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예측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마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내 기억의 빈 공간(만약 있다면)에 동전이 쌓이는 것처럼 부피를 늘리지 않은 채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평소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조금쯤 과도한(그렇다고 생각되는) 통행세를 요구할 때가 있다.  밋밋하고 심심해 할까 봐 그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개빈 익스텐스가 쓴《우주 vs. 알렉스 우즈》는 돼지저금통에 만 원짜리 지폐를 넣을 때의 뿌듯하고 든든한 느깜처럼 뭔가가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뭐랄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배제한 채 독자가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만을 옮긴 듯한, 다소 시니컬하고 간결한 문체로 465페이지의 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흔들림 없이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개빈 익스텐스는 비록 30대 중반의 젊지 않은 나이이지만 이 책은 그의 데뷔작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소설은 알렉스(이 소설의 주인공)가 열 살이었을 때 벌어진 일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그의 집 천장을 뚫고 들어온 2킬로그램짜리 운석에 머리를 맞은 알렉스는 수술을 받고 2주만에 가까스로 깨어난다.  그 후 알렉스는 간헐적 간질을 앓게 되고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알렉스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싱글맘인 그의 어머니는 타로 점을 보거나 그것과 관련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몇 년 뒤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알렉스는 동네의 불량배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엄마가 따르는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은 달랐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엄마의 규칙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건, 앞뒤가 맞건 안 맞건 상관없었다.  시험 성적을 잘 받아서 장차 내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 이게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이었다.  내가 간질을 앓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엄마는 내가 뒤쳐져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고, 우리 주의 어떤 학교도 내 입학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p.101)

 

어느 날 하굣길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피해 달아나던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으로 뛰어든다.  알렉스를 찾지 못한 불량배들은 피터슨 씨 집의 온실 유리를 부수고 알렉스는 속죄의 대가로 피터슨 씨의 편지 쓰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피터슨 씨는 베트남전의 참전 용사로서 아내를 잃고 은둔자적 삶을 사는 평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작가는 우연과도 같았던 알렉스와 피터슨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금 나는 카오스로 가득한 한 세계의 정점인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을 묘사하려 한다.  이 순간 덕분에 생각하게 됐다.  보기에 따라 인생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또 보기에 따라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다음의 이야기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p.112)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빌려 읽게 된다.  그러던 중 버스 안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다시 만났고, 알렉스가 읽고 있던 커트 보네거트의 희귀 초판본이 그들 중 한 명에 의해 버스 밖으로 내던져진다.  알렉스는 그 아이와 주먹다짐을 하고 그 일로 인해 알렉스는 외출 금지 명령을 받는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사과하고 한동안 공부에만 몰입한다.  어느 날 피터슨 씨의 애완견 커트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알렉스는 처음으로 실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애완견 커트가 죽은 후 피터슨 씨의 정신건강이 염려되었던 알렉스는 <커트 보네거트 세속 교회>라는 이름의 독서 모임을 만든다.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락을 적어와 피터슨 씨의 집에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보관하던 운석을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마중나온 피터슨 씨를 만나 함께 귀가하던 중 가벼운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피터슨 씨는 놀랍게도 진행성핵상마비. 신경이 점차적으로 마비되는 희귀한 퇴행성 질환으로, 아저씨는 이제 3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열네 달 동안의 독서 모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할 말이 있어 다시 들렀다가 자살을 시도한 피터슨 씨를 만난다.  알렉스의 신고로 되살아난 피터슨 씨는 병원에 입원하고 알렉스는 피터슨 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돌보기로 결심한다.  줄곧 대마를 직접 재배하여 마리화나를 피워왔던 피터슨 씨를 대신하여 알렉스는 대마 재배하는 법을 배우고 피터슨 아저씨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피터슨 아저씨의 몸은 점점 쇠락하여 가고 알렉스가 약속했던 스위스로 향하는 여정을 결행할 즈음 아저씨는 바닥에 넘어져 다시 입원한다.

