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친구는 당뇨 합병증으로 몇 년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병문안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던 나는 그마저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친구는 괴사가 진행되는 한 쪽 발의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일정이 다음주로 정해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더럭 겁이 났던 것입니다.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건강에 별 문제가 없는 나로서는 아픈 친구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또는 의례적인 요식행위인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입니다.  검게 변한 발가락에서는 살 썩는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병실 한쪽에서는 방학을 맞은 친구의 아들이 보조침대에 앉아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눈동자는 세상 어느 것에도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세상의 종말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병실의 풍경이 그 전조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문명은 육체를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해왔고,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겠구나'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 문명은 주로 육체의 편리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와 각종 전자제품 등은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너무도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화공약품 덩어리로 변질된 각종 식재료는 또 어떻습니까?

 

인간 육체의 파괴는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구의 발달은 이제 그 정점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탐욕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각종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진화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아주 쉽게 잠식당하도록 고안된 것이지요.  육체를 파괴하도록 설계된 과거의 문명은 그나마 의학의 발달과 아직은 건재한 영혼으로 인해 생명마저 파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파괴는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문명의 발전은 파괴와 무엇에서 다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발전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과거에는 육체를, 미래에는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문명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파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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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리라는 암울한 전망을 결코 한 귀로 듣고 흘리질 못하겠군요. 연초에 어떤 신문을 보니 '총균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더라구요.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별이 50년도 못 버틴다구요.

꼼쥐 2014-01-12 20:47   좋아요 0 | URL
저도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일은 비교적 오래 걸렸지만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과 그로 인한 지구 전체의 파괴는 가속화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끔찍한 일이지만 말이죠.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새해를 맞는 기분은 언제나 약간의 흥분과 기대가 뒤섞이게 마련이지요.  그런 까닭에 저는 새해에는 주로 에세이를 읽곤 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에는 에세이만 한 게 없다는 생각에서이지요.  그러나 연초에 출간되는 책은 얼마나 많은지요.  책을 고르는 일부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자칫하다간 책욕심만 키우고 맙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군요.

 

 

 

대한민국의 현대문학사에서 최인호 작가만큼 영욕의 세월을 살았던 분도 드물지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에 등단하면서부터 시작된 작품 활동은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겠지요.  무수히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고 인기와 명성을 한 몸에 받았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 나는 <최인호의 인연>을 읽었습니다.  한 작가의 유고집을 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새해에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 곁을 떠난 노작가의 삶을 더듬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또 다른 의무가 아닐까요?

 

 

 

 

 

 

소설가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신경숙 작가의 <아름다운 그늘>을 읽었을 때도 그랬고, 공지영 작가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읽을 때도 그랬습니다.  소설가의 산문집은 작가의 민낯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소설가의 산문집은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딱히 여행기를 즐겨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눈에 띄는 여행기가 있습니다.  여행지에서나 있을 법한, 자신의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그런 책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겠습니다.  치장에 익숙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지친 까닭이겠지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목마른 까닭이기도 합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에 까무룩 잠이 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자는 듯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게 뭔지 하는 유행가 가사의 한 소절쯤으로 삶의 가치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요즘 진정으로 나를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정답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 비밀의 문을 살짝이라도 엿볼 수만 있다면 내게 남은 날들을 힘차게 살 수 있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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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1-0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하성란 에세이도 궁금합니다. 소설가의 에세이는 내공이 느껴져요~~~

꼼쥐 2014-01-08 13:20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데 소설가는 소설에 집중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애타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루키처럼 너무 많은 에세이집을 출간하면 무덤덤해지거든요. 신경숙 작가처럼 너무 적어서도 곤란하지만 말이죠.
 

하늘은 적당히 우울합니다.

사람들은 또 적당히 분주하고

밖은 또 적당히 소란스럽습니다.

 

개벽을 하듯

새해는 또 어김 없이 찾아왔건만

잘 벼려진 대패로 민 듯 도드라진 그 무엇도 없이

일상은 그저 평온합니다.

