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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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섯 살 난 소년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소재들은 너무나 가혹하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7년전 납치를 당해 감금되었다. 하늘로 아주 작게 난 방안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코르크 냄새가 가득한 아주 작은 방, 룸 안에서 소년에게는 매해 생일을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감금한 남자가 올 시간이 되면 침대 밑 서랍으로 돌돌 말려 숨어 있고 어머니를 범하는 소리까지 다 들으며 살아야 한다. 어머니를 감금하고, 무수한 성폭력을 휘두르고 그곳에서 원치 않는 출산을 혼자 하는 스무 살 청춘을 다 보내고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던 밀실 감금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게 되었다는 소설의 소재들은 잔혹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잔혹한 소재들의 반전에 있는 어린 아이의 시선이라는 것으로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납치를 당한 여성의 시각이었다면 이만큼 더 안쓰러울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 작은 방 안에서 세상과 소통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나오지 않는 채널을 가진 구식 텔레비전과 천장으로 난 작은 투명창밖에 없다. 그리고 일요일에 한번 여자와 어린아이 잭을 위해 선심 쓰듯 원하는 것 한가지씩 가져다주는 그들을 가둔 올드 닉의 선물, 즉 동화책이거나 리모컨이 있는 장난감들 밖에 없다. 여자는 치통을 계속해서 앓아가고 있지만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결국 그녀의 청춘을 갈아먹는 감금된 방처럼 곪아 빠져버린다.

그녀는 잭이 첫 아이가 아니었다. 첫 번째 딸을 낳았지만 경험도 없는 그것도 어린 나이에 혼자 출산을 해 탯줄에 목이 감겨 나오자마자 사산을 했다. 그리고 잭이 두 번째 출산이었다. 문득 그녀를 가둔 닉의 마음이 참 궁금했다.

첫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나서 왜 피임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말처럼 감금된 그녀를 범하면서 만약 아이를 원했다면 구글을 통해서라도 출산하는 방법이라도 알아야 했을 텐데 전혀 사전 자식도 없이 들어와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그 부분을 읽을 때 너무 속이 부글거리고 화가 치밀어 올라 책을 여러번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잭이 태어나고 여자가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얼굴 한번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닉은 여자를 사랑하기보다는 오로지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위해 감금해 놓은 상황이니까 어떤 부성애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자신의 핏줄인데 어쩜 그렇게 모질고 사나울까.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방이 좁아지고 있다. 여자 혼자 있을 그 방에 작은 아이가 점점 커지면서 그녀는 일생일대의 큰 결심을 한다. 그곳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 또한 아이의 눈에 맞춰 이뤄지고 역시 아이의 시선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녀는 점점 작아져가는 방에서 탈출해 자신의 청춘을 찾기보다 아이를 위한 모성으로 세상으로 나가려고 했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탈출을 했고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모성으로 죽을힘을 다해 탈출을 했지만 여자라는 이름으로 세상 앞에 좌절하고 만다. 그녀를 마치 밀림에서 몇 십 년씩 살다가 살아나온 사람 취급하는 매스컴의 낚시들에 여러번 낚이며 낚싯대에 걸려 구경거리가 되었다.

7년 동안 감금된 방에서 매일 눈을 감으면서 꿈꿔왔던 탈출이었지만 세상을 등지게끔 많은 약을 먹어야 했던 세상의 호기심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눈밭에 서 있는 것보다 더 춥고 눈보라에 살들은 더 아프게 깎여간다. 잃어버린 7년이라는 시간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좁은 공간에서 살아온 잭이 공간 개념이 없어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매번 벽에 부딪치고 넘어지는 것처럼 그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동안 계속 넘어지고 다치며 일어서야 할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장에서 잭의 안녕을 소리 내어 읽었다면 다들 코끝이 찡해 왔을 것 같다. 잠을 자기 전 좁은 방안에 있는 작은 세상에 안녕을 고하며 잠들었던 잭은 자신이 있었던, 엄마인 그녀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던 그 작은 룸을 찾아 안녕을 고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그 지옥 같은 룸이었지만 잭이 세상에 나왔던 우주를 떠나보내는 안녕이라는 말에는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꼭 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이 세상이라는 룸 안에서 좀더 자유로워지기를 잭처럼, 안녕을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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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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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간혹 그런 책들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워 다 읽기가 아쉬워지는 책들. 혹은 너무나 지루해서 다 읽지 못하는 책들. 어렵고 무거운 주제 때문에 절반을 읽지도 못하는 책들. 그리고 점점 현실을 알아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어서 더 이상 읽지 못하는 책들.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는 후자에 속한다. 책을 한 장씩 읽어내는 일이 너무나 힘겨웠다. 아직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워서 끝까지 읽어내는 일이 너무나 두러웠던 책이었다.