 

병원으로부터 피터슨 아저씨의 퇴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을 빠져 나온다.  피터슨 아저씨를 차에 태워 스위스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고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가 죽기 전 스위스 세른에서 마지막 관광을 한다.  '과학 혁신 전시관'에서 알렉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별난' 입자의 수명을 생각하고,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생각하고, 우주가 마지막 열적 종말(모든 별이 사라지고 블랙홀이 증발하고 모든 핵자가 붕괴하고, 기본 입자만이 우주의 무한한 어둠 속을 떠다니는 순간)을 겪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다가,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라진다."    (p.429)

 

병원의 신고로 알렉스는 영국 방송사의 뉴스 메이커가 되고 피터슨 아저씨의 유골을 차에 싣고 귀국하던 중 경찰에 의헤 체포된다.  그러나 알렉스는 무사히 석방되어 열여덟 살 생일에 피터슨 씨가 남긴 유언장에 의해 5만 파운드의 상속금을 받는다.

 

"나는 피터슨 씨가 이 편지를 쓰면서 아주 즐거워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한테 편지를 건네주었다.  엄마는  편지를 읽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엘리에게 편지를 넘겼다.  엘리는 울지 않았다.  편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까딱 흔들면서 내게 돌려주었다."    (p.464)

 

도서관에 들러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제5 도살장>을 빌렸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결코 인연이 되지 않았을 소설.  어쩌면 내 삶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커트 보네거트라는 낯선 이름이 우연처럼 내 삶을 파고들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손쉽고 짧았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내가 던진 동전이 언젠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내 기억을 깨울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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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친구가 있다. 움직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발뒤축에 게으름을 한아름 달고 다니는 친구가 어떻게 야구 관람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 스케줄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몸 상태 및 주특기까지 줄줄 꿰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 친구가 혹시 천재?' 라는 턱도 없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 친구 덕분(?)에 사주에도 없었던 야구장 구경을 두어 번 갔었으니 말 다했다. 나는 사실 야구 관람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야구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것보다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을 즐기는 나로서는 그 친구가 도통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곁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라운드만 뚫어지게 노려보았고 그날 나는 그 친구가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보였었다. 그러다가도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 이길 가망이 없어 보일라치면 들입다 술만 먹는 것도 친구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그렇게 얼큰히 취한 친구는 선수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이건 뭐 숫제 개망나니가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내가 경기 도중에 친구만 홀로 남겨두고 도망을 갔을까.

 

그러던 친구가 요즘은 통 야구장을 찾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다. 혹시 벼락을 맞은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원정 경기도 마다않고 전국을 누비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바른생활 아저씨'로 탈바꿈한 데는 분명 까닭이 있을 터인데 이렇다 저렇다 해명도 없이 야구 얘기를 입 안 깊숙이 묻어버렸으니 궁금하다 못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왜 그렇게 갑자기 변했느냐' 물었더니 그저 씩 웃고 돌아서는 본새가 더욱 수상하기만 했다. 몇 번인가 재차 다그쳐 물었더니 친구 왈, 재미없다는 거였다. 그걸 대답이라고... 나는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도 궁금하고 답답한 쪽은 나인지라 슬슬 구슬렀더니 술을 사란다. 어디 그게 술을 사주면서까지 들을 일인가.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됐다, 내 안 듣고 말지'하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었다. 그러던 친구가 오늘은 자발적으로 해명을 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무슨 수작이 있겠거니 생각하고는 궁금하지 않다며 돌아섰다. 그런데 이 친구 쫓아오면서까지 해명을 늘어 놓았다. 질 팀은 지고 이길 팀은 이겨서 이제 야구가 재미없어졌단다. 이런, 된장! 그걸 해명이라고. 내가 다시 돌아서자 장황하게 풀어놓은 해명인즉슨 이랬다. 야구라는 게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어야 보는 재미도 있고 응원할 맛도 나는 법인데 경기를 보지 않아도 승부를 뻔히 예측할 수 있으니 볼 재미가 없어졌단다. 게다가 자신이 응원하던 팀은 내쳐 지기만 해서 몇 날 며칠을 줄창 술만 마시다 집엘 들어갔더니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어느 날 이혼서류를 내놓더란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싹싹 빌고 각서까지 썼다고 했다. 그 후로 친구는 단 한번도 야구장을 찾지 않았단다.

