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밤을 빠져나와 완전히 다른 빛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늘 있는, 언제까지나 진행될 것만 같은 일상적인 것이지만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저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낮이 길어진 탓에 미처 산을 다 오르기도 전에 먼 산 위로 하루의 태양이 떠오르곤 하지만 그렇다고 어둠과 빛의 경계가 옅어지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봄꽃 만발한 숲의 어둠 속으로 속속들이 스며들고 있는 빛의 폭발에 내가 지금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서 있구나 하는 느낌이 선연해지곤 합니다.

 

이따금 저는 나와 타인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여기까지가 내 의식의 영역이야.'하는 생각으로 든든히 담을 치고 사는 까닭에 경계의 이 편에서 저 편에 있는 상대방과 섞이거나 구분짓지 못하는 '의식의 혼재 상태'를 경험하지는 않지만 문득 그 경계가 무너지는 한 순간, 이를테면 의식의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의 나는 '왜 내가 여기에 있지?'하는 의문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제는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밖에 나갔습니다.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히 앉아 있었는데 제 차의 룸미러에 비친 뒷차의 운전자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SUV차량을 타고 있는 여성 운전자였습니다.  불과 5,6년 전만 하더라도 SUV 차량을 운전하는 여성은 드물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SUV 차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여성 SUV 운전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죠.  그 여성 운전자는 나처럼 신호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핸들에 올려진 손가락으로 핸들을 가볍게 톡톡 두들기면서 박자를 세고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때 라디오를 튼 것도, 다른 음악을 틀어 놓은 것도 아닌데 제 귀에도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있었던 '의식의 무방비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뒷차의 크락션 소리에 놀라 앞을 보니 제 앞에 있었던 차량들은 이미 다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텔레파시도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의식의 경계가 무너지고, 심지어 너와 나의 구분도 모호해지는 상태.  산을 오르며 등산로 근처의 나무 둥치에 손을 대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식의 경계가 분명한 나로서는 나무의 생각을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담을 없애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 인간사에만 필요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나무와 꽃과 이름도 모르는 풀과, 더 나아가서 우주의 모든 것들과 스스럼없이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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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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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오후 3시경이었나 봅니다.  흐린 하늘에 휙 긋고 지나가는 빗줄기.  창유리로 맥없이 떨어지던 빗방울.  바람이 불고 지난 가을의 마른 낙엽이 스산하게 흩날렸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섞바뀌는 계절의 빈 자리에서 고독처럼 머물렀습니다.  이 순간에도 삶의 가장 밑바닥을 밟고 있는 어느 예술가의 고독한 외침이 들릴 것만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것이 예술입니다.  피를 토하지 않는 예술은 다 거짓처럼 보일 뿐, 한 점 감동도 전하지 못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는 워낙 유명하여 그림에 무지한 저도 몇 번이나 읽고 보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문학가요, 명철한 철학자였던 듯합니다.  그가 그린 그림의 기저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색의 물결들이 암반처럼 자리했겠지요.  그러나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았던 예술가의 삶을 더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화가 이중섭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이중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미술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소개된 그의 그림을 보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황소>였지요.  국어 교과서에도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 한 편이 소개되었던 듯합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받아적었을 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어떠한 호기심도 없었던 듯합니다.  제 머릿속에는 그저 이중섭이라는 이름이 서 푼짜리 지식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우연처럼 손에 잡았을 때, 저는 그저 서 푼짜리 지식에 약간의 윤기를 더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가벼운 지식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도 큰 것이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렇듯  그도 시대의 우울함을 온 몸으로 겪어낸 듯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에 두고 그가 견뎌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그림에 대한 희구와 갈망은 제가 읽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무척이나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말할 것도 아닌 것이 고흐의 그림이 사색과 순간적 느낌, 자연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되었다면 이중섭의 그림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태현, 태성에 대한 그리움과 순수, 강한 생명력에서 비롯되었던 듯합니다.

