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시, 문지혁 옮김, 노경실 글 / 가치창조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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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흐의 눈은 참 슬프다. 회색 모자도, 가난한 농부들도, 태양의 희망을 상징하는 해바라기의 노란색도 나에겐 슬프다. 처절하게 고독했던 옐로우 하우스도, 고갱과 함께 마셨던 압생트도, 말라비틀어진 빵조각도 모두 모두 슬플 따름이다.

  왜 이렇게 슬픈 걸까? 고흐의 그림들을 보면 가뜩이나 슬픈데, 맥엔타이어의 시와 함께 그림을 보니, 슬프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고흐의 그림을 보며,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흐를 상상하고, 그를 둘러싼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을 떠 올려본다. 그의 고독이 바로 내 코앞에 다가왔다는 착각을 일깨우고서야 묘한 환상에서 깨어난다.


  ※ 고흐의 그림과 멕엔타이어의 시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고흐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상하게도 고흐의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고흐의 그림에는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힘이 있고, 난 그의 파워를 믿는다. 신봉한다는 말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흐의 물감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사람들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천재로 인정받은 허탈함을 그는 지금은 알고 있을까? ‘에드거 앨런 포’와 마찬가지로 그의 생전이 그러했듯 철저한 가난과 고독, 소외 속에서도 오로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고흐의 우직함이 나는 참 좋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 ‘밤의 카페 테라스’가 이 책의 표지로 당당하게 금빛 불을 밝히고 있다. 「고흐를 만나다」라는 제목도 너무 마음에 들고, 고흐의 흐릿한 생명이 이어져 있는 그림 옆에, 고흐에게 바치는 사랑과 존경의 찬가를 노래하고 있는 ‘시(詩)’들이 너무 아름답다. 아마도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며 당시 그가 거닐던 거리의 풍경과 그의 옐로우 하우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내면을 살짝 들여다보고 있었으리라. 때론 황폐하기도 하고, 때론 환각으로 어지러움을 호소하면서도 끝까지 붓을 놓을 수 없었던 인간 고흐를.

  고흐의 심장은 태양의 벗이다. 고흐가 방을 그린 이유는, 그가 강제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대한 일종의 복수의 마음에서였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때도 그림을 위해 거리를, 아를 공원을 걸었다. 오늘도 그에 대해서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마도 앞으로 잠들기 전, 몇 번이나 이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게 될 것 같다.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다.
우리 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세상은 사랑 안에서 돌아가는 것,
우리는 대지에 알맞고 적당한 것을 주고,
몸이 우리를 쉬라고 부를 때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 92p (낮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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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관의 살인 1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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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에서는 대단히 팬 층이 두텁다고 하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중, 나는 아직「십각관의 살인」밖에 읽어보지 못한 상태다.「십각관의 살인」이 작가의 데뷔작이고,「암흑관의 살인」이 가장 최근에 나온 장편이라고 한다면, 처음과 끝을 알게 된 셈이니 사건 연결에 지장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물론 각각의 사건을 다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굳이 앞서 나왔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거라고 보지만, 아무래도 ‘나카무라 세이지’와 ‘가와미나미 다카아키’라는 묘한 이중주의 관계도를 살펴 볼 땐, 앞서 나온 책들을 읽어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니, 출간 순서대로 읽어 본다면 분명 더 큰 재미와 부드럽게 흐르는 사건 연결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십각관, 흑묘관, 시계관, 수차관, 미로관, 그리고 암흑관을 흘러 다음에 나올 기면관까지. 20년 가까이 출간되고 있는 다양한 관 시리즈가 국내엔 아직 모두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일본의 신본격 추리 소설의 기묘한 매력에 빠지다 보면 어느덧 몰입을 넘어선 폐인 지경에 이르게 되니, 만약 국내에 관 시리즈가 모두 번역 출간되어 한꺼번에 읽을 수 있다면, 일주일을 휴가 내어 밤을 새도 그 시간이 아깝지 않게 흐를 것 같다. 역자의 후기처럼 관 시리즈에는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 하드코어한 폭력과 억지로 끼워 맞춘 반전이 없고, 오묘하게 흐르는 어두운 분위기의 오컬트함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다. 어둡고 음침한 인간 내부의 피폐한 황폐함만이 온 몸을 전율케 하는 진정한 서스펜스의 묘미다. 