 

모름지기 스포츠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지는가 보았다. 그나저나 친구야, '너 참 불쌍타(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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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5-3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마누라다...그런 결론이로군요.요즘 남성들의 처지가 참으로 미제라블합니다.

꼼쥐 2014-06-05 19:3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내 입장에서 보면 그런 남편이 결코 달가운 건 아니겠지요. 물론 취미를 즐기는 것까지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도껏 해야 봐주지 않을까요? 암튼 저도 남자의 입장이지만 조금 심하다 싶더라구요.

말리 2014-05-3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꼴쥐 팬이신지... 설마 한화실까요.. 저희 집에도 야구의 계절을 손꼽아 기다리고도 매일 홧병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 미저러블 ㅠ

꼼쥐 2014-06-05 19:32   좋아요 0 | URL
한화 팬 맞습니다. 요즘은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헤어진 연인처럼 아예 관심도 두지 않더군요. 그래도 가끔은 생각날 법도 한데.
 

떨어진 버찌열매는 인도의 보도블럭에 거뭇거뭇 흉한 무늬를 새겨놓았다. 새 생명이 생명으로 화(化)하지 못하는 모습은 처량하다못해 서글펐다. 까만 알갱이들이 이사람 저사람에게 밟히고 뭉그러져 도로를 어지럽히는 꼴이라니... 봄밤을 화사하게 빛내주던 벚꽃의 낭만은 어데가고 이제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의 푸념이나 듣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릴 적 달짝지근한 풋내가 나는 오디를 입술이 파래지도록 따먹던 생각이 난다.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오디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까.

 

나는 흉물스럽게 굴러다니는 버찌 알갱이들을 보며 생각나는 게 있었다. 중학교때였나, 국어시간에 배웠던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에 등장하는 버찌씨다. 그 책에는 아직 돈에 대한 개념이 없는 어린 소년과 사탕가게 주인인 위그든 씨가 등장한다. 사탕이 먹고 싶어 사탕가게에 들렀던 소년은 돈 대신에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던 버찌씨 여섯 개를 내놓는다. 모자라냐, 묻는 소년에게 위그든 씨는 오히려 사탕과 함께 거스름돈 2센트를 쥐어준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아이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했을 버찌씨를 보며 그 값어치를 소중하게 셈할 줄 알았던 위그든 씨가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했다. 나도 그 어른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으쓱할까. 흔해빠진게 사탕인 풍요로운 시대인데 배고프던 그 시절보다 더 심한 허기가 밀려온다. 한여름의 더위가 턱밑까지 차오른 오늘, 그 더위 속에서 영악해진 내 영혼의 서늘함을 보는 듯했다.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내 아이만 괜찮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유난히 사망 사고가 많았던 요즘, 탐욕에 내어준 원칙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적당히 눈감아 주고, 적당히 쥐어주던 검은 뒷거래의 대가가 우리 앞에 크나 큰 재앙으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 예외가 있을 수 있을까. 버찌 알갱이들이 저토록 처참하게 밟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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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외인구단 - 곧 죽어도 풀스윙, 힘 없어도 돌직구
류미 지음 / 생각학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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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매인 몸이라 여행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어떤 여행이 기억에 남는 멋진 여행이었던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떠났던 여행, 이를테면 일정도 목적지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훌쩍 떠났던 여행이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중학교 시절 비상금도 한푼 없이 친구들과 함께 갔었던 어느 해수욕장, 대학 시절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차를 몰았던 경춘국도, 결혼 전 아내와 함께 탔던 어느 시외버스...

