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전병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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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평을 쓰다가 포기했다. 그러다가 의무감에, 자신만의 만족감에 다시 쓰기 시작한다. 나는 대체로 이런 부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전병욱 목사의 설교집은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의 이야기가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내 마음에 불편해서이다. 전병욱 목사는 참 자신감이 강한 사람이다. 너무나 강해서 때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해 온 나로서는 무척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다. 일종의 파쇼라고나 할까?

  "이제 문제다. 왜 이렇게 못살아. 이렇게 살아."라는 설교를 할 때마다 그런 고민을 해보지 않을까? 내가 하는 설교에 대해서 과연 책임질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 설교 했다면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사랑하는 시늉은 내야 하지 않을까? 과연 이 책에 다루는 내용들을 본인은 얼마나 삶으로 표현해내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다지 은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다. 그의 끝모르는 자신감도 마음에 걸리고, 깐죽거리는 듯한 설교 스타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던지는 이야기들이 상처가 되지 않을까 마음이 조심스럽다. 그러다보니 전병욱 목사의 설교는 듣지 않게 된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많은 목회자들이 전병욱 목사의 설교집을 베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큰 교회를 향한 열망이 아닐까? 이렇게 설교하면 우리 교회도 커지겠지 하는 단순한 무식에서 연유하지 않을까?

  두번은 읽고 싶지 않은 책이다. 런닝머신 위가 아니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책을 이렇게 편집하고 이만한 가격을 받는 것 자체가 사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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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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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보면서 왜인지 도올 김용옥씨가 생각이 났다. 기독교에 대하여 독설을 내뱉으면서 자기의 독설을 무시하지 말라고, 생명력이 다한 기독교가 자기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던 그의 말이 생각이 났다. 매우 듣기 거북한 말이었다. 기독교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기독교에 대하여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 어디서 연유하는지 모르는 교만한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그의 요한복음 강의는 사실 일반 신학자들의 이야기, 아니 4년제 신학대를 제대로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했고 고민하고 있을 법한 이야기의 발꿈치에도 못미쳤기 때문이다. 화려한 언변과 자극적인 이야기들로 청중들의 시선을 잡아 끌고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이야기하는 그 의기양양함은 불편하다 못해 가식적이라는 생각까지 불러 일으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만약 그의 강의가 "기독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제시하겠다."는 자신만만한 말에 책임질 수 있을만큼 훌륭한 내용이 있었다면 나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히친스의 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서양판 도올 김용옥씨를 보는 듯 하다. 이미 그의 책 "자비를 팔다."라는 책도 읽어 보았다. 그의 이야기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투적으로 기독교 까기에 몰입헤 있고, 마더 테레사 까기에 몰입해있다. 비판하기가 아닌 "까기"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내가 히친스와 잘 아는 사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내가 마더 테레사보다 더 정치와 종교를 겹합시킨 가증한 사람(히친스의 논리에 의하면)이라 가정하자. 그래도 히친스는 나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나는 마더 테레사만큼 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알리고 유명해지려는 속셈이 조금이라도 없을가? 아니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히친스를 옹호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고 "역시 종교는 나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생각을 단순히 히친스 까기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고 단 며칠만에 이 책을 독파한 나로서는 책을 덮으면서 많은 실망을 느꼈다. 도킨스의 책보다는 무척 읽기가 쉽다. 그러나 논리적이지 못하다. 단순무식하게 전투적일 뿐이다. 노란색 책 표지가 왠지 "이 책은 옐로우 페이퍼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비판하는 종교의 이야기들은 분명 역사적인 사실이다. 내 종교가 기독교라 그런지 다른 것들이야 잘 모르겠다만(물론 여기에 기록된 타 종교에 관한 것들은 알겠다. 타종교에 관하여 무지한 내가 이해했다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이야기가 상식 수준의 이야기를 크게 떠벌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가독교에 관하여 히친스가 짚었던 것들은 결코 독창적인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왔던 것들이고 나름대로 결론을 얻었던 것들이고, 그 결론들이 깨어지고 새로운 답을 찾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친스의 책에 관하여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만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종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비판을 한다면 "종교는 원래 선한 것을 내놓을 수 없다."라는 원천 봉쇄의 오류를 히친스가 저지를 것이 분명하지만.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관점을 가지고도 히친스의 말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논리가 부실하다는 이야기이다. 종교의 옐로우 페이퍼라 표현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쯤되면 알 것이다.