  아직 십각관 밖에 읽어보지 못한 상태지만, 굳이 암흑관과 십각관을 비교하지면, 암흑관은 십각관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흐름으로 독자를 이끌고 있다. 방대한 분량에 따른 수많은 이야기들, 끝없이 이어지는 그 사건들의 연결 과정은 실로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연출하는 호흡 또한 대단하다. 처음 1권을 읽을 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2,3권을 이어 읽다 보면 어느덧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향연에 감탄 할 수밖에 없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서로서로 이어지는 개연성에 저마다 목적이 있고, 사연이 분명하다.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가족사의 비밀. 과거로,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새로운 비밀들이 자꾸만 터져 나오고, 이는 암흑관을 읽는 독자의 재미를 한층 더 가중시킨다.    

  총 8년 동안의 집필과정, 우리나라 원고지 6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무색하지 않게「암흑관의 살인」은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과연 공동 집필이 아닌, 한 작가의 작품이 맞을까 싶을 만큼 탄탄한 과거와 현재의 연결은, 긴 분량의 소설 특유의 지루하게 늘어짐이 없어 좋았다. 다만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연속되는 독백이나, 회상 장면은 원작에서부터 좀 수정이 되어 있었더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결말부분은 3권 중반 무렵이 되어서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나의 예지력은 정중하지 않았기에 다소 놀라웠다. 줄거리를 밝히는 건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실례이므로, 밝히지 않겠다. 그리고 ‘암흑관’에 얽힌 살인 사건이 궁금하다면 반드시 줄거리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먼저 읽어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시간 여유가 되는대로 틈틈이 읽었으나 읽는데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8년동안 암흑관을 쓴 작가나, 1년 넘게 번역을 했던 역자에 비하면 역시나 나의 시간은 세 발의 피에 불과하다. 모든 비밀을 알아버렸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분명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세 번째 읽을 때는 혹시나 모를 작가의 실수에 대해 지적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암흑관은 몇 번씩 곱씹으며 진중한 맛을 음미해보고 싶은 추리소설이다. 어둠에 지배를 당해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우라도 가족’의 으스스한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함께 범인을 쫓다 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에나미’라는 청년처럼 무엇이 현실인지, 꿈인지, 그 뒤바뀐 일탈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달리아의 축복이 있기를! 섬뜩한 피의 축제 속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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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11-2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보셨으면 좋았을텐데^^
시계관을 읽어보세요~

mind0735 2007-11-27 13:06   좋아요 0 | URL
시계관도 읽어봐야지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ㅠ_ㅠ
 
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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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간혹 내 자신도 감당 못할 만큼 깊은 ‘우울’이 찾아오는 날이 있다. 그렇다. 우울과 슬픔은 엄연히 다른, 이차원적 감정의 모델이다. ‘슬픔’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해 달라고, 나를 좀 일으켜 세워 달라고 투정도 부를 수 있는 반면, ‘우울’에는 약이 없다. 오로지 세상에 나 혼자 뿐이라는 절망과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음을 더욱 뼈저리게 만들어 버리는 공황의 늪인 우울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모든 과거와 미래로 통하는 기억의 문을 닫고, 따뜻한 이부자리에 웅크려 책을 읽는 거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듯 문을 걸어 잠그고,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과감하게 누르고서 말이다.

  책 속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현실 도피를 위한 가장 탁월한 처방전이다, 라는 말조차 진부할 만큼 책은 나에겐 절실하다. ‘책’이라는 존재가 주는 무한한 해방감은 오히려 부차적인 설명이 되어 버릴 만큼 말이다. 도저히 한 마디로 표현 할 수가 없다. 그저 책은 태곳적부터 그러했다는 듯 나에게 너무 절대적이고, 너무 절실할 뿐이다. 무조건적인 숭배대상에 대한 해석 불능의 상태가 책과 대면할 때마다 항상 발생하곤 한다. 묘하게 가슴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마치 연인과의 잠자리에 들 때 느껴지는 짜릿한, 이런 감정. 그래……. 책을 신봉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런 감정의 일부분이다.

  아 - 이토록 사랑스럽고, 이토록 고귀하고, 이토록 무조건적인 믿음을 찬양케 하는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책이 존재하는 한, 나에겐 그 흔한 애인조차 필요 없다. 지독한 외로움의 갈증은 더 없이 매력적인 주인공들로부터 채우면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박학다식하고 수려한 외모의 그들로부터 사랑을 생각하게 하고, 영원을 기약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과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의 지식들, 풍경들, 고지식한 상태로 머물러 있던 내 빈 가슴을 채워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로 하여금 처절할 만치 숨 막힘을 경험케 했다. 언제나 책과 마주보면 가슴이 뛴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읽는 그 세계는, 총 천연색으로 빛나는 환상의 세계다. 그리고 나는 무작정 그 세계로 뛰어 든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단단히 부여잡고서.

