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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Harold S. Kushner 지음, 김하범 옮김 / 창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가?"
대학교 2학년 때 읽었던 책이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책이었지만 지은이와 그 내용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시골에서 어렵게 목회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푸르렀고, 잘 돌아갔다. 남에게 잘못한 것 없이 착하게 살다 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 무엇인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라는 질문을 참 많이 던진 것 같았다. "왜 착한 사람이, 아니 착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악하지 않은 사람이 더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가?" 내 마음을 모두 빼앗아간 화두였다. 그러다가 선배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온지 오래되어 절판되었는지 복사실에서 복사해서 제본한 책이었다. 책 제목 때문에 읽기 시작했던 그 책은 온통 내 마음을 빼앗았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던 책이다. 내가 윤리를 전공하고, 조직 신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책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 책이 다시 번역이 되어 출판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오랫만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스물 한살의 시퍼렇던 나이에 읽었던 것과 서른 둘이라는 나이에 읽는 것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다. 아마 10년이 지나고 마흔의 나이에 읽는다면 또 다르겠지?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면서 산다. 호기심에 열지 말아야할 상자를 열였다는 판도라는 거론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호기심 때문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 던지는 존재이다. 더군다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심한 경우 세상을 떠났을 때라면 더욱 절박한 심정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온갖 논리를 동원하여 이것이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존재가 손상을 입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저자 쿠스너 또한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만난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앞에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다가 결국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쿠스너를 심각한 오류라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쿠스너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는다. 세상은 하나님게서 세우신 법칙에 의하여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하나님 스스로도 따르며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인한다. 예전에는 이 말이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다는 말은 스스로 제한한다는 의미일 뿐 그분의 성품과 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용인이 되는데 그깟 하나님의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시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모두 스스로를 제한하시는, 즉 스스로 전능함을 포기하시는 모습이 아니던가?
쿠스너의 주장은 너무나 간단하다. 세상의 불의와 고난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맞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 세상에 어려움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선한 사람만 있겠는가? 고난과 어려움은 불특정 다수에게 임하는 것일 뿐이지, 선악을 판별하여 선택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 버린다. 애꿎은 하나님만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욕먹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서는 안된다. 대신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미 상황을 일어났다. 내가 선하든 악하든 상황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라는 것이다. 수습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것이 쿠스너의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맞다.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왜라는 질문을 내려놓고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