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세월호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다녀왔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짙어가는 어둠 저편으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뚝 떨어진 기온만큼이나 스산한 날씨였습니다.  분향소 안을 떠돌던 무기력과 슬픔이 돌아서는 내 어깨에 천 근의 무게로 내려앉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무력감이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바닷물처럼 차올랐습니다.

 

차창 밖으로 이팝나무 가로수가 비를 맞으며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찬물에 만 밥알갱이들처럼 푸스스 흩어지는 이팝나무꽃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요.  예년 같으면 나는 그 꽃을 보며 찬란한 5월을 준비하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올해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요.  처음인 듯 생경한 느낌.  흐르는 세월이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잊게 하고, 권력과 탐욕에 찌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백기를 들겠지만, 그 과정을 겪는 우리에게 세월은 참으로 더디게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어찌어찌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던 최근 며칠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제단에 피어오르던 향냄새와 수북이 쌓여만 가던 국화꽃이 머릿속에서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살다 보면 별의별일을 다 겪게 마련이지만 생과사의 갈림길에 서면 모든 게 다 헛된 것처럼 허허로운 느낌만 가득합니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허방을 짚은 듯 나를 꼿꼿이 세울 수가 없군요.

 

한 일도 없이 오전이 다 흘렀습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이 머릿속을 콕콕 찌르는 듯 헤집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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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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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를 만난다는 것은 '소설을 통한 인문학적 채험'을 하는 색다른 경험입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던,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증폭시켜 대담하게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도록 만드는,  설렘과 기대로 '인문학'에 한발 다가서게 하는 그런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저로 하여금 줄리언 반스를 처음 알게 해준 책은 <내말 좀 들어봐>였습니다.  출간된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군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소설임에도 결코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과 재치가 넘치는 표현들, 무엇보다도 철학과 상식을 넘나드는 작가의 지성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줄리언 반스의 신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제 예상대로 호평이 쏟아지더군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은 소설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예사로 넘기기 힘든, 말하자면 소설을 통째로 옮겨 적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게 하는 소설이지만 리뷰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는 그런 짓거리는 통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 쓰는 리뷰에 제가 특히 마음에 두었던 작품 속의 구절을 최대한 많이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다음의 인용문부터 보시죠.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 같은 구절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바라보는 과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컨대 그 시절의 나는 경험이 부족해서, 보통의 젊은이가 갖는 치기 어린 과대한 감정 표출로 인하여, 혹은 으스대며 뻐기고 싶은 영웅심의 발로였다는 말로 우리의 과오나 실수를 합리화한다는 것은 조금쯤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과거의 사실을 가감하고, 기름을 치며, 때로는 망각이라는 그늘 뒤로 숨기도 합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미약하고 터무니 없는 것인지요.  게다가 그 기억을 바로잡아 줄 친구들도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결국엔 그 기억들이라는 게 나 스스로에게 했던 독백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p.106~p.107)

 

위에 인용한 글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는 학창 시절 '역사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른 그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고 번복합니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다른 인물인 에이드리언은 같은 질문에 대해'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선생님은 덧붙입니다.  '역사는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p.141)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는 평번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시간과 역사 속에 존재했었지만 기록되지도, 또는 기억되지도 않는 개인의 삶은 무의미한 것으로 남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삶은 역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이며, 개인은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까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확신하는 순간 삶을 거부해야 마땅할까요?  소설 속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친구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게 되면서 저주에 가득찬 편지를 보냅니다.  공교롭게도 토니가 편지에 썼던 예언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고, 에이드리언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노년에 이르러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편지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토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p.153)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주인공 토니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자책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일견 회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찌 됐건 살아 있는 자에게는 또 다른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토니의 아내였던 마거릿은 말합니다.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입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자신이 저질렀던 젊은 시절의 과오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토니의 노년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 애기의 요지는,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내가 틀린 거라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회한을 단순한 죄책감의 문제로 바꾸어, 사과를 하고 용서받을 방도가 있다면?  베로니카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기꺼이 그를 믿어준다면?"    (p.186) 

 