  히친스가 성경의 논리를 쓰러드리기 위해, 기독교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수없이 많은 내용들은 특별할 것 없는 신학의 한 조류들이다. 이것에 대한 반박학설들도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히친스는 오직 자신의 논리에만 맞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자신의 논리를 보강하는데에 사용했을 따름이다. 이 책에 적힌 이야기들 가운데 70%는 내가 23살 이전에 학교에서 고민했고 이야기하고 설익은 결론을 내렸던 질문들이다. 물론 지금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완전하게 자리잡은 것은 아니다. 내 이성과 판단을 가지고 여전히 돌아보고 답을 모색하고 점검해 보는 과정중이다. 물론 평생 이 작업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마치 자신이 발견한 기독교의 잘못인양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올 선생의 거만한 말투가 떠올랐 반발감이 앞선다. 차라리 이 책보다는 도킨스의 책이 훨씬 진지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을 보면서 히친스는 분명 유대인이지 않을가 생각을 해봤다. 왠지 히친스의 생각을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프로이드의 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히친스가 유대인이라면 그는 아버지 살해를 경험한 아들들이 겪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이 책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이라는 완전무결한 존재를 부정한다. 그를 부정해서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 완전 계몽된 존재, 완전무결한 이성적인 존재로 거듭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신을 공격한다. 전투적으로 공격한다. 그리고 그 신의 자리에 자신을 대신 세운다. 이제 자신을 숭배하는 나르시즘적인 생각을 굳힌다. 자신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은 공범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왠지 이책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것이다.

  이 책을 읽고 무신론에 빠진 사람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차라리 도킨스의 책을 보라. 이 책을 읽고 무신론에 빠진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이 아닌 감정에 좌지우지된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가볍게 봐라. 책을 덮으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결론은 "히친스는 위대하지 않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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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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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기도를 하시는 가운데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변하고 옷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관한 일이었다. 졸다가 일어난 제자들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보고 너무 좋은 나머지 예수님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세 채 짓고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쭉 살지요." 바로 그 말을 하는 순간 산 밑에서는 한 사람이 간질걸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삶에 찌들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데리고 왔고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절망하고 있었다.(눅 9:28~42)

  이 책을 아는 목사님 홈피에서 보았다. 그분이 이 책을 읽고 기록한 독후감이 기억에 남아서 허락받지 않고 무단으로 일부 옮겨 본다.