 

"나만의 사람, 마음의 사람인 남덕이여!  나는 당신의 편지와 그립고 그리운 아이들과 당신의 사진을 기다리고 있소.  지금은 싸늘하고 외로운 한밤중, 뼈에 스미는 고독 속에서 혼자 텅 빈 마음으로 있소.  그림도 손에 잡히지 않아 휘파람,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시집을 뒤적이기도 하오.  당신의 편지가 늦어지는 걸로 보아 혹시 당신이나 아니들이 감기로 눕지나 않았는지요?"    (p.121)   

 

책에는 유화, 수채화, 스케치, 구아슈화, 은종이 그림 등 이중섭의 대표 작품 90여 점과 더불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중섭이 일본에 있던 아내 이남덕(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이 결혼 전 마사코에게 띄운 그림엽서 등이 담겨 있t습니다.  놀라운 것은 남존여비의 사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당시에 이중섭의 편지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하나 숨김 없이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요즘의 연인들이 쓰는 연애편지도 이보다 더 뜨겁고 열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하나하나의 문장이 미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가장으로서의 심경,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복합된 감정이 그의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겠지요.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다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도 상관이 없소.  힘껏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하면 되오.  나는 한없이 사랑해야 할, 현재 무한히 사랑하는 남덕의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하늘이 점지해주셨소.  다만,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p.128)

 

이중섭의 그림은 엄혹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기도요,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던 절실한 소망일 것입니다.  비록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림 속에서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꿈을 꾸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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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3 17:15   좋아요 0 | URL
멋집니다^^

꼼쥐 2014-05-06 17: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모든 사물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느낌이 조금씩 달라지는 게 사실이지만 하늘만큼 그 선명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모습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하늘을 바라볼 때의 자세에 따라 우리가 받는 느낌은 사뭇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걸으면서 우연히 보게 된 석양, 찬란한 일출의 풍경 등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특별한 하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볼 수 있는 하늘,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하늘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제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능선에는 운동기구가 여럿 비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본격적인 산행을 하기 전에 그곳에서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윗몸 일으키기, 스트레칭, 철봉 등 가벼운 운동을 하곤 합니다.  윗몸 일으키기대는 경사진 것과 수평의 것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저는 경사진 윗몸 일으키기대에서 대략 25회 정도를 하는데 위몸 일으키기대에 누워서 보게 되는 하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나무의 우듬지와 넓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때 저의 느낌은 마치 어릴 적 내 가슴에 엊혀지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의 적당한 무게감과 그것으로부터 받았던 안온한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르르 잠에 빠져들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죠.  걸으면서 쳐다보던 하늘의 느낌과는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제 몸 전체가 하늘에 빠져들 듯한, 누군가 적당한 무게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한 행복하고 충만한 느낌.  말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그런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 하늘이 또 하나 있습니다.  호주의 사막에서 보았던 밤하늘.  그때도 역시 사막 한가운데 벌러덩 누워서 보았습니다.  온 몸 곳곳에 박힐 듯 쏟아지던 별빛과 완벽한 암흑.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낮에도 이따금 창유리를 통하여 하늘을 바라보곤 하지만 그런 감동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늘은 역시 누워서 보는 게 제맛입니다.  저는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가끔 권하곤 합니다.  누워서 하늘을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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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에세이 신간평가단을 시작하는 첫번째 미션.

잠을 깨우던 간밤의 빗소리처럼 일손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이 일이 어쩌면 내게는 달콤한 휴식처럼 반가운 게다.  새책을 받아 들고 책장을 넘길 때의 '빠닥'하는 탄력 넘치는 소리는 듣지 못할지언정 새로 출간된 책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재래시장에서 한나절 봄나물을 구경하듯.

 

 

 

 

독일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저서 <작가의 얼굴>을 통해서였다.  처음 접하는 작가는 으레 낯섦과 서먹함에서 오는 부대낌이 있게 마련인데 작가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문체에는 독자를 배려하는 친숙함이 베일처럼 깔려 있었다.  나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비평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독자의 변덕은 사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것이지만 나는 기꺼이 그의 팬이 되기로 작정했다.  비평서가 아닌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을 읽음으로써 어쩌면 그와 나는 세대를 떠나서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계절의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서 자연이 아름다워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하기에 자연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의 담론을 읽는다는 건 자연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터 트라튼버그의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또 다른 방랑이 아닐까.

