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과학이 발견한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와 진화심리학의 관점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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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의 이름을 알린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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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쓴 단편소설 중에 미간척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아마 제목은 몇 번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제목은 미간척이다. 이 또한 왼쪽의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의 내용이 가리키듯 복수에 대한 소설이고, 또한 옛이야기에서 따온 내용이었다. 사실 이미 시놉시스가 짜여있으면 - 옛날 이야기에서 따오게 되면 아무래도 내용이 익숙할 수 밖에 없다 - 내용이 익히 예상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진부할 수도 있으나, 루쉰은 과연 루쉰인지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소름돋는 필력을 발휘해서 나를 매료시켰었다. 호이 호! 자객이 음산하게 외치는 소리는 당시 여행 중이던, 그것도 서서 기차에서 책을 읽던 나에게 다리 통증을 신경도 안쓰게 만들었었다. 과연 왼쪽의 책도 그정도의 필력을 보여줄지, 문득 미간척이 생각나서 추천해본다.

 

 

 

 

나름 셜로키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셜로키언 찌끄래기 정도는 되는 나로써는 이 책을 지나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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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근래 꽤 큰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런 행사에 지원을 나갈때마다 사실 난 뭔가 묘하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깐 말장난같지만, 나는 분명 이 행사에서 필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행사에서 필요한 사람이 꼭 내가 될 필요는 없는 거다. 이런 행사에 출입증찍고 검색받고 들어가면, 순간 약간 우쭐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솔직한 심정이지만, 동시에 바로 위에 썼던 말처럼, 이 행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면 다시금 회의감이 든다. 저 행사에는 내 자리가 없다. 내 자리가 아닌 수많은 동일한 업무를 보는 인력의 자리만 있을 뿐이다.

 

하프 라이프, 라는 게임이 있는데 거기서 아리송한 역할로 나오는 - 때로는 주인공을 돕고 때로는 배신하는 - G맨은 주인공인 고든 빠루맨(이 게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피식 웃어주길 바란다), 아니 고든 프리맨을 보고 right man in the wrong place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가 된 기분이다. wrong man in the right place. 여기엔 내 자리가 없다.. 나는 이  어떻게보면 엉뚱한 사람인거다. 나는 분명 필요한 사람이지만, 필요한 사람이 꼭 내가 될 필요는 없다.

 

우울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요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다. 저 행사에서 내 역할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영어를 그만둔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손짓발짓과 서투른 영어발음 - 아, 옛날에는 그렇게 영어를 잘하던 나였건만! - 으로 중얼거리는게 역할이었다면 역할이었달까. 다행히 이런 나를 보조하기 위해서 조직위원회에서는 스탭 한 명을 파견해서 혹시나 영어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을 경우 원활하게 소통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이틀 정도 행사에 있었는데, 그새 같이 일하던 스탭이랑 그럭저럭 친해지게 되었다. 이틀씩이나 방에 같이 앉아있으면 심심해질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보면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친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침묵은 좋아하지만 지루함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 상대방이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존중하겠지만, 상대방도 이야기를 즐긴다면 상대방에게 아예 악감정이 없는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더욱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이런 국제 행사에 스탭으로 참가하게 된 사람이라면 분명, 목표가 뚜렷한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 스탭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원래 모 병원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그만두고 나왔다던가. 이부분 저부분 자기검열로 다 자르다보니 갑자기 글이 뚝 끊기지만, 어쨌든 요지는 그거였다. 제법 안정적인 직장이었고, 그대로 지낸다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걸 그만두고 뛰쳐나왔다. 이는 물론 나이도 큰 역할을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취업을 못한 다른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면, 그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미래에 뛰어드는 것은 어려웠을텐데도, 그래도 그 스탭은 그렇게 뛰어든거다.

