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그리스도인 - 현대 기독교 이미지 평가 보고서
데이비드 키네먼.게이브 라이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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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녀 하나가 나를 찾아왔네. 집도 없고 몸도 병든 데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두 살 먹은 딸아이 하나 먹여 살릴 수 없는 처지였지. 울먹이며 하는 이야기가 두 살 된 자기 딸을 변태 섹스를 밝히는 남자들한테 돈을 받고 팔아왔다는 거야. 딸의 몸을 한 시간만 팔면 자기가 하룻밤 버는 것보다 수입이 좋다나. 마약 살 돈을 대려면 어쩔 수 없다더군. 차마 듣기에도 끔찍한 이야기였네. 일단은 내게 법적인 책임이 생겼지. 아동 학대 사례는 무조건 신고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그 여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교회에 가서 도움 받아 볼 생각은 안 해 봤냐고 겨우 물어 봤지. 그 때 그 얼굴에 스쳐 지나가던 충격 어린 표정은 평생 못 잊을 걸세. "교회요! 거긴 뭐하러 가요? 안 그래도 충분히 비참한데, 가면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예요." 

                                                                    - 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中  

  책의 제목이 Non-Christian이 아니라 Un-Christian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인의 반대말을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책에서 외부인이라 표현하는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바라보면서 그렇게도 싫어하던 규정화를 우리 스스로 해왔던 것이다. 세상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 나뉘어 진다고 이야기해왔던 나에게 Un-Christian은 비기독교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Non"이 아니라 "Un"인 것일까? 이 책에서 말하는 "Un"의 의미는 "非"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쁜"으로 번역한 말은 어찌보면 이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한 번역은 "나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답지 않은"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위에서 언급한 구절이 생각이 났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을 읽다가 내 마음에 깊이 들어온 부분이다. 앞의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여인의 절규가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박혔다. "교회요! 거긴 뭐하러 가요? 안 그래도 충분히 비참한데, 가면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예요." 그렇다. 어느샌가 교회는 비참한 사람을 더 비참한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분명 우리는 교회란 죄인들이 가는 곳이라 배웠다. 감옥보다 죄인들이 더 많은 곳이 교회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로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죄인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의인들을 위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의로운 사람, 잘나가는 사람, 부자인 사람 등 사회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은 정작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예수님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들로 교회가 넘쳐난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이 책은 복음주의권에서 나온 책이다. 미국의 복음주의권에서 나온 책들은 대체로 교회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깝깝한 태도를 취하기 일쑤이다.(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 대하여 대응하는 방법들을 바라보라.) 비판을 아예 인정하지 않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 책은 복음주의권에서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뻔한 내용인데하는 생각을 품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은 위선적이다. 기독교인은 전도에만 열을 올린다. 기독교인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기독교인은 안일하다. 기독교인은 동성애를 혐오한다. 기독교인은 판단하려 한다."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외부인들에 대해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쉽게 고쳐지지도 않고 인정하기도 쉽지 않은 부분이다. 이 책은 이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말이다. 여기에 이 책이 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힘을 갖는 것일 아닐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부모님이 신앙생활을 하신 분이라, 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나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숨쉬듯이 당연한 일이었다. 나에게 교회란 당연히 가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에게 교회는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이런 교회가 요즘 욕을 많이 먹고 있다. 미국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말이다. 교회는 복음이 아닌 다른 곳에 힘을 쏟고 있다. 장로 대통령을 이야기하면서 정치에 힘을 쏟고 친미에 힘을 쏟고, 반공에 목을 맨다. 시청 앞에서 반공집회, 친미 집회에 참여해 영어로 기도한다. 그리고 성조기를 흔든다. 5년후 정권이 바뀌었을 때 교회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회적으로 지탄 받고 돌을 맞지 않을까? 마음이 무겁다. 기독교인이 진지하게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박물관에서, 문헌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종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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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힘
전병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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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에 자기 계발서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아마 IMF를 전후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생존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략 10년 정도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자기를 어떻게 변화 시켜야 하는가에서부터 시작하더니 이젠 어떻게 자기를 어필 할 것이냐, 어떻게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냐를 거쳐서 이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점점 어려워지는 시기에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대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라는 씁쓸함에 고개를 떨구어 본다. 그래서 나는 자기 계발서를 잘 읽지 않는다.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가장 최근에 내려가는 연습이라는 책을 보았는데, 그 책이 내게 신선하게 다가 왔던 것은 경제 빙하기의 생존방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지만 인생의 깊은 의미를 던져 주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전병욱 목사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 스타일 때문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좋지만 말투가 장난치는 듯한 말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교와 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책을 선택하게 된다. 시대의 조륭 뒤쳐지지 않기 위하여 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청년부를 담당하다보니 청년들이 좋아하는 목사이자 열심히 책을 써 내는 전병욱 목사의 책을 읽지 않고서는 마땅히 선물해줄만한 책을 고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서평을 읽는 순간, 불현듯 이 분도 내려가는 연습을 읽었구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머릿말에 아그파필름과 노키아의 이야기를 같이 사용하면서 불황기를 건너가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이 두가지 이야기가 같이 나오는 것은 내려가는 연습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머릿말을 읽는 순간 책의 방향과 주제가 대략적이나마 떠올랐다. "기독교 판 자기 계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셉의 이야기를 통하여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어떻게 불황의 파도를 넘을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성경으로 잘 포장된 한편의 자기 계발서를 본 듯한 느낌이랄까? 왠지 씁쓸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가 결국은 자기 계발서를 넘지 못한다니 말이다. 그런데 더 씁쓸한 것은 이것이 먹힌다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청년들은 아주 좋은 책이라고 반응하니 말이다. 내가 이상한 것인지, 청년들이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다. 