"책의 타이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중에...특별히 자는 한자로 者로 표기 되었다...뜻이야... 사람 자 이지만... 4획은 붉은 색으로 대각으로 틀려먹었다는 듯이 그려져 있고... 나는 사람자가 아니라 어려서 배운데로 "놈 자"자로 읽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결국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라고 읽어지는 나도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 책을 읽어가면서 끊임없이 이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다.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 주인공인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고 무례한 녀석들만이 남아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파티를 고발하는 책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선교된지 공식적으로 120년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내용면에서도 그렇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기독교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큰 위상을 차지하게 된 예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성장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인간적인, 문화적인 노력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적인, 시대적인 조건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인간적인 욕망들을, 그리고 이로 인해 변질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2007년은 참 시끄러운 해였다. "어게인 1907"을 외치던 해였다. 평양 부흥 운동의 역사가 이 땅에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왠지 나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단발성의 이벤트일뿐이었다. 여러 교파 중에서 장료교측이, KNCC와의 관계에서 한기총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인 이벤트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니었다. 단지 이것을 위해 이용당하는 평신도와 일선 목회자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감리교 교단본부에선 "어게인 1907"을 바라보며 "거봐라. 이렇게 큰 거 터뜨릴 거에 대비해서 우린 4년 전에 어게인 1903을 했어야 했다."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평양 대부흥의 촉발이 된 하디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산 대부흥을 너무 쉽게 지나갔다는, 그래서 장로교에게 한방 먹었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안타까움이다. 뒤늦게 감리교에선 1903년 원산 대부흥운동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장로교와의 기다툼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부흥운동이 감리교와 장로교의 기세싸움에 이용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왜 기세 싸움이 중요한가? 바로 대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선 교회가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가. 누구나 여기에 동의했다. 문제는 누가 그 주도권을 쥐느냐는 것이다. 주도권을 쥐는 쪽이 막대한 이득을 누리기 때문이다. 권력과의 밀착을 통하여 얻게될 이득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기득권을 빼앗겨 본 경험은 이들로 하여금 더 정권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온갖 비리와 범법 행위에 연루된 이명박 대통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면죄부를 쥐어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진홍 목사의 쪼다 발언일 것이다. "한국에서 그 정도 위치에 오르면서 한 두가지 범법 행위하지 않았다면 쪼다야. 일을 안했다는 말이지."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창피해지는 발언이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온갖 특혜를 누리며,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며 많은 성도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는 너무나 달콤하기에 내려놓기 힘든 것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제한당했기에(내려 놓은 것도 아니고 제한 당한 것이다.) 더 복수의 칼을 갈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성조기와 태극기가 휘날리는 이상한 집회, 한국 사람 앞에 모아놓고 마치 백악관에 들리라는 듯이 영어로 기도하는 이상한 목사, 자국 대통령을 시종일관 빨갱이로 매도하는 꼴통 보수들 이 모든 사람들이 결집하여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이 마음 아플 따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은 곧 교회의 실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을 왜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우러러 본단 말인가? 왜 내려가지 못하고 이곳이 좋사오니 하고 주저 앉아 있단 말인가? 한심할 따름이다.

  이곳이 좋사오니 외치는 그 순간에 분명 산 밑에서는 절망의 나락을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한 영혼이 있었다. 마귀에게 잡혀서 불위에 쓰러지고, 물 가운데 몸을 던지는 불상한 어린 영혼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가 좋사오니 눌러앉자 말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사회적인 약자들, 유의미한 소수들을 무시한채 권력에 빌붙어서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는 정치 목사들, 무례한 자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양쪽 모두 예수님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뿐아닌가? 반공이 복음으로 변한 이상한 기독교, 유의미한 소수보다는 권력을 차지한 소수를 더 귀하게 평가해주는 특권주의,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안하는 오만함, 하나님을 믿기 대문에 세상의 법은 무시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오늘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원흉들이 아닌가? 목사를 먹사로 만들고, 끊임없이 예수님 얼굴에 먹칠하고 있는 원흉들이 아닌가? 장로 대통령? 이미 두번의 실패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소리에 귀막은 이명박 정부나 예수님의 소리에 귀막은 정치교회나 똑같이 무례한 者들이다.

  한국 기독교회가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낮아졌으면 좋겠다. 섬기는 모습으로 내려왔으면 좋겠다. 설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설교하면서 세습하는 교회, 하나님만 의지하라 말하면서 세상 권력에 밀착하는 교회, 정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불의를 행하는 교회, "교회는 국가에 순종하라, 성경에 나와있지 않느냐?"라는 오만한 종필이 아저씨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교회, 유신은 하나님의 역사라 말하는 교회.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가 유지된다면 그 교회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예수님도 그것을 바라실 것이다. 예수님을 다시 교회의 머리로 삼고 그 말씀만 따라가면서 타협하지 않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내 딸은 개독교라는 소리를 안듣고 자랐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가 다시 존경을 받고 신뢰를 받았으면 좋겠다.