 

아마 위의 이야기뿐이었다면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지는 않을텐데, 이번에는 고등학교 동기 녀석의 이야기이다. 이 녀석도 그럭저럭 괜찮은 모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의 모 대학 물리학과를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하다가 모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를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서 때려치우고 나와서 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 나이도 있는데 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그렇게 불확실한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걸까? 위의 스탭도 그렇고 이 친구 녀석도 그렇고, 나라면 거의 택하지 않을 길을 향해서 자신을 서슴없이 던져놓았달까.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가능성만으로는 요즘 세상에는 부족하다. 아직 세상에는 직장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거나, 구했더라도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너무나 많고, 대학교의 어느 과를 나오더라도 미래는 뿌옇다. 정말 몇 안되는 그런 전문직을 찍어내는 과들, 그런 과들이 아니고서야 단단히 기반을 잡기란 힘든 일이다. 이과 중에서도 자연과학대학도 힘들고, 공과대학이 그나마 취업이 잘되는 편이라고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지방대에서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며, 문과는 더욱 더욱 더욱 취업의 문이 좁다.

 

나는 거의 인터넷서핑을 안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내 시선에 걸리는 짤방들이 있다. 그 짤방들에서는 젊은이들이 너무 눈이 높다, 눈을 낮춰서 중소기업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성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멋모르는 소리 하지말라며, 우리 나라의 실업률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냐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6수를 하고, 어떤 사람은 7년째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의학전문대학원을 가겠다고 준비하고, 어떤 사람은 약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의욕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젊은이들 스스로가 잘 모르기 때문에, 충분히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장을 구할때는.. 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패기넘치는 젊은이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들은 적 있다. 어딜 가더라도, 어떤 상황이더라도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 잘 될 수 있지 않냐, 하면서.

 

무엇이 옳은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정말 본인이 열심히 하면 무언가 길이 생길까?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저런 문제들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취업이 힘들다, 힘들다 이야기를 듣기는 듣지만 나 스스로는 당장 무언가 내 폐부에 찌를듯이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 될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이야기할 수 있다. 누구 한명이 직장을 구했다는 것은 누구 한 명은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입시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이는 사회 구조의 문제다. 떨어진 사람이 자격이 없어서 떨어진 게 아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왜 도덕인가, 에서 샌델이 반복하는 예시들이 몇 개 있는데, 샌델 본인이 공동체주의 이론가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깊게 새겨볼 만한 것들이 있다. 샌델이 논증한 바에 따르면 거칠게 말해서 justice가 꼭 good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가 되며, 이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대학 입시에서 자격을 갖춘 수많은 학생들이 커트라인을 넘지 못하는 것justice또한 소수민족우대정책에 따라good 허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더 확장해서 이야기해보면, 샌델의 합목적성 논의는 빼버리고, (사실 샌델의 합목적성 논의가 샌델의 주장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논리만 살펴보자) 입시든 그 어느 경쟁체제든, 당신이 그 체제에서 실패했다는 것이 당신의 가치가 낮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인데, 사실은 아직도 가끔씩 너무나 가슴이 아플때가 있다. 몇 번이고 이 서재에서 등장했던 그녀이야기인데, 그녀는 이직을 하고 싶어했다. 자신은 여기서 평생 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평생 살게 되면 어쩌죠? 토끼처럼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야기했었다. 나는, 내가 옆에 있을거라고, 내가 이 근처에서 직장잡아서 결혼해서 같이 살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지내면 되리라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근처에서 직장을 잡는다, 라는 결정자체가 나에게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 그때는 마법이라도 걸렸었는지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했고, 어정쩡하게 사회에 한 발을 딛고 있었고,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한채 흔들리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내가 하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학문으로서는 좋아하지만, 그 과정들은 사실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학문만 연구할 수 있다면 차라리 좋을텐데도, 그렇게 되면 사실 또 먹고 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에게 그당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하자. 나는 그녀를 서포트하자. 그렇게까지 내가 내 일을 꺼려하는 것도 아니니까, 내 꿈은, 사실 행복하게 사는게 꿈이니까. 업적이든 뭐든, 그런건 다른 사람들이 해주겠지, 안그래? 그래서 사실 어디에서나 직장을 구해도 좋다고 - 생각했었다.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직장을 구하고 쉽게 이직을 하여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다. 그게 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가끔 만나서 - 소개팅으로 만난 적 있는데 - 이야기해보면 그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인생 뭐 한번 살잖아요,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아야지. 굉장히 자신감이 강했던 것 같다. 속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또 박력있는 여자한테 약해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왠지 나도 그 힘을 나눠받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나는 저런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한번도 마음속 깊이 납득하지는 못했고, 진심어린 손을 내밀지 못했다. 결국 그 관계는 허세로 가득찬 관계가 되어갔었다.

