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가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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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분의 것들로 가득 채워보고 싶었다는「홀리 가든」은 ‘에쿠니 가오리’ 그녀 특유의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오묘한 초콜릿 무스 같은 냄새들로 가득하다. 실패할지도 모를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랑을 해 나가는 주인공들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간혹 세상에서 이방인 내지는 부적응아로 낙인찍힐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도 어쩔 수 없다는 표현으로밖에는 설명 되지 않는 그 복잡한 감정의 굴레. ‘가호’와 ‘시즈에’라는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로부터 서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확하게 흘러가는 줄거리의 핵심을 찌르기 보다는, 그녀의 말마따나 일상의 여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홀리 가든」. 오늘도 에쿠니 가오리 소설 속 주인공들은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다시 사랑하라고 외쳐대는 듯하다.

‘가호’와 ‘시즈에’는 그 흔하디흔한 베스트 프렌드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까마득한 오랜 세월동안 늘 함께 했다. 단짝 여자 친구들이 의례 그렇듯 그녀들은 비밀이 없었고, 서로에 관한 거라면 부모나 형제보다도 더욱 자세히, 면밀히 알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 서른 줄에 접어든 그녀들 사이엔 조금의 틈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코 균열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미묘한 틈이……. 그렇다. 그건 미묘한 ‘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간혹 두 사람이 단둘이 만나면 껄끄럽다고 여겨질 정도의 완벽한 틈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를 누구보다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상대방의 아픔도, 상대방이 현재 무엇 때문에 힘겨워 하는지, 자신의 아픔보다 더 정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점점 다가갈수록 조심스럽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다. 여자들 사이에선 그런 확신이 존재한다. 남자친구와 여자 친구의 틀린 점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마냥 편하기만 해야 할 ‘친구’ 라는 관계 속에서도 금기시해야 하는 무언의 침묵. 그리고 침묵의 이유를 상대방이 알고 있는 것. 그것도 소름끼치도록 정확히 말이다.

“남자들이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는 건 알아. 게다가 가족이란 애당초 거짓에서 시작되었고, 두 인간이 서로를 믿고 살아간다는 어리석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거니까. 하지만 말이야, 친구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거야? 내 사전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고.” - 168

「홀리 가든」은 단짝 여자 친구 두 명이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5년 전, 어느 유부남을 죽을 정도로 사랑했던 ‘가호’는 현재까지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 가호에게 그는 과거의 추억이 아닌, 자꾸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목덜미를 잡아채는 현재진행형의 사랑이다. 그런 가호를 ‘이해 못하는 척’ 하지만, 사실 시즈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재 그녀 역시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와 비슷하게 아파하면서도 냉엄하게 꾸짖을 수 있다. 본인 역시 현재의 사랑에게 눈알이 뱅글뱅글 돌 만큼 깊이 빠져있으니까. 어차피 누군가와의 사랑은 모두 부질없고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그 감정을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깰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홀리 가든」에서 에쿠니 가오리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두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사랑’이란 귀중한 경험을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상대방이 누가 되었든, 가령 현재 사회에서 범죄로 인식 되는 불륜이나 동성애조차도 어느 누구에게는 전부가 되기도 하며, 누군가의 눈에는 한심하게 비춰지기도 하는 것이다. 바보 같다고 욕할 지라도,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부득이하게 이끌려 가는 삶의 끝자락처럼, 사랑 역시 우리의 도처에 우리가 모르게 도사리고 있다.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을 좋아해. 내가 모르는 고장에서 태어나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살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세리자와를 좋아해. 난 지금의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없고, 지금의 내가 아닌 나를 상상할 수 없으니까. 연애라는 거, 뭐랄까 유일무이한 우연, 천문학적인 우연으로 성립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뭐가 하나라도 어긋나면, 예를 들어 좀 더 일찍 만났다든가 세리자와가 독신이라든가, 그랬으면 모든 게 달라졌을 거 아냐?” - 267

