실현하면서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능률적인 움직임과 현실적이면서도 조금은 감상적인 그녀의 성품이 많은 여성들이 자신을 잃어가며 헌신 할 때, 그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유추하고 있을 가능성뿐이라지만, 일생을 통틀어 단 한번 운명을 쥐고 뒤흔들었던 사랑을 만나면서 모든 혼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당찬 여성. 당시로서는 전무하다 싶을 정도의 자아 개척정신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제인 오스틴이 창조해낸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본인 역시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얼고 있었던 것이다.

  세기에 걸친 오스틴 가문의 계보는 지극히 단조롭고 평범한 듯하지만, 언제나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가 발생했음이 분명하다. 어느 가정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패밀리라는 개념 자체가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영국에서는 개인의 자유조차 가족이라는 구속 속에 영원히 귀결된 듯 보인다. 특히나 여성들이라는 신분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가족과 친척, 그리고 이웃이 삶의 전부인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게 되는 부딪힘의 문제들. 그리고 사랑이라는 돈독한 울타리 속에서 하나 되는 화합 역시 그들에겐 생명처럼 존재하고 있다. 제인 오스틴 역시 일평생을 가족들, 친척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희망을 얻으며 작품 속에 투영시킨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의 영감을 얻었고, 오빠 헨리와 사촌 엘리자를 모델로 삼아 직접 소설까지 집필하게 된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모든 이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이야기의 소재였으며, 삶의 이유인 듯 보였다.

  지금까지 읽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으로는 「오만과 편견」이 유일한데, 앞으로 만나게 될 그녀의 작품은 더욱 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그녀가 사랑했던 근사한 남자, 끝내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비운의 사랑 ‘톰 러프로이’와 그녀의 오빠들, 언니, 사촌들, 조카들, 모두가 조금씩 나름의 위치로 그녀의 작품 속에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연상 연하, 재혼, 사촌 지간의 결혼으로 유명했던 오빠 헨리와 엘리자의 러브 스토리가 무척 흥미로웠다. 「맨스필드 파크」를 읽는다면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만나봐야 할 그녀의 작품이 너무도 기대된다. 현대 여성보다 더욱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18섹시 영국 사회에서, 떨리는 로맨스와 여성이라는 지위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온갖 형태의 좌절과 고통, 언제나 수반되는 사랑이라는 갈증. 복잡하게 전개되는 소설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이유는, 어느 소설에서든 주인공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을 보면서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끼고 환상이라는 일탈 속에 자신을 던진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인 오스틴, 그녀가 주인공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비틀어진 삶의 신호도, 그녀 나름대로의 철학과 소신을 바탕으로 신 여성의 이미지를 창조해 나갔다. 만들어진 이유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이 때론 중요하며, 그녀는 무엇보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에게 부여된 참혹한 선과 악의 공존은 항상 상황의 지배를 받는 듯하다. 극단적인 예로 ‘살인’을 들 수가 있는데,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보다는 언제나 결과에 치중하여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살인자는 항상 '악'으로 판명되고 만다. 법률과 도덕이 정해놓은 사회의 규칙이 살인을 인정하지 않기에, 살인자에게는 어떠한 변명이나 동정도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살인자가 살의를 느끼게 만든 원인제공자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일까? 법률이 인정한 신악의 딜레마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을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본다. 처음부터 공개되어버린 살인자를 향해 옳다, 나쁘다, 라는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그의 행적을 쫓으며 그저 물 흐르듯이 유유히 흘러가는 상황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저 그런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저 그런 인생들의 3류 이야기. 얽히고 얽힌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저마다의 사연들. 때로는 눈물겹게 안타까우면서도, 한 편으론 이해 할 수 없는 사상을 지닌 자들에게는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걸까, 라는 냉소가 스멀스멀 피어올라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누구나 악한 면과 선한 면은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한다면 달리 말할 필요도 없는 '악인'이란 정의에 부합될 것이다. 본서에서 정의 내리고자 하는 주인공이 실제 악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플 뿐이다.