저는 이렇게 리뷰를 마칠까 합니다.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이진 이 소설은 제 리뷰와는 다르게 읽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겠군요.  제 바람입니다.  부디 예감이 틀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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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라고 다르진 않습니다.  며칠째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은 채, 마치 물 속에 잠겨 숨만 쉬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며칠 새에 등꽃이 피어, 혹은 지려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 양 제 멋대로 피었다 또 제 멋대로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덕 심한 봄날씨에도 그저 흘러가는 세월쯤으로 치부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더군요.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말수가 줄다 못해 아예 입을 닫아버린 사람들, 멀뚱히 TV 화면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대한민국은 지금 슬픔의 어항 속에 갇힌 굼뜬 열대어들로 가득차 있는 듯 보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미없는 글이라도 끄적거리지 않으면, 어제 오늘 유난히 따가운 햇살을 더듬지 않으면, 봄꽃 만발한 화단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 어디서부터 우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상실의 고통은 아무리 많이 겪어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지만 언 땅을 뚫고 소생하는 복수초처럼 꺼져가는 생명력에 다시 기운을 북돋울 때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근 일주일만에 잡은 책.  여전히 생각은 부유하는 슬픔의 어항 속에서 까닭도 없이 흔들리지만, '생각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봉인하고 살아야겠다고, 이제는 정말 삶을 붙잡고 매달려야 할 때라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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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4-04-2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내는 세월만큼 인간스러워 지는건 아니라는걸 절실히 보고 듣고 있습니다. 정치판이 저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지 , 원래 그런 사람들이 정치에 몸담게 되는지 , 몇몇사람들 정말 무뇌같습니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그러네요

꼼쥐 2014-04-27 13:34   좋아요 0 | URL
살아낸 세월만큼 인간의 영혼이 성숙되는 건 아니라는 데 공감합니다. 인간의 성숙도가 세월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저도 TV를 보면서 분노하는 건 그런 인간들을 정치의 주체로 뽑아놓았다는 현실입니다.
 

세월호의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만 사흘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동안 언론의 보도로부터 일부러 멀어지려 애써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식들이 들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고에 대처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판에 박인 행태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저으기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TV 보도를 보면서 저는 슬픔보다는 오히려 화를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마치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요.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탑승자 수, 구조자 수, 사망자 수가 마치 스트라이크, 볼, 아웃을 표기하는 자막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고인에 대한 애도나 추모의 숙연함보다는 숫자가 올라가는 흥분과 들뜬 분위기만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분통을 터뜨리게 했던 것은 그런 행태에 여러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망자가 29명이든 30명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안타깝고 슬픈 것입니다.  스무 명의 죽음이라고 해서 슬픔도 스무 배가 되는 것도 아니요, 그렇게 될 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아까운 생명의 죽음 앞에서조차 매번 경망스럽고 헛된 짓만 하는 걸까요.

 