아무 조건 없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아왔든, 그 사람이 현재 누구와 살고 있든, 중요한 건 지금. 함께 살아가며 사랑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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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처럼, 눈물처럼, 그리고...
이숙 지음 / 청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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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화보집이다. 그림 재료 중에서 사용하기 가장 까다롭다고 하는 컬러 잉크로 그려진 소박한 꽃 그림들과, 지금껏 작가가 살아왔던 삶의 무게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스란히 알려주는 짧은 산문시들……. 「꽃잎처럼, 눈물처럼, 그리고……」제목처럼 꽃잎의 향이 살포시 코 속으로 전해지는 듯 했고, 눈물이 맺힐 듯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많이 아끼는 동생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나 역시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면 이 화집을 주고 싶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저자 ‘이숙’씨는 매우 다양한 이력을 지니신 분이다. 자세한 프로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버지가 영국인이시고, 본인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고, 첫사랑의 실패와 두 번의 결혼으로 인한 국적이 다른 두 아이를 데리고 산다. 여성으로서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반평생 이상을 살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문화적 차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갈등을 겪고, 혼자 상처 받고, 아름다운 꽃을 보며 그 아픔을 달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참 외로운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방법 또한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로서 당연히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화합하고, 혹은 사랑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는 약하지만 강한 존재들. 살아가면서 꼭 한번은 느끼게 되는 철저한 고독 속에 고립되어 긴 한숨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올 때 읽는다면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이 많다.

잠들기 전, 맥주 한 잔 마시면서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읽는다면, 적어도 이 넓은 세상에 외롭고 힘든건 나 혼자 뿐이라는 서글픔은 날려버릴 수 있을 듯하다. 그녀의 말처럼 너무 힘들고 지칠 땐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내려다 봐야 한다. 나보다 더 절망에 사로잡혀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배부른 소리 그만하고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꿋꿋하게 일어나 다시 내일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지구가 마흔 아홉 번 바뀐대도 돌아오지 않을 그 사람이지만, 향기로운 꽃과 한 잔의 술이 그 빈자리를 채워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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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의 은밀한 거래 - The Secret World Of FIFA
앤드류 제닝스 지음, 조건호.최보윤 옮김 / 파프리카(교문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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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축구를 가리켜 지구상에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전쟁이라고들 한다. 총 22명의 선수들이 파릇한 잔디밭 위해서 공 하나를 가지고 경합하는 이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지구촌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어느 경기장 앞에서 환희에 들 떠 있을 것이다. 열광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광신적인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축구는 하나의 거대한 사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FIFA라는 축구의 핵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를 가나 돈 냄새에 밝은 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축구를 사업의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바람직한 선택인가. 총질이나 피 튀기는 살인을 하지 않고서도 떳떳하게 남의 주머니에서 거대 자금을 굴릴 수 있는 돈 줄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셈이니, 양복 입은 넥타이 부대 마피아가 스위에서 둥지를 틀기엔 최적의 장소다.

  ‘블래터의 위원들은 진짜 마피아다. 부패로 가득 차 있고, 구단 내부의 음모와 마약, 스테로이드 거래, 자금 세탁, 도박 등으로 뒤얽혀 있다. 이것이 FIFA의 병이다. - 리비아 일간지 「알 자프 알 아크다」’

  FIFA회장 제프 블래터와 그의 수족들에 대해 이렇게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담은 기사가 있었다. 이들은 총질만 안 했다 뿐이지, 돈이 될 수 있는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입으로 떳떳하고 밟힌 블래터가 성공을 위해 아벨란제에게 아첨해야만 했고, 다슬러에게 빌붙었으며, 안드레 겔피와 음모를 꾸며야 했던 과거. 그리고 그를 따른 충신들 잭 워너, 척 블레이저와 연합하여 스폰서를 기획하고 돈 세탁을 철저하게 (비록 많은 이들에게 들키기는 했지만) 함구하며 유지하려고 했던 번지르르한 회장 자리가 참으로 씁쓸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잔인한 독재자와 결탁하야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유혈을 서슴지 않았던 또 다른 독재자일 뿐이었다.