  지금 행복하세요?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당연히 잘 모르겠다,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이 먼저 떠오른다. 내 행복의 깊이를 아직은 탐색해 본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진지한 답변을 떠올리자면 먼저 숨이 막히는 경험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내가 이상하게도 책을 읽을 때는 그저 막연히 참 행복하고 아늑하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다. 공중부양을 한 기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현실은 나의 목을 비틀지만, 허구의 세상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되어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렇다면 「침대와 책」의 저자, 정혜윤 PD는 이 질문에 뭐라고 답변을 할까? 까닭 없는 행복함으로 하루가 충만할 것만 같은 그녀, 책과 현실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 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상상을 해 본다. 지금까지 경험한 책 속의 세계가 너무도 다양해서 도저히 우울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것만 같은 정혜윤 PD. 그렇게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기에, 삶의 달콤함을 일찍 깨달아 고단할 틈이 없는 걸까. 내가 닮고 싶은 그대로의 자화상을 그녀를 통해 바라봤다. 언제 한번 만나서 우울한 날 소주 한 잔 걸치고, 그녀와 마주 앉아 많은 말 필요 없이, 주고받는 몇 마디만으로도 나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자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지식인으로 비춰지는, 나보다 몇 살 쯤 많은 언니일 멋진 정혜윤 PD님……. 글을 통해서 그 사람을 바라본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우연히 클릭 했다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YES24 <침대와 책> 칼럼의 주인공은 오늘도 잠들기 전 다양한 세상과의 조우에 눈을 반짝이고 있겠지? 그녀의 삶을 상상하면, 내가 왜 이 책을 읽으며 이토록 행복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여전히 꿈꾸는, 내가 앞으로도 꿈꿀 삶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열거 할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지식 속에서, 그 수많은 책들과 함께 동침 하는 일상은 한 없이 달콤하기만 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이만큼, 그 속에 묻어나는 그 다양한 사연을 책과 접목 시켜서 ‘너무나 재미있는’ 책으로 출간해준 모든 분들께 새삼 감사 드리고 싶다. 「침대와 책」를 통해서 나는 한층 더 성숙해진 기분으로, 내 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시선이 닿는 그 작은 공간 속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야 나는 그녀처럼 유쾌하고, 그녀처럼 따뜻하고, 그녀처럼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변모할 수 있을 런지, 라는 막연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 한 것은 이미 나는 서서히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 80살의 생일엔 나의 침실로 지인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책을 읽다가 뭔가 하나씩 결심을 늘릴 때 마다, 나는 내가 대견하다.) 늙은 육신, 하얗게 바래진 머리카락, 꺼져 가는 목소리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레이스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그 주의 신간을 읽고 있겠다! 그러면 내 생일을 축하하는 지인들이 몰려와 가득한 책 선물과 함께 달콤한 치즈 케이크를 놓아두고, 두런두런 둘러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야지. 간혹 웃기도 하고, 간혹 울기도 하고, 책과 함께 늙어가는 이런 삶을 나는 바라고 또 바란다. 그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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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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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각관의 살인」은 고전틱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다. 이 장르의 마니아라면 다소 고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무인도에 갇히는 젊은 대학생들. 그리고 한명씩 죽어나가게 되는 그들은 서로 서로를 의심하기도 하고, 제 3자의 가능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나씩 사라지는 인디언 인형처럼, 죽음을 상징하는 글씨도 등장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스토리다. 전형적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식의 줄거리인데, 작가는 책의 가장 앞장에 ‘경애하는 모든 선배들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를 적어두었다. 책을 읽다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십각관의 살인」은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가 존경하는 미스터리, 추리 선배들에게 바치는 재기발랄한 오마주다.

이 책의 출간연도도 1987년,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 요런 스토리 라인이 지금은 너무 흔해져서 별달리 큰 매력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장르의 특성상 ‘재미’만큼은 확실하다.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그 누군가(범인)’을 물색하며 함께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재미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소의 허탈감도, 실망감도, 동시에 후련함도 느낄 수 있다. 범인이 누구였는지 맞추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독자가 몇 명이나 될까 싶을 만큼 범인은 정말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고, 덕분에 마무리가 다소의 억지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트릭이 워낙 정교하고 교묘했던 탓이라고 치부할 수밖에.