오히려 하나의 주관 방송사가 차분하고도 통일되게 슬픈 소식을 전할 수는 없는 걸까요?  흥분하거나 경망스럽지 않게 말입니다.  이런 행태는 중심을 잡아야 하는 정부 관계자들도 다르지 않더군요.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알 길 없지만 탑승자 수나 구조자 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입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국민들에게 사망자의 숫자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인지 저는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까닭도 없이 죽어가야 했던 그 각각의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감보다도, 그 유가족들의 애끓는 심정보다도 사망자의 숫자가 그렇게도 중요했는가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한 생명의 삶조차 한낱 의미도 없는 경쟁에 이용하려는 그들의 사고가 저는 마냥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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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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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이 세월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잠시 팔랑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 아스라한 순간을 하릴없이 지켜보아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정녕 내 뜻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엊그제 있었던 세월호의 침몰 사고 순간부터 나는 눈과 귀를 막은 채 TV와 멀어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입마저 막을 방법은 내게 없었습니다.  잔인하게도 나는 여린 생명이 죽어가는 소식을 내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듣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실시간 중계로 말입니다.  어쩌면 나는 사고 수습이 다 마무리 된, 마치 조문객이 다 물러 간 슬픔의 언저리에 주저앉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고 소식을 접했던 순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 입니다.  슬픔으로부터 멀어지려던 원래의 계획은 책을 몇 장 읽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책을 덮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날 테니 안심 해.'라고 말해 줄 악마의 스포일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사고 소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소설 속의 주인공 때문이었는지 분간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자식을 잃은 어느 학부모의 핏빛 오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남자 주인공 '윌'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국 시골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윌'은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하여 부와 명예, 아름다운 연인까지 그야말로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인해 그는 사지마비 환자가 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살게 됩니다.  '윌'의 자살 기도가 실패한 이후 부모님과 '윌'은 6개월이라는 한시적 유예기간을 두는 데 합의하였고, 그래도 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주는 병원에 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윌'이 태어난 시골 마을의 치안판사로 재직중인 어머니는 그 약속된 시간마저 지켜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윌'의 추가적인 자살 시도를 방지하고, 삶의 의지를 되살려줄 간병인을 찾는 과정에서 '윌'과 만나게 된 사람이 여자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입니다.  고향 마을을 단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전형적인 시골뜨기였습니다.  '루이자'는 간병인 모집 공고가 났을 때 자신의 직장이었던 카페가 문을 닫아 실직 상태에 있었고, 그녀의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던 루이자는 새로운 직업이 절실했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 간의 한시적인 고용 의무를 다하려던 루이자는 '윌'의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 탓에 간병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합니다.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짜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p.84)

 

어느 날 '루이자'는 6개월이라는 자신의 한시적 고용 관계가 끝나면 '윌'과 그의 가족들이 '윌'의 자발적 죽음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루이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로 '루이자'는 '윌'이 안쓰러워 그 결정을 돌리기 위해 헌신합니다.  반면에 '윌'은 그런 '루이자'가 불쌍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 갇혀 평생을 살아갈 '루이자'가 말입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배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p.114)

 

변심한 '윌'의 옛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루이자'의 생일 파티에도 초대하고, 혼자서는 시도조차 어려웠던 문신도 합니다.  행복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급기야 사랑의 감정까지 싹트게 됩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윌'과 엉뚱하고 순진한 '루이자'의 사랑은 그렇게 깊어갑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약 기간의 끝이 다가오면서 '루이자'의 마음은 초조해집니다.  '루이자'는 '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긴 여행을 계획합니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겼던 '윌'을 위해 사지마비 환자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꼼꼼히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결국 '윌'의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인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 바람에 '루이자'는 7년이나 사귀었던 애인과도 결별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쓰라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쓸쓸하지도 않았고, 감당 못할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몇 년씩 사귄 연애를 끝장낼 때 응당 느껴야 할 감정들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몹시 차분했고, 약간은 서글펐고, 어쩌면 조금은 죄책감을 느꼈다.  헤어진 데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도 들고 이토록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도 죄스러웠다."    (p.436)

 

'윌'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루이자'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합니다.  열흘 간의 꿈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복한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였음에도 '윌'은 끝내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루이자'는 '윌'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항에서 결별합니다.  '윌'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서 삶을 마감하려는 '윌'과 자신의 집에서 '윌'을 그리워하는 '루이자'.  '윌'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은 '루이자는 결국 스위스로 향합니다.  '윌'과의 마지막 인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이자'의 동생 '카트리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아들 토머스를 생각하며.

 

"나는 언니가 윌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남자를 좋아했던 적도 있고 같이 자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가끔은 나한테 무슨 감수성 칩이 결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귀던 남자들 때문에 운다는 건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게 유일하게 그 비슷한 사람은 토머스일 텐데, 그 애가 낯선 나라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내 마음 속에서 뭔가 펄떡 뒤집어졌고, 그게 너무나 섬뜩하게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깊은 곳 정신적인 서류철에다가 그 생각을 꽂아 정리해두고 '생각 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닫아버렸다."    (p.502)

 

차마  쳐다볼 수조차 없는 상실의 아픔을 외면하기 위해 선택했던 책.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더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진 듯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직시하는 슬픔보다는 유예된 슬픔을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에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참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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