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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들만... 이것 저것 놀다보니까 이렇게...

 

 

 

플라톤의 향연 입문.

향연의 설명서. 서광사의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참고가 되었다. 이번 책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술과 문명.

루이스 멈퍼드의 책이다.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문명 이야기.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반도 분할의 역사

사실 내가 요즘 들여다보는 분야가 근대사쪽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이렇게 놓아두련다.

 

 

 

 

 

 

 

 

 

 

 

 

불멸의 이론.

 베이즈 정리에 관한 책인데, 이 베이즈 정리는 객관적 관점에서, 혹은 주관적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다. 이 책은 주관적 관점을 기초로 서술하고 있는 듯 하다.

 

 

 

 

 

 

 

 

 

 

 

 

 

아.. 다음부터는 예전처럼 책도 좀 들여다보면서 추천을 해야겠다. 예전엔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들여다보면서 추천을 했는데, 지금은 서점을 가기가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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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9-09 17:36   좋아요 0 | URL
올리신 책들 중에서는 마지막 두 권이 가장 땡기는군요. 저 마지막 책은 혹 서평단 책이 안되어도 나중에 가연님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가연 2013-09-10 17:29   좋아요 0 | URL
ㅠㅠㅠ고견이라뇨,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아마 두 권다 안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네요.

희선 2013-09-11 03:34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도 좋더군요 그렇게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와서... 비가 내려서 아주 가을이 되는 것은 아닐 것 같지만, 다음주 낮에 좀 더울거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가을비군요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가연 님은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군요 읽는 책이나 읽고 싶어하는 책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지요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읽는 책은... 저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재미있기 때문이죠 어떤 책에서든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조금 신기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하우스라는 것에 대한 말을 잠깐 하더군요 가연 님이 쓴 글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뭔지 몰랐는데 이제 알았습니다 이게 신기한 일은 아니고, 그 말이 나왔을 때 제가 보고 있던 책에도 하우스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책에 나온 것은 말 그대로 하우스지만...^^

이 하우스도 의사 이름뿐 아니라 집을 나타내기도 하겠네요 의사가 환자 집까지 가서 그 사람이 어떤 병인지 알아낸다고 했으니까요(이 말은 들었는데 뒤에 한 말은 잘 못 들었습니다) 이 드라마 재미있을 것 같네요


희선

가연 2013-09-23 17:38   좋아요 0 | URL
아하하.. 제가 얼굴이 다 빨개지네요. 아니에요, 저는 그냥 놀고 있답니다. 공부해야지 생각은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가을비는 며칠 전에도 내렸습니다.

하우스House는 셜록 홈Home스에서 따온 거래요, 그래서 추리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희선 2013-09-17 00:30   좋아요 0 | URL
책이 다른 게 보이는군요 '빅 히스토리 - 한 권으로 읽는 모든 것의 역사' 정말 한 권으로 다 알 수 있을까요 '스티븐 호킹 자서전'도 보이고,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이 책에는 그림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때 그린 것인가요 책 소개에 조금 쓰여 있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오늘만 지나면 추석연휴로 올해는 긴 편이네요 가연 님도 쉬는 거 맞죠 달이 잘 보일지 모르겠는데 달도 보고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시간 없어서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며칠 안에 다 할 수는 없을 테지만...^^


희선

가연 2013-09-23 17:3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빅 히스토리는 요즘 관심주제라 저렇게 올려두었어요. 다 제 관심주제에요, 풋. 근데 언제나 들여다볼런지는 모르겠어요.

정말 긴 추석연휴였습니다만, 지나고 난 지금 시점에서는 정말 짧은 추석연휴였습니다. 조금만더 연휴가 길었었다면 좋았을텐데 잘보내셨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묵시록의 네 기사를 죽음, 전쟁, 기근, 역병이라고 둔다면, 무신론에도 네 기수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데니얼 대닛이 바로 그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 네 명이 무신론에 관하여 찍은 대담의 이름도 바로 묵시록의 4기사이다.) 이들 넷이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위의 묵시록의 네 기사가 지나간 것처럼 비논리적인 관념은 황폐화되버리고 만다. 유일신과 인격신을 믿는 자들에게 무자비한 영국식 발음으로 악센트를 혀로 굴려가면서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종교를 옹호하는 자라면 그 상대가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라도 상관없이 Absolutely wrong!을 외치며 어떻게든 굴복시키는 죽음의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 당신은 신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어느 신자에게 아니 도대체 없는 것에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는가? 라며 종교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악마의 변호인 (마더 테레사의 시성에 참여하여반대의견을 매우 많이 피력하였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도대체 신이 왜 필요한 것인지, 신앙이라는 것은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아 종교를 모조리 말려버리려 마음을 먹은 기근의 마법사 샘 해리스, 인지과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적설계에 대하여 강인한 공격을 퍼붓고 마치 역병처럼 무신론을 전파해나가는 무신론계의 신성 데니얼 대닛.

 

바로 위에서 볼 수 있는 동영상은 그런 네 기수 중 수좌인 리처드 도킨스에게 (왜 리처드 도킨스를 수좌로 놓았는가? 그것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다.) 날아온 한 묶음의 증오의 편지Hate mail다. 사실 컴퓨터로 날아왔으니 한 묶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떤 내용인지는 지금쯤 다 들어보았으리라. 굳이 간략하게 기억에 남는 한 구절만 끄적여보자면, GO BURNING HELL. 그야말로 뭐라 할 말이 없는 구절들이다. 도킨스가 종교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많은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관념을 조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그렇기에 글에도 반드시 내가 더 가치를 두고 있는 부분이 담길 것이리라. 나는 굳이 어떤 카테고리로 분리하자면 이신론Deism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의 속성을 정의하자면, 나는 세 가지를 들 것이다. 전지, 전능, 편재. 신은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하며, 어디에든 존재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존재가 있을까? 나는 솔직히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굳이 저런 세 가지 속성을 가지는 것이 있다면 법칙 - 인간이 지금까지 밝혀낸 불완전한 법칙들이 아닌 - 그 모든 법칙들의 원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모사된 불완전한 환영들과의 관계와 같아서 우리는 끝없이 그런 법칙에 다가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법칙은 마치 기계와 같다고 본다.  특히나 그 존재가 인격을 가진다거나, 사람의 외모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부정적이다.

 

