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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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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론을 통하여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 무신론 운동의 전위에 선 - 사람은 전투적 무신론militant atheism을 주창한 리처드 도킨스이리라. 그러나 개인적으로 무신론자들 중에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대니얼 데넷이다. 도킨스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진영에 들어가서 전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면, 대니얼 데넷의  논증을 보면 상대방을 어떻게든 자신의 진영에 끌여들여서 공격한다. 아무래도 상대방의 진영에서 싸우게 되면 그야말로 '학부 1년생이 어설프게 배운 종교 지식으로' 공격한다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아지지만, (어느 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자네는 무신론자가 될만큼 종교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네' 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진영에 - 데넷의 경우에는 분석철학의 전통을 이었다고 보는게 옳겠다. 그의 지향성 개념은 유물론적 제거주의의 연장선에 위치하니 말이다. - 끌여들여 공격한다면 이쪽에서 도리어 '공부 좀 하시지?' 라고 말할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만큼 종교에 대해 깊이 알면서 아직도 무신론자가 아니냐? 라고 받아칠 수 있다.)

 

앞서 지향성, 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개념인데, 더욱 이해하기 쉽게 진화론과 연관지어 논의를 진행한다면, 진화적으로 보았을때, 상대방이 의도나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 사자가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자가 당신을 언제라도 잡아먹기를 바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사자가 당신을 잡아먹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사자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사자가 당신을 잡아먹기를 바란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사자가 눈치채기를 바라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지향성 개념은 언어적 지향성과도 연계되어, 인간의 고유한 특질 - 동물실험에서는 이런 지향성이 3차 이상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이런 지향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교를 발달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향성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으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먼저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 자발라위에서부터 아라파에 이르기까지, 책 소개에도 나와있는 부분이니 내용 누설을 신경쓰지 않고 말하자면, 자발라위는 신(아브라함 종교의 야훼), 장남은 루시퍼, 막내 아드함은 아담, 자발은 모세, 리파아는 예수, 까심은 무함마드, 그리고 아라파는 과학의 발전, 과 대응된다. 이게 괜히 이렇게 해석하는게 아니라, 너무 모티프를 노골적으로 가져왔기에(읽어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라고 작가가 아예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자발에서 아라파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소설 내에서 '자발라위를 직접 만나는 묘사' 를 가지지는 않는다. 아드함은 자발라위의 아들이니 - 야훼가 아담을 창조했듯 - 어쩔 수 없이 자발라위와 만나는 부분을 소설로 그려내었지만 말이다.

 

자발라위를 직접 만나는 묘사를 그리지 않았다, 부연하자면 자발은 사람들 앞에서 사막에서 자발라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리파아 또한 벽에 기대어 있다가 자발라위의 음성을 들었다고 사람들에게 주장하며, 까심 역시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소설을 썼을까? 작가는 사실 자신이 원하면 자발라위가 자발이라던가, 리파아를 직접 만나는 모습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안했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소설이 그저 그런 신앙고백같은 소설이 아닌 정말 위대한 소설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들이 사실 자발라위, 그러니까 야훼에 대응되는 존재를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모두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자발라위가 바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지향성이다. 자발라위는 그들 모두의 지향계이고, 그들은 그 지향계를 그들의 행동의 중심에 놓고 자신들의 삶을 바친다. 그 대가는 자발에게는 결국에는 부귀영화였고, 리파아에게는 죽음이었으며, 까심의 경우에도 부귀영화였다. 그런데 왜 자발라위를 지향계로 놓는 것이 이 소설을 위대한 소설로 만들까?

 

자발라위라는 존재, 에 대해서 작가는 사실 어떤 입장인지 종잡을 수가 없지만, 적어도 위의 입장을 따를때에는 내 눈에는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듯 하다. 왜 자발라위는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의 불의를 없애지 않는가? 왜 사람들이 '자발라위' 라고 외칠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가? 물론 소설가 나름의 답은 있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바꿔 말하자면 스스로를 속이고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이 할 일은 아니며 물론 작중의 자발라위는 신이라고 직접적으로 표상되지는 않기에 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잘봐줘도 귀찮다, 라는 태도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자발라위 자체를 지향계로 (본의아니게)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종교철학에 대한 논의를 선취한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신을 신으로 보지 않고 하늘 위의 자리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단 말이다.

