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꽤 큰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런 행사에 지원을 나갈때마다 사실 난 뭔가 묘하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깐 말장난같지만, 나는 분명 이 행사에서 필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행사에서 필요한 사람이 꼭 내가 될 필요는 없는 거다. 이런 행사에 출입증찍고 검색받고 들어가면, 순간 약간 우쭐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솔직한 심정이지만, 동시에 바로 위에 썼던 말처럼, 이 행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면 다시금 회의감이 든다. 저 행사에는 내 자리가 없다. 내 자리가 아닌 수많은 동일한 업무를 보는 인력의 자리만 있을 뿐이다.

 

하프 라이프, 라는 게임이 있는데 거기서 아리송한 역할로 나오는 - 때로는 주인공을 돕고 때로는 배신하는 - G맨은 주인공인 고든 빠루맨(이 게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피식 웃어주길 바란다), 아니 고든 프리맨을 보고 right man in the wrong place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가 된 기분이다. wrong man in the right place. 여기엔 내 자리가 없다.. 나는 이  어떻게보면 엉뚱한 사람인거다. 나는 분명 필요한 사람이지만, 필요한 사람이 꼭 내가 될 필요는 없다.

 

우울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요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다. 저 행사에서 내 역할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영어를 그만둔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손짓발짓과 서투른 영어발음 - 아, 옛날에는 그렇게 영어를 잘하던 나였건만! - 으로 중얼거리는게 역할이었다면 역할이었달까. 다행히 이런 나를 보조하기 위해서 조직위원회에서는 스탭 한 명을 파견해서 혹시나 영어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을 경우 원활하게 소통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이틀 정도 행사에 있었는데, 그새 같이 일하던 스탭이랑 그럭저럭 친해지게 되었다. 이틀씩이나 방에 같이 앉아있으면 심심해질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보면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친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침묵은 좋아하지만 지루함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 상대방이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존중하겠지만, 상대방도 이야기를 즐긴다면 상대방에게 아예 악감정이 없는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더욱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이런 국제 행사에 스탭으로 참가하게 된 사람이라면 분명, 목표가 뚜렷한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 스탭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원래 모 병원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그만두고 나왔다던가. 이부분 저부분 자기검열로 다 자르다보니 갑자기 글이 뚝 끊기지만, 어쨌든 요지는 그거였다. 제법 안정적인 직장이었고, 그대로 지낸다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걸 그만두고 뛰쳐나왔다. 이는 물론 나이도 큰 역할을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취업을 못한 다른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면, 그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미래에 뛰어드는 것은 어려웠을텐데도, 그래도 그 스탭은 그렇게 뛰어든거다.

 

아마 위의 이야기뿐이었다면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지는 않을텐데, 이번에는 고등학교 동기 녀석의 이야기이다. 이 녀석도 그럭저럭 괜찮은 모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의 모 대학 물리학과를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하다가 모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를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서 때려치우고 나와서 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 나이도 있는데 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그렇게 불확실한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걸까? 위의 스탭도 그렇고 이 친구 녀석도 그렇고, 나라면 거의 택하지 않을 길을 향해서 자신을 서슴없이 던져놓았달까.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가능성만으로는 요즘 세상에는 부족하다. 아직 세상에는 직장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거나, 구했더라도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너무나 많고, 대학교의 어느 과를 나오더라도 미래는 뿌옇다. 정말 몇 안되는 그런 전문직을 찍어내는 과들, 그런 과들이 아니고서야 단단히 기반을 잡기란 힘든 일이다. 이과 중에서도 자연과학대학도 힘들고, 공과대학이 그나마 취업이 잘되는 편이라고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지방대에서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며, 문과는 더욱 더욱 더욱 취업의 문이 좁다.

 

나는 거의 인터넷서핑을 안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내 시선에 걸리는 짤방들이 있다. 그 짤방들에서는 젊은이들이 너무 눈이 높다, 눈을 낮춰서 중소기업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성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멋모르는 소리 하지말라며, 우리 나라의 실업률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냐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6수를 하고, 어떤 사람은 7년째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의학전문대학원을 가겠다고 준비하고, 어떤 사람은 약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의욕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젊은이들 스스로가 잘 모르기 때문에, 충분히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장을 구할때는.. 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패기넘치는 젊은이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들은 적 있다. 어딜 가더라도, 어떤 상황이더라도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 잘 될 수 있지 않냐, 하면서.