그러니깐,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칼 세이건의 이 말을 들 수 있겠다.'만약에 신이라는 말이 어떤 우주적 법칙을 의미한다면 분명 존재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뒤의 말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중력의 법칙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런 신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 무신론자들인 위의 네 명, 특히 리처드 도킨스, 에 대하여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너무 강한 주장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법칙을 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물리학적인 지식을 통하여 그 신이 '실재' 한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다. 물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절대 인격을 가진 신은 아니다. 가끔은 이런 상상을 해본다. 뭐,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지만, 정말 초 희박한 확률을 뚫고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눈 앞에 나타나, 나 사실 신이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리처드 도킨스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예상되는 반응 1. 그런 신은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과연 초월적 신이 자신을 반대했다고 앞에 나타나는 그런 찌질한 짓을 할까? 반응 2. 신이라고 불릴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게 신의 기본 요건이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응 3. 신이라는 존재라 주장한다면 검증을 거쳐야 한다. 등등등)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무신론 설파 커리어를 그의 초기작인 이기적 유전자 서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서문을 보면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다. '침팬지와 인간은 그들의 진화 역사 중 대략 99.5%를 공유하지만 대부분의 사상가들을 자신을 전지전능자로 가는 디딤돌로 여기는 반면, 침팬지는 엉성한 짐승으로 여긴다' 고 말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비교를 늘어놓은 문장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후 리처드 도킨스의 행적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저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 인간은 결코 침팬지와 다를 바 없다. 신이 과연 인간을 침팬지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을까? '설령 화석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수많은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적인 증거가 우리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존재라는 것을 뒷받침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사람들은 이 책을 보고 유전자라는 것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야, 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지만, 그것은 유전자라는 것을 인간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생기는 오류다. 인간은 유전자가 아니다. 이 말을 바탕으로 비유를 들자면, 유전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유전자에게는 이런 지능이 존재할 리가 없겠지만) 아, 내가 죽어도 나와 비슷한, 혹은 동일한 유전자들이 더 많이 번성한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러니 지금 내가 희생을 하여야 겠다. 이 이기적 유전자, 에 대한 몇 몇 반박론들이 동물의 이타적 행위를 기록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은 참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실제로 유전자는 마치 이타적인 것 처럼 행동을 하기 때문이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동물은 유전자와 동치관계에 놓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무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제목은 이타적 유전자, 가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인가? 쉽게 말하여 유전자 A의 입장에서는 이타적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유전자들을 A, B 등등 세밀히 구분할 수 없다. 모두 같은 유전자인 것이다. (A, B 이런 식으로 유전자를 나누는 것 자체가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일종의 인간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 전체로 볼때,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여 자신이 번성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 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공전절후의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리처드 도킨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무신론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왼쪽의 만들어진 신은 원제가 the God delusion인데, the God delusion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 신 = 망상. 왼쪽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와 함께 무신론자들의 필독서가 되버린 이 책은 그렇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쨌든 신이란 세상에 거의 없는 것 같다. 거의 없다니? '거의'가 의미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는 증거가 말을 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아직까지는 신의 부재를 완전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증거는 없다. 도킨스가 이 책에서 공격하는 것은 신에 대한 논증들은 모두 논파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증거가 꼭 필요한 과학을 해온 도킨스로는 신에 대한 논증들이야말로 이상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증거가 없으면 없을 수록 더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방향을 조금 틀자면 무신론자들의 생각으로는 종교는 미신에 가깝다고 본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한 실험을 가져올 수 있겠다. 스티븐 핑커(로 기억한다)가 진행한 한 실험에서 이 연구진들은 상자 안에 비둘기 한 마리를 가둬두고 먹이를 주는 실험을 했다. 먹이를 줄 때 그 비둘기는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이를 조절하여서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일 경우에 먹이를 주도록 하였다. 단순화하여 비둘기가 위로 움직일때마다 먹이를 주었다고 하자, 이렇게 실험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비둘기는 이렇게 믿게 된다. '아, 내가 위로 움직이면 먹이가 생기는구나' 그래서 비둘기는 그 이후 배가 고플때마다 위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음식을 주고 안주고는 실험자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종교도 마찬가지라서 우리가 일정한 형식의 의식을 올린 뒤에 복이 떨어진다고 믿지만 (기복신앙의 경우) 실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고, 미신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신론이 위의 실험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실제 현실에서는 저 실험에서 실험자 역할을 맡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실험자가 존재하더라도 그 실험자는 우리를 신경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리처드 도킨스도 마찬가지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처음부터 바넘 효과Barnum effect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점성술에 관련된 쪽지를 나누어주고, 당신과 이 말이 얼마나 맞는지를 조사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웃긴 것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내용은 사수자리의 성격에 관한 것이며, 모두 동일한 자료였었다는 점이다. 그 동일한 자료를 보고 각기 다른 별자리를 가진 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을 한다. '와우, 이거 제 성격이랑 똑같은데요?'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바넘 효과라고 부른다. 종교 = 미신, 이라고 규정을 하는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종교적 의식은 바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기적이 행해졌다고 알려진 곳에 가면 몸이 치료가 되는가? 도킨스는 이야기한다. 그럴 리가 있겠냐?

 

다만 말해둘 것은 이 책에서는 불교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점이다. 불교를 두고 도킨스는 일종의 철학 체계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이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다. 불교는 분명 종교라기보다는 철학 체계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더 우월하다고는 볼 수 없다. 도킨스의 비판을 불교가 벗어난 것은 단지 일신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불교서 굳이 신이라 들 수 있는 존재는 비로자나불이리라. 진리 그 자체를 형상화한 부처말이다. 하지만 이 비로자나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불교 자체도 사실 숭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는 사실 종교로서는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포교가 되지 않는다 - 숭배보다는 스스로의 불성을 깨닫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라는 점에서는 이 불교 또한 종교의 해악을 비켜나가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저서인 신은 위대하지 않다, 에서는 몇 장을 할애하여 불교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특히 일본 불교를 가져와서 불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제 2차세계대전때 불교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선에 투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점에서 불교는 분명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런 맥락의 비판은 우리나라에서의 성철 스님의 일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고승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고승으로서 성철 스님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크리스토퍼 히친스같은 이가 냉철하게 본다면 현실 도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히친스는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귀국했을때 동행한 지식인 중 한 명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불교 비판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히친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불교를 마치 허무주의의 종교, 인 것 처럼 해석을 가하며 사례를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결코 생이 허무하니 기꺼이 버려라, 라고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일본 불교를 가져온 것도 문제가 있는데 일본의 불교를 과연 얼마만큼 불교라 볼 수 있는가, 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은 일종의 만신전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힌두교에 받아들여진 석가모니를 불교의 석가모니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제노사이드, 의 작가인 다카노 가즈아키는 자신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30&contents_id=10889) 일본인들은 태어나면 신사에서 절을 하고, 결혼할 때는 교회에서 하고, 죽을 때는 절에 간다, 고 말이다.

 

이런 불교에 대한 비판은 우리에게 종교와 이성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다시 성철 스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승으로서의 성철 스님은 과연 깨달은 자, 일까?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가 침묵을 지킨 것이 일종의 견성의 일환이었다면? 우리가 불교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하여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기에 종교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비판한 사람들 중에는 마더 테레사 - 그렇다, 테레사 수녀다 - 가 있는데, 그는 테레사에 대하여 여러가지 가열찬 비판을 하고, 마무리로 그녀의 편지를 꺼낸다. 그녀의 편지는 다 줄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유튜브에서 히친스의 토론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4n05IxYaFS0  ) '나는 더이상 그(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을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도 결국엔 무신론으로 돌아섰구나', 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해석을 우리는 옳다고 볼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분명 히친스가 옳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종교에 어느 순간 회의를 가질 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런 회의감 속에서 글을 썼다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지 않을까? 동시에 이런 부정을 통하여 더 종교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옛날 나가르주나가 불교의 논리를 정립하면서 부정의 부정을 가져온 것 처럼 말이다. '정말로 깊은 진리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찾아온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전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히친스의 비판은 피상적인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어디까지 중요시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이 세상에 4만명의 오빠가 있고, 그 오빠의 사랑을 모두 합치더라도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오필리어가 죽고 레어티스가 오필리어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뿌리자 햄릿이 나서며 하는 이야기이다. 신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인데, 신을 오빠, 그러니까 레어티스라고 두고, 인간을 햄릿, 또 다른 인간을 오필리어라고 두면 왜 갑자기 저런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 4만명의 신이 있고, 그 신의 사랑을 모두 합치더라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히친스와 도킨스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무신론을 고집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덕을 지키는 것에는 굳이 신이나 종교와 같은 매개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도 여기에 공감한다.)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신이란 존재를 떠올린다면, 그 이상적 존재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한없는 사랑을 베풀 것이다. 그렇기에 충분히 정서적 만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과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과 같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진리가 어떻게 진리라 부를 수 있겠는가? 히친스의 저런 해석의 배경에는 이런 부분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이기 때문에 도킨스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은 정녕 어느 하나가 사라져야만 하는 관계에 놓여있을까?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을까? 스티븐 제이 굴드의 NOMA라는 개념을 가져오면 두 축은 서로 양립할 수가 있다. NOMA는 Non Overlapping MAgisteria의 약자로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 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magisterium의 사전적 의미는 교학권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설명은 모두 치우고, 이 개념은 종교와 과학은 둘 다 중요하며 서로 겹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얼핏 보면 매우 합리적인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들의 지적설계론은 이 개념으로는 대응하기가 어렵다.

 

지적설계론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지적설계자가 설계를 하였다, 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그러니까 창조론에서 신이 창조했다는 구절을 지적설계자가 창조했다, 라고 바꾼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까지만이라면 차라리 상관없지만 각종 과학적 영역을 지적설계론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그 대표적 논거다. (물론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진 생물은 하나도 발견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지적설계론은 저 명제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지적설계자라면 외계인? 외계인이 창조하였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본질적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설계자는 누가 만들어내었나? 얼핏 보아도 헛점이 보이겠지만, 만약에 이를 종교라 주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선 NOMA개념으로는 과학과 종교는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적설계론은 아무리 보아도 과학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이론이다. 과학적 영역을 침식하려고 드니 말이다. 하지만 지적설계론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종교로 끝까지 주장한다면? 과학자들로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NOMA개념은 정확하지가 못하다.

