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습니다.

가문 들녘을 적시는 단비였습니다.  우산을 쓰고 나서니 '싸르르 싸르르' 키 위에서 콩을 까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문득 떠오른 시는 그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수복의 <봄비> 한 구절이었습니다.

 

봄  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빗길을 천천히 걷노라니 세상은 온통 풍요롭습니다.  또한 고요합니다.

가로등의 여린 불빛으로도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다 녹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집 근처에 이르러서야 '도서관에서 시집이라도 한 권 빌려 올 걸'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것처럼 이 짧은 계절이 다 지나고 난 후 가버린 계절을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칼 비테의 공부의 즐거움>을 마저 읽어야 할까 봅니다.

어쩌면 빗소리에 취하여 읽어야 할 책마저 까맣게 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습니다.  물웅덩이에 파문처럼 일던 물동그라미를 밤새 생각한들 또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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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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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출현은 필연적인 듯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과거 7,80년대의 군부 독재 시절에 우리나라 국민의 인권은 그야말로 개의 밥그릇에 버려진 생선 가시보다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지하철역을 빠져 나올라치면 전경의 검문검색이 수시로 있었고, 어쩌다 조금 따분하고 지루해 하는 전경과 마주친 여대생이라면 어김없이 그들의 놀잇감이 되곤 했습니다.  검문을 한다는 핑계로 핸드백을 열어보는가 하면 그 안에서 혹시 담뱃갑이라도 발견되면 옳다구나 하고는 행인들에게 이것 좀 보라는 식으로 길바닥에 쏟아놓고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그들의 눈에 비친 여대생은 소위 '날라리'로 오인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절이 변하여 인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법과 정치 제도도 크게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이 지닌 권력과 부를 지키려는 욕심은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해졌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 국정원의 타겟이 된 유모 씨의 경우도 그런 것이겠지요.  어찌 보면 현실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더 실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을 그린 소설은 많이 있지만 저는 오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통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에게 어느 날 친구 '쥐'(별명)의 편지가 배달됩니다.  발신지도 밝히지 않은 의문의 편지였죠.  광고업을 하는 '나'는 P보험사의 PR광고에 우연히 그 친구의 편지에 동봉된 양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진이 발단이 되어 우익계의 거물로부터 압력을 받습니다.  사진에는 별의 문양이 찍힌 특별한 양이 포착되었던 것입니다.  그 양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자신이 의도하는 세계를 만들려는 그야말로 특별한 양이었죠.

 

사실 우익의 거물은 노쇠하여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었습니다.  후계자를 찾고 있던 중 그 사진이 눈에 띈 것입니다.  그 양은 죽어가는 우익계의 거물 머리 속에 기생하며 살다가 가치를 다한 그의 몸뚱아리로부터 빠져나왔기 때문에 양이 선택한 새로운 인물이 우익계의 거물을 대신할 후계자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우익계 거물의 비서실장은 '나'에게 한 달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양을 찾으라고 합니다.  '나'는 친구 '쥐'의 행방을 찾아 삿포로로 향합니다.  '내'가 묵었던 돌핀 호텔에서 한때 양의 숙주였던 양 박사를 우연히 만나 사진 속의 장소를 알아냅니다.  그곳은 '쥐'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쥐'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쥐'를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텅 빈 별장에서 무작정 기다리던 '나'는 양으로 변장한 한 사내를 만납니다.  그 사내는 죽은 '쥐'의 분신이었습니다.  언제나 나약하기만 했던 '쥐'는 자신의 몸 속에 양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본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몸에 들어온 양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삶을 단호히 거부한 것입니다.  죽은 '쥐'는 자신이 양에게 지배당했던 상태를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킨 도가니 같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한 거야.  거기에 몸을 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  의식도 가치관도 감정도 고통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거야.  우주의 한 지점에 모든 생명의 근원이 출현했을 때의 다이너미즘에 가깝지."    (p.422) 

 

