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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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맞는 맑은 하늘을 보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집니다.  그동안 미세먼지 때문에 목도 칼칼하고 눈도 따끔거렸는데 말입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셔 봅니다.  소중한 것은 언제나 한 뼘 곁에 있다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무심히 지나치던 것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하루입니다.  밝아진 기분으로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었습니다.

 

몇 장도 채 읽지 않았을 때 살그머니 떠오른 책이 있었습니다.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  제 딴에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내렸던 듯한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시 떠오르는 걸 보면 제 평가가 과히 틀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보다는 김소연의 <마음사전>이 더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별볼일 없는 그저 그런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책의 성격상 그렇다는 것이죠.  아무튼 두 책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감정은 세세하기 때문에 명명될 수 있지만, 기분과 느낌은 명명이 불가능하다.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집이며, 느낌은 한 도시 전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반응이며, 기분은 그 반응들을 결합하며, 느낌은 그 기분들을 부감한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중에서)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철학사를 이끌어 온 주류 철학자들의 관심은 대개 인간 이성에 관한 문제였기에 스피노자는 어쩌면 주류에서 벗어난 '변방의 철학자' 내지는 '철학의 이단아'라고 해야겠습니다.  저자도 스피노자의 그런 점에 끌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스피노자는 자신의 책 <에티카> 3부에서 인간의 감정을 크게 48가지로 분류하였고, 그와 유사한 감정들을 비교하였는데,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감정을 중요시 하여 자신만의 철학적 논지를 주장하였던 걸 보면 그의 용기가 대단했었나 봅니다.

 

아무튼 저자는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 만한 문학 작품을 통하여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를 내렸던 여러 감정들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철학적 명제는 설명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저와 같은 일반인이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참 친절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웠던 점은 제 독서력이 일천하여 소개된 책 중에 미처 읽어보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하여 이 책에서 짧게 소개하고 있는 문학 작품의 줄거리에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책의 소개가 너무 빈약하여 감질이 났다는 것이죠.

 

"특히 내게 고마웠던 것은 위대한 작품이란 어떤 특정한 감정의 아우라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가르쳐 준 48명의 위대한 문학자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웠다.  위대한 문학은 하나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반대로 말해 위대한 작품은 하나의 감정이라는 자장에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포섭시킨다는 사실을."    (p.516 '에필로그'중에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현대인들은 자신의 감정마저 누군가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주입된 것임에도 자신의 것인 양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연민’이나 ‘동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여자들, ‘질투'를 사랑의 증거라고 오해하는 남자들, ‘경멸'과 ‘멸시' 속에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들…   자신의 감정을 세밀히 관찰하여 그 기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밝혀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삶을 어찌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논리는 있으되 감정이 없는 현실, 소통은 있으되 공감하지 못하는 현실, 친밀감은 있으되 마음으로는 가까워지지 않는 현실, 예의는 있으되 존경하지 않는 현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삭막하다'고 평하는 이유는 간단해 보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억압하는 환경에서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에는 감정의 실체마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첫 단계는 다른 무엇보다도 공감하는 능력의 배양일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문학 작품보다는 자기계발서에 탐닉하는 이유도 공감하는 능력의 저하로 보아야 하겠지요.  '소통은 없고 불통만 있다'고 꼬집는 어느 정치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것인 양 느낄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그런 논평은 더 이상 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없이 맑은 날입니다.  이 충만한 기쁨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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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적엔 주변에서 많은 까마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까마귀는 흔한 새였습니다.  반면에 까치는 자주 볼 수 있는 새가 아니었죠.  하여, 집 근처의 나무 위에서 까치라도 우는 날이면 좋은 소식이 오려나 생각하며 괜히 들뜨고 반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 반대가 된 듯합니다.  까치의 개체수가 어찌나 많은지 농촌에서는 까치를 유해조수로 지정하였고 힘들여 키운 농작물을 까치로부터 지켜내고자 안간힘을 쓰더군요.