 

그런데 진실로 세상을 모조리 규명가능한 법칙이 있는가? 과연 과학이라는 툴Tool로 우리는 세상을 모조리 규명할 수 있을까? 먼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그런 법칙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노력을 하여야 한다, 즉, 과학의 진보를 믿는다, 가 나의 관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막연히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가 정말 의문인데, 과학의 객관성은 우리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에 1970년대의 일단의 학자들은 과학 지식 또한 사회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다음 두 가지 테제를 내세운다. 첫 번째, 관찰의 데이터들에 의하여 과학 이론은 과소결정된다. 두 번째, 관찰은 이론에 의존한다. 이 두 가지 테제는 비록 과학 외부에서 제기된 테제이지만 어느 정도는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저 테제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하자. 과학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칼 포퍼의 이야기에 따르면, 과학과 유사과학은 반증가능성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 포퍼의 이야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이는 듀엠 콰인 테제 - 과학적 가설을 고립적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는 - 로 반박이 가능하다. (물론 물리학에 한하여 듀엠은 약간 입장이 다르지만) 듀엠 콰인 테제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과학적인 가설 설정 방법은 가설-연역법이다. 즉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따른다.

 

1. 가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하다

2. 이러이러하다

3. 가설은 옳다.

 

그런데 1번, 가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하다, 는 이 명제 자체에 이미 몇 가지 가정을 품고 있다. 애초에 가설을 설정한 것 자체가 추측이라고 할 수 있고, 옳다면, 이라는 말 또한 추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설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기존 과학 지식에 의거할 것이다. 여기서 확실해진다. 우리는 고립적으로 과학적 가설의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으며, 그러한 가설을 토대로 세워진 과학적 지식 또한 고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그렇다면 새로운 과학 지식이란 기존 과학 지식의 재반복Rephrase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과학적 인식은 중세의 인식과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중세의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그건 왜 그런 것일까?

 

이 비밀 또한 가설-연역법에 숨어있다. 위의 논리 구조는 논리학적으로 따졌을 때 전형적인 후건긍정의 오류에 해당한다. 후건 긍정의 오류는 예시로 든 논리 구조에서 설령 1번과 2번이 옳다고 하더라도 3번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저 가설-연역구조를 (논리학적으로 따지면) 폐기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이런 경우 귀납법으로 해석하여 얼마만큼 논증이 강한가, 약한가를 따져서, 최대한 강한 쪽으로 우리의 지식을 굳힌다. (귀납 추론의 경우 타당하다, 라는 말 대신 강하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또한 설명할 것이다.) 예시를 들어보자.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검증할 때 이런 논리구조틀이 사용되었다.

 

1.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옳다면 개기일식시 태양 주변의 빛들이 휠 것이다.

2. 개기일식시 태양 주변의 빛들이 휘었다.

3.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옳다.

 

지금이야 저런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이 매우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 조금만 들어올리기만 하여도 검증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정도로 기술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자, 어쨌든 위의 논리구조는 사실상 오류다. 전형적인 후건 긍정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귀납법으로 파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귀납 추론의 옳고 그름은 강하다, 약하다, 라는 용어를 쓰는데, 범주화의 옳음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서 파악이 된다. 추론의 참 거짓을 따지기 위하여 다른 정보를 가져온다는 이야기이다. 예시를 들면 1번인 모든 병아리는 노란색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걸 참으로 두고 (지금 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 명제 자체의 참 거짓이 아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는 명제인 2번 모든 병아리는 분홍색이다 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1번 명제가 2번 명제에 대하여 더 옳다고 알 수가 있다. 왜 그런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게 된다. (시간 t에 따른 과거와 미래의 성공적 투사가 노란색이라는 개념에서는 분홍에 비하여 더 많이 일어났기에 더 잘 고착entrenched되었다, 따라서 더 강한 명제다, 굳이 유식한 말로 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포퍼라면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위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리구조도 마찬가지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다른 경쟁 이론에 비하여 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옳다, 귀납적으로는 강하다, 라고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귀납적으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귀납적으로만 획득할 수 있는가? 연역적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가? 당연히 연역적으로도 획득할 수 있다. 어떻게? 다시 저 논리구조를 가져와보자, 이번엔 조금 바꿔서 말이다.

 

1. 가설이 옳으면 이러이러하다

2. 이러이러하지 않다

3. 가설은 옳지 않다.

 

이는 논리학적으로 후건부정식이다. 타당하다는 이야기이다. (보통 전건부정과 후건긍정에서 오류가 많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설이 옳지가 않다는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한 번의 반증만으로 바로 가설을 폐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이런 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쌓아나갈수 있다.

 

이제 다시 위의 두 테제인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과 관찰의 이론의존성으로 넘어가자.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은 이런 의미이다. (원래 과소결정과 과잉결정은 알튀세르의 용어로 알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어떤 과학 이론이 있는데, 그 이론에 의하면 어떤 실험 결과는 반드시 어쩌고 라고 나와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어쩌고 라고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 과학자들은 그 이론의 하위에 있는 가설들을 잘 조절하여서 이론전체를 짜맞춘다, 라는 이야기라고 (다소 과장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험이 이론과 다르더라도 이론 전체를 부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이론의 일부가 잘못되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내가 말한 후건부정식에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가설이 옳지 않은 게 아니라, 그 가설을 뒷받침 하는 다른 보조 가설들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 라고. 관찰의 이론의존성은 비유하기가 훨씬 쉽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라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물론 이것도 좀 과장된 설명이겠다) 이미 어떤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이론 내부에 담겨져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를 통하여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도 주장을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입장에서 볼때 저 두 테제는 시사하는 바는 있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첫 번째 과학 이론의 과소결정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론을 펼 수 있다. 물론 몇 번은 보조 가설을 조절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오류를 지우지 못한다면 저 후건부정식처럼 가설을 폐기할 것이다. 왜 과학자들이 가설을 폐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관찰의 이론의존성에는 이는 선후관계를 잘못파악한 주장이라는 반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관찰이 있기 때문에 가설을 설정하고 이론을 세운다.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관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론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검증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관찰이 힘들다. 그렇다면 더더욱 보고 싶은 것들만 보려고 관찰하지는 않겠나? 이는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관찰하다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몇 번이고 보았다면, 이론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가설을 폐기할 것이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을 결국에는 발견하였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또 한 번 보라고 권할 것이다. 정말 내가 발견한 이 것이 나의 이론에 실제로 합치를 하는 것인지. (CERN의 뉴트리노의 속도에 대하여 수많은 다른 연구소들에게 검증을 권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과학지식의 객관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과학지식은 적어도 종교의 탈을 쓴 이론을 부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객관적이다. 세상을 규명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믿음이다. 그 믿음을 부정할만한 근거가 충분하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일단 객관성은 어찌어찌 확보할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종교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이가 나타난다. 종교적 지식은 저런 가설-연역법을 통과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뿐이다. 그리고 증거가 없으면 없을 수록 더 신성해진다. 바로 이 점을 리처드 도킨스를 위시한 무신론자그룹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 도킨스의 기독교 비판은 차라리 이 책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새롭게 복간된 (오른쪽 표지) 이 책은 그야말로 기독교에 대한 광범위 공격을 퍼붓는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경의 내용과 디오니소스, 오시리스 신화의 내용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 기독교에서 주된 상징으로 삼는 물고기는 사실 두 원을 그려서 생기는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수비학적인 기원을 가진다. 여러 가지 고대 종교의 비의에 기독교는 빚지고 있다. 등을 주된 주장으로 삼고 있다. 결국 이 책에 따르면 기독교는 잘 만들어진 신화다. 사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의 기원 자체는, 이만큼 과격하지는 않더라도 종교학자라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다. 당장 유명한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인 축의 시대를 보아도, 기독교의 기원에 대하여 민족 종교였었다, 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민족 종교였다면 주위의 다른 신화를 융합하는데 도대체 무슨 거리낌이 있었겠는가?

 

 

이런 책들에 대한 반론은 왼쪽의 도킨스의 망상, 그리고 옆의 신을 위한 변론, 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나는 도킨스의 망상, 은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오른쪽의 신을 위한 변론을 지은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 신의 역사,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종교학자인데 무신론자인지 유신론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어느 곳에서는 유신론자라고 말하고 어느 곳에서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내가 볼때에는 무신론자였지만 유신론으로 넘어가는 그런 중간적 위치에 입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바로 이 '신을 위한 변론' 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 은유를 강조한다. 신이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신을 느끼고 싶다. 그러다보니 종교적 의례를 행하게 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게 된다, 라는 것이다. 여하튼 신은 이해할 수 없지만 신을 알아가려는 그 과정속에서 충만함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게 바로 신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아포파시스, 부정의적 신학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에게 꿇어엎드려야만 한다. 신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저 은유적 방식으로 그 편린을 살짝 드러낼 뿐이다. 대략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도킨스의 주장은 그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신화를 깔아뭉개는 것에 다름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주제만 더 이야기를 하겠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정도로 이어지는가? 과학의 세계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엄격히 분리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아무리 마음속으로 번개여 라고 염원하더라도 결코 현실에서는 번개가 치지 않는다. 우연히 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을 이런 명제에 대한 반례로 들지 말기를 바란다. 양자역학을 의식과 연관지으려는 시도는 많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성공적인 예는 아직은 없다. 양자역학에서는 그저 관찰자, 가 중요할 뿐이다. 내가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겼다, 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정신과 육체가 이어져있다면? 그리고 내 정신이 마치 촉수처럼 세계 어디에서든 뻗어있다면? 예전의 어느 TED강연에서는 육체에 의식이 머무는 곳, 이라는 주제로 대략 연수부위에 의식이 존재할 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대중들에게 알려질정도로 눈에 들어올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듯 하다. 또한 초상과학에 대한 연구도 은근히 진행중이지만 여전히 유의한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도 이 정신과 육체의 관계의 닮은꼴일지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과학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정신이 없다고 한다면 좀 쓸쓸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종교가 완전히 와르르 무너져버린다면 좀 쓸쓸할 것 같다, 풋.