  이야기는 어느 평범한 여자가 교살로 살해 되면서 시작된다. 살해 된 채 인적이 드문 고갯길에 버려진 ‘요시노’를 둘러싸고 그녀의 주변을 찬찬히, 마치 카메라가 훑는 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허영에 들떠 싸구려 인생을 살기는 했으나 요시노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였다. 철딱서니 없이 설쳐 대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탄식해봤자 이제는 들어줄 상대조차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실은 그녀도, 유이치도,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싶었을 뿐이다.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실타래처럼 얽인 사람들의 공생관계 속에서 참다운 '나 자신'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주는 책이다. <악인>에서 진짜 악인이 누구였는지는 마지막까지 책을 모두 읽은 독자들만이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군지를 친절히 알려주고는 있지만, 중반까지는 설마,하는 의혹 속에서 긴장해야 했다. 추리 소설답게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풀어가는 형식이지만, 어쩐지 <악인>은 재미보다는 휴머니즘을 더욱 강조한 듯 보인다. 타인에게 정의 내려지는 개인의 본성과 은밀한 내면, 들추어내면 낼수록 더욱 신비하고 아리송한 인간의 마음들. 깊은 철학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악인>을 통해 가슴 깊이 요동치는 깊고 깊은 인간이라는 심연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가되는 책임의 무게는 막중하다.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해 부모의 심정을 100%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내 부모님의 딸이기에 전적으로 자식의 입장에서 이 글을 서술할 수는 있다. <엄마의 집>에 등장하는 미스 엔의 의젓한 딸 호은과 나는 놀랄 만큼 비슷한 입장으로, 부모가 이혼 한 가정의 딸이라면 대부분 겪는 극심한 정신적 타격과 사회적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다. 부모가 이혼한 경우 대부분의 딸은 다소간의 애정 결핍을 보이고, 누군가에게 내색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성에 갇혀버리게 된다. 엄마에게도 속하지 않고, 아빠에게도 속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중립의 입장. 또래에 비해 상당히 조숙한 정신세계를 지니게 되고, 힘겨운 아르바이트로 어린 나이에 물질이 주는 풍요와 아늑함을 동경하게 됨은 물론이다. 아버지가 무능한 경우 상황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엄마의 집>은 마치 우리집 앨범을 들춰보는 듯 적나라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런 특이한 케이스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일 경우, 대다수 일탈 혹은 타락의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으나, 또 어떤 식으로 보면 그 반대라고 볼 수도 있다. 상황이 본인을 지배 해 버리는,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 아무리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쳐도 결국은 제자리 걸음 뿐인 막다른 골목길 같은 삶들. 상황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 상황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노력은 <엄마의 집>에서 호은이 보여준 용기이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 '생은 시어 빠진 레몬 따위를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 운명에 수긍한 채 날개 빠진 채로 살기 보다는 조금 더 타당하고 조화롭게, 그리고 아름답게 생을 조리해야 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 시절, 가출한 엄마를 시작으로 '호은'의 삶은 격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둘이서 더 잘 살기 위해, 자신들의 집을 갖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힘들기만 한 시간들을 채워간다. 오직 딸과의 재회라는 결과만을 노리면서 말이다. <엄마의 집>은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가정의 범주에서 벗어난 두 모녀의 이야기다. 아직도 시대를 탓하며 자신의 무능을 정당화하는 고집불통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벽과 평생을 마주봐야 했다.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는 동시에 동정하는 딸 호은, 그녀는 오히려 아버지에게서 냉정히 떠나가 가정을 파괴해 버린 엄마라는 존재를 더 증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호은이 느끼는 증오의 원천은 그리움이었고, 사랑이라 불렸던 표현의 다른 이름이었다. 결국은 서로의 존재를 찾게 되고 인정하며, 또 이해하게 되는, 핏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연결의 고리가 끝내는 눈물겹다. 그리고 몹시 잔인하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가족들. 기존의 '집'을 파괴해 새롭게 잉태된 또 다른 '집'은 과연 누구에게 휴식을 준 것일까? 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한때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들고, 또 초라하고 가엽게 느껴지다가도 돌이켜보면 나보다 더 힘들고 고통을 겪었던 또 다른 사람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 했던 엄마라는 큰 이름이 있었다. 한 걸음씩 가까워져 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세상을 조금 더 밝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엄마의 집>을 통해, '나'란 아이의 의미, 엄마의 의미, 그리고 가정이라는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는 누군가의 집을 엿본 소감은? 당연히 진부한 듯 보이지만, 소소한 희망과 감동을 느낀다. 가족이라는 완전체가 지리멸렬하게도 내 삶을 잡아끄는 이상, 촌스러운 자존심과 멍에 따위는 깨끗이 잊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해와 타협으로 혹은 존중으로 나와 익숙한 타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해하는 한 아픔은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 성숙해야 하는 순리인 것이다.' 나는 지금 독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어느 불안정한 가정의 딸로서 이 글을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