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왕
니콜라이 바이코프 지음, 김소라 옮김, 서경식 발문 / 아모르문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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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부터 조선은 호랑이를 영물로 여기며 숭배해왔다. 유독 우리나라만 그랬을까. 여하튼 호랑이를 소재로 한 속담도 많고, 호랑이를 신성시하는 풍습 역시 우리의 전통마냥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맹수 중에서도 특히 호랑이는 위엄 있는 그 모습이 동물의 왕이라는 칭호가 절로 들어맞는다. 포효할 때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굉음이 흡사 고막이라도 찢을 듯이 울려 펴지며 거북이 등껍질도 뚫는다는 날카로운 송곳니, 멋지게 휘어진 꼬리와 등줄기의 검은 줄무늬는 수묵화를 보는 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러한 매력적인 동물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었다니, 그것도 러시아인이 조선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글을 썼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물을 끔찍이 좋아하는 탓에 어렸을 적부터 시튼 동물이나 동물 관련 프로그램, 다큐멘터리를 빠짐없이 시청했기에 이 소설 역시 기대가 컸다. 「위대한 왕」이라는 제목과 이 책이 출간된 지 70년이 넘어가는 고전반열에 오른 소설이라는 점도 기대심을 자극했다. 독특한 저자의 이력처럼 이 소설 역시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한 매우 특색 있는 동물 소설이다. 호랑이 중에서도 혈통이 좋고 풍채도 남다르기로 유명한 아무르 호랑이. 흔히 ‘백두산 호랑이’ ‘조선 호랑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이 아무르 호랑이가 타이가를 호령하는 위대한 왕으로 등장한다. 지혜롭고 용맹하고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만으로도 확실한 존재감을 심어주는 아무르 호랑이의 파란만장하고도 질곡 맞은 인생사…….

  저자 ‘니콜라이 바이코프’가 2차 대전을 겪는 중 만주로 파견된 후 그곳으로 망명하여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평소 동물에 관심이 많았던 바이코프는 만주 일대의 넓은 자연에서 동물들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보았던 동물들을 소재로 한 소설로 출간하기에 이른다. 「위대한 왕」역시 그 때 탄생한 소설이다. 저자의 생동감 있는 삽화도 다량 수록되어 있고, 직접 관찰했던 만큼 호랑이 일대기의 매우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호랑이가 인육을 먹는 장면에서는 절로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호랑이에게 희생당한 불행한 사냥꾼들도 많았겠지만, 상상을 해보면 아무리 나쁜 인간에 대한 응징이라도 나와 같은 종족이기에 어느 동물의 먹이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섬뜩하기만 하다. 

  후반부, 인간의 마구잡이 포획으로 점점 터전을 잃어가는 동물들을 볼 때는 참으로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인간들의 점령으로 점점 살 곳을 잃어가고, 줄어드는 먹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영역으로 침범해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삶. 원래 숲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왜 쫓겨나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점점 보금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누가 진정한 이 지구의 주인들일까. 단지 문명을 이룩한 기계를 쓸 수 있는 사람이기에 원래 살던 이주민을 억지로 쫓아내 버리고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은 것처럼. 불과 반세기만에 이룩한 과학의 업적은 놀라우나, 끝도 없이 파괴해가는 문명이라는 현세상이 참으로 무섭게 다가온다. 작가 또한 황폐해져가는 자연 앞에 속수무책인 동물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모든 야생동물들이 점점 보금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어쩌면 호랑이라는 동물 역시 몇 백 년, 아니 몇 십 년 후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전설로만 남아 그림책을 뒤져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호랑이를 보러 동물원에 가봐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야생 호랑이를 직접 찾아갈 수는 없으니, 우리 속에 갇혀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인간에게 길들여져 버린 애처로운 호랑이라도 보며 아쉽지만 만족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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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연애론 - 새롭게 쓰는
스탕달 지음, 권지현 옮김 / 삼성출판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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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탕달의 연애론」은 1822년 출간 된 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현재의 사랑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시대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주제. 이 사랑에 대해 ‘스탕달’이 쓴 연애론은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모든 연애 감정을 총망라하고 있는 듯 보여 졌다. 태초에 사랑에 의해 탄생한 인류 최초의 누군가부터, 현재의 복잡다단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과 해석의 과정은 필시 작가의 경험담이 분명하다.

  ‘수많은 사건이 있었던 세월이 지난 후에도 나에게 기억되는 것은 사랑했던 여인의 미소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스탕달. 소설이 한 사람에 의해 집필된 산물인 만큼 한 작품에 담긴 작가란, 주인공들을 키워낸 주인이자 자신의 영혼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적과 흑」에서 볼 수 있었던 주인공들의 사랑과 본인이 겪었을 사랑의 고통이라는 계절 중 한 철이 지독하게 잘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탕달에게 기억되는 사랑이란, 연애란 무엇일까? 눈을 감는 순간까지 떠올렸을 사랑하는 여인의 미소, 그 속에 겪었던 우여곡절은 「연애론」의 달콤한 비화들을 탄생시켰다.  

