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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평점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책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역시 공지영이라는 감탄사를, 어떤 이들에게는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어떤 이들에게는 쌍차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책이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책가운데 이정도로 파장을 일으킨 책이 몇권이나 될까? 그것도 문학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말이다. 그뿐이겠는가? 이 책을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저작권 문제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덮고 가야한다는 쪽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양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난 아직까지도 도대체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다만 공지영씨가 조금만 더 민감하고 겸손하게 반응했더라면 좋지 않았게나 싶다. 어찌되었거나 공지영씨는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상위 클래스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지영씨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더 느긋하게, 조금만 더 여유있게 반응했었더라면 이 문제로 소모되었던 에너지를 쌍차 해고자들에게 더 실어 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냥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쌍차 문제가 아닌 저작권 문제로 시끄럽게 되면서 난 이 책을 읽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아마 그 문제가 그렇게 크게 불거진 것은 논점을 흐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린 것은 아닐까라는 소설을 써본다. 그 문제로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포기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책 가방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만지작 거리던 책을 당구장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는 사이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구, 골프, 야구와 같이 작은 공은 절대로 가지고 않겠다는 쓸데없는 똥고집을 가지고 있는 내가 당구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독서와 후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당구장에서 준 음료수를 축내는 것밖에 없었다. 옆에서 친구들이 2:2로 당구를 치고 있을 때 지루해진 나는 의자놀이를 폈다. 그리고 정확히 20초 후 천장을 바라보면서 눈을 심하게 깜빡거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시츄에이션이겠는가? 친구들이 옆에서 당구치고 있는데 30중반의 남자가 당구장에서 책을 읽다가 눈물을 뚝뚝흘린다면, 그리고 펑펑 울어버린다면.. 이틀동안 열심히 읽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쌍차 해고자들의 삶과 고통이 손에 잡힐듯 했다. 당장이라도 대한문으로 달려가 함께 울고 싶었다. 물론 아직까지 대한문에 못나갔지만 그렇다고 쌍차에 대한 내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에 대한 내 관심이 더 깊어져 가고 있다. 쌍차라는 말만 나오면 유심히 기사를 살펴본다.
의자놀이라는 제목이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감이 있으니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책이 대중에게 읽히는구나 싶었다. 쌍차의 상황을 이렇게 정확하게 비유하고 있는 단어가 또 어디있겠는가? 어릴적 누구나 다 한번씩 해봤던 놀이다. 사람수보다 한개씩 의자를 적게 놓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의자 주위를 돌다가 사회자의 신호에 맞추어 자리에 앉는다. 자리가 없는 사람은 탈락이다. 사회자가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놀이를 진행한다. 최후의 승자는 사회자로부터 아주 소소한 선물을 하나 받고 박수를 받으면서 게임이 끝이 난다.
이 게임을 가만히 뜯어 보면 게임을 유지하는 룰이 상당히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낀다.
먼저 사회자를 살펴보자.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 다만 리스크가 미미하냐, 커다랗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임을 진행하고 탈락자를 설정하는 사회자는 그 어떤 리스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탈락의 위험도 없고, 심지어는 주변을 도는 수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을 아웃시킬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사람들의 행위와 분위기를 보면서 탈락시키고 싶은 사람에게 불리한 타임에 신호를 줌으로 그 사람이 안고 있는 탈락의 리스크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참가자들은 오로지 사회자에게 집중하고 사회자의 신호에 일사분란하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즉 사회자는 그 어떤 리스크도 없이, 그 어떤 수고도 없이 게임을 지배한다.
쌍차 해고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투쟁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힘을 휘두르고, 룰을 지배하는 사회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그 어던 리스크도 감당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무슨 말이냐? 오히려 그 위기 속에서도 절대적으로 이익을 추구한다. 결국 모든 리스크와 비용은 게임처럼 사회자가 아닌 가장 큰 피해자들이 탈락한 순서대로 감당하게 된다.
다음으로 게임이 진행되어 갈수록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심화된가는 것이다. 10명 중에 한명을 탈락시키는 것은 그렇게 큰 경쟁이 아니지만 의자의 숫자가 줄어갈수록, 의자의 갯수를 줄여가는 사회자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함게 의자 주변을 도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해 버린다. 함께 멈추어서 게임 끝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파블로프의 개처럼 사회자의 신호에 무비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반응해 버린다. 만약 의자가 아닌 총이 주어졌다면 기꺼이 그 총을 상대방에게 겨누고도 남았을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로 편을 가르고 사측에서 노측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 구사대 등이 그러한 모습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큰 리스크를 안고 게임의 승자가 된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 고작 껌이나 사탕같이 소소한 것들, 커봐야 문화상품권 한장 정도라는 것이다. 내 친구들의 엉덩이를 밀어내고 넘어뜨리면서까지, 매 단계마다 살아남았다는 희열을 맛보면서 가슴을 졸인 결과가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이다. 쌍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인가? 사람도 잃고, 긍지도 잃고, 평화도 잃었다. 이웃도 잃고 공동체도 잃었다. 대신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더 열악한 작업환경, 삭감된 월급통장, 마을 주민끼리의 반목과 갈등이 아닌가? 그들이 목숨걸고, 친구들과 친지들까지 잃어가면서 지키려고 한 것이 인상된 월급도 아닌 동결 혹은 삭감된 월급이요, 복지였던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락바락 애쓰면서 경쟁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찌 해야하는가? 당장 게임을 멈추고 룰을 개정해야 한다. 의자에 앉지 못한 이에게 칼락이 아니라 1분간 퇴장시킨다고 생각해 보자. 1분이 지나고 나면 퇴장자가 다시 게임으로 복귀한다. 소위 말하는 패자부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자도 게임의 일원임을 이해시키면서, 리스크를 분담하도록 해야 한다. 주어지는 상도 한 사람에게 줄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준다든지, 혹은 그러한 상 자체를 없애버리든지 하면 오히려 더 긴 시간동안 게임이 진행될 수가 있다.
"다같이 죽자는 말이 아니라 다같이 살자는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다. 다같이 죽는 것도, 일부의 희생을 대가로 일부가 살아남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함께 생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다수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이 가능하도록, 그리고 지속되도록 다수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도록 룰을 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와락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연대한다. 다같이 살기 위해서 룰을 바꾸려고 애를 쓴다. 여기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대한문을 가는 것도 좋고, 쌍차를 위해서 식사 한끼를 찾아가서 먹는 것도 좋겠고, 십시일반으로 모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같이 살기 위해 룰을 바꾸려는 연대, 그 연대가 24번째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젠 의자를 그만 치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