 

80년대에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늦은 밤, 아니 더 일찍 귀가를 하는 여성들을 봉고차에 납치하여 100여만 원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단들의 뉴스였다. 돈에 팔려간 여성들은 모두 사창가나 시골 유흥주점에 넘겨지고 심지어는 서울 하늘에서 납치되어 서울 미아리 사창가로 넘겨지는 젊은 여자들의 얘기에도 놀라서 집에서는 절대 밤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었던 엄마의 말들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잠잠해진 얘기들이어서 그저 그런 일들이 없겠거니 했었다.

몇 년 전 <테이큰>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 주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당연히 없는 것이구나 했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 딸들만 키우고 있던 선배가 늦은 밤 두 부부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한숨만 쉬면서 나왔다고 한 얘기가 떠올라 오싹해졌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의 가학적인 장면들에 대해 그런 말을 했었다. 영화 속보다 현실이 훨씬 더 가학적이고 잔인하지 않은가. 그렇다, 현실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이면은 훨씬 더 잔혹하고 가학적이고 놀라울 뿐이다.

 

원래의 제목 <NOT FOR SALE>인 제목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팔아 돈을 챙기고 부유해지는 이 세상은 영화 속 그 어떤 장면보다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난다.

19세기를 통해 이미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듣게 되는 노예라는 단어자체는 아주 먼 얘기를 꺼내는 일과 같다고 생각되어졌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도 ‘노예’라는 단어만 숨겨졌을 뿐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도 뉴스에 나온 베트남 여성이 50대의 남성에게 시집을 왔지만 집안에 매일 갇혀 매를 맞고 모진 학대를 당하다 죽은 얘기들도 성노예로 팔려 온 것과 다름없다.

 

이 책은 사실적인 사실과 약간은 가미된 얘기들로 또 다른 문학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있었던 인신매매로 인한 노예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신매매와 성노예로 팔려나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가장 많은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노예로 팔려나간다는 캄보디아의 스레이 네앙의 얘기를 시작으로 책의 서문을 연다. 스레이 네앙은 열두 살 때부터 늙은 여자의 노예로 팔려서 살다가 나중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모르는 남자와 마주하게 되는 성노예로 팔려나가는 얘기를 들려준다. 처음부터 읽는 동안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아내들이 사원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다가 탈출을 하자고 조르는 그 아내들이 너무나 세상물정 모른다고 생각했던 남편들이 아내들이 욕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 아내들을 탈출 시키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려진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인가.

내가 살고자 다른 사람들을 수렁으로 넣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또 어떤가.

처녀성을 잃었으니 이제 걸레가 되었다며 이제 그런 일을 하며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그 여자 또한 피해자이었지만 어느새 가해자로 탈바꿈하게 만들어 놓는 더러운 그물속 물고기와 같다. 하지만 그녀의 그 삶도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연민이 스며들 수 밖에 없다. 
 

인신매매는 중국, 태국, 캄보디아등 저소득층의 나라에서 이뤄지는 줄 알고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도 이뤄지고 있다니 참 세상은 모두 자신의 것만 가져가려는 세상인가 싶어 먹었던 모든 음식들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식당에서 음식을 날라주었던 중국인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어디서부터 이곳으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임금은 받으면서 일을 하는 것일까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살펴보게 될 것 같다.

타인을 위한 배려가 어떤 것일까. 정말 많은 생각들이 왔다가 사라졌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데 누가 더 우월하며 월등하더라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 서로를 사고 팔 수 없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진리가 살아있는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꽃들을 죽이며 살아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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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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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모두 미니홈피에 열광을 보이고 있을 때 나는 미니홈피는 처다 보지 않았다. 좀더 활발한 이웃을 만들 수 있고, 화면 가득 사진을 올릴 수 있으며 음악 또한 내가 선곡한 것들을 올릴 수 있는 블로그의 맛에 흠뻑 취해 있었다.