  약 200년 전 프랑스,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암울한 신분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보다 오히려 그 때의 프랑스가 더 개방적이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을 품게 될 만큼 그들은 성과 사랑에 솔직했다. 한 귀족 부인의 문란한 성생활과 남성편력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언뜻 폭로로 비춰지기도 하는) 이 자유분방함을 칭찬해야 할까, 부담스러워해야 할까. 어쨌든 스탕달이 몇 몇 일화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누군가의 경험담은 지금 보아도 수위조절이 어려운 파란만장하고도 은밀한 사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작가가 프랑스인이기에 대부분 프랑스 귀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다른 유럽의 사정도 어느 정도 비슷했으리라 본다.

  원치 않은 상대와의 혼인에 따른 여성들의 괴로움, 마초의 남성들의 군림과 귀부인의 변덕, 사랑이 시작되는 상태에서부터 사랑의 절정, 마침내 식어버린 냉담한 상태, 질투와 허영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쩔쩔매는 사람들, 돈 후안식 사랑과 베르테르식 사랑의 장단점까지……. 다양한 사랑 증후군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었던 ‘사랑 정의 내리기’는 여전히 아리송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 표를 얻어낼 수 있을 만큼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현실적이다.

  사랑에 빠지면 마치 누군가가 눈앞을 가려놓은 것만 같다. 사랑하는 상대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사랑하는 상대의 얼굴에 난 종기까지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콩깍지가 씌었다고 표현하는 우리네 속담처럼, 얼마나 그 사람이 좋으면 콩깍지가 눈에 덮여 있는 것처럼 눈이 멀어버릴 수가 있을까? 잘츠부르크의 소금광산에 대한 이야기.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소금광산에 던져두면 나뭇가지가 온통 반짝이는 소금 결정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처럼, 사랑은 참으로 무한한 힘과 미스터리한 아름다움을 가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들 하고 있겠지. 평생의 업보가 되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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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은 책이랍니다 :)
 
잠자는 라푼첼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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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가 ‘나 요즘 너무 외롭다.’라는 말을 한적이 있다. 평소에 전혀 그러던 애가 아닌데, 진심으로 사력을 다해, 자신의 한없는 외로움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색한 것이다. 무신경한 남자친구 때문에 외로워서, 도저히 맨 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혼자 있는 것보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 더 외롭다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하는데, 그 때 마다 그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욱 외로웠다는 말처럼 무섭고 슬픈 말이 또 있을까.


결혼한 부부들이 흔히 겪는 문제는 ‘떨림’의 부재로 인한 무신경함이다. 대화가 차단되고 웃음이 마비되고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가족끼리 무슨 키스야?’ ‘아직도 당신을 보면 떨리느냐고? 이봐, 우린 결혼한 지 5년이 넘었어. 아직도 떨린다면 그건 심장병이지.’ 이런 영화 속의 우스갯소리를 웃으며 넘길 수 없다. 왜냐? 이 모든 것이 현재 발생하고 있는 처절한 리얼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쪽과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쪽, 첫눈에 반하는 불꽃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쪽과 사랑은 모두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비웃음을 흘리는 쪽, 어쩌면 이 모든 사랑의 정의는 맞는 말이며, 굳이 이유나 해석을 달지 않아도 무방할지도 모르겠다.


야마모토 후미오의〈잠자는 라푼첼〉을 읽고 결혼을 하기가 더욱 싫어졌다. 나 역시 ‘시오미’처럼 라푼첼로 박제되어 성 안에 갖혀 버리는 운명이 되면 어쩌나 싶어서. 물론 결혼을 해도 꾸준히 일을 할 것이기에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일은 없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일종의 나 자신을 버리고 타인에게 의탁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에 막연한 불안함이 샘솟는다. 아무리 사랑하고 미칠듯이 원했어도 결국 그 사람을 합법적으로 갖게 되면 왜 사랑의 유효기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마는 것일까. 모두들 이기적이기에 그럴까? 미치도록 갖고 싶어서 꿈속에 까지 등장하는 옷을 구매해서 내 소유로 만들었을 때 느끼는 잠깐의 기쁨. 그리고 그 후론 그 옷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이기적이게 변모하는 것처럼.