 

이제 이 길고 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루쉰은 자신의 단편소설인 '고향' 을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원래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땅은 본디 길이 없지만,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길이 생겼고, 희망도 필시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데, 종교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신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신이 등장한 것이다. 나는 그 믿음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길이 어느 순간 잘못된 방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끈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길에서 돌아설 것이다.

 

 

 

 

 

 

 

 

 

p.s.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를 하자면, 나는 굳이 따지면 이신론적인 관념과 불가지론적인 관념의 중간을 걷는 중이다.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불교의 비로자나불과 같은 존재를 신이라고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는 인간의 일에 절대로 개입할 수도, 개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생겨난 것은 그야말로 그냥 생겨난 것이다. 존재에 별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꼭 있어야 우리 인간이 신성해지고 멋있어지는가? 그 수많은 확률을 뚫고 세상에 출현한 우리들 자체를 기적이라고 보는게 훨씬 옳은 일이 아닐까? 이런 관념이 내가 가진 관념이다. (동시에 불교에서 비로자나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밀교에서의 대일여래 - 비로자나불과 동일한 격으로 여겨지는 - 는 숭배의 대상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등등 수많은 종교들 - 천지의 창조를 설명하고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하는 - 을 일거에 부정해버릴 생각은 없다. 이 글 전체가 무신론에 치우쳐져 있다고 하여 내가 무신론을 완전히 옹호한다고 여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를 두고 유신론의 공세에 겁을 먹었나,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겁을 먹을 때도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유신론의 공세에 겁을 먹은 것은 둘째치고라도, 나 또한 이신론이라는 막연히 그러리라는 '증거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무신론자라면 이런 비판에 자유롭겠지만 나는 그만큼 자유롭지는 않다. 물론 나는 내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주저없이 내 입장을 포기할 것이다.) 

 

이런 나의 타협(?)도 여전히 유신론자들에게는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지론이 종교에 대한 호의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되어지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예 (감옥에 갇혔을때 간수가 버트런드 러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종교가 무엇인가요? 러셀은 이렇게 대답한다. 난 불가지론자요 I'm agnonostics. 그리고 간수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 모두는 어쨌든 같은 신을 섬기고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 간수는 오해를 한 것이다. 나는 영지주의자요I'm a gnostics)를 보면 불가지론은 사실 유신론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신이 무조건 존재한다, 라고 보는 유신론자들에게는 신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없을 수도 있다, 라는 말들은 기분이 썩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신에 대하여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존재할 수도 있는데, 설령 그렇다고 하여도 그 신은 기독교의 신은, 더 나아가 어느 종교의 신도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기만은 타협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너의 신은 자꾸 기계장치의 신, 이라고 하는데 법칙과 과학의 신인가? 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질문이 잘못되었다. 법칙이나 과학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학과 과학으로 생겨난 세계에 무슨 정서적 만족이 필요하겠는가? 그야말로 도덕경에서 이르듯 천지불인天地不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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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28 02:38   좋아요 0 | URL
처음 드는 생각, 무엇 때문에 이런 글이 쓰고 싶어졌을까 입니다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겠죠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인데...
언젠가 그런 말 들은 적 있어요 그게 불교만을 말한 것인지 모든 종교를 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철학으로 공부하면 좋은 것이다(불교만을 말했던 것이었는지도... 불교만 그렇지는 않을 것도 같군요)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지할 것이 필요하죠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들은 적 있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내 종교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쓸데없는 말이었습니다

종교가 순수함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 쪽에서 멀어지고 있기도 하죠


희선

가연 2013-08-28 03:28   좋아요 0 | URL
ㅎㅎㅎ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구..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보니까 든 생각을 모아본 거겠죠.. 풋.

사실 의지할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대하여 많이 고민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 자체가 어쩌면 스스로의 가능성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논증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참 나약하다는 느낌을 지우지는 못하지만요) 철학으로 불교라던가 다른 종교를 익히면 그 종교에 깊이 빠지긴 어렵게 될 것 같아요.

희선 2013-08-29 00:22   좋아요 0 | URL
그런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그러면 왜 물어봤을까 하겠군요 확인일지도...) 그리고 여러 책을 읽고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습니다 이 글뿐 아니라 다른 글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신은 있을 것 같아요(확실하지 않은 말이군요) 신이 있으면 귀신도 있다고 하던데...^^
신은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든 있고, 모습은 늘 같지 않다는 말이 있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신이 뭐든 해줄 수는 없을 겁니다(전능을 믿지 않는...) 자신이 해야죠 제가 생각하는 신은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러면 신이라 할 수 없을까요


희선

가연 2013-09-10 17:49   좋아요 0 | URL
ㅎㅎ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저야 책들을 읽고 이렇게 잡글을 끄적거리는 거죠.. 요즘은 진짜 시간이 좀... 어허허...

신의 기본 요소가 전능이 아니려나요, 아하하. 희선님께서 생각하는 신은 제가 떠올리는 그런 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 하네요.

군자란 2013-08-28 09:21   좋아요 0 | URL
종교야말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줄수 있는 장치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쫒아 다니며 핍박했던 사도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개안했다고 믿듯이 인간은 어떤것도 자기가 믿고 싶은것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의 조건에 갖힌 존재....그게 바로 종교 혹 이신론아닐까 싶습니다.

가연 2013-08-28 11: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에.. 약간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먼저 종교와 이신론을 동일 선상에 둘 수는 없습니다. 이신론에서의 신은 숭배대상이 아니니깐요. 신이 이 세상의 법칙을(혹은 이 세상을) 만들고 더이상 관여를 하지 않는다, 가 이신론의 기본 명제라고 볼 수 있는데 앞의 법칙을 만들다, 라는 부분에 강조를 두느냐, 관여를 하지 않는다, 에 강조를 두느냐에 따라서 입장차이가 생길 수 있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숭배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신론에서의 신의 위치는 조금 미묘합니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증명에 대한 논증이 필요할 듯 합니다만 여기서 다루기에는 너무 여백이..(페르마의 정리도 아니고, 하하하)

그리고 사실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약간 생각이 다른데, 이 짧은 댓글만으로는 군자란님께서 불가지론자이신지, 무신론자이신지 등등을 구분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혹은 유신론자이실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무신론적인 관념에 더 가깝다고 보고 말씀을 드리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면, 반대로 그들은 무신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 또한 우리 종교에 대하여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무신론자들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유신론에서는 저렇게 말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이 글에서 언급하였던 카렌의 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대들은 피상적 이해에 그치고 있다, 라는. 그래서 종교에 대하여 어떤 논증을 할 때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글의 중간에 이에 대하여 조금 끄적여놓았습니다만.. 사실 저 또한 아직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애매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댓글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자란 2013-08-28 16:34   좋아요 0 | URL
사실 여기에 댓글를 달게된것은 내가 좋아하는 데넷, 도킨스가 언급되서 호기심이 동하여 몇자 적었읍니다. 님이 말한 이신론이나 종교를 가지고 토론할 정도는 제 능력이 안되는 것 같고 현재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동물원의 철망에 갖힌 동물처럼 그 안에 갖힌 존재라는 것외에는 제가 확신할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가연 2013-08-28 20:01   좋아요 0 | URL
편하게 댓글 달아주셔도 괜찮습니다. 저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거니깐.. 인간이라는 존재는 갇힌 존재다, 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마립간 2013-08-28 10:38   좋아요 1 | URL
가연님, 잘 지내시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default값이 개신교에 맞춰져 있지만, 새로 추가되는 지식과 경험에 의해 계속 수정해 나가면서 가나안(거꾸로 읽은) 개신교입니다. 종교는 이성적인 대화가 잘 안 되어 저는 인간의 정신 세계 (인식, 사고, 믿음, 도덕 등)으로 치환해서 생각합니다.

