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서 - 152 True Stories & Innocent lies 생각이 나서 1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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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가 늦은 날이면 라면 생각이 난다. 출출하다는 것과, 헛헛하다는 것과, 종종 외롭다거나 급기야 사무치는 느낌으로 라면을 삶는다. 내 영혼이 현실로부터 반쯤 밀려난 시각,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들 녀석이 깊이 잠들어 있을 그 시간에 나는 라면을 삶고 약간의 슬픔으로 간을 한다. 짭쪼름한 면발을 한 젓가락 삼키며 TV 볼륨을 높인다. 저만치 밀려나는 침묵과 자동반사에 의지한 채 운전을 했던 바로 전 귀갓길의 희미한 기억들이 화면 속에서 푸른 빛으로 번진다. 불어터진 라면 면발을 보면 식욕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식탁 한켠으로 밀려난 냄비를 멀뚱히 지켜본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무력감은 말하자면 나의 수면제.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할수록 이물질처럼 단단해진 현실감이 나를 깨운다. '책이라도 좀 읽자' 생각한다.

 

농밀해진 침묵 간간이 책장 넘기는 소리. 황경신의 <생각이 나서>. 언제 어떤 이유로 접어두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페이지 앞에서 나의 시선이 멎는다. '하염없음'과 '속절없는 우울'을 그 야심한 시간에 얹어놓은 채 빈 시간만 흘려보낸다. '조금만 더 읽고 자야지' 생각한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날카롭게 재촉한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가며 읽어야 할 책이 있다. <생각이 나서>도 그런 책이다. 느낌만으로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아쉬운.

 

"우리 이렇게 나란히 목매달고 있다가, 사람이나 사랑이나 여하튼 그런 것에 매달려 있다가, 작은 진동에도 떨리며 부딪치다가, 그때마다 불안하고 투명한 소리를 내다가, 그 소리 참 아름답다 추억하며 그리워하다가, 다시 한 번 가까이 가려 하다가, 너무 가까이 가면 깨어질까 다칠까 두려워한다. 친구가 친구를 불러내고, 그 친구가 또 친구를 불러내고,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넷이 되었던 어느 밤. 매달린 사랑 하나 가만히 내려 조심조심 향긋한 시간을 따른다. 유리처럼 투명한 마음을 주고받는다." (p.27)

 

왜 오래된 기억들은 밤에만 깨어나는지, 왜 사소한 기억들은 올망졸망 두서없는지, 왜 그리움 저편 기억들은 슬픈 것인지, 밤이 깊을수록 기억의 세계는 점점 투명해지는지... 작가의 기억 속으로 내 영혼이 한뼘쯤 다가간 시간. 152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내 영혼 속으로 한 모금 녹아들던 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전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 나는 이유도 없이 슬펐다.

 

"기다리는 답이 오기를 기다리다

나도 누군가에게 기다리는 답을 기다리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자 오래전에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대답 없음도 대답이다' 中에서)

 

마음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가가 있다. 그런 글이 있다. 이슬 맺힌 나뭇가지를 살포시 흔들고 날아가는 작은 새의 움직임처럼 독자의 감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그런. 황경신 작가는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언저리에서, 이별의 언저리에서, 동경과 희망의 언저리에서, 때론 죽음의 언저리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한동안 바라보다 섬세한 언어로 일상을 기록하는 그런 작가이다.

 

"괜찮으냐고 묻지마.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물어보면 나는 괜찮다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잖아. 괜찮지 못하다는 말은 배운 적이 없으니. 힘내라고 하지 마. 이미 힘을 내고 있잖아. 그러고 있는데 또 그러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울어버리고 싶은걸.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말하지 마. 잘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잘되지 않았고 잘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내 곁을 지켜주겠다고만 말해줘. 울고 싶으면 울라고 해줘.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아파하라고 해줘. 내가 위로를 구할 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함께 있어줘. 그것으로 나는 감사해. 그 힘으로 나는 걸을 거야. 어쩌면 무엇인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거야."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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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모든 게 귀찮고 마냥 내팽겨치고 싶은 여름의 정점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역시 책이 아닐까 싶다.  신간 에세이를 검색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나는 잠언집과 같은 포토 에세이나 SNS 문장을 모아 놓은 듯한 짧은 글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황경신의 <생각이 나서>는 싫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한 문장 한 문장에 작가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헤르만 헤세는 내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그의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등은 나의 성장과 함께 했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도 이따금 읽었던 책들을 들춰보며 그때를 추억하곤 한다.  헤세를 추억하면서 읽고 싶은 책이다.