2003년 배타 시절부터 시작한 블로그를 1년 정도 하고나니 어느덧 메인에 올라와 있을 때가 몇 번 생기더니 수십 명이었던 이웃이 하루에 몇 백 명씩 늘어났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매스컴이란 참 대단한 것이구나! 놀랐었을 때였는데 하루에 수백 명씩 늘어났던 이웃보다 내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나의 포스트를 홀랑 마우스 그래그 하나로 자신의 블로그에 붙여놓기 한 사람들의 행태였다.

결국 그들을 발견하고는 지워달라고 부탁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그들의 행동에 분개하며 결국에는 아이디 삭제까지 감행하며 블로그를 없앴던 적이 있었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가는 그들의 행위에 분개했지만 그때는 그들 또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그 어떤 양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공간이었다. 너무나 급속도로 변하는 인터넷 환경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익명의 존재들은 무섭고 양심 없고 무감각하다.

 

이런 경험은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었다.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의 가장 큰 취약점은 스크랩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정보를 공유하는 곳에서의 스크랩은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을 개선하고자 느끼는 오른쪽 마우스를 막아놓아 복사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에 나는 가장먼저 박수를 보냈고 좋아했었다.

 

친구는 몇 년 동안 드라마 보조 작가 일을 했었다. 친구는 하루에 열 개씩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따른 에피소드들을 써내야 했지만 오년 동안 한 번도 친구의 이름으로 방송된 적이 없이 보조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친구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메인 작가 이름으로 방송되었다. 이런 일들이 어디 방송국뿐이겠는가. 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올라가져 있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어글리 베티>에서 베티는 수도 없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올려놓지만 그녀의 이름으로 올라가기보다는 그의 사장이름으로 혹은 대표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이 회사 구조의 익숙한 방법일 수 있겠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생각을 훔치는 것에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 많고 물건보다 덜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는 것만 같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속의 작가는 중학교시절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었다. 집 식구들을 두고 혼자서 전학의 꿈을 꾸거나 고아가 되고 싶다고 느끼는 엉뚱한 아이였다. 소리지른 것이 싫고 목만 아프다는 웅변을 때려치우고 시나 소설을 쓰는 백일장에 나가겠다는 작가는 결국 백일장에 나가게 되고 그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만다.

 

정류장에서 느껴지는 그 아릿한 향수와 함께 작가는 남의 글의 일부를 자신의 백일장에 인용하고 그것을 하필 자신의 백일장을 지도했던 국어선생님, 즉 작가의 담인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별이 내려졌다.

그것은 오백 매에 달하는 반성문을 쓰는 일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딱 한번 반성문을 써 봤던 적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열줄 이상 쓰지 못한 반성문을 다는 선생님에게 종이를 더 달라고 하면서 장작 10장의 반성문을 써내려갔다. 그 반성문을 읽으셨던 선생님은 내게 딱 한 가지만 말씀하셨다. 종이 한 장을 다시 주시면서.

“10장을 1장으로 요약해 놓고 집으로 가거라. 넘쳐서도 부족해도 안 된다.”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10장을 다시 1장으로 줄이기 위해 학교에 남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열장을 한 장으로 줄이면 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쓰면 쓸수록 말이 더 꼬였고 힘들었다.

열장을 썼던 반성문의 시간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서여 한 장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다음날 나를 불러 다시 한 장을 열장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하셨다.

그때의 선생님의 생각을 지금에서야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게 되었지만 그때는 전혀 선생님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잘못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했건만, 남들보다 말이 많은 내가 좀 많이 반성문을 썼다고 한들 너무 한일 아니었나 싶었지만 지금은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의 담인 선생님이 왜 작가에게 오백 매에 달하는 반성문을 쓰라고 하셨는지 작가 또한 삼십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몇 달 남지 않았다는 작가의 담임선생님이 작가의 한 번에 다 쓰지 못한 작가의 반성문을 연재하듯 가지고 오는 그 날들의 기쁨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그것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들 알고 있으니 얼마나 벅차고 어련하고 애틋할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는 작가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 아내가 아이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목련이 지고 선생님이 떠나시고 하얀 목련 봉우리가 작가의 아내에게 심어졌다.

 

애틋하게 끝내는 작품 속에서 가장 마음을 울렸던 구절은 시인 신달자 선생님의 “성실성을 이기는 운명은 없다.”라는 말이었다.

