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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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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낮에 도시의 작은 공원을 거닌 적이 있는지. '찜통 더위', '가마솥 더위' 등 상투적인 말들이 부지불식간에 생각나는 한낮 오후에 말이다. 나는 간혹 도시의 잉여 공간처럼 여겨지는 그곳에서 시들어가는 삶의 모습을 목도하곤 한다. 이 건조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마치 생명을 잃은 나뭇가지처럼 금방이라도 와삭 부서질 듯한 노인의 시선을 마주 대하고 있노라면 '어서 빨리 가을이 와야 할 텐데'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곤 한다.

 

빌딩에 가로막혀 손바닥만한 허공일지언정 누구에게도 제 영역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말매미의 악다구니 울음이 공원에서 종일 떠나지 않고, 등 굽은 노인들이 옹기종기 공원 벤치에 모여 앉아 장기를 두었다. 이따금 큰소리가 오가고 대판 싸움이라도 벌어지려나 보면 말매미의 소음 때문인지 갈수록 청력이 떨어지는 까닭인지 메마른 시간만 한나절 흔들릴 뿐 이렇다 할 싸움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지근거리의 기척에도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는 그들만의 독백이 한여름 도시 공원을 떠돈다. 도시의 잉여 공간과 같은 공원 한켠에서.

 

윤대녕의 신작 에세이집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떠벌리면서도 나는 정작 그 이유를 찾지 못한다. 분명 다른 책들도 읽어보았을 텐데 윤대녕 하면 줄곧 <대설주의보>만 떠오른다. 선물 상자의 뚜껑을 열고 바닥까지 샅샅이 살폈으면서도 혹시 몰라 상자를 높이 들고 밑면까지 확인하는 아이의 심정으로 나는 천천히, 한 발 한 발 아주 천천히 그의 공간 속을 걷는다.

 

"제 아무리 바다라 할지라도 프레임 속에 가두어놓으면 곧 공간으로 변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 순간 시간의 지속은 멈춰지고 현재는 삽시간에 과거로 환원되며 풍경은 추억으로 변한다. 모든 사진이 실은 죽음의 기록인 것도 다 이 때문이다." (p.66)

 

공간은 장소와는 달리 입체적이면서 동시에 한시성을 전제로 한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유년기의 공간을 중년의 작가는 이제 아프게 기억한다. 폐허의 기억들. 닿을 수 없는 시간들. 2011년 10월부터 2013년 9월까지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이 책에서 작가는 고향집, 노래방, 바다, 술집, 영화관, 우체국 등 작가의 삶과 연계된 사적인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속에서 작가의 지난했던 삶과 젊은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집필을 위해 옮겨다니던 수많은 공간들과 만나게 된다.

 

"흑백으로 각인된 골목의 풍경들은 내 육체 속에 숲의 잔해처럼 남아 있다. 비록 어두웠던 기억일지라도 내게는 여전히 잊지 못할 추억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저 낯선 그림자들이 서성대는 익숙한 공간으로 말이다." (p.106)

 

공간은 태생적인 한계를 품고 있다. 내가 자주 다니던 술집, 첫사랑의 연인과 함께 들렀던 영화관 등은 개개인의 추억과는 상관없이 소멸하거나 변화를 거듭한다. 그것은 오직 기억해야 할 만인의 역사가 아니라 은밀함 속에서 사라져가는 개인의 역사일 뿐이다. 삶은 때로 푸근한 인상의 안주인처럼 안주를 허락하다가도 느닷없는 퇴거를 표독스럽게 명령하기도 한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잊혀진 공간에 넋두리처럼 나의 기억을 한나절 풀어놓으면 맑은 눈물처럼 정화될지, 그런 날 꿈속에서 내일은 탄산수처럼 투명한 공기방울로 나를 맞아줄지, 모르겠다.

 

"지나고 나면 삶은 한갓 꿈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돌아보니 정말이지 모든 게 하나의 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그 꿈이라도 한사코 복원하고 싶었던가 보다. 연재를 하는 동안 나는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가끔 찾아가보았다. 짐작했듯 대부분의 공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 이상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그곳에는 마음의 텅 빈 장소(場所)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p.254 '작가의 말' 중에서)

 

오후에는 별안간 소나기가 내렸다. 도시의 잉여 공간과 같은 공원 한켠에는 있어야 할 메마른 시선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독백들이 잔영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공간에서 나는 내일 있을지도 모를 죽음을 더듬고 있다. 여기에 머물렀던 등 굽은 노인들을 생각하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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