 

 

 

 

 

 

 

 

 

한 나라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려면 여행자가 아닌 타국적의 현지인이 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작가 신이현이 쓴 이 책은 프랑스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적어도 여행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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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나크리가 북상한다는 기상청 예보가 있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무덥습니다. 아침나절에 책을 조금 읽고, 하릴없이 잠깐 졸고, 무료해서 대학 시절의 노트를 잠깐 뒤적였습니다. 미친 짓인 줄 잘 알면서도 그때 쓴 낙서 한 줄을 올려봅니다. 오글거리는 내용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잠시 더위도 잊으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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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와 비 걷힌 후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다르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것은 침묵을 깨는 균일성의 차이라고 말입니다. 당신과 나의 만남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변을 서성였고 어쩌면 그 발걸음은 빗소리처럼 균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정녕 느닷없음에 다르지 않나 봅니다.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렵니다.

 

사랑의 시작과 그 끝을 어림하는 것만큼 미욱한 일이 또 있을라구요. 우리가 염원했던 평온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속일 만큼 간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의 시선을 외면한 채 흐르는 시간만 응시했습니다. 그때 당신의 시선이 바람결처럼 흔들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시선도 그렇게 흔들렸겠지요. 서로의 불안을 알면서도 우리는 끝내 마음의 균열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두려움과 공포를 당신과 나는 오직 자신의 품 안에 갈무리하려 애쓸 뿐이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이별의 징후들이 하나 둘 열꽃처럼 피어나던 무렵이었나 봅니다. 나는 당신의 옹졸함을 담을 수 없는 언어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재어보지는 않았어도 우리의 가슴은 딱 그 정도의 크기였다는 것을 지금은 알겠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지나온 길은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까닭이지요. 기늠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다 지난 후에는 언제나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합니다. 삶의 부조리는 그곳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비가 내립니다. '그래도 살아지는구나' 생각했던 마음은 어느새 '너도 잘 살고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계절이 바뀐 까닭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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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조금 더 이어지지만 옮기기가 쑥스러워서 멈췄습니다. 이렇게 옮기고 보니 대학 시절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만 한 것 같네요. 결코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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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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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낮에 도시의 작은 공원을 거닌 적이 있는지. '찜통 더위', '가마솥 더위' 등 상투적인 말들이 부지불식간에 생각나는 한낮 오후에 말이다. 나는 간혹 도시의 잉여 공간처럼 여겨지는 그곳에서 시들어가는 삶의 모습을 목도하곤 한다. 이 건조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마치 생명을 잃은 나뭇가지처럼 금방이라도 와삭 부서질 듯한 노인의 시선을 마주 대하고 있노라면 '어서 빨리 가을이 와야 할 텐데'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곤 한다.

 

빌딩에 가로막혀 손바닥만한 허공일지언정 누구에게도 제 영역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말매미의 악다구니 울음이 공원에서 종일 떠나지 않고, 등 굽은 노인들이 옹기종기 공원 벤치에 모여 앉아 장기를 두었다. 이따금 큰소리가 오가고 대판 싸움이라도 벌어지려나 보면 말매미의 소음 때문인지 갈수록 청력이 떨어지는 까닭인지 메마른 시간만 한나절 흔들릴 뿐 이렇다 할 싸움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지근거리의 기척에도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는 그들만의 독백이 한여름 도시 공원을 떠돈다. 도시의 잉여 공간과 같은 공원 한켠에서.