 

생각할수록 아련한 그리움이 물 밀듯 밀려옵니다.  이제 겨우 인생의 반쯤 지나온 제가 인생을 논한다는 건 우습지만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삶이라는 시간 열차에 훌쩍 뛰어 오를 수 있는 용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딴에는 꼼꼼히 준비한답시고 여행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수선을 떨다가 결국에는 여행의 첫머리부터 진이 뻐져 여행다운 여행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신경정신과 의사 류미가 쓴 <동대문 외인구단>을 읽으며 문득 들었던 생각입니다.  책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서울 동대문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서 중학생 선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한 '푸르미르 야구단'의 활동 보고서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쓸쓸한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휠체어를 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푸르미르 야구단'의 멘탈 코치로 우연히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교도 가기 싫고, 공부도 싫고, 특별히 되고 싶은 게 없는' 아이들과 함께 야구라는 스포츠에 동승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한편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하는 호소문으로 읽혔습니다. 

 

"누군가 야구는 인생과 닮았다고 했다.  푸르미르야구단 아이들은 후반기는커녕 아직 전반기도 시작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스프링캠프를 소화하고 있을 뿐.  이 아이들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 아이들을 2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102)

 

학창시절은 인생을 준비하는 스프링캠프와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훈련에 지쳐 정작 본 게임에는 참가도 못한 채 쓸쓸히 퇴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기에 참가는 했지만 경기를 즐길 여유도 그럴 기분도 아니라면, 또는 스프링캠프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이기는 방법만 습득했다면 스프링캠프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우리 기성세대는 과연 그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하며, 어떤 책일을 져야 하는지...

 

"선생님, 저는 즐겁게 지면 된다고 생각해요."  충격이었다.  나는 '즐겁게 진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는 데 즐거운 것도 있나?  쿨한 어른이고 싶어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애쓴다고 자평했는데, 내 머릿속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교육제도가 심어둔 승패, 위계 같은 것에서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유주에게 점점 조여오는 승부의 긴장감은 어쩌면 짐이 될지도 모르겠다."    (p.263)

 

나는 인생의 본 게임을 시작도 하기 전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어린 학생들을 무수히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물론 나뿐만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고단했던 학창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변화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어른들도 보았습니다.  나는 예외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올 3월, 나는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다.  어떤 아이라도, 성적이 꼴찌이거나 사람들이 다 욕하는 아이일지라도 마음속에는 빛나는 별 하나가 있다는 생가, 철없다고 할지 몰라도 푸르미르야구단을 마치고 나서 이 생각은 더 강해졌다.  무력감에 빠져 있던 의사에게 아이들이 준 선물이다."    (p.316)

 

준비도 없이 떠났던 여행처럼 우리의 삶의 여정이 조금 고되고 힘들지라도 그 낯섦과 불편함을 온전히 즐길 여유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초라하거나 허망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히려 내가 준비없이 떠났지만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어느 멋진 여행의 추억처럼 우리네 삶도 그렇게 기억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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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을 나설 때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와 검은 색 재킷을 입었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어디 장례식장 갈 일이 있느냐'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5주기라서 그렇게 입었을 뿐이라고 했더니 반응들이 참 재미있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났느냐'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빠라고 오해받아요'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면 욕 먹어요'하는 사람이 있기에,

"아니, 내가 돌아가신 분과 썸 좀 탔기로서니 그게 왜 욕까지 먹어야 되지? 죄없는 사람을 붙잡아 죽도록 팬 것도 아니고, 무단횡단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했더니 다들 웃었다.

 

겉으로는 다들 '평화와 공존'을 주장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괜한 트집과 비난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위선적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나는 누가 박정희와 썸을 타든, 히틀러와 영혼 결혼식을 올리든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거나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비난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비난해야 마땅한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천안함 사건으로 국군 장병들이 숨졌을 때는 온 국민이 경건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애도하면서 지나갔는데, 왜 이번에는 이렇게 시끄러운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모두 다 백정"

 

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

“여러분 아시지만 한국은요. 이번에 정몽준씨 아들이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을 향해) ‘미개하다’고 했잖아요. 사실 잘못된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에 인용한 두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비난이나 트집은 적어도 이성이 있는,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에게나 할 일이다. 개과천선의 소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말이다. 위의 두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이성이 없는 가엾은 영혼일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엾은 영혼을 구제해 달라고 조용히 기도를 올려야 한다.

 

재킷을 입고 나왔더니 덥기는 덥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영혼이 없는, 웃기는 짬뽕들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자면 오늘 저녁은 기도 시간이 많이 길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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