  작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을 보면서 한국 선수들이 유럽의 심판들에게 부당한 오류를 당하는 모습을 보며 캐스터와 해설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스포츠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지금 판정은 누가 봐도 조작으로 보여 지는군요.’ 아무리 눈에 빤히 보이는 연극이라도 공중파 방송에서 이런 멘트가 나올 정도면 그 문제는 생각의 범위보다 훨씬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과거, 동계 올림픽 중계 사건에 대해 언급을 하는 이유는 축구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스포츠에서 횡횡하게 정치와 사업에 의한 부정부패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2006년 월드컵은 또 어떠한가? 한국 vs 스위스 경기는 참으로 많은 뒷담화를 낳았는데, 이해 못할 부심과 주심의 판정에 대해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터져 나왔던 말이 ‘FIFA회장이 스위스 사람이잖아.’라는 자조 섞인 말이었다. 한국 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월드컵, A매치를 보다 보면 이해 못할 수준을 넘어선 심판의 행동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어딘지 모를 찜찜한 판정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게 된다. 돈 냄새가 절로 폴폴 풍기며, 이 경기에서 승리한 팀으로 인해 득을 볼 나라와 관계자들에 대한 계산이 먼저 나오게 되는 것이다.

  「FIFA의 은밀한 거래」의 작가이자 현직 스포츠 기자 ‘앤드류 제닝스’는 참으로 치밀하고 영악하다. 축구라면 환장하는 나라,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에 기쁨 충만한 훌리건들이 설쳐대는 영국의 기자라서 그런가.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파헤칠 때가지 파헤쳐서 피파 조직 위원들의 위선을 뿌리 뽑자는 집념이 느껴진다. 블래터가 제닝스를 가르켜 ‘당신 지금 소설을 쓰고 있네!’라는 표현을 했는데, 본서는 정말이지 논픽션이 아닌 픽션 같다. 실제 발생하고 있는 사실을 지우고 읽는다면, 여느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이 따로 없다. 국제축구연맹의 점잖고 돈 많은 제프 플래터라는 마피아 두목과 그의 심복 똘마니들은 오늘도 각본 없는 영화를 찍고 있겠지. 그리고 그들의 비리를 파헤치고자 고군분투하는 집념의 사나이들이 바짝 뒤를 쫓고 있을 것이다.

  이 책, 「Foul! The Secret World Of FIFA」가 2006년도에 출간 되었는데, 제프 블래터가 2007년에 또다시(!!)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참으로 이해 못할 아이러니다. 아돌프 히틀러께서 아마 10년 정도 가장 높은 위치에서 독재자로서의 능력을 멋지게 발휘해주셨는데, 제프 블래터씨 역시 히틀러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와 다르게 축구라는 ‘합법적인 전쟁’을.

뇌물 비리를 전면 부인하던 제프 블래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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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분만 더
하라다 마하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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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을 키우다보면 행복하고 기쁜 반면, 아기나 나름 없는 애견들의 뒤치다꺼리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찮거나 짜증이 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이사 온 후로 개 두 마리를 마당에서 키우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사라졌지만, 일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배변을 정해진 곳에 하지 않고 아무 곳에나 하거나, 눈에 보이는 온갖 물건들을 물어뜯는 경우엔 나도 모르게 절로 손이 올라간다. 한번은 퇴근하고 돌아온 이후 방에 있던 나의 모든 물건들을 다 꺼내서 물어뜯어 놓았기에 이성을 잃고 채벌을 가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올리면 그 때 심하게 맞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지 본능적으로 먼저 몸을 움츠리는 모습에 참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현재 애견 두 마리를 기르고 있는데, 산책을 시킨 경우도 거의 없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너무 피곤하고 시간도 없어서 물과 사료를 챙겨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엔 잠자리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에 빠져들곤 했다. 주말에는 약속이다 뭐다 자꾸만 일이 생겨서 주말 역시 같이 놀아주거나 함께 있어준 경우가 거의 없다. 「일분만 더」의 주인공 ‘아이’를 보면서 가장 반성했던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아이’는 여성 패션지 에디터로 일하는데, 그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리라’의 산책만은 하루 두 번씩 빠지지 않고 챙긴다. 그런데 나는 뭐지? 죽을 만큼 바쁜 것도 아니면서 귀찮다는 이유로 그렇게 좋아하는 산책 한 번 제대로 시켜 준 적이 없었다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원래 개를 좋아하고, 싱글인 입장에서 개를 두 마리나 기르고 있기에 「일분만 더」를 더욱 애착 있게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주인공의 경우와 내 경우가 기가 막히게 맞아 들어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동시에 가슴 아프기도 했다. 책을 받고 하루 만에 뚝딱 읽고 난 후, 어제 밤 다짐 한 것이, ‘저녁에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강아지들 산책만은 반드시 시켜 주리라.’ 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우리 개를 데리고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숨이 넘어 갈만큼 흥분하면서 뛰어다니는 모습에 다시 한 번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원래 정말 소중했던 존재는 그 존재가 사라진 이후 느끼는 법이다.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꼭 호강시켜 드린 다는 말을 무덤 앞에서 통곡하며 떠올리는 것처럼, 무엇이든, 어떤 존재든 간에 극한의 상황에 치닫고 나서야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리라’가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난 후에 ‘아이’가 흘렸던 눈물처럼 추억과 함께 다가오는 나와 함께 했던 애견의 모든 것들은 일상에서는 너무 소소했기에 한참 후에나 그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길 가의 작은 돌멩이, 개미, 흙, 풀, 꽃잎 같은 모든 사소한 것들의 냄새를 맡고 궁금해 하는 개들. 매일 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앉아 있을 그 모습이 오늘 따라 정말 눈에 많이 밟힌다.