 

 

 

 

 

 

 

내가 호주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거라지 세일에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보았었다.  너무나도 사고 싶었지만 내게는 돈이 님아있지 않았다.  그때의 아쉬움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 책을 보자 나는 그때 느꼈던 아쉬움이 첫사랑의 추억처럼 되살아났다.

 

 

 

 

 

 

 

 

 

다비드 르 브르통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다.  우연히 읽었던 그의 저서 <걷기 예찬>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좋은 책이었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그가 내놓는 책은 몸과 관련된 어려운 책뿐, <걷기 예찬>과 같은 순순 문학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책을 보고 저자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금도 흥분과 설렘을 가누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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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릿 Grit - 잠재력을 실력으로, 실력을 성적으로, 결과로 증명하는 공부법
김주환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공부'와 관련된 서적에 저절로 손이 가거나 한동안 시선이 머물곤 합니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은 '나도 별수 없이 대한민국의 학부형이구나' 하는 자괴감입니다.  주말부부로 지내다 보니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그리 많지 않은데 말입니다.  괜한 욕심만 키우는 셈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조바심에서 읽게 되는 것이 또 '공부'에 관한 책입니다.  이 정도면 병적인 집착이지요? 참으로 구제불능입니다.

 

그렇게 읽게된 책이 김주환 교수의 <그릿>입니다.  <회복탄력성>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김주환 교수 바로 그분입니다.  사실 '공부'에 대한 책은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이 시중에 나와 있는지라 어떤 책이 좋고, 어떤 책이 그저 그런 책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렵지만 초등학교 이상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새로운 책이 출간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것 또한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에 비해 비교적 솔직하고 체계적으로 쓴 책인 듯 여겨집니다.

 

"선유(작가의 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도 나는 꼭 일류대학에 갈 필요는 없으며, 심지어 대학을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선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진심이냐고 되물었고, 나는 정말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이는 나의 개인적 신념이기도 하다."    (p.125)

 

사실 이런 책을 한두 권 읽다 보면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아이들마다 타고난 재능도 제각각이고 자라는 환경도 각기 다른데 일률적으로 어떤 법칙이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이 꾸준히 팔리는 걸 보면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불안감이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구나 하는 딱한 마음도 듭니다.  어쩌면 저도 그 중 한 사람에 속하겠지만 말이죠.  딸을 서울대 경영대에 입학시킨 저자에게 특별한 공부 비법 하나쯤 배워볼까 싶어 이 책을 읽었던 저로서도 딱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비인지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릿(grit)이다.  그릿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릿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열정을 갖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이다.  그릿은 스스로에게 동기와 에너지를 부여할 수 있는 힘, 즉 '자기동기력'과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전진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조절하는 힘, 즉 '자기조절력'으로 이루어진다."    (p.84)

 

책은 총 5개의 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공부를 둘러싼 오해와 착각  2. 그릿, 성취의 원동력  3. 그릿을 시작하는 힘, 자기동기력  4. 그릿을 완성하는 힘, 자기조절력 5. 시험 잘 보는 법, 그릿을 발휘하라  부록: 서울대 경영대 합격생 선유가 말하는 공부전략 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학창시절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도 두어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저는 비교적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 책의 기준으로 본다면 공부와는 거리가 먼,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이었죠.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그런 날이면 항상 가족들에게 폭력을 일삼았고, 그게 두려웠던 저는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같은 동네의 친구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습니다.  위로 있었던 형과 누나들은 일찍부터 아버지를 피해 도시에 나가 학교를 다니거나 취직을 한 상태였고, 저와는 나이차가 있는 어린 여동생과 저는 무지비한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었죠.

