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책이라...  나는 정말 모르겠다.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이건 정말 멍청한 질문이다.  혹시 이런 질문은 어떨까?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도 안다.  궤변도 그런 궤변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에게는 그 질문이 그 질문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하자면 기억할 수 있는 연령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책과 떨어져 지냈던 적이 결단코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상과 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스운 대답일지 모르지만 내게 책이란 동일시되는 나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책과 가까워진 계기는 부끄러운 애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드셨던 아버지를 피해 나는 친구네 집을 전전했고, 그럴 때마다 책에 빠져 들었다.  한국전래동화나 세계문학전집, 셜록 홈즈나 괴도 뤼팽, 심지어 무협소설에 이르기까지 나는 밤이 늦도록 친구의 눈치를 보며 책을 읽었고, 아버지가 잠드셨을 늦은 시각에야 집으로 향하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나와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새로 사귄 도시의 친구들 앞에서 조금이나마 어깨를 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책밖에 없었으므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등록금의 부담에서 자유로웠던 나는 아르바이트에서 번 돈으로 마음껏 책을 살 수 있었다.  그만한 호사가 없다고 늘 생각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에도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한두 권쯤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시작했던 첫 사업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 암울했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한 것도 역시 책이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간혹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게 말할 때가 있다.  책 좀 그만 읽으라고.  그러나 멈추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외로움을 달래주던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친구네 집에서 읽던 책에서 나던 퀴퀴한 곰팡내의 평온한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잊기 위함인지...

 

어쩌면 나는 번지점프대 위에 오르는 순간에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그런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책은 나 자신과 구분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이없는 일은 아들놈도 나처럼 책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대책이 없다.  나도 남들처럼 이 질문에 우아하고 멋진 말들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런 글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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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4-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길동무로 책을 곁에 두면서
삶을 사랑하시기를 빌어요

꼼쥐 2014-04-24 11: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마 제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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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한가한 시간이 찾아와도 멈출 줄 모르고 쉼 없이 작동하는 나의 뇌를 생각할 때 조금 걱정이 되곤 합니다.  마치 방전된 자동차가 '푸르륵 푸르륵'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정적 속에 농밀한 절망만을 남겨둔 채 멈춰버리는 것처럼 나의 뇌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머릿속의 상상이나 걱정들은 대체로 쓸데없는 것들이어서 적어도 한가한 시간에는 나의 뇌도 육체와 함께 편히 쉬었으면 좋으련만 무슨 궁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모처럼 맞는 한가한 오후를 『오즈의 의류수거함』을 읽으면서 보냈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낯선 불청객이나 느닷없이 벌어지곤 하는 특별한 사건이 나의 오후를 방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쌓여 독서를 하려니 책의 내용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모래알갱이들처럼.  어쩌면 현실을 비껴간 작가의 작위적 구성이 약간의 거부감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대략 이렇습니다.  외고 입시에 낙방하여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도로시(본명),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닉네임), 자발적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숙자 씨, 식당을 하는 마마, 탈북 새터민 카스 삼촌, 자살을 꿈꾸는 195.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뭉텅뭉텅 사라져가는 행복과 급기야 칼날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슬픈 자화상.

 

이야기는 독서실에서 늦은 귀가를 하던 도로시가 의류수거함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수거함 속으로 다 들어가지 않은 멀쩡한 스키니진을 발견한 도로시는 마치 득템한 기분이었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장비를 갖춰 동네의 의류수거함을 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류수거함 속에는 옷만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강아지 토토를 맡길 데가 없어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와 가까워지고 그녀에게 수거한 옷을 넘기게 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도로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의사 부부였던 숙자 씨는 구제역이 창궐하였을 때 가축 살처분 현장에 있었고, 그의 아내는 그 트라우마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 숙자 씨는 홀로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게 됩니다.  마녀를 통하여 알게된 마마는 유능한 자동차 딜러였습니다.  도박 중독자였던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과 함께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학교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들은 집 근처의 건물 옥상에서 투신을 했던 것입니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마마는 아들이 숨진 옥상에 식당을 차렸습니다.  탈북을 하다 다리에 총을 맞았던 카스 삼촌은 도로시처럼 의류수거함을 털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로시는 카스 삼촌과 구역을 나눠 옷을 수거하기로 약속하고 마녀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거리는 도로시가 누군가의 일기장과 상장 뭉치, 사진첩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물건들로부터 자살의 분위기를 감지한 도로시는 그 물건을 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 끝없이 시도합니다.  195번 의류수거함 위에 올려 놓은 책 속에 메모지를 끼워 놓음으로써 대화는 이어지고 결국 그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자살을 막아보려는 도로시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195는 결국 미국으로 마약 중독 치료를 받으러 떠나게 되지만 그 전에 도로시와 함께 의류수거함을 돌며 옷을 수거합니다.