모두가 평범하게만 살지만 성실하게 움직이는 자만이 원하는 것에 혹은 가혹한 운명 앞에 당당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걸을 알게 해 주신 작가의 담인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문득 내게도 그런 깨우침을 주셨던 나의 선생님이 보고 싶어진다.

 

이런 아련함을 선사해주신 작가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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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카르마
이상민 지음 / 푸른물고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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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본 일본 드라마 <스카이 하이>에서의 주 골조는 복수와 용서에 있었다. 타인에게 살인을 당한 사람이 천국의 문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됐는지 보게 되고 복수를 할 것인지 용서를 할 것인지 선택을 하게 한다. 복수를 하고 지옥으로 갈 것인지 용서를 하고 천국으로 갈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에 늘 망설이지만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용서보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며 자신을 죽게 만들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음으로 복수를 해주며 지옥행을 달게 받겠다고 한다.

 

등급 때문에 한참 말이 많았던 김지운 감독의 개봉작 <악마를 보았다>역시 죽은 약혼자를 대신해 복수의 칼을 가는 내용이며, 그 이전에 박찬옥 감독은 복수 시리즈를 내 놓았다. 그중에 우리에게 가장 많은 단골 대사를 남겼던 <친절한 금자씨>역시 복수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아픔과 고통을 잊지 않고 그보다 더 아픈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일지 모르겠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처럼 내가 아픈 팔보다 더 아픔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 저 밑에 깔려있는 심리라면 심리이겠지만 어디 그렇게만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다.

하지만 때론 이런 모든 것이 내가 전에 가지고 있었던 어떤 업(業)에서 온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나가는 말로 어떤 돈 많고 잘 생긴 연예인과 결혼하는 평범한 여자를 보고 때로는 이런 말을 할 때도 있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무슨 덕을 쌓아 저런 행운을 잡느냐”

 

카르마(Karm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업의 말로,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인과응보에 따른 결말을 예시할 수 있었던 소설 <카르마>는 작가의 시나리오 경력이 잘 배어 있는 작품이었다. 장을 나눠진 것도 마치 시나리오의 씬을 연결하듯 구성이 되어있었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성도 구성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아마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구성을 해 놓고 장면 분할까지 마쳐놓은 것 같은 소설 분량에 작가의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10년 전에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그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방식 또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스릴러물 같았지만 개연성 없이 등장한 인물이 한명도 없었고 화상자국의 남자며, 곽사장등 조연의 성격 그대로 유지해 온 것을 보면 작가 이상민의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효진의 캐릭터를 이해하기엔 그녀의 얘기들이 너무나 대사를 통해, 그것도 마지막은 거의 장문의 연설을 통해 이뤄진 것은 너무 지루했다.

 

10년 전의 일이 다시 꺼내지면서 시작되는 한 가정의 파국, 하지만 파국으로 끝나지 않고 어떤 결말을 맺으려는 반전에 독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있다.

10년 전의 사건을 꺼내 온 것은 시작이니 뭐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이 없지만, 여자의 복수, 그것이 꼭 윤간이어야 했을까.

언젠가 어떤 스릴러물의 얘기에 어떤 기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복수를 하기위한 소재는 꼭 그것 말고는 없을까.

 

효진과 정희는 이미 원한을 사기에 충분한 위치에 놓여있다. 배다른 자매이고 아버지는 전처보다 후처를 더 사랑하고 그 후처의 딸은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착하기까지 한데, 돈 많은 전처의 딸은 후처의 딸과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효진과 정희 모두 똑같이 능력 있고 괜찮은 여자였으면 어떴을까. <어글리 베티>를 보면 모두 다 괜찮은 사람들이 나와서 좀 더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 서로를 음해하고 속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심은 얼마큼이나 되기에 저리도 못살게 굴면서 살까 싶었는데 좀 더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움직임이었으면 진부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에 좀더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효진과 정희의 관계를 알고 나서부터 점점 처지는 극 후반부의 사건 결말은 작가가 이제 곧 끝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많다. 하지만 화상자국의 남자가 미선을 겁탈하는 장면에서 주는 극적 긴장감, 그녀가 가지고가야 하는 휘발유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움은 또 한 번 느슨하지 않게 만들어가는구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놀라서 읽게 되었다.