 

어느 해 여름이었나 봅니다.

나는 아스팔트 열기가 이글대는 고속도로를 몇 시간째

달리고 있었습니다.  흐물흐물 피어나는 열기의 아지랑이 속으로

내 차는 그렇게 단조로운 직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 '액셀러레이트를 밟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처음'이 갖는 신선한 느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한 느낌은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느껴질 때, 그 익숙함의 영속하는 재생은

어쩌면 삶의 위험 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멈춤'이 필요한 순간은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는 말은 괴테가 한 말입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은 그 어떤 것에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아마도 '익숙함'에 가려진 '처음'을 발견고자 하는 노력일 듯 싶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끝없이 방황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가 밝았고 벌써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나는 습관처럼 하루하루를 헤아리고 익숙함 속에서 영혼없는 날들을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내게 '처음'이 남아있기에,

처음이라는 신선하고 설레는 것들이 남아있기에 나는 여전히 내일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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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는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나 신년운세를 보는 것이지요.  대개는 재미삼아 하는 일종의 놀이쯤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요즘 신년운세를 보지 않습니다.  믿지 못해서이거나 궁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귀찮아졌을 뿐이죠.

 

제가 어렸을 때는 점집이 참 많았던 듯합니다.  붉은 바탕에 만자 (卍字) 표시가 있는 집은 한결같이 점을 보는 집이었죠.  지금도 더러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보이지는 않더군요.  점도 이제는 다양화되고 첨단화되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으로 이동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에는 점집을 찾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돈을 내고 점을 보았던 것은 아마도 아내와 결혼하기 한두 해 전쯤 아내와 함께 점집을 찾았던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듯합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어느 점집에 들러 가족들 사주며 운세를 모두 보고 와서는 저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적은 한두 번 있었던 듯합니다.  요즘에도 제 주변에는 심심풀이로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곤 합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은 우리 주변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아지는 게 사실인 듯합니다.  못 믿으시겠다구요?  그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지 인간의 길흉을 예측하는 점이나 무슨무슨 예보 또는 예측은 사실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적중률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지만 말이죠.  예컨대 일기예보만 하더라도 단기예보는 잘 맞는 편이지만 장기예보는 적중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주가예측이나 경기예측도 비슷하지요.  이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보는 점보다도 못한 적중률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은 미신으로 치부하며 터부시하는 반면 경기예측이나 주가예측을 두고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개중에는 신기한 예보도 있더군요.  요즘은 미세먼지도 예보를 하고 내년 4월부터는 서울시에서 모기예보제를 시행한다니 점의 종류는 나날이 늘어날 것만 같아요.  예보를 하는 것도 그 주체에 따라 성향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듯 보입니다.  가령 장기 기상예보는 늘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주가예측은 항상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지요.  올해만 하더라도 올 겨울은 눈도 많고 혹독한 추위를 예보했었는데 지금까지는 그렇지도 않은 듯 보이니 적중률은?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이네요.  주가예측도 올초에는 상당히 높게 예상했는데 강보합 정도였으니 예측은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기관에 따라 왜 이런 예측을 하고 사람들은 왜 어떤 예측은 기억하고 어떤 예측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상청 장기예보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말할 경우 이 예보가 맞을 경우 잘 맞는다고 할 테고 맞지 않았을 경우는 날씨가 좋았을 테니 그런 예보가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주가예측은 주가가 상승하든 하락하든 손해를 보는 사람과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 기왕이면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예측을 믿었다가 손해를 본 사람들은 원망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하겠죠.