  11,000원이라는 책값이 솔직히 아깝다. 책 내용이 전혀 쓸모 없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던지는 이야기들이 나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니 말이다. 그러나 책이 성의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지금가지 썼던 책들을 이것저것 섞은 듯한 느김이 더 드는 것은? 규장이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글쎄다. 아직까지는 이런 책을 보면서 소위 말하는 은혜받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한숨을 쉴뿐이다. 그러면서도 전병욱 목사의 책을 또 읽어야 하는 상황이 답답할 뿐이다. 그의 책 "자신감"만 못한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려면 차라리 내려가는 연습을 읽어라. 그게 더 은혜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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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Harold S. Kushner 지음, 김하범 옮김 / 창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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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가?" 

  대학교 2학년 때 읽었던 책이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책이었지만 지은이와 그 내용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시골에서 어렵게 목회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푸르렀고, 잘 돌아갔다. 남에게 잘못한 것 없이 착하게 살다 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 무엇인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라는 질문을 참 많이 던진 것 같았다. "왜 착한 사람이, 아니 착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악하지 않은 사람이 더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가?"  내 마음을 모두 빼앗아간 화두였다. 그러다가 선배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온지 오래되어 절판되었는지 복사실에서 복사해서 제본한 책이었다. 책 제목 때문에 읽기 시작했던 그 책은 온통 내 마음을 빼앗았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던 책이다. 내가 윤리를 전공하고, 조직 신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책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 책이 다시 번역이 되어 출판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오랫만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스물 한살의 시퍼렇던 나이에 읽었던 것과 서른 둘이라는 나이에 읽는 것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다. 아마 10년이 지나고 마흔의 나이에 읽는다면 또 다르겠지?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면서 산다. 호기심에 열지 말아야할 상자를 열였다는 판도라는 거론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호기심 때문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 던지는 존재이다. 더군다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심한 경우 세상을 떠났을 때라면 더욱 절박한 심정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온갖 논리를 동원하여 이것이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존재가 손상을 입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저자 쿠스너 또한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만난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앞에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다가 결국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쿠스너를 심각한 오류라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쿠스너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는다. 세상은 하나님게서 세우신 법칙에 의하여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하나님 스스로도 따르며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인한다. 예전에는 이 말이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다는 말은 스스로 제한한다는 의미일 뿐 그분의 성품과 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용인이 되는데 그깟 하나님의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시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모두 스스로를 제한하시는, 즉 스스로 전능함을 포기하시는 모습이 아니던가? 

  쿠스너의 주장은 너무나 간단하다. 세상의 불의와 고난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맞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 세상에 어려움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선한 사람만 있겠는가? 고난과 어려움은 불특정 다수에게 임하는 것일 뿐이지, 선악을 판별하여 선택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 버린다. 애꿎은 하나님만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욕먹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서는 안된다. 대신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미 상황을 일어났다. 내가 선하든 악하든 상황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라는 것이다. 수습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것이 쿠스너의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맞다.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왜라는 질문을 내려놓고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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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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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도덕과 사회를 배우면서 배웠던 표어가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사회복지가 잘 된 유럽의 선진국들을 예로 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 나라는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모든 것들을 국가가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지금와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비하여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고, 다분히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적인 성격이 강한 주먹구구식 정책이었지만 당시에 그 말이 참 멋있다고 느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바뀌어 가기 시작하더니 노무현 전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을 하셨고,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프렌들리비지니스의 삶을 사시고 계시다. 초기 자본주의의 경찰 국가를 표방하면서 모든 것을 민영화하는 것이 세금을 줄이는 길이요,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말한다. 국영기업은 부패의 온상이요, 이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이밖에 안되니 빨리 민영화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과 정책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수도와 건보까지 그 대상에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한전은 이미 국영기업인지 민영기업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단계에 와있다. 세계화를 주장하면서 시장의 논리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합리적으로 사회가 돌아갈 것이라는 시장 지상주의를 연일 복음처럼 외쳐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말이 맞을까?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합리적이 되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사회가 합리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장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 가운데에서도 극우의 사람들이나 주장하는 것이지 실제로 많은 경제학자들은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만능이 아니며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은 인간이 고안해낸 제도일 뿐이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친기업의 입장에 서서 국민의 이익을 기업의 사익으로 바꾸어 버리는 이들이라고 장하준 교수는 단적으로 말한다. 