 

"숙자 씨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  왜 그렇게 195의 일에 매달리느냐는 숙자 씨의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숙자 씨에게는 단순히 자살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195의 존재가 이미 내 속에 깊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나의 세계로 들어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뚜벅뚜벅, 소리나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바람처럼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있다.  내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들어서는 사람도 있다.  195는 어어, 하는 사이에 쑤욱 내 속으로 들어왔다."     (p.118)

 

그렇게 밤의 세계에서 우연처럼 만난 사람들은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어 갑니다.  폐지를 주워 손자들을 돌보는 할머니를 위하여 집에 보일러를 놓아 주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부자 마을의 의류수거함을 터는가 하면 각자가 모았던 돈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여태껏 살아오며 이렇게 자존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항상 1등만 해온 너는 이런 내 심정을 잘 이해 못할 거야."  195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힘없이 웃었다.  "자존감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 대신 자존심이 자리하고 있지."  "그것들의 차이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  굳이 설명하자면 자존감은 포용이란 토양에서 자라나고 자존심은 경쟁이란 토양에서 자라나지.  자존감이 이타심이란 열매를 맺는 반면, 자존심은 이기심이란 열매를 맺어."  나는 195가 너무나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나를 이해시켜준 데에 크게 감탄했다."    (p.218~p.219)    

 

사실 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몇 달씩 의류수거함을 털 수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거니와 정기적으로 옷을 수거해 가는 허가 받은 업자가 그것을 모를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것은 아마도 의류수거함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고등학생인 도로시가 미처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고 나눔을 베품으로써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지식을 우겨넣음으로써 현실과 점점 멀어지는 부작용을 겪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도 모두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죠.  내가 매일 들르는 식당 아주머니가 오늘 "수고하세요." 라는 나의 인사에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과 라일락 꽃의 향기가 어제보다 조금 옅어졌다는 것과 공원의 등나무 넝쿨에 꽃이 피고 있다는 것 등을 생생히 느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상상의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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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파트나 비슷하겠지만 제가 사는 아파트에도 청소를 담당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짧게 자른 파마머리에 세월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분이죠.  물론 저는 그분의 이름도,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 눈물의 문신들도, 혹은 즐거웠던 어느 봄날의 추억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언제나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는 까닭에 1층 현관의 계단을 청소하고 있는 그분과 저는 매일 아침 비슷한 장소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할 뿐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도 비슷한 풍경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는데 그분도 잊은 물건이 있었는지 제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할아버지 한 분이 청소 아주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이어 아주머니도 밝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마친 할아버지가 요즘 어찌 지내느냐 물었나 봅니다.  아주머니는 "머슴살이가 뭐 늘 비슷하지요."하자, 할아버지 왈, "아줌마가 왜 머슴이야?" 하고 되물었습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놓아두었던 빨간 양동이를 집어 들며 아주머니께서는 담담히 대답하기를,

"사는 게 다 머슴살이 아닌가요?"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만 들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순간 아주머니의 말씀이, 그 한마디 말이 왜 그토록 크게 들렸었는지...  '누구나의 삶도 다만 하나의 머슴살이에 지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 먹은 종이처럼 차곡차곡 쌓였을 세월의 그림자들이 아주머니의 그 한마디에 다 배어 나오는 듯했습니다.  마음이 금세 축축해졌는지 할아버지도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초록이 싱그러운 봄날이었고, 아름다움 뒤에는 언제나 가슴을 적시는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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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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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이 사람 이거 순전히 날로 먹으려고 하네.  책을 뭐 이따위로 설렁설렁 썼지?'하는 생각 말이다.  하루키의 에세이집이 대부분 신변잡기를 늘어놓은 가벼운 것들이어서(물론 아닌 것도 있다.  작가가 유럽을 여행하며 쓴 <먼 북소리>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 동안 인상을 쓰며 지내는 사람이라면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기에 앞서 한번쯤 정신과 상담을 받기를 권하고 싶다.  의사로부터 '정신적으로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서를 받은 사람만 읽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분명 반쯤 미친 놈으로 보일 테니까.

 

앞에서 말한 하루키 에세이집의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책을 꼽으라면 최근에 출간된 <더 스크랩>이 아닐까 싶다.  이건 뭐 숫제 에세이집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특히 한국 에세이스트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 정도가 더 심할 듯.)  가까운 친구들을 일개 분대쯤 집으로 불러서는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이기도 하고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유명 연예인의 가십을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기사라도 되는 양 입에 침을 튀기며 말하는 사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무척이나 쉽게, 즐기면서 썼음을 실토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약 사 년에 걸쳐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글이다.  연재하는 걸 싫어하고,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인 내가 <넘버>에 장기 연재를 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 썼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보내주는 것은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 <뉴욕> <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이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긴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  어떤가요, 즐거워 보이죠?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p.4)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대부분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로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의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집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왜냐하면 하루키의 에세이집은 개콘을 보듯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심각할 겨를이 없다.  때로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기도 한다.  아마도 나는 앞에서 제시했던 정신과 상담을 빼먹었기 때문이리라.  책에는 <스타워즈의 츄바카>라는 제목의 꼭지가 있다.  갑자기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아들 녀석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새삼 깨달았는데 원숭이 츄바카 캐릭터가 정말로 귀여웠다.  어디가 귀여운가 하면, 츄바카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므고오"라든가 "아구"하는 정도로 대부분 소통을 마친다.  나 역시 그 정도의 단어로 볼일을 보면서 때때로 제국군과 공중전을 하며 인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p.105~p.106)