 

아무튼 예보든 점이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비록 그 기법이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죠.  미래는 신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불확실성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은 점이든 예보든 그 무엇엔가 더욱 의존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과학이 발달해도 100% 정확한 예보는 존재하지 않을 듯 싶군요.  점이든 또는 예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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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2-3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어떤 책 속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이 'AGAINST THE GODS'였던 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구절이 다음 내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 *

확률은, 확률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나올 때만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확률에 대한 의존은 확률을 어느 정도 고려해서「행동해야 한다」는 판단이 설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확률이 우리에게「인생의 지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존 로크(Tohn Locke)가 말했듯이, 신은「우리의 관심사 대부분에」단지 미광(微光)만을 부여하셨다. 내가 여기에 부연해 덧붙인다면,「신은 우리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 하셨다」라고 하겠다. 이는 가정하건대, 신이 우리를 놓고 즐거워하셨던「평범(Mediocrity)」과「수습기간(Probationership)」의 상태에 걸맞은 표현일 것이다.


꼼쥐 2014-01-04 11:39   좋아요 0 | URL
멋진 표현이네요.
신은 정말이지 우리 인간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한 것 같아요. 우리는 그 미광을 붙잡고 떼를 쓰고 있구요. ㅎㅎ

세실 2014-01-0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도서관에도 다가올 인사를 앞두고 유난히 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 어디가고, 누군 어디가고..마치 인사파트에 있는 사람처럼요. 늘 엇나가지만 말의 양은 줄어들지 않네요. 별명이 오뻥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참 다양하죠? ㅎㅎ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해 되시길 빕니다.
새해엔 더 자주 뵈어요~~~~

꼼쥐 2014-01-04 11:41   좋아요 0 | URL
어느 조직에서나 그런 사람은 한둘 있게 마련이지요.
아마도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나 봅니다. 눈치를 주고 주의를 줘도 잘 고쳐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죠.

세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일은 증오를 사랑으로 갚는 것, 버려진 자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뜩이나 2013년의 막바지에 이른 요즘의 대한민국 정세를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도노조의 파업과 민주노총 사무실의 강제진입을 보면서,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변호인'의 흥행을 보면서 마음이 그닥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보면서 저는 8,90년대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 장면이 보여지곤 했으니까요.  오죽하면 대학가 주변의 상인들은 민방위 훈련을 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셔터를 여닫아야 했겠습니까.

 

현 정부의 이와 같은 행태는 집권초기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대치 상황이 전 정권에서 발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뿐입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물러날 즈음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모두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제 의견에 반하는 분도 물론 있겠지요.

 

다들 보셨겠지만 참여정부의 초기에 있었던 평검사와의 대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 어느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던(어쩌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권위주의의 탈피는 그때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민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삶에서도 성공과 과오는 있게 마련이지요.  어쩌면 과오가 아홉이라면 성공은 그 중 하나쯤만 되어도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과오를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삶은 더욱 위대한 것이겠지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과오로 언론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과 참여정부와 척을 지는 반대파를 제거하지 못했던 것을 꼽는 분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뜨뜻미지근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은 자유보다는 오히려 억압과 복종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이들은 그런 환경보다는 오히려 자유와 개성에 더 익숙하겠지요.  그 정점은 역시 참여정부 시절이었구요.

 

민주주의의 기반인 자유와 평화를 누려본 사람들은 억압과 복종을 결코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지요.  저처럼 그나마 나이 든 사람들은 억압적인 환경을 여러 번 경험했던지라 지금 그런 환경에 다시 처한다고 할지라도 적당히 견딜 수 있겠지만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어디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참여정부가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일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과오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것은 그의 위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정의에 기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와 다른 의견이 있는 분들은 오히려 공권력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도 분명 있을 겁니다.  현 정부를 책임지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구요.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히틀러나 뭇솔리니도 자신의 행동이 틀리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곧 전체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과 그것을 모두 수용할 때 가능한 제도입니다.  불협화음과 시끄러움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지요.

 

영화 '변호인'이 흥행몰이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커다란 위협이 엄습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자유를 향유했던 사람들은 억압과 굴종의 시대를 결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현 정부의 성공 여부는 그것에 달려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하고, 더 많은 대화를 시도하는 것 그것이 정답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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