  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안되는가? 첫째 기업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고안해낸 제도이기 때문에 그 안에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장 과열시 중복투자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매몰비용이라는 손실을 견제라는 기능은 시장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시장만능주의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시장만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공익을 사익으로 훔쳐가는 좀도둑일뿐이다. 대체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말도 안되는 논리이며 역사상 경제 발전을 이룩한 많은 국가들은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국가 개입주의를 채택했었음을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아마 현재 기업가들이 싫어하는 경제학자 중에 장하준과 우석훈이 들어가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장하준의 논리는 박정희 시대에 이미 우리가 겪어 본 논리이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 어느 정도 나이드신 분들은 박정희 대통령를 이 나라를 가난에서 구원해낸 구원자로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퇴보는 둘째치고 오늘날 한국의 경제의 기틀이 그 시기에 어느 정도 형성된 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 시장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 개입과 계획 경제가 아니었던가? 매번 기업이 도산될 위기에 국민의 혈세로 공적자금을 투자하여 기업을 살리는 것이 누구이던가? 시장인가? 국가인가? 위기의 순간에 기업이 매달리고 구조 요청을 외치는 곳이 어디인가? 시장인가? 국가인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아예 성립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국가의 개입을 부정하고 불공정한 것으로 몰아가는가? 공익을 도적질하여서라도 사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제2 롯데 월드 건설, 민영화, 대운하 건설 등에서 공익과 사익이 부딪히는 순간 기업이 무엇을 택하는지 살펴보라.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 살펴보라. 그러면서도 기간 시설 건설이나 돈을 내야 할 때가 오면 국가의 개입을 주장하는 것이 시장 옹호자들의 논리가 아니던가?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이 불온서적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보다 더 직설적이고 더 적나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불온 서적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제목이 점잖고 그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친기업의 시대에 꼭 읽어볼 책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작심하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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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 10주년 기념판, 은혜 없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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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매우 유명한 책이고, 유명한 필립 얀시의 책이다. 기대를 가지고 책을 열어봤지만 솔직히 말해서 기대한만큼의 감동은 없다. 아마도 번역이 매그럽지 못한 이유 때문이겠지? 번역서는 정말로 번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책이었다. 

  내용은 둘째치고 책이 다분히 상업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쓸데없이 그라데이션으로 색을 입혀 놓았고, 10주년 기념판이라는 금박을 자랑스럽게 달아 놓았다. 무엇인가 있을법 하게 만들어 놓은 디자인에 비하여 내용은 볼품이 없음이 이 책의 특징이라 하겠다. 물론 번역 상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은혜란 무엇일까? 얀시는 은혜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말한다. 복수와 정당방위의 세상에서 복수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용서요, 은혜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한다. 맞는 말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줄 수 있는 것, 교회만의 특징이 은혜를 제외한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교회는 은혜에 대하여 가벼이 생각하고 있다고 얀시는 지적한다. 교회가 은혜를 베풀고 사랑과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도덕 교사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강압하고 사회를 통제하려 한다며,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님을 냉철하게 지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포르노에 대한 공격과 낙태 반대, 정치 권력에 대한 참여를 목놓아 외치면서 교회는 정작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다고 사자후를 토한다. 맞는 말이다. 미국교회만의 모습이 아니다. 한국 교회에도 놀랍도록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이 말이 너무나 슬프다. 정치 권력화 된 미국 교회의 모습을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한국 교회또한 정치화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교회의 정치화 모습이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직설적으로 표현된 때는 아마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후보로 등장하면서부터일 것이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세상에 주입하고 세상을 통제하려는 미국 교회의 모습보다 더 못한 것이 한국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도 미국 교회는 정치적인 이슈는 있지만 한국 교회는 이것마저 없이 맹목적인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은혜가 실종되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적개심과 무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대에 대한 적개심이 뜨겁게 타오르는 한국 교회 안에서 은혜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열려 있어야 할 은혜가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따지면서 선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자기도 값없이 받은 은혜를 정치적인 입장과 신분과 인맥에 의해서 나누어 주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국 교회가 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대동강 물을 팔아 먹은 봉이 김선달처럼. 

  은혜를 자유롭게 흘러 가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 문턱을 한 없이 낮추어야 한다. 서문에 나오는 창녀가 비참해하는 교회를 만들면 안된다. 비참한 사람들이 언제라도 들어 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 5년후 한국 교회의 설 자리는 어디일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은혜를 회복하는 것, 은혜를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할 길이다.

ps.미국 복음주의자의 시각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도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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