종교적 신과 인간을 제외시키고,
칼 세이건의 이 말 '만약에 신이라는 말이 어떤 우주적 법칙을 의미한다면 분명 존재한다.'
우주적 법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 후자라면 법칙 없는 부분을 신으로 귀속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로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의견에 따라 중력의 법칙에 대한 기도를 해야겠죠. (짧은 글로 요약하려니, 잘 설명이 안되는 글이 되었네요.)

가연 2013-08-28 11:33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잘 지내시나요,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긴 글이라 지루하시지 않으셨으려나 생각하였습니다만..

그런데 이 댓글만으로 파악하건데 마립간님께서는 인간의 정신 세계를 법칙 없는 부분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씀해주십시오) 여기서 저는 의견이 조금 다른데, 예를 들어 도덕 또한 충분히 진화의 산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칙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없다, 고 여길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만약에 어떤 법칙이라던가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서 우리의 정신 세계가 더 저속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더 탄탄한 근거를 바탕으로 설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런 정신 세계를 도그마로 여길 여지를 주지 않기에 도리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우주적 법칙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글 중간에서도 밝혔던 것 같지만 이 또한 믿음이겠지요. 사실 제가 온전한 이신론자라면 자연 법칙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신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신의 존재를 근거로 우주적 법칙의 존재를 확신하겠지만 글에서 보시다시피 이신론과 불가지론을 왔다갔다 하는 중이라.. 뭐.. 없다는 증거가 나타난다면 당장 버릴 그런... 하하하하하. 믿음보다는 차라리 가설이 더 적절하겠네요

마립간 2013-08-28 12:01   좋아요 0 | URL
정신 세계에도 법칙이 있죠. 그리고 정신세계에도 진화론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진화심리학도 있고요. 하지만 제가 제시한 문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냐, 아니냐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가치관은 불가지론과 (default 값인) 유신론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왔다 갔다보다 양다리)

밝혀진 부분 내에는 신이 없는데, 밝혀지지 않은 부분(창발성)이나 증명할 수 없는 부분에 신이 존재할 가능성(예를 들어 플랑크 상수 아래 존재하는 신)에 대한 판단은 개인 취향에 따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법칙이 있고 (창발성이 더 이상 없는 상황 ; 저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현재로는 믿음에 영역에 남아 있지만), 신의 유무의 논란이 어떤 것을 신으로 할 것이냐의 논란으로 전환되겠지요.

가연 2013-08-28 20:14   좋아요 0 | URL
온전한 무신론자라면 아무래도 개인 취향에 따른 선택, 이라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저의 입장이 애매한 입장이다보니...ㅎㅎㅎ 하지만 이 부분, 관통하는 어떤 법칙이 있다는 것이 창발성이 더 이상 없는 상황이다, 라는 말씀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법칙, 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보느냐, 에 대한 차이일 듯 한데.. 제가 생각하는 그런 관통하는 법칙은 정말 기초적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초적 법칙들이 서로 얽혀가면서 무한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내기에 창발성은 계속되리라고 봅니다. 그런 기초적 법칙이 굳이 하나여야할 이유는 없을 것 같고 설령 하나일지라도 거기서 파생된 다른 법칙과 서로 상호작용하여 가능성을 펼쳐나갈테니.. 거칠게나마 이야기하면 중력의 법칙은 다른 물리학적인 법칙과 상호작용을 하여서 더 많은 가능성을 펼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너무 예가 거친 것 같지만.. 여기서 굳이 신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이 기초적 법칙 체계 전체를 일컫겠지요.

여담이지만 이런 점에서 운명이라고 불릴 만한 삶의 궤적은 존재하지 못하리라고 봅니다. 가능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요. 결국 각자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마립간 2013-08-29 08:56   좋아요 0 | URL
제가 창발성이 없는 상황이 있다는 가설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지론과 유신론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죠.

인생의 궤적은 카오스와 끌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확정적), 유사한 모양을 갖는 다는 점(직관의 적용), 그럼에도 정확한 궤도를 계산할 수 없다는 점(불확실성, 무한한 가능성)에서요.

저는 기초 법칙 전체가 밝혀진다면 그것을 신(의 섭리)이라고 칭하겠습니다.

가연 2013-09-10 17:46   좋아요 0 | URL
나중에 댓글을 달아야지, 했는데 이렇게 늦게 다네요. 마립간님의 마지막 문장은 옳은 말씀인 듯 합니다

테레사 2013-08-29 11:03   좋아요 0 | URL
생활인으로서 저는,인간이 그저 우연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만, 어느 한 구석에 누대로 쌓인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두가지 사이를 ㅎ왔다 갔다 하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신이 없다고 하면 좀 쓸쓸할 것 같아요...이 표현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가연 2013-09-10 17:46   좋아요 0 | URL
저 표현 괜찮죠? 저도 써놓고 괜찮은 것 같다고 여겼었습니다, 하하하. 사실 저 구절만큼이나 제 심정을 이 글을 쓸 때 대변하였던건 없었던 것 같네요.

2013-08-30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0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작나무 2013-09-12 17:39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연 2013-09-23 17:42   좋아요 0 | URL
너무 늦었습니다ㅠ 감사합니다

2013-09-12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3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은 쌓여있는데 잘 읽지를 않고 있다.

솔직히 지금은 바쁜 건 아닌데 그냥 머리가 지끈거려서 잘 들춰보지를 못한다.

열심히 놀고만 있다.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제법 재밌는 책이었달까. 책에서 강신주는 말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긴가민가한 사람들을 자기쪽으로 끌여들여야 되지 않겠나, 비슷한 말을 말이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불호쪽인데 - 강신주에 대한 감정이 불호인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 그런 내가 읽어도 정말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달까. 강신주 본인의 저작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소 과격한(?) 사랑론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하던데, 결과적으로 강신주에 대한 불호감[...]은 더 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시간이었다. 왜 강신주에 대한 감정이 불호냐고? 나는 너무 강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사람이 독단적이어야 할 때도 필요하지만 그런 독단성은 충분한 근거와 증거 그리고 신비한 마술에 이를 정도로 착착 갖추어진 합리적 확신이 바탕이 되었을 때 정당화 되는 것이다. 굳이 이 예를 들자면 폴 디랙이 자신이 개발한 방정식이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틀릴 수 없다고 여겼던 것 처럼 말이다 - 결국 양전자가 발견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N포털의 캐스트를 참조하라)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이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확신이 저만큼이나 아름다운 확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일단 여러 입장을 동시에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가진다. (물론 더 '마음에 드는' 혹은 속된 말로 '촉' 이 오는 이론이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의 이론이 정말로 합리적이라면 결과적으로는 어느 누구든 호로 바뀔 것이다. 나는 차라리 그가 말하는 주류의 입장 - 그가 말하는 주장도 옳을 수 있다 - 가 더 마음에 든다. 더 유연하다, 랄까나. 과학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연함이다. 그런데 철학은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철학에서는 꼭 유연함이 가장 중요하다고는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달까. 강신주가 아무리 양자역학책을 들여다본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철학자이고 인문학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철학자로 살 것이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이 책도 생각 외로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아직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으나 별 기대없이 읽고 있는데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었다, 랄까나.

그런데 이 경우 로쟈가 글을 잘써서 재미있는 것인지, 아니면 로쟈가 읽으려고 하는 대상인 지젝의 사상이 흥미로운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하나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실재의 해석에 가져다 붙인 부분이 앞에 나오는데,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대한 부분에 대하여 좀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지젝의 해석은 어느 쪽이든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이 난달까. 아니, 가져다 붙인 것은 둘째치고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지젝은 특수상대성이론이 물체 - 휜 공간, 이며, 일반상대성이론은 이것이 전환되어서 휜 공간 - 물체, 의 쌍을 이루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이야 기하로 힘을 설명하는 이론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특수상대성이론은 저런 내용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부터 공간과 물체의 관계가 이야기되지는 않는다. 공간과 물체가 설명되는 것은 중력과 가속력을 구분할 수 없다, 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많이들 아인슈타인의 휜 공간에 감명을 얻어 많이들 쓰는 것 같은데..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이라는 책에도 범주를 설명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들이 적혀져 있다.) 사실 상대성이론에서의 휜 공간은 생각의 확장의 부수적 산물이다. 이게 근본은 아니다. 정말 중심이 되는 것을 꼽자면 관성계, 이리라. 물론 휜 공간, 에 대한 이야기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건 결과물이다.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의 전환, 이라는 것에 너무 초점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이론을 보면 결국 보면 알겠지만 논리적 정합성을 따른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움직여야만 되는데 네가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움직이겠다, 라는 느낌이랄까. 너무 인식의 전환, 에 초점을 둔다면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 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꼴 세트, 신의 가면.