 

그 끔찍했던 시절에 저의 유일한 소망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의 빈곤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자식들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학교는 이제 그만 다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받았던 장학금으로 중학교를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고, 중학교 2학년 무렵 형들이 있던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해방의 순간이었죠.  저는 그때부터 지독하게 공부만 했던 것 같아요.  밤 11시에 잠들어서 새벽 2시에 일어나는 강행군을 끝까지 버텼었죠.  2시에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으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어요.  2시에 자명종이 울리면 혹시나 곤히 잠든 형이 깰새라 단박에 일어나곤 했었죠.  2시부터 5시까지 책을 읽고 5시에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는 자취방 근처의 산을 휘감고 도는 우회도로를 따라 전력질주하듯 1시간을 뛰었습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체력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장염으로 죽음의 문터까지 갔었죠.  당시의 저는 자신의 한계까지 저를 몰아붙였던 셈입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등교하여 남들처럼 수업을 받은 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밤 11시까지 책을 읽고 잠을 자는 반복적인 생활.  학원 수강은 고사하고 참고서 살 돈도 없어 친구의 문제집을 베껴서 수학문제를 풀거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면지를 얻어 연습장으로 쓰곤 했던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누나와 학교 선생님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치른 후 장학금 때문에 서울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지금도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4년제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형의 등록금과 저의 용돈을 벌기 위해서 낭만적인 대학생활은 즐길 수 없었고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어찌 버텼나 싶은 세월입니다.

 

제 얘기가 자랑질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공부에 관한한 저는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아요.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저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연습장에 빠르게 받아 적으면서 암기와 집중을 동시에 해결했었습니다.  말을 글씨로 받아 적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속기사도 아닌데 말입니다.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연습장에 글씨를 쓰는 저만의 방식은 수업 내내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시 보기 위해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러나 효과는 만점이었죠.  시험을 치를 때 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으니까요.  굳이 시간을 들여 복습을 할 필요도 없었구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생각과 달랐던 점은 더러 있었지만 바로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계획을 짤 때는 '이만큼 하면 많이 하는 거지 뭐.'라는 한계를 두는 대신,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공부량을 전제로 한 계획을 세워보자.  그러고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여라.  일별 계획을 세워놓고 목표량을 달성할 때마다 자신이 지킨 것을 펜으로 지우면서 뿌듯한 성취감을 느껴보라.  그럴 때마다 자신과의 투쟁에서 싸워 이긴 듯한 뿌듯한 승리감을 만끽할 것이다."    (p.240)

 

이 부분에서 저는 저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의지가 부족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십중팔구 며칠 지나지 않아 계획표 쓰는 것마저 그만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계획과 실천 결과는 늘 엇나가기 때문이죠.  오히려 '최소한 이만큼은 하자.'라는 식으로 최소 학습량을 계획하면 실천 결과와 계획이 맞아떨어져 게획을 세우는 본인 스스로도 놀랄 것입니다.  그때부터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구요.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았네요.  아무튼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독서를 좋아한다는 것과 체력이 좋다는 것이겠지요.  독서와 체력이 우선순위에서 빠진 공부 관련 책이라면 읽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공부를 지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공부 방법의 선택도, 부모의 확고한 신념도 일정 부분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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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4-03 23:39   좋아요 0 | URL
아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꼼쥐님 겪어오신 얘기를 해주시는게 그 어떤 책보다 더한 가르침이겠어요.
저 역시 지금도 공부에 관한 이런 책들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간답니다. 아마 해결못한 어떤 아쉬움이 무의식중에 남아있기 때문인가봐요.
공부법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서 저도 제 아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자신있게 말 못하겠더군요.

꼼쥐 2014-04-04 20:45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에서 보더라도 자신만의 확고한 주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잘 보지 못하겠더군요. 늘 휘둘리고 말이죠. 이 방법이 좋다 하면 이 방법으로, 저 방법이 좋다 하면 저 방법으로, 그렇게 시간만 보내는 게 현실인 것 같아요. 아이들이 공부 방법을 실험하는 마루타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