어쩌면 나에게도 어렵고 힘든 상황,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면 영혼이라도 팔아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에게는 또한 그런 유혹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용기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책 속의 '쥐'처럼 말입니다.  책에서 주인공인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평범한 소시민일 뿐입니다.  '나'의 행보는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짜여진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날개 달린 종자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날려오듯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대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그렇듯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똑같은 요리 같은 것이다."    (p.101)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머리 속에 다들 욕심 많은 양을 한 마리씩 품고 있는 숙주와 같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여지는 사람이 사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를 장악한 양이 나쁜 것이겠지요.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의 인권을 깔아뭉개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테구요.  인간의 감정과 가치관이 남아있다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양의 탈을 쓴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빅 브라더',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빅 시스터'인 탐욕스러운 양이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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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그렇다고 무슨 자격증 획득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영어회화 등 목적이 있는 공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공부에 관련된 책에 눈길이 간다는 것일 뿐 실제적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황농문 교수의 <공부하는 힘>은 다 읽고 리뷰도 올렸지만 그 외에도 '칙센트미하이의 몰입(flow)', 마리아 코니코바의 '생각의 재구성' 등 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책들을 딴에는 열심히(?) 읽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또래의 사람들은 20년 이상을 공부하는 데 시간과 열정을 소비했음에도 자신이 최종적으로 공부에 재능이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지금도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장 20년 이상을 공부했음에도 말이다.  인간의 수명을 80년으로 가정할 때 인생의 1/4을 하나의 활동에만 헌신했음에도 그 활동에 있어 자신의 능력이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 전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인생에 있어 도대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최종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주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창시절 자발적 노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지 못하였거나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상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일종의 자기기만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재능의 유무와 직업 선택의 적절성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내가 어렸을 때 남학생들의 대부분은 직업과 관련된 자신의 꿈이 판,검사나 변호사, 혹은 의사와 같은 소위 '사'자가 들어간 직업을 선호했고, 여학생들은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세상에, 현모양처가 꿈이라니!  요즘 학생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답이 아닌가.

 

아무튼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자신이 갖게 되는 직업은 공부에 대한 재능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를테면 부모의 경제적 능력, 부모의 교육 정도, 인맥, 사회적 압력(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적 환경, 기타의 배경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예컨대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환경이라는 거대한 홍수에 떠밀려 잠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직업인이 된다는 얘기다.  학생 신분에서 사회인으로의 갑작스러운 점프.

 

공부와는 조금쯤 멀어질 만한 나이에 공부에 관심을 두는 것도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에도 그랬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공부가 재밌는 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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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힘 - 몰입 전문가 황농문 교수가 전하는 궁극의 학습법
황농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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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 속에서 볏짚 타는 냄새가 날 때가 있습니다.  산다는 건 결국 시간의 불꽃이 태우고 간 세월의 재를 끌어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를 때도 있을 터이고, 화롯불처럼 은근히 타오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질료를 무엇으로 태우느냐에 따라 타고 남은 재의 빛깔과 향기는 천차만별이겠지요.  때로는 회색빛 고운 재가 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채 불타지 못한 시간이 그을음처럼 남아 가슴에 깊은 후회와 자책의 응어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조금 쓸쓸해지는군요.  순간 순간을 꿈인 양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몰입>으로 유명한 황농문 교수의 <공부하는 힘>을 읽었습니다.  요즘 들어 사는 게 재미없고, 무엇엔가 열정적으로 매달릴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제 만났던 친구는 그러더군요.  연애를 해보라고.  그러나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결혼을 한 사람이 연애라니요.  언감생심이지요.  아무튼 <공부하는 힘>은 꽤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의 추억도 떠올랐구요.

 

얼핏 제목만 들으면 이 책은 공부의 요령이 절실한 수험생이나 학생들에게 필요한 책 같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능동적으로 집중하고 몰입함으로써 해결책을 찾는 동시에 삶의 무게에 눌려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바로 세우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의 나처럼 말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저는 강원도의 한 암자에서 그곳에 계시던 스님으로부터 참선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제대로 배웠다고는 감히 말할 수조차 없지만 아무튼 저는 그때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에 혹해서 딴에는 꽤나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해보는 결가부좌의 불편한 자세로 하루 10시간씩 꼬박 3일을 앉아 있었던 적도 있으니까요.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스님은 농담 삼아 '전생에 스님이 아니었냐' 묻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저는 화두선의 최고봉인 삼매(三昧)에 이른 적도 없고, 단순히 공부에 도움이 되려니 하는 욕심에 열심이었던 것이지만 그때의 경험은 공부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몰입은 제가 그 시절에 경험했던 수도자의 방법론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저와 같은 일반인이 감히 따라할 수조차 없는 고난도의 몰입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몰입의 중요성과, 몰입에 이르는 기본적인 방법과 수험생에게 필요한 몰입을 이용한 공부 방법 및 몰입을 이용한 공부의 성공 사례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어떤 문제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여러 상념들을 잊을 수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참선을 배우면서도 그러했습니다.  저는 그때 저 자신이 하루에 그렇게나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에 의식을 집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었던 경험이었지요.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니 그 시절의 제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문제들, 그것이 비단 공부뿐이겠습니까.  조금 더 나이가 든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라'고.  '더 큰 문제들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학창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이상 그런 문제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을 그런 문제들에 수동적으로 휘둘리면서 허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구태의연한 말은 이제 더 이상 감동도 없다구요?

