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댄스 댄스 - 하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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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적어도 삶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물을 흘리며 인정하지 않는 한 삶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삶은 꽤나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므로 사업의 실패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일들로 인하여 겪게되는 상실감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인생을 몇 가지 단계로 나눈다면 1년, 1년 나이를 먹는 시계열적 추세 변화와 삶은 하등의 관련성이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극구 피하려 하지만 말이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애먼 거미를 기피하는 것처럼.

 

나는 녹색의 여린 잎을 내밀고 있는 양지쪽의 철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어리숙한 사람도 이따금 제법 그럴 듯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도 떠오르는 그 순간에 적어두지 않으면 금세 잊혀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지만 말이다.  한번 떠오른 생각이 내 머릿속에 진득하니 눌러 앉는 법이란 결코 없다.  마치 대기표를 뽑아 들고 기다리는 다른 여러 생각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이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변심한 여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냉정하게 자리를 뜨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댄스 댄스 댄스>를 읽고 있노라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카를 융의 '그림자 이론'을 소설로 각색한 듯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하루키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주인공은 현실 속의 사람들과 한 발짝 멀어져 있다.  자발적 소외.  그렇다.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경제적으로나, 능력으로나 그닥 뒤처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주인공의 의식은 때로 원시의 신화와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짙은 암흑은 폭력의 입자를 내 주위로 떠돌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바다뱀처럼 소리도 없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볼 수조차 없다.  구제할 수 없는 무력감이 나를 지배한다.  온몸의 모공이 송두리째 어둠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셔츠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다.  목구멍이 칼칼해진다.  침을 삼키기도 힘들어진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일까?"    (상권 p.132)

 

책에서 주인공인 '나'는 잡지사의 자유 기고가로서 이혼 경력이 있는 34살의 사내다.  작품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은 그 성향에 따라 '환상의 세계(또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과 '영혼의 세계(또는 관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뚜렷이 구분된다.  내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그랬다.  배우이자 학창 시절 친구인 '고탄다', 고급 콜걸이자 환상의 여인 '키키', '키키의 친구 '메이', 외팔이 시인 '딕 노스'가 이미지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주인공인 '나'와 예지능력이 있는 열세 살의 소녀 '유키', 그녀의 어머니인 '아메'는 관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가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키키'와 만났던 삿포로의 돌핀 호텔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키키'를 만나야겠다는 결심으로 도쿄에서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삿포로로 향한다.  그러나 돌핀 호텔은 예전의 그 호텔이 아닌 새로운 호텔로 개축되었다.  다만 그 이름만 그대로인 채.  그 호텔에 머물면서 '나'는 예전에 사라진 돌핀 호텔의 관념 속에서 '양 사나이'를 만난다.  '양 사나이'는 '나'에게  "춤추어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되도록 멋있게 춤을 추어라" 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나는 호텔 여직원 '유미요시'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나'는 '양 사나이'의 충고에 따라 운명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채 춤을 추듯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과 의문의 죽음이 이어진다.  '아메'가 죽고, '고탄다'가 죽고, '딕 노스'도 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애적 표현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  대신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무력감이 조용히 소리도 없이 물처럼 방 안에 차 있었다.  나는 그 무력감을 밀어 헤치듯이 목욕실로 가서 <레드 클레이>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샤워를 하고, 부엌에 선 채로 캔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스페인 어로 하나에서 열까지 센 다음,「끝났다」하고 소리 내어 말하고는 손뼉을 치자 무력감은 바람에 날려가듯이 휙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나의 주술(呪術)이다."    (하권 P.19)

 

"죽은 '정어리'와 마찬가지로, 결국 키키는 당연히 죽어야 했기에 죽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내게는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체념이었다.  광대한 해면에 내리 쏟아지는 비처럼 조용한 체념이었다.  나는 슬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영혼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지면, 산뜻하고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모든 게 소리도 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모래 위에 그려진 표지를 바람이 날려 버리듯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하권 P.229)

 

'나'는 환상의 세계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현실을 조화롭게 인식한다.  그것은 일종의 춤을 추는 과정과 비슷하였다.  작게 스텝을 밟으며 서서히 빠져드는 춤처럼, 관념의 세계로 침잠하던 의식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이다.  비록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환상의 세계에서 하나 둘 사라지지만.  '나'는 결국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 '유미요시'를 만나고 현실의 사랑을 이룬다.  '유미요시'는 '나에게 사라지지 않는 현실의 구원자였다.  그들도 물론 언젠가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메이의 죽음이 내게 가져온 것은, 오래된 꿈의 죽음 및 그 상실감이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내게 어떤 체념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혼다(고탄다)의 죽음이 가져온 것은, 출구가 없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와 같은 절망이었다.  고혼다의 죽음에는 구원이라는 게 없었다.  고혼다는 자신 속의 충동을, 자기 자신에 잘 동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힘이 그를 극한적인 장소까지 몰고 간 것이다.  의식의 영역의 제일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어둠의 세계까지."    (하권 P.249) 

 

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성지 순례를 갔던 관광객들이 폭탄 테러를 당하고, 무고한 사람이 간첩 누명을 쓰는 이런 세상에 때로는 어둠 속에 갇혀 '양 사나이'를 만나고 싶지만 인생은, 삶은 우리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 춤을 추듯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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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향친구가 나의 숙소를 찾아왔었다.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는 연락도 없이, 그것도 늦은 시각에 세상 다 산 표정을 하고는 나를 찾았던 것이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초인종 소리에 놀라 문을 열었더니 친구는 오래 절인 배추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어두운 복도에 그렇게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치킨 한 마리와 맥주 두 병을 들고.