 

나는 아이러니를 많이 느낀다. 좋은 학벌, 똑똑한 머리, 분위기 잘읽기, 그런 것들을 모두 가졌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일이 잘 안풀리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응해서 살아간다. 어쩌면 저런 것들이 모두 갖추어졌더라도 약한 사람에게는 쉽게 운이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가장, 그리고 계속 생각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생각날 사람은 나만큼이나 약했던 사람이다. 눈부시게 빛난던 상대보다는 붙박이별처럼 덜덜 떨면서 우주공간에서 깜빡거려서, 그만큼이나 깜빡거리던 내 빛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던 상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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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4-26 01:01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장에 담긴 가연님 마음이 참 좋아요.

한수철 2015-04-26 01:26   좋아요 0 | URL
˝당신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실은 취중인데, 이 문장만큼은 명약관화하게 꽂히는 구먼요.

음, 한두 번 댓글을 주고받은 기억이 나는 만큼,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ㅎ

잘 읽었습니다.^^

몬스터 2015-04-26 16:23   좋아요 0 | URL
끄덕이면서 잘 읽었습니다. 길게 보면 자석처럼 ,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끌여 당겨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더라구요. 결혼할 분을 향한 마음이 참 고와요.

가연 2015-04-27 07:09   좋아요 0 | URL
음.. 헤어졌고, 잊지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 뭔가 죄송하네요. 가끔 너무 뭔가 주절거리고 싶을때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어요, 쓰고 또 후회해요.

다락방 2015-04-26 19:07   좋아요 0 | URL
아, 역시 가연님이에요.

테레사 2015-04-27 11:45   좋아요 0 | URL
가연님, 여전히.....^^..저도 마음이 어지럽고 서글플때,...우울감이 밀려올때 서재를 헤매고 있더군요..그게 그렇게라도 해야 위안이 되는 양, 말이에요...모두가 지나간다고 말하지만, 역시나 지나가지 않는 것들이 있더군요...그게 가연님에게 그것이듯, 저에게도 그런 게 있듯이...

아무개 2015-04-27 13:27   좋아요 0 | URL
깜빡깜빡....

2015-04-2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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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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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는 평점을 매우 너그럽게 주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마지노선이라면 마지노선이라고 불릴만한 무엇인가가 있긴 있다. 별 네개. 그러니깐 5점만점에 4점. 거의 대부분의 책들에 대해서는 4점을 주는 편이다. 바꿔 말하면 5점은 정말 좋아하는 책에 주는 것이다. 내 서재의 평점을 믿지 말라. 매우 주관적인 평점이고, 이 서재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거의 대부분의 과학분야, 특히 하드 사이언스 계열의 책에 두꺼운 천페이지가량 되는 책들은 거의 5점을 주는 편이다. 인문 계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나는 기본적으로 천페이지가 되는 책들은 4점을 깔고 시작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평점 매기기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뭐? 이 서재는 내 서재고, 내가 무슨 직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 자유롭게 끄적-거리려고 노력하지만, 수많은 자기검열때문에 끝내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곳이기에, 이런 조그만 자유는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굳이 조금만 사족을 붙이자면, 아무리 뻘소리라도 천페이지를 아무렇게나 채울 수는 없다. 물론, 아예 방향을 잘못잡은 책이라면 정말 가끔가다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천페이지 중 정말 일부는 그럭저럭 괜찮은 내용이 섞여있다.