 

까마귀는 예로부터 죽음을 상징하는 불길한 새로 여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어렸을 적엔 온 마을에 죽음이 만연했었습니다.  죽음은 갓 태어난 아기서부터 나이 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죽음이 만연한 곳에서는 희망도 만연한 법이지요.  마을의 성황당에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어쩌다 보게 되는 까치와 같은 미물에게도 자신의 바람을 기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희망은 '유한성을 인식하는 자의 조급함'이라고 규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조금 어렵지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굳이 오늘 당장, 또는 가까운 시일 안에 무엇인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로프처럼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겠지요.  반면에 죽음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작든, 크든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이죠.  더구나 시일이 촉박하니 조급해질 수밖에요.

 

까치만 보이는 요즘에는 우리의 삶에 오직 희망만 넘쳐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에 죽음이 아주 없어질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누구의 죽음, 아무개네 집 초상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병원의 장례식장이나 종교시설에서 치뤄지는 애도의 현장은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판에 박은 듯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요즘 사람들이 죽음을 그저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기거나 기피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은 이제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어쩌면 현재는 사라지거나 잊혀진 어떤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삶으로부터 멀어진 요즘, 기다렸다는 듯 까치가 온 산천을 뒤덮고 까마귀는 자취를 감추는 걸 보면서 느껴지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말이죠.  이렇듯 희망만 있고, 죽음이 멀어진 시대가 좋기만 한 것일까요?  이제 희망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흔한 것이 되었고,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간절함이나 조급함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이제 옛적의 희망이 아닙니다.  죽음은 없고 희망만 남은 까닭이지요.  간절함이 사라진 희망을 희망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잊음으로써 희망도 함께 잃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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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3-0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한성을 인식하는 자의 조급함', 희망에 대한 이런 멋진 정의는 처음 봅니다.

꼼쥐 2014-03-02 14:02   좋아요 0 | URL
에구구구. 부끄러워요.
hnine님의 글에 비하면 아무 생각없이 쓴 글이죠.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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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우리는 주변에서 처음 만난 누군가에 대하여 '그는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너무도 쉽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그의 판단을 영민한 감각으로 오인하여 부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대개는 그런 일들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나 지적 오만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를 접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피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책을 읽을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기껏해야 단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마치 그 작가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떠벌리는 그런 경우지요.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경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행위가 아니라 사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직감이나 추론에서 비롯된 작가에 대한 일차 평가를 나는 그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을 읽을 때에도 똑 같이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선입견으로 굳어지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평가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독자가 무심히 내렸던 평가를 아무런 비판도 없이 내 것인 양 그대로 따르는 것이지요.  그 중에는 하루키에 대한 선망이나 경외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경멸이나 근거 없는 부정에서 비롯된 것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 근거를 파고들면 확증할 수 있는 정확한 근거를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한 측면만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저는 그동안 국내에 번역된 하루키 작품의 대부분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는 수필집도 더러 섞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소설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하루키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문학적 깊이가 없이 지나치게 상업주의적이라던가, 성적인 묘사를 위주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는 선정성이라던가 뭐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죠.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 전반에 흐르는 놀라운 상상력과 사고의 깊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그에 반비례하여 상상력은 고갈되게 마련인데 예순을 넘긴 그가 아직도 젊은 작가의 상상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제가 오늘 읽었던 책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었습니다.  소설 전체를 이루는 이야기의 뼈대는 비교적 간결합니다.  스미레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사랑과, 17세 연상인 뮤에 대한 스미레의 일방적인 사랑이 서로 대비되어 그려지고 있습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나'와 대학을 중퇴하고 직업 작가를 꿈꾸는 스미레,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뮤'가 등장합니다.  '나'는 스미레를 이성으로 좋아하지만 스미레는 '나'를 동성 친구처럼 편하게 대합니다.  어느 날 스미레는 한국계 일본인인 '뮤'의 제안을 받고 그녀의 비서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같은 여자인 '뮤'를 사랑하는 스미레는 이제 소설을 쓰지 않고 오직 '뮤'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여자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욕을 느낄 수는 없다고 했다.  스미레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성욕도 느끼고 있다.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성욕을 느끼고 있다.  스미레는 나를 좋아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고 성욕을 느끼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익명의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복잡하다.  마치 실존주의 연극의 줄거리 같다.  모든 상황은 거기에서 멈추어 어느 누구도,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선택할 여지가 없다."    (p.169)

 