 

윤대녕의 신작 에세이집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떠벌리면서도 나는 정작 그 이유를 찾지 못한다. 분명 다른 책들도 읽어보았을 텐데 윤대녕 하면 줄곧 <대설주의보>만 떠오른다. 선물 상자의 뚜껑을 열고 바닥까지 샅샅이 살폈으면서도 혹시 몰라 상자를 높이 들고 밑면까지 확인하는 아이의 심정으로 나는 천천히, 한 발 한 발 아주 천천히 그의 공간 속을 걷는다.

 

"제 아무리 바다라 할지라도 프레임 속에 가두어놓으면 곧 공간으로 변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 순간 시간의 지속은 멈춰지고 현재는 삽시간에 과거로 환원되며 풍경은 추억으로 변한다. 모든 사진이 실은 죽음의 기록인 것도 다 이 때문이다." (p.66)

 

공간은 장소와는 달리 입체적이면서 동시에 한시성을 전제로 한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유년기의 공간을 중년의 작가는 이제 아프게 기억한다. 폐허의 기억들. 닿을 수 없는 시간들. 2011년 10월부터 2013년 9월까지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이 책에서 작가는 고향집, 노래방, 바다, 술집, 영화관, 우체국 등 작가의 삶과 연계된 사적인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속에서 작가의 지난했던 삶과 젊은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집필을 위해 옮겨다니던 수많은 공간들과 만나게 된다.

 

"흑백으로 각인된 골목의 풍경들은 내 육체 속에 숲의 잔해처럼 남아 있다. 비록 어두웠던 기억일지라도 내게는 여전히 잊지 못할 추억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저 낯선 그림자들이 서성대는 익숙한 공간으로 말이다." (p.106)

 

공간은 태생적인 한계를 품고 있다. 내가 자주 다니던 술집, 첫사랑의 연인과 함께 들렀던 영화관 등은 개개인의 추억과는 상관없이 소멸하거나 변화를 거듭한다. 그것은 오직 기억해야 할 만인의 역사가 아니라 은밀함 속에서 사라져가는 개인의 역사일 뿐이다. 삶은 때로 푸근한 인상의 안주인처럼 안주를 허락하다가도 느닷없는 퇴거를 표독스럽게 명령하기도 한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잊혀진 공간에 넋두리처럼 나의 기억을 한나절 풀어놓으면 맑은 눈물처럼 정화될지, 그런 날 꿈속에서 내일은 탄산수처럼 투명한 공기방울로 나를 맞아줄지, 모르겠다.

 

"지나고 나면 삶은 한갓 꿈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돌아보니 정말이지 모든 게 하나의 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그 꿈이라도 한사코 복원하고 싶었던가 보다. 연재를 하는 동안 나는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가끔 찾아가보았다. 짐작했듯 대부분의 공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 이상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그곳에는 마음의 텅 빈 장소(場所)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p.254 '작가의 말' 중에서)

 

오후에는 별안간 소나기가 내렸다. 도시의 잉여 공간과 같은 공원 한켠에는 있어야 할 메마른 시선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독백들이 잔영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공간에서 나는 내일 있을지도 모를 죽음을 더듬고 있다. 여기에 머물렀던 등 굽은 노인들을 생각하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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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특정 장소와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듯한 차림의 사람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리산 정상에서 숏팬츠 차림의 관능적인 여인을 본다거나, 스파이크 골프화만 신으면 당장이라도 필드에 나설 수 있을 것처럼 골프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배 통통한 남자를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만난다거나, 클럽의 플로어에서 격식을 갖춘 양복 차림의 청년을 만난다거나, 어느 유명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참석한 관객들 사이에서 도드라진 초라한 행색의 할아버지를 보는 경우이지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이 지구를 빛내고 있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는 고작 내 앞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있는지, 뒤로는 또 몇 명의 사람들이 있는지, 그동안 나는 몇 칸이나 뒤로 밀려났는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지독한 배신인지요.

 

나는 끝내 벌어진 틈새를 메우지 못하고 흔들리는 내 영혼을 그들의 영혼 가까이에 두지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지구의 정원에 오직 내 잣대의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지기를 바라고 또 바란 것이지요.  이 얼마나 고독한 영혼인지요.

 

숲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채로운 꽃들이 서로를 시기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면서도 나는 끝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셈이었습니다.  나의 삶은 지금껏 청맹과니의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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