현재 애견을 키우고 있거나, 키울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지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고 위해서나 오락을 위해서 키운다고 보기엔 애견을 입양하는 책임은 제법 막중하다. 애견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데, 우린 항상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 같다. 애견에게 주인은 다만 함께 걸어주고, 함께 놀아주고, 함께 웃어준다면 바랄 것이 없는 반면, 우린 항상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내가 그들의 요구에 발맞추어 주기로 결심했다. 어제부터 매일 밤 애견과 산책을 하기로 한, 중대한 결심을 심어준「일분만 더」라는 소설에게 평생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회사 일에 바쁘게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일과 사랑, 애견이라는 딜레마는 너무도 힘들지만 달콤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엔돌핀이자, 삶의 이유인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펑펑 울었고,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중대한 결심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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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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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도 신’의 원작 소설을 읽기 전에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을 먼저 관람 했다. 원작과 리메이크 작을 볼 때면 매번 비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번 역시 비교 아닌 비교를 해야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작품 모두 매력과 장단점이 있는 듯 하다. 우선 영화는 권순분 여사의 자제분들이 모두 방탕하고 이기적으로 그려진 반면, 소설에서는 도시 여사의 자제분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단순함이 있는 반면, 어머니의 구출을 위해서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참여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무래도 소설 쪽이 뭔가 더 가슴이 남는 진지함이 있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가볍게 즐기기엔 영화도 추천할만하다.

「대유괴」의 간단한 소개문 개요를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바로 이 작품의 1979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된 소설임에도 긴박한 상황이나 세상 돌아가는 정서가 지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세상의 모든 미디어로 장악하고 있을 무렵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현재 난무하는 초특급 과학수사보다 더욱 정교하고 화려한 수사 방식에 매료되어 흥미롭게 푹 빠져들 수 있었다. 뭔가 허점이 있을 법도 하지만, 수사적인 두뇌가 발달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들의 완전 범죄 중, 의문점이 남았던 경우는 없었다.

소설의 설정부터가 재미있다. 인자하시고 지혜로운 80대 할머니와 어딘가 모르게 초보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풋내기 유괴범들이라니……. 게다가 할머니가 얼뜨기 유괴범들에게 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인질극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이 매우 신선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건실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인 도시 여사를 비롯해서 겐지, 마사요시, 헤이타, 이카리, 미스구……. 순수하다 못해 미련해 보일 만큼 사리사욕을 챙길 줄 모르고 심성이 착하다. 착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라서 그런지 몰라도 범죄 자체도 그리 밉지가 않다. 당시 100억 엔이라면, 지금의 환율로 따지자면 더욱 더 천문학적인 수치가 될 텐데, 너무 많아서 그런지 오히려 돈에 대해 무감각해진다고나 할까.

간혹 재벌들의 횡령 사건을 접할 때 마다 한 마디 욕을 하지만, 솔직히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큰 욕심이 생기는 법이니까. 100억 엔이라면 평생 먹어도 못 먹을 라면을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제트기를 두 대나 살수도 있다. 돈은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분명 소설이기에 우스개로 넘길 수 있는 유괴사건이지만, 「대유괴」는 세상에 존재하는 일부 몰지각한 재벌들에게 가하는 작가의 따끔한 충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더불어 노인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사람의 몸값을 금액으로 측정했을 때, 과연 얼마의 가치를 매길 수 있을 것이라는 윤리적인 문제까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듯 누구나 저마다의 생명은 자신이 느끼는 가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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