 

효진과 정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 미선이 영매가 아닌 채널러라는 것 또한 특이해서 새로운 장치가 나쁘지 않았다. 영혼의 파장을 수신하는 능력을 지니고 타고난 능력으로 고유의 채널을 찾아 영혼의 파장을 찾아간다는 채널러에 익숙하지 않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

 

만약 나도 그런 채널러를 만나게 된다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미선에게 더 없는 애정을 가지고 그녀의 마지막 반전을 위해 불안하고 초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화면 속 장면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감독의 속임수와 연출력이 작가에게 있어야 하고 그런 극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소설을 쓴다는 것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이야 무서운 사운드와 어두운 화면 속으로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지만 글로서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든다는 것은 또 다른 능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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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코브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디 아더스 The Others 1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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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SF,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경찰이 나오니 범죄 수사극, 한 마을을 탐구하는 걸로 해석할 수 있는 심리 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푸른숲에서 The others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고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제목과 일치하니 일반적이지 않은 다른 것들과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좀처럼 나오는 등장인물에 몰입을 할 수 없었고 지루한 부분들을 어떻게 하면 빨리 넘어 거서 읽어 낼까 그 고민만 했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치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파인 코브는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미관 위주로 설계된 마을이어서 기능 면에서는 디즈니랜드와 다를 바 없다. 성업구역의 구조와 서비스도 주민들의 편의 따위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P184)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많은 권태에 찌들어 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은 살인 사건을 담당하게 된 시오경감이다.

시오는 오랜 세월 대마초에 찌들어 있었고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에게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권태라는 것을 알았고 그 권태는 일순간 무너지고 곧 그의 권태를 날려버릴 것을 찾으므로 권태가 사라져 버린다.

 

파인 코브 마을의 9월, 9월은 밝은 앞날을 예고하는 달이라고 한다. 그 달은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달. 관광객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그간 많은 관광객을 치루고 조용해진 9월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쉬며 평정을 찾을 줄 알았던 파인 코브 마을에는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첫 번째는 파인 코브 마을 남쪽으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디아블로 협곡 원자력 발전소의 냉각 파이프에 작은 누수가 발생 한 것과 민달팽이 술집에서 블루스를 노래 할 가수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낸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베스가 목매달아 자살한 일이다.

 

첫 번째 사건과 마지막 사건이 서로 엮어지고, 두 번째 사건의 배경으로 깔리면서 이 세 가지를 풀어내는 것은 시오 경감이다. 앞에 말한 것처럼 그는 권태로 대마초에 찌들어 있다. 그는 대마초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시오처럼 어떤 것, 즉 우울증이라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던 마을 사람들이 그 중독을 벗어나면서 생기는 부작용과 함께 마을의 평정을 찾는 소설은 대 활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잔잔하고 주인공이 뚜렷하게 없는 글이고 마을 주변의 인물들 간의 각각의 캐릭터들의 활용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어느 작은 마을 전체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그래서 항우울제 약을 복용하고 있다 중단했을 때의 반응과 그것과 함께 그 우울증과 함께 어떤 포식자라는 것을 하나 넣어서 일어날 것을 상상하며 소설을 섰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 소설의 전반은 관광객이 빠져 나가 버린 텅 빈 마을의 모습처럼 지루하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그 어떤 호기심이 일어나기까지 작가가 서술하는 캐릭터들의 장황한 묘사들이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며 작가의 의도가 정말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착하고 착실하게만 마무리 되는 이 소설의 결말을 미덕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왜 두 아이의 엄마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삶의 한 이면을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람보다 사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방사능 물질에 눈을 뜬 커다란 바다괴물과 그 바다괴물을 사랑했던 몰리와의 만남, 이별이었다. 간혹 바다 괴물의 부분이 서술되는 장면에서는 이 바다괴물 참 매력적이고 통속적이다 싶다가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궁금했었는데 작가의 천성이 착한 것인지 인간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바다 괴물에게 사랑을 찾아주는 것 같으니 사랑 전도사라고 해야 할까.

권태에 찌들어 있던 시오에게도 그 권태를 벗어 낼 수 있는 사랑을 찾아주디 더욱 그런 것 같다.

 

작가의 결말을 생각해보자.

그가 원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어때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착하게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사실 ‘칫, 착하게 굴기는’이라고 속으로 비웃었지만 그게 나쁘지는 않으니 이 소설의 결말처럼 뭐 괜찮은 결말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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