 

물론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아닌 한, 뻘소리와 괜찮은 내용을 구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러다보면 대개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치우게 된다. 그리고 별점을 깎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한 책을 다 읽고 평점을 매길때에는 관련되는 책을 같이 읽고, 어떤게 옳은 것인지 나름 판단을 내린 뒤 내리면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의 영향으로 선택의 수준이 유전자라고들 많이들 알고 있지만, 집단 선택설에 관한 논문과 책을 읽어보면 생각보다 아예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칼 세이건이 자신의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에서 이기적 유전자론에 대하여 소심한 반항을 하는데, 사실 이기적 유전자론에서 본다면 칼 세이건은 매우 그릇된 오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 또한 칼 세이건이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그 칼 세이건이 정말 이기적 유전자를 이해를 못했을까? 그걸 이해하지 못한게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물론 열정적으로 이런 것을 권할 생각은 없다. 자신의 독서인생은 자신이 꾸리는 것인데, 내가 뭐하러 남의 독서에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겠는가. 사실 쓰다보면 이렇게 흥분해서 끄적거리지만, 또 얼마지나지 않으면 귀찮아지게 된다. 내가 신간평가단을 안한다면 아마 글을 거의 안쓸 것이다. 솔직히 내가 당장 하루 하루 꾸려나가기도 바쁜데. 아마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공이 깊은 사람들이 비단 인터넷 뿐만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도 수면 밑에 잠수해서 잠들거나 하고 있으리라.

 

그런데 소설 분야에 한 발을 걸치게 되면서 약간 그런 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긴 하다. 내가 요 몇년간 5점을 준 책들을 다합쳐도, 최근 요 몇달 만점을 준 책들 갯수랑 차이가 없다. 사실 내가 신간 평가단을 하면서 쓰려고 했던 방향은 요런 방향 http://blog.aladin.co.kr/760670127/7108252 

이었고, 저 링크를 따라가보면 알겠지만 어설프게나마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요근래 내가 쓴 글은 저런 방향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소설 본연의 가치, 아니 좀 더 말하면 그림과 사진과 여행의 차이에 가까울 것이다.

 

사진과 그림은 현실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고, 영영 그 현실에 가닿을 수 없는 공허를 당신의 마음에 남긴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여행을 통해서 그 현실에 도달한 순간 당신의 공허는 현실에서 받아들이는 인상과, 거기서 가공된 관념을 통하여 채워지게 된다. 그러니깐 여행가서 당신의 두 눈으로 열심히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사진만 찍는 사람들은 헛여행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사진은 부차적인 것이다. 당신의 안구에 뙇하고 광자가 부딪혀서 시신경으로 전달되어 전위차를 일으켜 뇌로 향하는 그 상황이 당신에게 진짜인 거다. 물론 상상으로도 당신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시신경에 도달하는 광자가 없고 그저 기준 준위 뿐이니, 당신의 마음 속의 커다란 구멍은 채워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소설도 마찬가지다. 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냥 보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여기의 어딘가에 이성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데이비드 흄을 인용했던 것 같다. 결론은 여튼 중요한 것은 감정이고, 이성은 그저 거들뿐, 이라는 거다. 백날 논리를 통해서 논파해보라. 논파당한 사람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는지. 이해는 무슨, 다음에는 다른 증거를 가져와서 당신을 이기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당신이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무라카미 류의 소설도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몇 권 안읽어봤다. 잠깐 몇 권 나열하자면, 식스티나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코인 로커 베이비. 식스티나인은 좀 발랄하다고 치더라도, 다른 두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작가 좀.. 읽기 거북한 작가인 것은 사실이다. 섹스, 폭력, 건조한 문체 등등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난 솔직히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다. 식스티나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제목을 보자마자 참 중의적인 제목이구나 라고 떠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책도 보자마자 발랄한 표지와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55세 이후의 성생활을 다룬거 아니냐고 의심했다.