 

무엇이 옳은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정말 본인이 열심히 하면 무언가 길이 생길까?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저런 문제들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취업이 힘들다, 힘들다 이야기를 듣기는 듣지만 나 스스로는 당장 무언가 내 폐부에 찌를듯이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 될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이야기할 수 있다. 누구 한명이 직장을 구했다는 것은 누구 한 명은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입시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이는 사회 구조의 문제다. 떨어진 사람이 자격이 없어서 떨어진 게 아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왜 도덕인가, 에서 샌델이 반복하는 예시들이 몇 개 있는데, 샌델 본인이 공동체주의 이론가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깊게 새겨볼 만한 것들이 있다. 샌델이 논증한 바에 따르면 거칠게 말해서 justice가 꼭 good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가 되며, 이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대학 입시에서 자격을 갖춘 수많은 학생들이 커트라인을 넘지 못하는 것justice또한 소수민족우대정책에 따라good 허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더 확장해서 이야기해보면, 샌델의 합목적성 논의는 빼버리고, (사실 샌델의 합목적성 논의가 샌델의 주장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논리만 살펴보자) 입시든 그 어느 경쟁체제든, 당신이 그 체제에서 실패했다는 것이 당신의 가치가 낮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인데, 사실은 아직도 가끔씩 너무나 가슴이 아플때가 있다. 몇 번이고 이 서재에서 등장했던 그녀이야기인데, 그녀는 이직을 하고 싶어했다. 자신은 여기서 평생 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평생 살게 되면 어쩌죠? 토끼처럼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야기했었다. 나는, 내가 옆에 있을거라고, 내가 이 근처에서 직장잡아서 결혼해서 같이 살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지내면 되리라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근처에서 직장을 잡는다, 라는 결정자체가 나에게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 그때는 마법이라도 걸렸었는지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했고, 어정쩡하게 사회에 한 발을 딛고 있었고,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한채 흔들리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내가 하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학문으로서는 좋아하지만, 그 과정들은 사실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학문만 연구할 수 있다면 차라리 좋을텐데도, 그렇게 되면 사실 또 먹고 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에게 그당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하자. 나는 그녀를 서포트하자. 그렇게까지 내가 내 일을 꺼려하는 것도 아니니까, 내 꿈은, 사실 행복하게 사는게 꿈이니까. 업적이든 뭐든, 그런건 다른 사람들이 해주겠지, 안그래? 그래서 사실 어디에서나 직장을 구해도 좋다고 - 생각했었다.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직장을 구하고 쉽게 이직을 하여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다. 그게 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가끔 만나서 - 소개팅으로 만난 적 있는데 - 이야기해보면 그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인생 뭐 한번 살잖아요,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아야지. 굉장히 자신감이 강했던 것 같다. 속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또 박력있는 여자한테 약해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왠지 나도 그 힘을 나눠받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나는 저런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한번도 마음속 깊이 납득하지는 못했고, 진심어린 손을 내밀지 못했다. 결국 그 관계는 허세로 가득찬 관계가 되어갔었다.

 

나는 아이러니를 많이 느낀다. 좋은 학벌, 똑똑한 머리, 분위기 잘읽기, 그런 것들을 모두 가졌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일이 잘 안풀리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응해서 살아간다. 어쩌면 저런 것들이 모두 갖추어졌더라도 약한 사람에게는 쉽게 운이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가장, 그리고 계속 생각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생각날 사람은 나만큼이나 약했던 사람이다. 눈부시게 빛난던 상대보다는 붙박이별처럼 덜덜 떨면서 우주공간에서 깜빡거려서, 그만큼이나 깜빡거리던 내 빛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던 상대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15-04-26 01:01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장에 담긴 가연님 마음이 참 좋아요.

한수철 2015-04-26 01:26   좋아요 0 | URL
˝당신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실은 취중인데, 이 문장만큼은 명약관화하게 꽂히는 구먼요.

음, 한두 번 댓글을 주고받은 기억이 나는 만큼,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ㅎ

잘 읽었습니다.^^

몬스터 2015-04-26 16:23   좋아요 0 | URL
끄덕이면서 잘 읽었습니다. 길게 보면 자석처럼 ,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끌여 당겨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더라구요. 결혼할 분을 향한 마음이 참 고와요.

가연 2015-04-27 07:09   좋아요 0 | URL
음.. 헤어졌고, 잊지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 뭔가 죄송하네요. 가끔 너무 뭔가 주절거리고 싶을때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어요, 쓰고 또 후회해요.

다락방 2015-04-26 19:07   좋아요 0 | URL
아, 역시 가연님이에요.

테레사 2015-04-27 11:45   좋아요 0 | URL
가연님, 여전히.....^^..저도 마음이 어지럽고 서글플때,...우울감이 밀려올때 서재를 헤매고 있더군요..그게 그렇게라도 해야 위안이 되는 양, 말이에요...모두가 지나간다고 말하지만, 역시나 지나가지 않는 것들이 있더군요...그게 가연님에게 그것이듯, 저에게도 그런 게 있듯이...

아무개 2015-04-27 13:27   좋아요 0 | URL
깜빡깜빡....

2015-04-2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