 꼴 세트는 요즘 반값할인중이다. 한 번 구입해놓으면 좋을 것이다. 관상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은 구입하여서 읽어볼 만 하다. 그런데 사실 이 허영만의 꼴, 에서는 뭐랄까, 허영만 본인의 생각과 이 만화를 감수한 관상가 생각의 부딪힘들이 너무 자주 보이는 것 같다. 관상가는 꼴대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데 허영만은 배우는 입장이라서 대놓고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없으니 소심하게(?) 만화의 컷마다 조그만 반항을 그리는 것 같다. '정말 ~~~라면, ~~~들은 다 ~~~하겠네?' 라는 식으로. 아마 인터넷 연재 당시에도 많은 반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꼴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되겠나, 라고. 허영만 본인의 입장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꼴 만화로 유명한 것은 오른쪽 신의 가면, 도 마찬가지이다. 만화, 라는 것에 입각해서 둘 중 어떤 책이 더 잘넘어가는가, 라고 한다면 이 신의 가면, 이 더 재밌다.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허영만의 만화에 비하여, 이 책은 회사와 관련지어서 스토리들이 짜여있기에 말이다. 다만 끝이 좀 미진한 것이 아쉽다. 두 만화를 동시에 놓고 같은 상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상불여심상이다. 관상은 마음상보다 못하다. 그리고 이 뒤에 한 문장이 더 있다. 심상불여용심이라, 마음상은 그 마음씀씀이보다 못하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 그리고 그 이쁜 마음을 실제로 쓰고 있는가, 가 당신의 운명에 가장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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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12 02:30   좋아요 0 | URL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책은 재미있게 읽고 있군요 철학도 유연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것은 무엇이든 다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진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주장하고는 좀 다르려나

글을 잘 써서인가 그 대상이 가진 사상이 재미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재미있네요 먼저 대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글을 쓸 수는 없겠죠(억지로 쓸 때도 있겠군요^^)

사람은 무엇인가 정해져 있는 것을 싫어하죠 만약 그게 좋다면 그렇구나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면 꼭 그게 맞지는 않을 거다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지... 관상도 살아가면서 바뀌지 않나요 그러니 이것도 정해져 있지는 않죠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바뀌겠군요 잘 써야 할 텐데...^^

노는 것도 열심히...


희선

가연 2013-08-12 18:10   좋아요 0 | URL
ㅎㅎ 좋아하는 것과 재미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요.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책의 저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재미있다는 것은 그 책 자체만 보면 되는 것이니, 풋. 확실히 대상을 좋아하니까 재미가 있는 글을 쓸 듯 합니다.

비로그인 2013-08-12 11:19   좋아요 0 | URL
가연님 잘 지내시죠? 전 요즘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고 있어요 너무 재밌어서 아껴가며 천천히 읽고 있답니다 : ) 평소 읽는 속도대로 읽지 않고 어떨 땐 한 쪽을 한 시간에 걸쳐 읽고 또 읽고 하네요.

가연 2013-08-12 18:10   좋아요 0 | URL
오오오오오오오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고 계시는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정말 재미있지요???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으아, 오랜만입니다, 신간평가단.

책읽기, 에 대한 회의가 많이들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책을 읽게 되긴 하네요.

논리만 앞세워 남에게 뭐라고 하는 그런 괴물이 안되야 될텐데

옳은 것만이 유일한 장점인 그런 사람이 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벌써 반성을 좀 하고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깃털.

아무래도 7월에 출간된 신간 중 가장 기대가 되는 책은 이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되는 새들, 그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나도 저 새들처럼 하늘을 날아가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새처럼 날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날개입니다. 새는 날개가 있어 날아가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날개가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일련의 추론 과정을 거쳐 우리는 행글라이더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어 결국 하늘에 날고, 이윽고 하늘을 정복했다고 믿지만, 여전히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정말 하늘을 정복한걸까? 무언가 2퍼센트 부족한 것 같지요. 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 몸 밖의 물체를 이용해 하늘을 날기에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날개가 달려있다면, 전혀 부족한 느낌을 받지는 않겠지요. 이 깃털, 이라는 책은 그 조류의 날개를 구성하는 깃털에 대한 책입니다. 하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날개에 대한 이야기와 그 날개를 이루는 깃털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깃털은 날때만 사용되지는 않겠죠. 만약에 우리가 날개를 가지게 된다면, 그만큼 다른 부분에서든, 다른 장기에서든 사라져야 할 부분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깃털이 가지고 있는 보온기능이라던가, 심지어 장식기능들 때문에. 바로 그 부분도 이 깃털, 이라는 책은 잘 짚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자신을.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자기기만에 대한 책입니다. 보통 기만, 은 사회관계에서, 아니 더 나아가 자연세계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예를 들자면 세균, 기생충 등등도 모두 기만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갑니다. 그런데 기만의 방향이 상대가 아닌 자신을 향한다면? 그런 양식을 취하는 존재가 살아남을수 있을까요? 바로 이 의문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결국 결론을 '자기기만은 진화의 산물이다' 로 마무리짓는듯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진화가 되었다고 해서 꼭 이게 최적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화를 주관하는 신은 눈먼 시계공과 같아서 그저 고칠 뿐이며, 그것이 최선의 답이다, 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자기기만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를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죠. 자기기만연구를 하였던 저자는 결국 마지막 장의 제목을 이렇게 짓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

이 책은 미술사에 대한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목처럼 딱히 예술이론에 대한 책도 아닙니다. 굳이 이 책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책을 골라보자면 솔 크립키가 지은 '논리철학론' 에 대한 해석이겠지요. 말하자면 오독과 정독 그리고 이해가 교차하면서 그려내는 팽팽한 긴장의 책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비교하자면 이 책은 사실 논문들로만 구성되어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한데, 예술이라는 큰 틀에서 각각 다루고 있는 주제들, 미학, 형식, 내용, 양식, 인류학, 미술사, 의미 등 관련된 논문을 모으고 그 글들의 연관방식을 보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에 더욱 각별합니다. 물론 논문이 쉽게 읽히지는 않겠지요. 여러번 느리게 정독하면서 읽어야 할 책으로 여겨집니다.

 

 

 

 

자연과 인간.

일전에 나온 세계사의 구조, 로 날카로웠던 관점을 개진했었던 고진이 이번에 추가로 책을 내어 보충합니다. 바로 이 책, 자연과 인간, 이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보충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좀 더 지평을 넓혔다, 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세계사의 구조, 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보다도 조금 더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진이 이 책들을 통하여 천착하고 있는 부분은 교환, 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환이 있기 위해서는 주는 존재와 받는 존재가 필요하겠지요. 이들은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으며 언제든 전복될 수 있는 긴장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이를 두고 관계, 라고 일컫습니다. 정리하자면, 교환에서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이루는 주체들, 이 고진이 이 책들을 통하여 탐구하고자 하는 것들이 될 듯 합니다. 그러면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도 이 책과 함께 읽어보아야 될 듯 합니다, 만 한편으로는 이 책은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세계사의 구조, 의 꼬리를 덥썩 물기에 이 책 부터 손에 잡아도 좋을 듯 합니다.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아무래도 이 책을 7월에 나온 신간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물론 신간평가단으로 뽑힐 가능성은 한없이 낮으며, 설령 뽑혔다, 라고 하여도 기간 내에 이 책들에 대한 리뷰를 쓰기란 한없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사실 저는 그다지 지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혹은 좋아한다, 라는 감정때문에 그 작가의 책은 모두가 별로다, 라고 말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진실로 '시차적 관점' 은 - 번역에 대한 말들이 많기는 하지만 - 뛰어난 책이고 (지젝 본인이 대작으로 꼽았었다지요) 그 책에서 보여준 날카로움이 여전하다면, 이 책 또한 충분히 기대해볼만한 하겠습니다. 이름하여, Less than nothing시리즈를요.