 

그런데 왠걸, 무미건조한 야설이나 봐야지 - 그래, 나한테 무라카미 류의 이미지는 이런 느낌이었다 - 하는 심정으로 첫 몇 페이지를 넘겼는데, 이렇게 수작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식스티나인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의 두배, 아니 세배의 충격이랄까. 이 글을 쓴 사람이 정말 무라카미 류가 맞아? 하고 저자를 다시 쳐다보기를 두 번이나 했으니 말이다. 역시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이렇게 바뀌는 걸까?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은 말그대로 55세 이후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실직을 하거나 명예퇴직을 했고 결과적으로 직장이 없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어떻게 다시 삶의 기력을 가져가는지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는데, 글들이 대부분 호흡이 빠른 것은 아마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들이었기에 그럴 것이리라. 그리하여, 55세부터 헬로 라이프,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조금 다른 측면을 환기시키고 싶은데, 사실 저 서사구조, 실직하거나 기타 이유로 삶에서 유리된 상태의 사람이 -> 어떠한 계기를 만나서 -> 다시 삶에서의 희망을 가진다, 라는 구조는 비단 주인공의 나이가 55세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주인공의 나이가 20세든, 30세든 소설의 구조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측면이다. 류의 전작들을 - 앞서 말했다시피 많이는 읽지 않았지만 - 살펴보면 의외로 이 구조가 그대로 적용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깐 류는 사실 바뀐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옛날부터 해오던 글쓰기를 조금더 온건하고 실생활에 밀접한 소재로, 말하자면 독자 프렌들리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한 것 외에는 주제면에서는 동일하다. 부연설명하자면 대부분의 그의 소설은 마지막의 다시 삶에서의 희망을 가진다, 단계를 괄호로 묶어두는게 옳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환기시키고 싶은 부분은 이런 부분이다. 20대의 청년 실업 부분이랄까. 사실 작가의 고국에서도 분명 취업은 쉬운 것이 아닌데, 단지 주인공이 55세였을 뿐이며, 이 55세를 20세로 바꾼다면 이 또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의 청년실업을 순간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효과도 있다. 아마도 이런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전에 류가 자극적이고 건조한 글쓰기에서보다 조금더 나아진 부분이 있으리라는 판단이 든다.

 

그래서 이 책도 5점!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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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4-21 23:04   좋아요 0 | URL
솔직히 아직 이 소설 읽기 전인데, 5점 주셨다니 상당히 기대하게 되는군요. 그러나저러나 저도 무라카미 류 소설 읽는 건 참 오랜만입니다.

낭만인생 2015-04-22 10:04   좋아요 0 | URL
저도 평점은 좋은게 주는 편인데... 고민이 되는 글입니다.

아무개 2015-04-22 13:26   좋아요 0 | URL
˝결론은 여튼 중요한 것은 감정이고, 이성은 그저 거들뿐, 이라는 거다. 백날 논리를 통해서 논파해보라. 논파당한 사람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는지. 이해는 무슨, 다음에는 다른 증거를 가져와서 당신을 이기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당신이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크!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글에 꽂혀갑니다^^

다락방 2015-04-22 14:36   좋아요 0 | URL
위에 아무개님 댓글에 동의합니다. 좋으네요 가연님.
반갑고요.
:)

류는 제게도 야설(?)의 이미지라서(뭔가 원조교제에 대한 책이었는데 거기에서 되게 노골적 묘사가 놔왔었고 그제 잊혀지질 않아요..) 저기 저 바깥에 둔 작가였는데, 이 책에 대해서라면 다들 호평이네요.