PS. 말이 너무 어렵다. 쓸뎁없이 어렵게 쓰는 부분이 많다. 목회자라면 모르겠지만 평신도가 읽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민중 신학을 하시는 분들의 책이 어느 순간 어려워졌다. 민중 신학이 아니라 민중 신학의 이름을 빌린 엘리트 신학이다 생각이 들게 되었다. 말이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은 쉬운데 왜 말을 어렵게 썼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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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교회 - 권력에 중독된 한국 기독교 내부 탐사
김지방 지음 / 교양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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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미국이 철수하지 못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존경하는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께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김한식 목사)

  미국 사람들이 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한국 사람들이, 그것도 대형 교회의 명망있는 목사들이 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이들이 한국 사람인지, 미국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국의 오만함을 정당화 해주는 모습이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이야기이다. 자국의 대통령은 빨갱이라 몰아 붙이면서 미국의 자선을 구걸하는 말도 안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너무나 많이 살고 있다. 참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한기총을 필두로 하여 이름만 댔다하면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코메리카를 주장한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갚는다는 미명하에 청나라를 대적하였던 조선 말의 그 고루한 사고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충만하다. 6.25전쟁의 은혜를 갚는다는 미명하에 영원한 미국의 우방, 아니 미국의 한 주이고 싶은 코메리칸들이 이 땅에 넘쳐난다. 성조기를 흔들면서 기도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앙을 버리게 만든다. 소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라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젊은이들을 실족시킨다. 신앙을 버리게 만들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들이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기보다 개인들의 정치적인 야망과 권력 획득을 위해 교회가 발벗고 나섰다. 평소 교회가 정치에 뛰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다. 정교분리를 외치는 것은 사실 비겁한 타협이라고 주장하는 나이지만 이건 아니다. 교회가 권력 획득을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진정 잘못된 모습이다. 교회가 세상을 떠나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아무도 대변해 주지 않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하여 가진 모든 것들을 투자하는 것이 교회가 가져야 하는 모습이다.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행하셨다. 사회적인 약자, 전통의 피해자들, 문화와 관습에 매여 신음하는 민초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교회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가진 것들을 다 쏟아붓고 그것이 해결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뒤편으로 물러나는 것, 이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영광의 자리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사회적인 약자가 아니라 극소수의 기득권자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정당화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이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자였을 때 기존 대형 교회에서 했던 일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가? 장로 대통령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거기에서 떨어질 떡고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축복을 남발한 것이 기존 교회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를 거부하였던가?

  더군다나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스킬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나마도 없다. 아마츄어리즘의 극치가 한기총의 정치력이 아니던가? 협상도 모르고 타협도 모르고 무식하게 자신들의 정치적인 견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모습이 아마츄어리즘이 아니던가? 기독당은 물론이요, 한기총을 필두로 정치에 뛰어든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아마츄어리즘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고 팽당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렇게 많은 물적 자원, 인적 자원을 쏟아붓고도 개독교라고, 자신들만 안다고 비난 맏는 것이 아마추어리즘이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던가?

  정치를 외치겠다면, 사회 가운데 교회가 뛰어들겠다면, 겸손한 모습으로 프로 정신을 가지고 뛰어들라. 자세는 한없이 겸손하게, 약자를 살펴보고, 맡겨진 역할이 끝났다면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라. 그리고 시대적인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있을 때 다시 나오라. 결코 자신의 욕심에 하나님을, 예수님을, 십자가를 소품으로 사용하지 말라. 그리고 실력을 배양하라. 협상의 기술, 전문적인 정치력, 기술을 갖춰라. 이것이 진정한 POLI-CHURCH의 나아갈 길이다. 마지막으로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함으로 우리 교회가 사회 가운데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감당하길 소망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1~24)

PS. 부끄럽다. 평신도인 저자도 이런 글을 쓰는데, 목회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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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설교 꽉찬 설교 정용섭의 설교비평 1
정용섭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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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에 가시가 걸렸나 보다.