 

제 경험으로는 어떤 하나의 문제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면 나를 둘러싼 다른 여러 문제들을 한시적으로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그 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던 것 같았구요.  오히려 해결책을 찾는 그 시간이 즐거웠던 듯도 합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말이죠.  그렇게 나를 잊고, 산재한 여러 문제들을 잊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인 듯 보입니다.  즐기면서 말이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입니다.  참고로 저자가 말하는 '수험생을 위한 하루 15시간 공부 비법'을 요약하여 올립니다. 

         

1. 수면이 부족해서는 안된다.

2. 매일 규칙적으로 30분간 운동한다.

3. 온몸에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슬로우 싱킹'방식으로 공부한다.

4. 두뇌 가동률을 최대로 올려야 한다.

5. 과목은 수시로 바꾸지 말고 한 과목을 충분히 오래 공부한다

6. 암기보다는 이해와 사고 위주의 학습을 한다.

7. 자투리 시간에 몰입도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8. 선택과 집중을 한다.

9. 반복 학습을 한다.

10. 공부에 대한 최대 구동력이 만들어지도록 의도적인 노력을 수시로 한다.

 

이렇게 요약하고 보니 여타의 자기계발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직접 읽어보지 않으면 위에서 요약한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 풍요나 커다란 권력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순간 순간을 그저 즐기면서 살 뿐이죠.  이 책은 그 길로 가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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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3 17:18   좋아요 0 | URL
그저그런책이아닐까하여 아직 펼쳐보지못했는데 이글읽고 황농문선생책을 일독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해요 ~

꼼쥐 2014-05-06 17:31   좋아요 0 | URL
학생들이 하는 공부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쯤 읽어볼만한 좋은 책이지요. ^^
 

최근에 들었던 몇몇 소식들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공과금 70만원이 담긴 봉투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세 모녀에 이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동반 자살한 사람들이 줄줄이 이어졌지요?  그들의 죽음 자체도 안타까운 게 사실이지만 저는 그들이 죽음을 결심하기 전까지 겪었을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말도 있지만 그들을 벼랑끝으로 몰았던 책임은 분명 살아 남은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잠시 잠깐 느꼈던 아픔을 글로 옮기는 것도 생각해 보면 한 줄 감상에 불과한 것일 터이고, 지극한 아픔인 양 과장하는 것도 한낱 위선에 불과할 터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제 자신의 아린 가슴과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분노는 쉬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봄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오늘, 투명한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오늘의 풍경은 마치 중고품을 약용 알코올로 닦아 놓은 듯 곰팡내가 풀풀 풍길 것만 같았습니다.  그 풍경을 가로질러 하루 종일 괴기영화에 나오는 덩치 큰 괴물의 휘파람 소리 같은 바람이 훑고 지나갔습니다.  스산한 하루였어요.  몸도, 마음도 겨울 맹추위 속에 놓인 듯 했었지요.

 

시간이 여유로울 때, 적선하듯 제 숙소 주변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제 자신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채 외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든 어린 시절을 경험했던 제가 이렇게 모질고 냉정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파리한 초승달만 덩그러니 걸린 하늘이 몹시 슬퍼 보입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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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3-2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은 그 자체가 가난은 나랏님만이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랏님이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꼼쥐 2014-03-26 14:1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아마도 그 말은 아무리 능력이 있는 나랏님조차도 누군가를 가난으로부터 영원히 구제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선거를 통하여 통치자를 뽑는 이유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조금쯤 돌보고,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힘쓰라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