희선 2015-04-23 00:0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376쪽이군요 이런 걸 보고 오다니... 이 책은 예전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군요 무라카미 류 책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어느 때든 살아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른 데서 들은 말인데, 누군한테나 앞날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 좋지만 정말 그럴까 싶기도 합니다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네요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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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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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론을 통하여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 무신론 운동의 전위에 선 - 사람은 전투적 무신론militant atheism을 주창한 리처드 도킨스이리라. 그러나 개인적으로 무신론자들 중에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대니얼 데넷이다. 도킨스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진영에 들어가서 전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면, 대니얼 데넷의  논증을 보면 상대방을 어떻게든 자신의 진영에 끌여들여서 공격한다. 아무래도 상대방의 진영에서 싸우게 되면 그야말로 '학부 1년생이 어설프게 배운 종교 지식으로' 공격한다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아지지만, (어느 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자네는 무신론자가 될만큼 종교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네' 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진영에 - 데넷의 경우에는 분석철학의 전통을 이었다고 보는게 옳겠다. 그의 지향성 개념은 유물론적 제거주의의 연장선에 위치하니 말이다. - 끌여들여 공격한다면 이쪽에서 도리어 '공부 좀 하시지?' 라고 말할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만큼 종교에 대해 깊이 알면서 아직도 무신론자가 아니냐? 라고 받아칠 수 있다.)

 

앞서 지향성, 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개념인데, 더욱 이해하기 쉽게 진화론과 연관지어 논의를 진행한다면, 진화적으로 보았을때, 상대방이 의도나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 사자가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자가 당신을 언제라도 잡아먹기를 바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사자가 당신을 잡아먹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사자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사자가 당신을 잡아먹기를 바란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사자가 눈치채기를 바라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지향성 개념은 언어적 지향성과도 연계되어, 인간의 고유한 특질 - 동물실험에서는 이런 지향성이 3차 이상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이런 지향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교를 발달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향성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으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먼저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 자발라위에서부터 아라파에 이르기까지, 책 소개에도 나와있는 부분이니 내용 누설을 신경쓰지 않고 말하자면, 자발라위는 신(아브라함 종교의 야훼), 장남은 루시퍼, 막내 아드함은 아담, 자발은 모세, 리파아는 예수, 까심은 무함마드, 그리고 아라파는 과학의 발전, 과 대응된다. 이게 괜히 이렇게 해석하는게 아니라, 너무 모티프를 노골적으로 가져왔기에(읽어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라고 작가가 아예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자발에서 아라파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소설 내에서 '자발라위를 직접 만나는 묘사' 를 가지지는 않는다. 아드함은 자발라위의 아들이니 - 야훼가 아담을 창조했듯 - 어쩔 수 없이 자발라위와 만나는 부분을 소설로 그려내었지만 말이다.

 

자발라위를 직접 만나는 묘사를 그리지 않았다, 부연하자면 자발은 사람들 앞에서 사막에서 자발라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리파아 또한 벽에 기대어 있다가 자발라위의 음성을 들었다고 사람들에게 주장하며, 까심 역시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소설을 썼을까? 작가는 사실 자신이 원하면 자발라위가 자발이라던가, 리파아를 직접 만나는 모습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안했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소설이 그저 그런 신앙고백같은 소설이 아닌 정말 위대한 소설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들이 사실 자발라위, 그러니까 야훼에 대응되는 존재를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모두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자발라위가 바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지향성이다. 자발라위는 그들 모두의 지향계이고, 그들은 그 지향계를 그들의 행동의 중심에 놓고 자신들의 삶을 바친다. 그 대가는 자발에게는 결국에는 부귀영화였고, 리파아에게는 죽음이었으며, 까심의 경우에도 부귀영화였다. 그런데 왜 자발라위를 지향계로 놓는 것이 이 소설을 위대한 소설로 만들까?

 

자발라위라는 존재, 에 대해서 작가는 사실 어떤 입장인지 종잡을 수가 없지만, 적어도 위의 입장을 따를때에는 내 눈에는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듯 하다. 왜 자발라위는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의 불의를 없애지 않는가? 왜 사람들이 '자발라위' 라고 외칠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가? 물론 소설가 나름의 답은 있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바꿔 말하자면 스스로를 속이고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이 할 일은 아니며 물론 작중의 자발라위는 신이라고 직접적으로 표상되지는 않기에 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잘봐줘도 귀찮다, 라는 태도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자발라위 자체를 지향계로 (본의아니게)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종교철학에 대한 논의를 선취한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신을 신으로 보지 않고 하늘 위의 자리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단 말이다.