  분명히 실체는 있다. 비평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의 설교가 100% 옳을 수는 없다. 아니 옳다고 믿는 것은 교만이다. 그러나 비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드 답답하다. 껄끄럽다. 왠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김기동, 김기석, 김남준, 김동호, 김진홍, 박영선, 박옥수, 박종화, 윤석전, 이수영, 이재철, 임영수, 조용기, 하용조" 이렇게 14명의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한다. 한국 교회에서 정통이든 이단이든 모든 것을 떠나서 막강한 영향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좀더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영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며 한국 교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거물들에게 대하여 필자는 일어나서 당당하게 돌을 던지고 있다. 비평이 필요할 것이며 본인의 비평을 통하여 한국 교회가 더 발전하기를, 개혁되기를 원한다며 거침없이 비평을 한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 읽어갈 수록 비평은 사라지고 비판만이 남은 기분이다. 아니 어느 부분에서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존재할 뿐이다. 설교가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면이 날카롭게 들린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이 비꼼의 모습을 입고 등장할 때에는 목에 가시가 걸린듯이 답답하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누워서 침뱉기의 모습이 아니라 신학자의 교만은 아닐런지 생각해보게 된다. 비평은 좋지만 비꼼이 개입되는 순간(내가 잘못보았으면 정확한 지적을 바란다. 내가 잘못 보았기를 원한다 등등) 그의 날카로운 비평은 사라져버린다. 이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본인은 설교가들이 자기의 비평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고 귀를 기울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판단하는 견지에서 그것은 열린 마음이 아니라 무던히 낮아지는 마음,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모든 것에서부터 초월하는 마음을 가져야 비로서 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나 거론된 목사들은 예수가 아니다. 고로 설교 비평을 가장한 비난이 마음에 계속 짐이 되고 불편함이 될 것이다.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라는 제목을 통해서 설교가들의 교만을 필자는 지적한다. 설교에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는 없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야기와 인문학적인 소양만이 남아 있다 비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니므이 영에만 너무 매달려 있어서 인문학적인 소양이 없는 모습을 비판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인지? "개개의 사실이 옳다고 해서 설교가 바른것은 아니다."라는 필자의 말대로 개개의 글이 논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적절하게 비평을 한다고 해서 책 전체가 논리적이고 적절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해 졌다. 설교비평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가지고 많은 설교가들 설교를 비판하고 나아가 비난하고 비꼬는 모습이 나에게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필자의 관심에 오르지 못할 겅도로 피라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누군가가 나의 설교를 이렇게 비난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노파심에서이다. 안티를 위한 안티? 이것이 이 책의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필자의 말대로 설교는 text를 context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라면 과연 설문을 읽고 설교만 보고 그것을 비평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솔직한 심정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설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설문을, 설교문을 비평하는 인문학적인 작업일 뿐이다. 이러한 인문학적인 과정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재단하고 운운하는 것은 오만이 아닐까? 본인도 설교를 들을 때에 비평하고 비판은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없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설교다라는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말이 아니라 본인과 설교자가 갖는 생각의 차이는 이것이구나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제약한다는 생각이 들정도라면 침묵하거나 피할따름이다.

  필자의 설교비평이 왠지 안티를 위한 안티요, 신학자 특유의 오만으로 느껴지는 것은 2권을 읽고 1권을 읽은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오직 세상에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는 생각, 이러한 신학자의 오만이 책의 곳곳에 숨어 있다. 긍정이 20%이라면 부정과 지적은 70%요 이꼼과 비난이 10%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 본 정용섭 설교비평의 모습이다. 또한 곳곳에 사용된 언어들이 필자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서양학문을 배운 인문학자들의 오만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충분히 한국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섞어 쓰는 모습은, 철학적인 용어를 씹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은 신학을 전공한 본인에게도 낯선 것이며 피하고 싶은 것이다. 좀더 지혜롭고, 좀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더 적어봐야 나도 똑같은 입장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서평을 보고 똑같은 말을 할테니 말이다. 책을 읽으며 겸손함도 같이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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