〈잠자는 라푼첼〉은 무기력한 일상에 힘겨워하는 전업주부의 삶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특별히 미화시키지도, 그렇다고 적나라하지도 않은 평범한 이웃집 누군가의 삶이다. 이웃들 간에 말 많기로 유명한 아파트에 사는 ‘시오미’. 매일 출장가 있는 남편의 부재로 외로움에 지친 그녀는 옆집에 사는 15살 연하의 소년을 사랑하게 된다.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 ‘로미’를 정말 정말 진심으로. 무신경한 남편과 그렇게 좋던 연애 초기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 터질 것만 같은 사랑의 실체를 15살 연하의 핏덩이처럼 어린 소년에게 느끼다니. 그녀는 이 아이러니한 부조리에 대해서 스스로 난감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가게 된다.


지독하게 보수적인 사람이 읽는다면 다소 엽기적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웃집 남자들과 오묘한 관계를 맺는 그녀, 지독히 게으르며 자기만의 세계라는 선을 긋고 누구도 그 속으로 침범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녀. 그러나 작가는, 15살 연상의 남자는 괜찮다고 여기면서 15살 연하의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의 시선을 오히려 냉엄하게 꾸짖는다. 미성년자를 탐하면 물론 범법행위이지만, 나이라는 장벽을 넘어 우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라는 광범위한 범위의 수용성인 것이다. 찬반의 여론이 강한 특성을 이용하되, 은근한 찬성의 뜻을 내비치게 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둔 감옥에서 힘겨워하는 주인공 시오미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무기력하게 하루 하루를 주인에게 사료를 받아먹는 고양이처럼 연명하기 보다는, 스스로 그 성을 탈출해서 좀 더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더라면 어땠을까. 남편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더라면 루피오라는 금단의 사랑을 넘보게 되는 일도 애초에 없지 않았을까. 여자의 일생이 다소 서글프게 그려졌지만, 기묘하게 사람을 이끄는 유혹에 대해서 섬세하게 표현 한 것 같아서 많은 공감이 가는 소설이다. 지푸라기처럼 축축 늘어져 사는 한가한 주부들이 읽는다면 색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웃집 소년을 탐하는 행위는 철창 감이므로 각별히 조심할 것~! 흐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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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달리기
니꼴라 레 지음, 이선영 옮김 / 지향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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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남자들

  아슬아슬하다. 위태롭다. 뭔가 큰일을 저지를 것 같기도 한데, 오히려 폭풍전야의 밤처럼 잔잔한 그들의 행로가 더욱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안정되지 못한 이 방황의 정체는 무엇일까? 소위 서른을 넘겨 마흔으로 달려가는 남자들의 복잡다단한 감정의 이분법칙을 폭로하고 싶었는지 작가 ‘니꼴라 레’의 「서른 살의 달리기」는 ‘서른의 남성’이라는 주제의 다섯 명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고 있다.
 
  문장이 매우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그래서 한 문장이라도 대충 읽고 넘어가면 다음 문장이 제대로 이해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원래의 호흡대로 책을 읽어나가다가 문득 ‘왜 이렇지?’라는 물음표가 머릿속에 달려 다시 앞부분을 읽기 일쑤였다. 작가는 단 한 줄의 문장 속에 매우 많은 의미를 담아둔 듯하다. 대충 읽어버린다면 30분이면 족할 분량을, 꼼꼼히 생각해서 읽어본다면 하루 이상 걸릴 수도 있는 책. 매우 특이하고, 어지러운 문장과 앞 뒤 연결의 부자연스러움이 가끔은 다소 불안정하기도 하다. 이해를 목적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 그저 그 상황이 주는 느낌만을 안고 가야 할 것 같은 약간은 난해한 분위기의 책이다.

  다섯 명의 프랑스 남자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인데, 하나 같이 타인으로 인해 본인의 상처를 상기시키게 된다. 사랑에 아파하고 절망해야만 하는 그들. 푸르른,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한 이십대의 젊음은 지나가고 마흔 줄을 바라보는 서른의 그들은 하나 같이 육중하게 아파하고 있다. 이성에 눈을 뜨고 본능이라는 욕구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울타리는 족쇄처럼 묶여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불꽃처럼 강하게 터져 나오는 누군가에 대한 강한 갈증은 여전히 그들을 살아있게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고, 남성을 움직이는 자극제가 된다. ‘왜’냐는 물음조차 무의미한, 삶의 윤리대로 흘러가고 마는 타인에 대한 집착과 환멸과 감정의 기쁨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야 이러한 감각이 사라져버린 메마른 심장을 가지게 될까? 인간이 살아가는 한은 영원히 지속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도 분명 겪고 있거나 겪었을 때, 삼십대의 남성들의 공허한 가슴에 대해서. 한없는 외로움에 대해서. 또한 바보처럼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삶이 이어지는 한 계속 달려야만 하는 사랑이라는 미스터리한 릴레이에 대해서. 말도 안 되게 어린 소녀에 대해 묘한 감정을 품고, 이혼한 아내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고, 스크린에 등장하는 젊은 여자를 동경하고,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들의 속절없는 고통스러움에 대해서.