 

자발라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있는 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치고 내 말을 들어보라

 

지상에 떨어진 신은 더이상 신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이윽고 마지막 장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실 그가 죽기 전에도 이미 사람들은 마지막의 아라파, 의 장에서 아라파가 개발한 마법 - 이라고 보기에도 사실 조악한 폭탄 - 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폭탄은 잘못된 자에게 넘어가서 도리어 압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게 되지만 사람들은 또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이 마법으로 다시 압제를 몰아낼 수 있을테니까. 이제 신화의 시대는 갔고 마법의 시대, 아니 과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발라위가 자신의 종을 시켜 긍정하였듯' (아라파는 자발라위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여겼지만, 자발라위는 나중에 하녀를 보내 자신의 죽음은 그와는 관련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신이 인정한 합법적인 만인의 압제에 대항하는 수단이다.

 

얼핏보면 신이 죽는다는 서사는 니체와 연관있어보이지만, 니체의 신은 춤추다가 눈물에 빠져죽어버렸다면, 여기의 신은 담담하게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다. 작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신이 허용한 부분이라는 주장을 내보이고 있는 부분이 있으니 니체의 철학의 경향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으리라.

 

A rose is a rose is a rose a rose.

 

거트루드 스테인의 시의 한 구절로 기억한다. 지향계로 신을 해석한다고 해서, 신이라는 용어가 어떤 믿음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할 이유는 - 물론 나는 여기서 다른 무신론 철학자들과 다른 입장에 선다. - 없다. 여전히 저런 식의 문장을 보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어딘가 깊숙한 곳에 언어 너머의 무엇인가를 발견하며 웃음을 짓는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에서는 과학을 대표하는 아라파에게 자발라위가 웃음을 짓는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 없다.

 

우리는 영겁의 시간이 흘러 겨우 인간으로 바로 섰다. 우리는 한 때 수풀이었고, 새였으며, 바다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에 지나지 않던 존재였으나, 무수한 진화와 자연선택에 힘입어 계통수의 한끝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없는 물고기들이었다면 도리어 고독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능력이 있었을테니 맹목적인 믿음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된 우리는 도리어 인간이고, 말이 생겼고, 의식이 발달했기에 종교적인 신앙이 생겼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오귀스트 콩트, 가 삼단계 법칙을 주장했듯, 종교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벗어나 과학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 물론 콩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은 아니다. 바로 전단계에서 제기한 모든 물음을 그 다음 단계가 포괄할 수는 없었기도 하거니와, 과학기술이 많이 발달했다고 일컫는 오늘날까지도 해결조차도 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걸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듯, 어떠한 방식의 압제라도 우리 손으로 뒤엎는 무기가 될 것이기에.

 

 

 

나는 일찍이 소년이고 소녀였다.

수풀이고 새였다.

바다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였다.

 

- 엠페도클레스, 정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s.1. 개인적으로 엠페도클레스를 상당히 좋아한다. 논증의 엄밀함이나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따지자면 파르메니데스를 더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겠지만.. 결국 엠페도클레스가 한 것은 그냥 종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한 사원소설이 바슐라르에게 영감을 줬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니겠는가.

 

 

 

p.s. 2. 과학에 대하여 사실 과학도 문제점이 있지 않느냐, 등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텐데, 과학철학 및 구성주의에 관련된 논쟁에 대해서는 나도 그럭저럭 알고 있는 편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지만.. 사실 막상 쓰려니 귀찮기도 하다. 우울하지만 이런게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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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11 00:54   좋아요 0 | URL
동물이나 식물은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하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남과 세계를 보고 자신과 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좋지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할 때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는 신에 의지하기도 하죠 가짜 신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군요 아니 지금 생각하니 신이 진짠지 가짠지 이것도 알 수 없군요 어떤 큰힘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신일지 그저 우주 법칙일지...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