 

작가는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수필집에서도 그의 관심사를 빠트리지 않는다.  음악(특히 재즈), 영화, 소설, 섹스, 애완동물, 마라톤 등이 그것이다.  나는 이따금 '하루키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시시한 글들을 쓸까?'하는 생각과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책을 나는 도대체 왜 읽을까?'하는 의문에 빠지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하루키의 수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어떤 작가도 하루키처럼 쓸 수 없다는 데 있다.  예컨대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와 같은 사람이 피에트 몬드리안의 대표작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을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키가 쓴 '쉬워 보이는' 글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신기하다.

 

"특히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여름의 에게해는 그야말로 섹스의 도가니 같다.  대낮부터 거리 한복판에서 아베크족들이 위장까지 닿을 정도로 딥키스를 한다.  뭐 별로 상관없지만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정말로 육식동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개트윅 공항에서 단체로 우르르 몰려오는 영국 펑크 소년소녀들의 기세는 엄청나서, 성기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로큰롤이라도 할 것 같다."    (p.94)

 

그러나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결국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 듯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과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벗겨놓고 보면 다 오십 보 백 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도 마음속 밑바탕에는 그런 철학이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그저 '시간 죽이기' 용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하루키를 몰라도 한참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는 내내 유쾌한 기분에 휩싸이다가도 다 읽고 나면 문득 심각해지곤 한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면서 무작정 웃을 수만은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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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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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을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짝짓기가 필요했던 청년기 이후로는 아마 없었던 듯합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육체적 질병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죠.  나란 놈에게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책에 등장하는 위인이나 세미나에서 만난 지식인, 혹은 성당의 미사나 사찰의 법회에서 만난 종교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저란 놈은 참으로 특이한 족속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경계에서 춤추다』를 읽으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서경식 작가와 타와다 요오꼬 작가에게 신뢰를 넘어선 아름다움, 즉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스트 서경식과 일본 소설가 타와다 요코꼬가 열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주고 받았던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편지글이 갖는 은근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두 작가는 '남과 여'라는 이질적인 성별과 10여 년의 나이차가 나는, 속물적 시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작가는 그들이 나누었던 열가지의 주제에 대해 지성인으로서의 폭 넓은 사색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고고한 기품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여행'을 주제로 나누었던 두 작가의 편지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툭 하면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만,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거주'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도 같은 것이죠.  나이와 더불어 여행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져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거주' 또한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p.68 서경식이 타와다 요오꼬에게)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철도에 의한 이동은 육체의 이동입니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수천 킬로미터나 옮겨놓는 것이죠.  이것은 이른바 집필활동이 서재 안에 갇혀 있는 무엇이 아니라 무대예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일본어가 고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언어를 그 내부에 포함하는 까닭에 온갖 언어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형태로부터 또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여가는 운동 자체에 창작활동이 있는 것이고 또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탐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일지도 모릅니다."    (p.75~p.76 타와다 요오꼬가 서경식에게)

 

이 편지들은 재일교포 2세 작가로서 2006년 4월부터 2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서경식 작가와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 이후 독일에 거주하는 타와다 요오꼬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위에서 짧게 인용한 글만으로는 내가 느꼈던 감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편지가 마치 서로 다른 악기 두 대가 화합하여 멋진 앙상블을 이루는 협주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어가 사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았을 때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 하는 느낌도 함께 말입니다. 

 

두 저자의 사유의 방향은 서로 합치 되기도 하고 때론 어긋나나거나 교차하기도 하는데, 이는 생생한 소통의 현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를 통해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고 또 다른 사유의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의 열가지 주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시하고 그에 화답하면서 또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게 엮여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목소리에 대하여 쓴 타와다 요오꼬의 말은 재밌습니다.

 

"저는 얼굴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음성이나 말할 때의 리듬, 언어 선택 등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드는 편인데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언어를 말하면 이미지가 싹 바뀌어버리기도 해서, 나는 정말로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싶어 불안해집니다."    (p.130)

국적, 성별, 세대가 모두 다른 두사람이 ‘언어(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두사람이 지니고 있는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재일조선인인 서경식은 스스로를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 규정해왔으며, 타와다 요오꼬 역시 일본인 여성 지식인이지만 1982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수십년간 살면서 독일어를 제2의 모어로 삼아 살아가는 이민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어와 투쟁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사유하기를 희망하는 두 작가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아름다운 두 지성인의 사유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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