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친구가 있다. 움직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발뒤축에 게으름을 한아름 달고 다니는 친구가 어떻게 야구 관람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 스케줄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몸 상태 및 주특기까지 줄줄 꿰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 친구가 혹시 천재?' 라는 턱도 없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 친구 덕분(?)에 사주에도 없었던 야구장 구경을 두어 번 갔었으니 말 다했다. 나는 사실 야구 관람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야구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것보다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을 즐기는 나로서는 그 친구가 도통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곁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라운드만 뚫어지게 노려보았고 그날 나는 그 친구가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보였었다. 그러다가도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 이길 가망이 없어 보일라치면 들입다 술만 먹는 것도 친구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그렇게 얼큰히 취한 친구는 선수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이건 뭐 숫제 개망나니가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내가 경기 도중에 친구만 홀로 남겨두고 도망을 갔을까.

 

그러던 친구가 요즘은 통 야구장을 찾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다. 혹시 벼락을 맞은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원정 경기도 마다않고 전국을 누비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바른생활 아저씨'로 탈바꿈한 데는 분명 까닭이 있을 터인데 이렇다 저렇다 해명도 없이 야구 얘기를 입 안 깊숙이 묻어버렸으니 궁금하다 못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왜 그렇게 갑자기 변했느냐' 물었더니 그저 씩 웃고 돌아서는 본새가 더욱 수상하기만 했다. 몇 번인가 재차 다그쳐 물었더니 친구 왈, 재미없다는 거였다. 그걸 대답이라고... 나는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도 궁금하고 답답한 쪽은 나인지라 슬슬 구슬렀더니 술을 사란다. 어디 그게 술을 사주면서까지 들을 일인가.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됐다, 내 안 듣고 말지'하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었다. 그러던 친구가 오늘은 자발적으로 해명을 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무슨 수작이 있겠거니 생각하고는 궁금하지 않다며 돌아섰다. 그런데 이 친구 쫓아오면서까지 해명을 늘어 놓았다. 질 팀은 지고 이길 팀은 이겨서 이제 야구가 재미없어졌단다. 이런, 된장! 그걸 해명이라고. 내가 다시 돌아서자 장황하게 풀어놓은 해명인즉슨 이랬다. 야구라는 게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어야 보는 재미도 있고 응원할 맛도 나는 법인데 경기를 보지 않아도 승부를 뻔히 예측할 수 있으니 볼 재미가 없어졌단다. 게다가 자신이 응원하던 팀은 내쳐 지기만 해서 몇 날 며칠을 줄창 술만 마시다 집엘 들어갔더니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어느 날 이혼서류를 내놓더란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싹싹 빌고 각서까지 썼다고 했다. 그 후로 친구는 단 한번도 야구장을 찾지 않았단다.

 

모름지기 스포츠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지는가 보았다. 그나저나 친구야, '너 참 불쌍타(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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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5-3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마누라다...그런 결론이로군요.요즘 남성들의 처지가 참으로 미제라블합니다.

꼼쥐 2014-06-05 19:3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내 입장에서 보면 그런 남편이 결코 달가운 건 아니겠지요. 물론 취미를 즐기는 것까지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도껏 해야 봐주지 않을까요? 암튼 저도 남자의 입장이지만 조금 심하다 싶더라구요.

말리 2014-05-3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꼴쥐 팬이신지... 설마 한화실까요.. 저희 집에도 야구의 계절을 손꼽아 기다리고도 매일 홧병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 미저러블 ㅠ

꼼쥐 2014-06-05 19:32   좋아요 0 | URL
한화 팬 맞습니다. 요즘은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헤어진 연인처럼 아예 관심도 두지 않더군요. 그래도 가끔은 생각날 법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