이 책의 묘미는 뒤통수를 때리는 결말의 반전보다는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정교한 과정에 있다. 두 가지 사건이 혼합되어 독자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며, 극의 재미를 더해준다. 아주 오래된 서랍에서 방금 튀어나온 책 것처럼, 우연히 잡았다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뭐 그런 흥분감을 주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십각으로 만들어진 그 미스터리한 집을 실제로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다. 책에 십각관의 평면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기에 내 머리는 너무 많은 비주얼을 기대하고 있는 탓이다. 영화 ‘쏘우’를 보고 난 후의 기분과 비슷하다. 그 보다는 훨씬 덜 잔인한 책이기에 찜찜함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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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11-18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전일스러움을 느꼈었어요^^;;

mind0735 2007-11-1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전일의 삿대질은 누구에게 통했을까요. 하핫
물만두님~ 넘 오랜만이에요~~~~` >.<
 
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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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을 발산할 패기도 없고, 특별히 뭔가 하고자 하는 욕구도 없다. 그렇다고 일 자체를 하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딱딱하고 지루한 회사보다는 좀 더 기발하고 재미난 곳에서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이 든다. 컴퓨터와 핸드폰 mp3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참을 수 없으며, 어디라도 이동할 수 없다. 저마다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를 쫓고 있다. 영화, 책, 음악, 쉼 없이 발산되는 매체의 유행. 아이디어위해 장초된, 앞으로도 창출해 낼 수 있는 미디어를 향해 미친 듯이 열광한다. 제자리에 있기를 거부하며 빠르게 돌아가는 네트워크, 든든한 백그라운드 없이는 출세하기 쉽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와 맞설 힘이 점점 소진되어 가는 우리의 젊은이들……. 허영이나 질투, 끝없는 추락과 절망과 조우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지금, 바로 여기 대한민국 서울이란 장소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20대의 자화상을 이토록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퀴즈쇼」를 읽는 내내 내 주변의 누군가를 탐색해 보았는데, 대다수가 이 작품의 화자 ‘민수’와 닮아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이건 내 자신이 아닐까, 싶을 만큼, 김영하씨가 창출해 낸 살아 있는 캐릭터에 공감했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긴 가방끈이 무색할 만치 번듯한 직장 없이, 컴퓨터와 하루 종일 놀고 있는 주인공 ‘민수’. 스물일곱 살이나 먹었지만,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다. 부모 없이 외할머니의 손에 컸는데,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자, 이 넓고 넓은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은 희망마저 사라진 기분이 든다. 딱히 내 새울 만한 것은 오직 퀴즈에 능통하다는 것 뿐. 민수는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상식이 풍부하다는 것 빼곤 무기력한 세상의 낙오자로 비춰지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젊은이다.

  지금 이 시대의 이십대 젊은이들은, 마치 컴퓨터의 아바타처럼 저마다들 개성은 틀리지만, 그들만이 갖는 분위기는 흡사하다. 무엇을 향한 반항인지도 모른 채 지루한 반항을 하며 기성세대들과 공방을 벌이는데, 그것은 아직도 그들이 순수하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단순히 철이 덜 들어서 정신 못 차리고 반항을 해대는 애송이일 뿐인 걸까? 너무 순수해서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젊음의 상징을 너무도 잘 지적한 작품이「퀴즈쇼」가 아닌가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허영의 삶을 선택하는 우리들. 가령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에 동화되거나, 게임 속으로 무한정 빠져 들어간다던지, 혹은 채팅방에서 만난 얼굴 없는 그(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상상 속에서 사랑을 키워가기도 한다. 이것은 현재의 삶이 실패라기보다는 좀 더 나은 유토피아적 환상을 꿈꾸는 그들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혼란을 가중시킬 만큼 무겁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은 주제. 빠른 전개와 기발한 재치. 일반상식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퀴즈쇼」는 매우 즐겁고 유쾌한 소설이다. 소설 속 퀴즈를 하나씩 풀어 가면서 스스로의 무지함을 탄식하기도 했고, 간혹 맞추기라도 하면 민수처럼 희열에 들 떠 세상의 지배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퀴즈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승자 아니면 패자가 되어 버리는, 혹은 살아남는 자 아니면 죽어야만 하는 자, 라는 무시무시한 법칙이 적용되는 게임이지만, 퀴즈는 바로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 A인가 B인가 선택하는 사이에 판은 끝나버리고 나 아닌 상대방에게 우승이 돌아간다. 진로도, 삶도, 꿈도, 사랑도, 모두 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 작가는 이러한 미니어처 인생을 통해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 우리는 방탕하지 않다! 새파란 하늘이 이토록 밝게 우리를 향해 방긋 웃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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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2007-11-2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의 리뷰의 제목을 엔제리너스 테이블매트의 퀴즈쇼 광고에 나스카 이름을 넣어서 삽입할 예정입니다. 리뷰를 너무 훌륭하게 써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mind0735 2007-11-2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고에요?? 우와. 영광입니다.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