 

 밖에는 바람이 부는지 아파트 뒤편의 소나무가 술에 취한 거인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뿌연 달빛.  친구는 부부싸움을 하고 무작정 나왔는데 그 시각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고 했다.  술을 못 마시는 나에게도 거품이 넘치도록 가득 부어주고는 목이 말랐는지 안주도 없이 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트림인지 한숨인지 깊은 숨을 토해내는 친구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부럽다고 했다.

가족과 떨어져 홀애비 아닌 홀애비 생활을 하는 내가 부럽다니...  맞벌이를 하면서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친구.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그와 나는 이따금 전화를 할 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바빴던 것인지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임에도 정 떼는 연습부터 미리 하며 살았나 보다.

 

만사태평한 친구와 무엇에든 욕심이 많고 성마른 성격인 그의 아내는 극과 극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잘도 살아왔다.  그렇게 다른 성격이어서 그렇게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체중 때문인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친구는 운동 좀 하라는 아내의 말에 괜한 성질을 부렸었나 보다.  그렇게 1시간쯤 다투고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옷도 변변히 챙겨 입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고 했다.  막상 나오고 보니 딱히 갈 데가 없다는 걸 알았고.

 

친구는 자고 가겠다고 했다.  연락도 없이 그래도 되느냐 물었더니 괜찮다며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친구는 잠이 들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 몇 번을 뒤척였다.  어찌어찌 잠이 들었고, 운동을 나가기 위해 잠이 깨었을 때 친구는 더 자라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겠다며 옷을 입었다.  현관을 나서는 친구의 뒷모습이 어두웠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매달려 공연 시간을 기다리는 줄 달린 인형처럼 처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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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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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9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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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도 하지요.  책을 읽다 보면 그 계절과 딱 맞는 그런 책과 만날 수 있다는 게.  혼잡한 거리에서 우연히 친한 친구와 마주치는 그런 경우처럼 말입니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결과 나날이 도타워지는 봄의 기운이 나를 인도했던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요.  숨죽였던 계절이 기지개를 켜는 이맘때면 세월의 켯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추억 한토막쯤 풀어내어 한나절 그 추억 속에서 노닐고 싶은 심정.

 

박완서 작가의 유고집 <노란집>은 그런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와 나는 일면식도 없고 생전에 어떤 인연의 끈으로 엮여진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 양 스스럼없이 내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봄의 기운이 소리가 되어 터져나오기에는 조금 이른 이 계절에 작가가 들려주는 소소한 일상의 추억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작은 것들의 소중함, 그 이야기들이 얼음장 같던 내 마음을 사르르 녹입니다.  나는 저으기 안심하며 푸근해지는 것입니다. 

 

"설이 지나고 제법 해가 길어진 어느 날 아침이었다.  곧 해가 뜨려나, 파스텔 조의 노을빛을 받은 숲의 나무들이 흡사 꼼지락대는 것처럼 보였다.  겨우내 맨몸으로 삭풍을 견딘 늠름하고도 날카로운 가장귀들이 마치 간지럼을 참듯이 들썩이고 있는 게 암만해도 수상쩍었다.  나는 숲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마당 끝까지 걸어갔다.  우리 집 마당 끝은 조그만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숲과 연결돼 있다.  바람 없는 조용한 새벽이었다."    (p.126)

 

어느 책이건 글에서 작가 자신의 성품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참 드문 경우입니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글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또렷이 그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서(그것이 소설이든 산문이든 간에)는 언제나 살아생전의 작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솔직한 성격과 똘망한 기억력 덕분이겠지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굳이 감추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삶은 있는 그대로의 소설이자 잘 씌어진 한 권의 산문집일 것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대가족 속에서 자랄 때부터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거짓을 말하거나 남의 것에 손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걸로 교육받았고 구태여 그걸 어길 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 된 것이었을 텐데도,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쟤는 제 털 빼, 제 구멍에 넣을 애'로 통했다.  엄마도 칭찬의 뜻보다는 융통성 없음에 대한 한탄 비슷하게 그런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런 나를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예뻐하신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p.234)

 