유학 시절에 마음에도 없는 성적 체험을 한 '뮤'는 그 누구에게도 성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심지어 유부녀인 '뮤'는 남편에게도 그렇습니다.  남편은 이미 '뮤'의 그런 사정을 알고 결혼했기 때문이었죠.  성욕이 뭔지도 모르던 스미레는 '뮤'를 만난 이후 그녀에게 급격히 이끌립니다.  스미레는 '뮤'와 동행했던 유럽 여행 도중 그리스의 한 섬에서 '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 갑자기 사라집니다.  당황한 '뮤'는 '나'를 그 섬으로 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스미레는 찾지 못하고 나는 돌아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다시 교사의 업무로 복귀하고 어느 날 스미레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오랫동안 혼자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결국 한 명분의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외톨이로 지낸다는 것은 굉장히 외로운 생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거야.  외톨이로 지낸다는 건 비내리는 저녁에 커다란 강 입구에 서서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야."    (p.263 ~ p.264)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다양한 것을 욕망합니다.  사랑도 그 중 하나이겠지요.  그러나 나와 같은 것을 욕망하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우연과 같은 기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우주를 유영하는 인공위성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스푸트니크는 러시아가 발사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으로서 특히 개 한 마리를 태워서 쏘아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러시아어로 '여행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지닌 스푸트니크는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생명을 다할 때까지 정해진 궤도를 따라 무작정 도는 인공위성.  그렇다고 하여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바다에 이르는 강물처럼.  외롭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타인의 삶을 그저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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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오후에 공원을 산책하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겠습니다.

그 길에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중년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많아도 1초 이내의) 짧게 머물다 지나쳐 갔습니다.

그 중년의 여성은 그들의 시선에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미세먼지 예보가 있었고

그녀가 틀어놓은 음악이 공원의 적당한 침묵을 잠식하는 동안

미세먼지의 서걱거림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그룹 아바(ABBA)의 노래였습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노래의 제목은 'I have a dream'이었던 듯합니다.

참으로 오래된 노래입니다.

 

스치듯 들었던 그 노래로부터 나는 '국기 하강식'을 떠올렸습니다.

'왜?' 라고 묻는다면 뭐라 답변할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추억은 국기 하강식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의 가는 줄에 매달려 한동안 펄럭이다가

무의식의 품으로 갈무리되는 그런...

 

노래가 끝나기 전에 국기는 천천히 내려오고

먼지가 날리는 아스라한 운동장에 석양이 내려 앉는

그런 시각에 국기 하강식은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울리는 쪽을 향하여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죠.

 

오늘 내가 들었던 아바의 노래가 끝나기 전에,

한동안 펄럭이던 내 추억의 깃발이 다 내려오기 전에,

어디선가 가던 길을 멈추고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얹은 채

내 추억의 깃발에 경의를 표해줄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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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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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고 있는데 옆 좌석에는 중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 아이가 자신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동영상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어쩌면 그 아이는 지금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독립된 자신의 방으로 착각했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처음 보는  그 아이를 중학교 1학년이라고 인정했던 이유는 너무 서둘러 중학생이 되는 바람에 미처 버리고 오지 못한 초등학교 시절의 장난기가 그의 얼굴에 두서너 개 붙어 있었고, 코밑에는 이제 막 자란 듯한 콧수염이 어린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드폰을 끼고 있었지만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나는 좀처럼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사적인 의식 세계를 침범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들겼다.  그리고 평소에 내는 목소리의 한 옥타브쯤 낮춘 낮은 목소리로 컴퓨터의 소리 좀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동전을 구걸하는 어느 거리의 노숙자를 보는 시선으로 내 얼굴 어디쯤에 한동안 머물다가 적선이라도 하는 양 소리를 줄여주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은 <미처 다 하지 못한 :감광석 에세이>이다.  나처럼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조차 어쩌다 그의 노래를 들을라치면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의 고요를 떠올리게 된다. 오늘 내가 저질렀던 한 아이와의 작은 풍파를 생각하면(이런 일은 내게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가수 김광석은 지구가 아닌 딴 세상에 살다 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말이다.  우리가 겪는 세상은 이토록 거친 곳인데, 그 거칠고 험한 모습을 은행에 비치된 파쇄기처럼 곱고 잔잔하게 뽑아내려면 그의 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튼 김광석의 노래는 입자가 곱다.  나는 오늘 그 고움의 기원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  가수로서의 그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듯도 하고, 지난했던 그의 삶에서 비롯된 듯도 하고, 급기야는 그가 바라보았던 세상에서 비롯된 듯도 하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의 거친 풍경을 그 작은 체구로 그렇게 곱게 갈아내려면 그는 어지간히도 힘에 부쳤으리라.  오선지에 나붓나붓 그려지는 음표들이 적잖이 힘겨웠으리라.