  사랑과 성에 지독히도 개방적인 프랑스인들의 문화가 낯설기도 하지만, 언제나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장 이야기’에서 장과 그녀의 딸이 나누는 대화에서 특히나 그런 면을 많이 발견했다. 딸과 같은 나이의 여배우에게 빠진 아버지에게 그녀를 사랑하냐고 당돌한 질문을 하는 딸. 마침내 그렇다고 대답한 아빠의 목소리에 딸은 이런 말을 한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하는 데까지 해 봐. 그게 해야 할 일이겠지. 사람들이 뭐라 하던 운명을 걸고 한번 해보는 거야. 114p’

  이게 바로 정답이다. 그녀, 혹은 그를 사랑한다면 하는 데 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구덩이에 빠지고 진창에서 허우적대고, 심지어 정신병동에 수용될지라도, 그것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마지막을 멋지게 올인하는 수밖에. ……그것이 사랑이고, 인생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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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북스 퇴사 후원회 1
브라이디 클라크 지음, 이수정 옮김 / 세계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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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여성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난 타고난 매력적인 미모의 여성, 일에서도 성공하고, 백마 타고 달려온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남자친구까지. 흔한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언제나 전 세계 수많은 여성들을 열광시키고 환희에 젖어들게 만든다. 태초에 성별의 구분이 있기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의 로망은 오직 하나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멋진 부모와 친구, 그리고 근사한 남자친구를 가지는 것.

  「그랜트북스 퇴사 후원회」 역시 뉴욕에서 고군분투 살아가는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클레어 트루먼’은 책을 사랑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자신 역시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은 출판사 에디터로 일하게 되는 발랄한 20대 여성이다. 일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심에 대형 출판사인 그랜트북스에 스카우트 제의에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일생일대 가장 치명적인 상사 ‘비비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비안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사이코틱한 성격의 소유자로, 평상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미모의(어울리지 않게도) 출판사 거물이다.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그녀 밑에서 근무하는 에디터들은 늘 파김치가 되도록 일을 해야 하고, 욕을 먹어야만 했다. 어딜 가나 저란 사람 꼭 하나씩 있다며 피식 웃어버리기엔 비비안의 성격이 제법 살벌하다. 오죽하면 그랜트북스를 퇴사한 직원들이 스스로 모임까지 만들게 되었겠는가?
 
  전형적인 뉴욕 여성의 삶을 그린 발랄한 트렌드 소설이다.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노력하면서, 우연히 찾아든 멋진 남자들과 묘한 삼각관계에 빠져드는 주인공. 그녀를 힘들게 하는 악의 근원(비비안)이 있는가 하면, 그녀의 모든 하소연을 수용해주는 베스트프렌드(베아) 역시 존재한다. 힘겨움에 쓰러질 듯해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는 운명의 상대까지. 아,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도대체 클레어는 무슨 복을 타고 나서 이렇게 호방이 넝쿨째 마구마구 굴러 들어오는 걸까? 부러움에 지친 나머지 배가 아플 지경이다. 그리고 명품으로 몸을 휘감겨 주는 약혼자를 두고, 진정한 사랑은 왜 꼭 결혼식 날 깨닫게 되는 건지. 진부하기로 치면, 6주 전에 키스했던 그 남자를 못 잊어 결혼 당일 진정한 사랑에의 목마름을 깨닫게 되는 그녀가 최고일 것이다.

  책을 좋아하기에 출판사에 대한 상세한 뒷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사이코틱한 상사 비비안의 이야기밖에 없어서 다소 실망을 했다. (그나마 총 20회에 달하는 목차에 나온 명작들의 간결한 소개에 만족하는 수밖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얼추 비슷한 내용으로 보면 될 듯하다. 무수히 등장하는 명품 브랜드에 눈이 휙휙 돌아간다. 미국 사람들의 쿨한 사고방식 역시 여전히 나를 흥분하게 하지만, 아마도 그녀의 절반만큼의 행운도 나에겐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뻔한 사실에 쓰디쓴 좌절감을 맛보게 됨은 어쩔 수 없나보다. 나 역시 샤넬 드레스를 입혀주며 페라가모 구두를 신겨주고, 다사키 진주 목걸이를 선물해주는 남자를 환영하는 허영심만 가득 들어찬 여자는 아니지만, 루크 같은 남자를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좌절 할 수밖에. ;; 그러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선택의 감각을 배우고 싶다. 그녀로부터.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할 내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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