 

자발라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있는 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치고 내 말을 들어보라

 

지상에 떨어진 신은 더이상 신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이윽고 마지막 장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실 그가 죽기 전에도 이미 사람들은 마지막의 아라파, 의 장에서 아라파가 개발한 마법 - 이라고 보기에도 사실 조악한 폭탄 - 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폭탄은 잘못된 자에게 넘어가서 도리어 압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게 되지만 사람들은 또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이 마법으로 다시 압제를 몰아낼 수 있을테니까. 이제 신화의 시대는 갔고 마법의 시대, 아니 과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발라위가 자신의 종을 시켜 긍정하였듯' (아라파는 자발라위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여겼지만, 자발라위는 나중에 하녀를 보내 자신의 죽음은 그와는 관련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신이 인정한 합법적인 만인의 압제에 대항하는 수단이다.

 

얼핏보면 신이 죽는다는 서사는 니체와 연관있어보이지만, 니체의 신은 춤추다가 눈물에 빠져죽어버렸다면, 여기의 신은 담담하게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다. 작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신이 허용한 부분이라는 주장을 내보이고 있는 부분이 있으니 니체의 철학의 경향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으리라.

 

A rose is a rose is a rose a rose.

 

거트루드 스테인의 시의 한 구절로 기억한다. 지향계로 신을 해석한다고 해서, 신이라는 용어가 어떤 믿음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할 이유는 - 물론 나는 여기서 다른 무신론 철학자들과 다른 입장에 선다. - 없다. 여전히 저런 식의 문장을 보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어딘가 깊숙한 곳에 언어 너머의 무엇인가를 발견하며 웃음을 짓는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에서는 과학을 대표하는 아라파에게 자발라위가 웃음을 짓는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 없다.

 

우리는 영겁의 시간이 흘러 겨우 인간으로 바로 섰다. 우리는 한 때 수풀이었고, 새였으며, 바다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에 지나지 않던 존재였으나, 무수한 진화와 자연선택에 힘입어 계통수의 한끝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없는 물고기들이었다면 도리어 고독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능력이 있었을테니 맹목적인 믿음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된 우리는 도리어 인간이고, 말이 생겼고, 의식이 발달했기에 종교적인 신앙이 생겼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오귀스트 콩트, 가 삼단계 법칙을 주장했듯, 종교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벗어나 과학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 물론 콩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은 아니다. 바로 전단계에서 제기한 모든 물음을 그 다음 단계가 포괄할 수는 없었기도 하거니와, 과학기술이 많이 발달했다고 일컫는 오늘날까지도 해결조차도 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걸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듯, 어떠한 방식의 압제라도 우리 손으로 뒤엎는 무기가 될 것이기에.

 

 

 

나는 일찍이 소년이고 소녀였다.

수풀이고 새였다.

바다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였다.

 

- 엠페도클레스, 정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s.1. 개인적으로 엠페도클레스를 상당히 좋아한다. 논증의 엄밀함이나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따지자면 파르메니데스를 더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겠지만.. 결국 엠페도클레스가 한 것은 그냥 종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한 사원소설이 바슐라르에게 영감을 줬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니겠는가.

 

 

 

p.s. 2. 과학에 대하여 사실 과학도 문제점이 있지 않느냐, 등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텐데, 과학철학 및 구성주의에 관련된 논쟁에 대해서는 나도 그럭저럭 알고 있는 편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지만.. 사실 막상 쓰려니 귀찮기도 하다. 우울하지만 이런게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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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11 00:54   좋아요 0 | URL
동물이나 식물은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하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남과 세계를 보고 자신과 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좋지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할 때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는 신에 의지하기도 하죠 가짜 신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군요 아니 지금 생각하니 신이 진짠지 가짠지 이것도 알 수 없군요 어떤 큰힘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신일지 그저 우주 법칙일지...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