 

 

 

 

 

 

요즘 시간이 좀.. 사랑니때문에 입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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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06 01:57   좋아요 0 | URL
<깃털>에 대한 책이라... 저는 가연 님이 쓰지 않았다면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몰랐겠군요 두번째 책을 보니 제가 본 책에 나온 게 있어서 밑에 썼습니다


“슬플 때는 슬프다, 슬프다, 하고 바보처럼 말하게. 기쁠 때는 기쁘다, 기쁘다, 하고 말하게.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돼. 스스로 자신을 속이게. 그것밖에 없어.”

“속인다.”

이야기하는 거야, 하고 지헤이는 말했다.
.
.
.

“믿는다는 것은 속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세. 서로 믿는다는 것은 서로 속인다. 서로 속는다는 뜻이야. 이 세상은 모두 거짓일세. 거짓에서 진실이 나오지는 않지. 진실이란 모두 속은 놈이 보는 환상일세. 그러니──.” (247쪽)


“진정한 자신이니 진실한 나니, 그런 것에 집착하는 놈은 무엇보다 바보일세. 그런 것은 없어. 자신을 바란다면 자기가 자기를 속여야 해. 속이는 게 서툴다면 서툰 대로──.” (248쪽)

《엿보는 고헤이지》(교고쿠 나쓰히코) 에서


이거 나중에 쓰게 될 테지만... '지헤이가 말했다' 다음에는 자기 부모에 대해 말한답니다 부모는 이말저말 나오는 대로 좋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그 말을 사람들은 좋아한다고... 거짓말일지라도 그게 좋은 말이면 좋은 거다, 그리고 진짜가 되기도 하죠 그게 말이 가진 힘인 거죠 생각해보니 “믿는다는 것은... 속은 놈이 보는 환상일세.” 이 부분 소설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런데 제가 쓴 것을 보니 이 말하고는 거의 상관없이 썼군요 읽을 때는 그런가, 했는데... 쓸데없는 말을 조금 늘어놓았죠 고헤이지 씨한테, 하고 싶은 말은 아주 적었는데... 언젠가 올려두겠죠

하지만 자기를 속이는 것과 싸우기라고도 하는군요 좋은 것은 괜찮지만 나쁜 것은 안 좋겠죠

사랑니가 아프다니, 혹시 사랑이라도(이것은 날 때인가)...^^
저도 잘 모르지만 치과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희선

가연 2013-08-11 20:39   좋아요 0 | URL
교고쿠 나쓰히코, 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책들은 거의 못본 것 같네요, 그런데 정말 두번째 인용문에는 동감합니다. 진정한 자신 등에는 집착을 하여선 안될 것 같아요. 사랑니는 또 괜찮네요, 풋.

희선 2013-08-12 03:05   좋아요 0 | URL
저는 우연히 알게 돼서 책을 읽었는데, 교고쿠도 시리즈가 재미있어요 음양사, 작가, 탐정, 형사가 나옵니다 읽을 때는 이런 생각 못했는데... 네 사람이 다 친구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하니 부럽군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요괴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진짜 요괴라기보다 사람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죠(이런 것은 미야베 미유키도 비슷하군요) 사람 마음일 수도 있고, 요괴나 괴담을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탐정이 나오지만 실제 탐정 노릇을 하는 사람은 교고쿠도입니다 본래 하는 일은 고서점인데 음양사이기도 합니다 아는 것이 참 많더군요 자꾸 생각나서 더하게 되는군요 교고쿠도라고 하지만, 이름은 추젠지 아키히코군요 교고쿠도는 책방 이름입니다

사랑니는 그냥 잠깐 아팠던 건가 보네요 다행이네요


희선

가연 2013-08-12 18:12   좋아요 0 | URL
희선님의 서재에 들러보니까 일본 소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더군요. 그런 희선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은 정확하겠지요. 교고쿠도 시리즈는 저도 언제 기회가 되어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테레사 2013-08-09 09:54   좋아요 0 | URL
가연님, 시간이 없다고 하시면서도..늘 많은 정보와 평가를 해 주시잖아요?ㅎㅎ 글이 늘 깔끔하고 정직해요.

가연 2013-08-11 20:37   좋아요 0 | URL
어허허... 테레사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제가 요즘 알라딘 생활을 잘 안해서.. 이렇게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주명철 지음 / 소나무 / 201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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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테판 츠바이크의 명성에 비하면 조금 그 빛이 바래는 감이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역사 전기 작가인 막스 갈로의 명성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유려하면서도 짧은 호흡으로 쓰여지는 그의 역사 소설들은 쉽게 읽히기도 하고, 동시에 독자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이번에 출간된 프랑스 대혁명, 도 바로 이 막스 갈로의 책인데, 여간한 야심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말 거대한 사건을 하나의 줄기를 잡아서 그대로 써내려간 작품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에 고증이 부족한 것은 또 아니다. 하나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는 정말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그걸 다시 머리속에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재구성한 결과물들을 우리 눈에 보여준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리고 그 소설은 우리 마음에 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아무리 막스 갈로가 뛰어난 역사가이자 작가라고 할지라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날카로운 인물평에는 한 수 접어주어야 할 것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평생 수많은 인물들의 전기를 썼는데, 어쩌면 그가 그렇게 전기에 집착한 것은 시대의 광기에서 눈을 돌리려는 시도였을런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히틀러의 시대였고, 수많은 죽음과 두려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난의 시대에서 재능을 가진 인물은 그 고난을 내면화하고, 이윽고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법, 그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수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막스 갈로는 소설가이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인데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가 있을까? 물론 직접적 비교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막스 갈로의 기존 저작들 - 로마 인물 시리즈, 나폴레옹 등 - 을 볼때, 막스 갈로도 인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경향을 참작한다면 주로 전기를 많이 써왔던 슈테판 츠바이크를 인물, 이라는 스펙트럼을 중심으로 함께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두 작가를 비교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다음의 두 책을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언급한 막스 갈로의 '프랑스 대혁명' 이라는 책과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루이 16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루이 16세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막스 갈로를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이다. 특히나 루이 16세에 대한 두 작가의 상반된 태도를 보면 더욱더 그런 확신이 들게 되리라. 그런데 이 루이 16세는 단순히 두 작가의 성향만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프랑스 혁명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려내는 루이 16세는 (비록 책이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인공이라서 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상당히 나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남성으로서의 능력(엄밀히 말하자면 생식능력)의 부족에 기인하여 그는 평생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주권을 빼앗기며,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왠만하면 다 들어주었던 것 처럼 그려지고 있다. 루이 16세가 사냥을 좋아하고, 대장간 일과 같은 남성적 힘이 필요한 취미를 가졌던 것 모두 남성적 능력이 부족하기에, 그 사실에 대한 심리적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라고 보고 있다. 결국 일종의 소시민이자 공처가가 뒤섞인 면모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루이 16세에 대한 평에 쐐기를 박는다. '이들 부부는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 왕과 왕비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라고.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에서는 몇 번이고 루이 16세의 실책이 나온다. 유명한 목걸이 사건(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환심을 사려고 추기경이 목걸이를 바치려 했지만 실제로는 사기를 당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을 들지 않았다면 귀족들이 왕을 등지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에 삼부회 소집시 총칼로 민중을 해산시켰다면 적어도 당대에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약함과 부인에 대한 애정(이라고 보기에도 미묘한 감정) 때문이었고 이 나약함은 이윽고 자신의 목마저 내어주게 된다. 나중에 억류되어서 도망을 칠 때, 왕가의 일원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그리고 결국 베르사유 궁전에 쳐들어왔을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면, 역사는 정말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물들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한 문맥을 통해서 계속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막스 갈로의 루이 16세는 위에 비하여 훨씬 입체적인데, 막스 갈로는 그의 역사소설 프랑스 대혁명, 의 전기 부분에서 루이 16세의 학구적인 면모를 먼저 언급한다. 이는 도리어 그의 학구적인 면모가 루이 16세를 나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무게를 싣게 되는 부분인데, 어려서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했었던 루이 16세는 이웃나라의 혁명을 보고 깊이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국의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올리버 크롬웰은 왕의 목을 자르고 호국공에 올라 공포정치를 펼쳤다. 아마 이 장면을 보고 루이 16세는 자신의 목 또한 저렇게 잘릴 수 있지 않을까,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지는 않았을까? 두려움을 가지게 된 사람은 보통 두 가지로 반응을 하게 되는데, 하나는 그 두려움의 싹을 잘라내려고 모진 반응을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에 먹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고,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시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루이 16세의 반응은 후자에 더 가깝다.