 

<미처 다 하지 못한 :감광석 에세이>는 그 힘겨움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가 남겼던 일기와 메모, 편지, 노랫말 등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때 묻은 운동화는 끝없이 삶을 밟아가고 있다.'고 썼던 어느 날의 기록에서 나는 그의 마음을 읽는다.

 

"나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이십 대에 가졌던 기대나 가능성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없어지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허무가 몰려왔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서른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처음으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p.100 ~ p.101)

 

가수로서의 김광석이 있기 전, 그러니까 이 책의 1부에 실린 그의 기록들에서 음악에 대한 열망과 궁핍했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자고, 먹고, 사랑하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삶의 질료들은 비슷할지라도 완성되는 그 이미지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환영과 같은 그 이미지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삶을 평가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는 어느 쪽이었을까?

 

"하루의 아침을 바쁘게 시작하여 하릴없는 오후를 지나 멍청한 내 눈 위에 눈이 내렸다.  땅으로 내리는지 하늘로 오르는지 분간하기 힘든 눈이 자꾸 흩날리며 세상을 촉촉이 적셨다.  예전엔 그래도 여기저기 조금이나마 하얗게 쌓이더니 오늘 눈은 전혀 쌓일 기미조차 없이 땅에 닿는 순간 물로 변했다.  눈답지 않은 눈, 별 싱거운 눈.  나 같은 눈이 땅으로 내리는지 하늘로 오르는지 자꾸 흩날리며 아무 생각 없는 무료한 오후 한때를 스쳤다."    (p.39)

 

2부에서는 그의 대학 시절과 큰형님의 죽음으로 인해 짧아졌던 군 시절, 딸을 자신의 손으로 받았던 경험, [사랑했지만]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등병의 편지] 등의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 등을 설명하고 있다.  딸이 태어나고 바빠진 일정 속에서 그는 몹시 힘들어 했었던 듯하다.  마흔이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던 그는, 환갑 때는 연애를 하고 싶다던 그는 그 나이에 이르지도 못한 채 너무도 쉽게 우리 곁을 떠났다.

 

"내 딸이 태어날 때 처음 본 얼굴은 의사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딸을 직접 받아냈기 때문이다.  의사는 출근 전이었고 간호사는 무슨 준비하러 간다고 나간 사이에 내가 아이를 받아냈다.  아주 놀라웠다.  아!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그 놀라운 광경은 괴기영화보다 더했다.  참 신기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게."    (p.126)

 

3부의 소제목은 "꽃이 지네 눈물같이 -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로 화하지 못한 노랫말들을 모은 것이다.  언젠가는 노래가 되어 그의 목소리로 되살아났을 그 노랫말들은 쓸쓸하다 못해 슬프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버려진 운동화처럼 그렇게 어색하다.

 

"산허리 돌면 굽이쳐 나를 부르고

 시냇가에 구르던 돌처럼 나도 구르고

 내가 나인지도 모르고 굽은 길만 탓했지

 내가 나인지도 모르고 모르고 모르고"    (p.239  '하늘을 쳐다보며' 중에서)

 

문학이든 음악이든 삶의 저 깊은 심연에서 건져올린 듯한 것들에는 깊은 울림이 있게 마련이다.  비록 그런 삶을 사는 당사자는 외롭고 쓸쓸할지라도 그 글을 읽고, 그 노래를 듣는 우리들은 행복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추억하면서 세상의 풍파를 잊는다.  아름다움은 결국 누군가를 사랑함이다.  사랑이 깊었던 가수, 김광석이 그리운 이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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