삶의 질곡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다정한 할머니가 어린 손녀의 포동한 손을 붙잡고 자신의 삶을 차분히 들려주는 듯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정의 찌꺼기들일랑 흐르는 세월에 훠이훠이 날려보내고 맑고 투명한 이야기들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경리 작가가 박완서 작가를 아껴하셨던 까닭도 그런 이유겠지요.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장 긴 동안일 수도 있는 노년기, 다만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    (p.121~p.213)

 

밤이 깊었습니다.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의 손길처럼 순한 달빛입니다.  어쩌면 나는 오늘 그렇게 순한 잠을 잘 듯합니다.  꿈결에서 새싹의 수런거림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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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4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V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아무 목적도 없이 목을 길게 늘인 채 TV 화면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프로건 상관없이 켜진 대로 무작정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뉴스는 잘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끔찍한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모아 놓고 말하면서도 무심한 듯 아무런 표정도 없는 아나운서를 볼 때마다 세상 공포영화 중에 그렇게 무서운 공포영화도 없겠다 싶어서입니다.

 

그렇다고 예능 프로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웃긴지, 어느 시점에서 웃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게다가 코맹맹이 소리로 세살배기 애기 흉내를 내는 어느 코미디언의 나이를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놀람보다는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이 스물이 넘어도 성인으로서의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늙어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철이 드는 것인지...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마치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네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취향이 다를 뿐이죠.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인문학 강의 등을 즐겨 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그 생생한 화면이나 놀라운 촬영 기술에 감탄하곤 합니다.   '세상 좋아졌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지고 기술의 발달에 새삼 감사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어쩌다 예능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되는데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구나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까무룩 잠드는 낮잠처럼 들었던 생각입니다.  젊은이들이 장악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엣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자주 비교하여 보여주는 것에서 저는 '아, 이제 물질문명의 정점에 도달했구나'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 앞뒤의 연계성에서 그닥 필요한 장면도 아니었는데 출연자의 옛모습을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과거는 무조건 나쁜 것, 과거는 무조건 촌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기업 광고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폄훼함으로써 현재의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자주 보게 되었다는 것, 뉴스와 비슷한 아침 프로그램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광고로도 수요를 늘릴 수 없는 기업의 다급함이요, 정부의 아우성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물질이 넘쳐나는 시공간에 도달한 것입니다.  경제지표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ISM 제조업지수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미국은 그동안 수요를 늘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시장에 쏟아부었던 것일까요.  그럼에도 수요는 예전처럼 늘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했던 그런 생각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문명의 종말과 함께 사람 냄새 나는, 사람다운 세상이 오려나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푸근한 미소를 덤으로 줄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제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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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시골이어서 그런지 나는 집을 고를 때도 인근에 산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그런 곳에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도 야트막한 산이 있다.  평일 아침에 그 산을 매일 오르다보니 몇 년 되지 않아 나는 그 산의 속살을 훤히 꿰뚫게 되었다.  하여, 요즘처럼 밤이 긴 계절에도 달빛도 한 줄기 없는 캄캄한 길을 손전등도 없이 잘 걷는다.  아마 눈을 감고 걸어도 눈 뜬 초행자 정도는 따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요즘 오르는 산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산천과는 산에 사는 식물들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 이름을 모른다는 게 어찌나 얼띠고 한심하던지.  가끔은 산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이따금 식물도감도 찾아 보면서 이제는 어지간한 것들의 이름은 외우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제가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자리를 잡아  정착하는 데는 시간도 걸리고, 품도 드는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산에는 소나무, 아카시아, 은사시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쥐똥나무, 산벚나무, 찔레나무 등 수종이 비교적 다양한 편이지만 요즘 내 눈에 들어오는 나무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다.  미끈하게 쭉 뻗어 몸피도 야리야리한 은사시나무와는 달리 가지도 많고 몸통에 잔주름도 많은 그 나무들이 내 눈을 잡아 끌었던 것은 단지 겨울이 다 지나도록 칙칙한 작년의 갈잎을 다 떨구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제는 말라 오그라든 채 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  때로는 약한 바람에도 어떤 무게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그 잎들이 그렇게 겨울을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와삭 부서질 것 같은 마른 갈잎이 매서운 겨울 눈보라를 이기고 봄철 새순이 돋을 무렵이 되어서야 묵은 옷을 벗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줄기를 보호하는 보온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닐 테요, 그렇다고 잡아먹힐까 두려워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식물학자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는 요즘 그 나무들이 배려심이 많은 까닭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새순이 막 돋아날 무렵, 꽃샘추위로부터 여린 새싹을 지켜주기 위해 겨울 한철을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한 봄바람을 타고 어딘가에 있을 어린 새싹을 찾아 멀리 날아가는 갈잎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무한의 사랑과 배려심에 생각이 이르자 나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게다가 가지에 붙어 엄혹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잎의 수분을 모두 날려보내고 최대한 가벼워져야 한다는 사실도 갈잎을 통해 배웠다.

 

요즘 나는 아침에 산을 오를 때마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등산로 주변의 밤나무와 졸참나무에 가만히 손을 얹고 그 사랑과 배려를 생각하곤 한다.  식물도 그럴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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