 

영국의 혁명들, 그러니까 청교도 혁명이나 명예 혁명 모두는 사실 그 주체가 민중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 16세가 저들의 역사를 보고 민중의 힘에 감명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목이 잘렸다, 라는 것이고, 왕과 국가를 동일선상에 놓는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국가' 자체가 목이 잘려버린 것이다. 여기서 루이 16세는 어떤 세력이든 간에, 자신에게 강하게 나오는 그런 세력들에게 결국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그들과 동일시한다면 최소한 목이 잘리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리고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우연찮게 그 세력이 민중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같은 세력들에게 최대한 나약하게 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막스 갈로의 루이 16세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치기는 하지만 기존의 낡은 사고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행동한 결과 멸망해버린 존재로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와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고나 할까.

 

위의 두 작가가 그려내는 루이 16세는, '나약함' 이라는 결과에 이르면 결국 동일한 인물이 되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는 사뭇 다른 궤도를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루이 16세는 그저 냉담하고 감정 자체가 무딘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을 빌리자면 점액질 성격의) 그래서 어떤 사건이 터지더라도 그걸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인물이지만, 막스 갈로의 루이 16세는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능동적으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엔 실패해버렸지만 말이다. 과연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두 작가가 그려내는 루이 16세 중 어떤 루이 16세를 고르는 것이 좋을까?

 

여기서 우리는 이 책,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을 가져올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짧은 분량의 개괄서에 가까운 이 책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전반적 지식을 알려준다. 그런데 방금 개괄서에 가깝다고 했다. 그렇다. 이 책이라고 해서 위의 두 루이 16세 중 어떤 루이를 고르는 것이 옳을지는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이런 갈림길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오늘 만나는 혁명, 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미에 꺼낸다. '우리는 언제나 다양한 의견을 조절하면서 더 좋은 결론을 이끌어내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즉, 이 책이 제공하는 프레임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던 구체제(혁명 이전의 체제)에서는 왕의 의견이 최고였었다. -> 거기에 대항한 프랑스 혁명은 민중들의 혁명이다 -> 이 혁명이 의의를 가지는 것은 다양한 의견때문이다 -> 우리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결국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려면 루이 16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를 살아간 민중을 이해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당시를 살아간 민중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당시 민중들에게는 세 가지 막연한 두려움 - 굶주림, 질병, 전쟁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그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하거나, 혹은 그 두려움 자체에 그대로 삼켜져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민중들의 두려움에 대한 대응방식은 전자였다. 이런 두려움은 그들에게 음모론적인 관념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윽고 귀족들이 자신을 착취하지는 않는가, 에 대한 생각을 계속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닥친 기근은 프랑스 민중들을 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아붙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 이르렀기에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만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조각을 온전히 그러모으기는 어렵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문제점이 있는데, 아마 개괄서로서의 한계이리라. 분명 혁명은 군데군데 허점이 있었다. 왕이 조금만 제정신을 차려서 대포라도 발포했다면? 적극적으로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고 용병을 부려 잔혹하게 복수했다면 아무리 계몽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일지라도 분명 숨죽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가 한 일은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그저 국회에 대한 존중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내가 너희들을 존중해줄테니 너희들도 나를 존중해달라.

 

또한 민중과 왕, 이 두 세력 말고도 혁명의 배후에 존재한 세력이 있다. 바로 귀족이다. 앞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언급한 목걸이 사건, 이후로 수많은 귀족이 왕에게 등을 돌렸고, 왕의 동생과 조카는 이를 통해서 야심을 키워나갔다. 현재 있는 왕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에게는 이득이 될테니 무르익은 혁명의 분위기에 대해서 그들은 도리어 좋아하였으리라. 결국 왕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은 이후에 루이 18세가 된다. 자, 생각해보라, 수많은 농민들, 그리고 생산자들이 그들의 생업에서 손을 떼고 거리로 나와 몽둥이를 들고 돌아다닌다. 과연 누가 이들을 먹여살렸겠는가? 이들이 숨겨둔 재산이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지원해준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들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세력은 아마 귀족이나 지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귀족이 자신의 지위를 노리는 민중들을 지원해줬을까? 그들이 단체로 돌아버린 것일까?

 

이 책에서는 귀족에 대한 설명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 또한 이 책의 허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저 의문, 왜 민중을 귀족이 지원해주었을까, 에 대한 해답은 어느 정도 제시해준다. 먼저 당시에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졌다는 것에 있다. 이 책에서는 당시의 루소,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사람들의 사상이 퍼지면서 평민이라고 해도 귀족들의 살롱에 들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물론 상당한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했겠지만) 이런 사상의 향유는 귀족들의 마음을 실제로 움직였을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귀족의 경우 그저 이런 사상을 악세서리 정도로 생각했고, 이런 교양을 통하여 자신의 품격을 더 높인다, 라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말이다. 물론 또 다른 해답은 앞서 말한 부분인 적의 적은 친구, 왕에 대한 불만이 나타날수록 이득을 보는 세력이 민중을 지원해주었을 가능성이리라. 

 

하지만 이런 허점에 대한 책임을 모두 이 책에 돌리는 것은 어쩌면 부당할런지도 모른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입문서에 가깝기 때문일테고 - 서문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 무엇보다도 분명 이 책의 의의는 왕에 대비되는 민중의 눈으로 보는 혁명, 이라는 프레임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이 책이 이렇게 민중을 중심에 두고 혁명사를 이야기하려고 할까? 그것은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나라 또한 혁명이라면 이미 몇 번이나 겪었지 않는가. 특히나 대표적인 4. 19 혁명처럼 말이다. 4. 19 혁명은 대표적인 민중의 힘에 의한 혁명이다. 이 4. 19 혁명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정신이 완전히 싹을 틔우게 되었다. 이 민주주의 혁명은 어디에 기원하는가? 이 책은 그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뒤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귀가 있다. 루이, 당신만 신성한가? 우리도 신성하다. 라는 말이다. 물론 책 본문에 나오는 말이지만,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저 문장 이상의 문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위정자들, 당신만 신성한가? 사실은 우리가 더 신성하다. 라고. 프랑스 혁명은 언제나 위정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줄 것이다. 굳이 프랑스 혁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것은 이런 일들을 잊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옛날에 비하여 훨씬 배움의 수준도 높고, 다양한 의견의 소중함,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소중한 이유를 더욱 깊이 깨치고 있다. 이미 어떤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리라. 이 책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때 흘린 피들을 잊지 않는 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감정이입'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되돌이킨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내면의 힘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p.s. 첫 문단만 세 번 고쳐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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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1 22:26   좋아요 0 | URL
와우~ 역시 가연님! 이 글만 읽어도 두 책의 장단점 및 프랑스혁명의 뒷면이 절로 그려져요!

가연 2013-08-05 00:08   좋아요 0 | URL
사실 이 글은 너무 많이 고쳐서 도리어 문단이 좀 뚝뚝끊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잘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희선 2013-08-03 00:05   좋아요 0 | URL
프랑스 혁명 잘 모르지만, 민중이 일으켰다 해도 다른 문제가 많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귀족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하지만 그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살아야 하니까 왕이 사람들 말을 잘 들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왕이 보통 사람들을 잘 볼 수 없기는 하죠

프랑스 혁명이 있어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니... 프랑스 혁명이 우리와 아주 먼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세계는 하나, 죠^^


희선

가연 2013-08-05 00:11   좋아요 0 | URL
프랑스 혁명때문에 4.19가 생긴 것은 아닌 것 같구.. 다만 4.19혁명의 민주정신은 프랑스 혁명에 빚지고 있다, 라는 의도로 글을 썼는데 잘 전달이 안된 것 같군요. 다 제 글 솜씨가 아직은 모자라서 그런 것 같네요.

왕은 보통 사람을 보기가 쉽지는 않죠. 글쎄, 요즘 역사를 보다가 느끼는 것은 정말, 약간만 방향이 바뀌더라도 정말 나중에 크게 바뀔 것 같다는 그런 생각들... 그러나 언제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겠죠?

희선 2013-08-05 00:51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 정신이군요 제가 앞에 있는 말보다 뒤에 있는 말을 더 본 것은 아닌가 싶군요 그리고 다른 생각을 했는데, 때가 다르군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그것은 거의 100년 뒤였네요 왜 그게 생각났는지... 아마 백성들이 한 일이기 때문이겠죠


희선

가연 2013-08-05 13:17   좋아요 0 | URL
4.19혁명은 1960년이구.. 프랑스 혁명은 1789년이니 굳이 따진다면 200년이 더 가깝겠네요, 풋. 저는 개인적으로 4.19를 더 높게 평가하는 편이지만.. 이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네요. 하지만 어떤 혁명이든지... 프랑스 혁명에 그 정신의 빚은 어느정도는 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2013-09-07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0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