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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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혀간다가 요즘 유행이다.

 

  "BBK를 말하는 자 잡혀간다."(정봉주)

  "데모 하는 자 잡혀간다."(유모차 부대)

  "촛불을 드는 자 잡혀간다."(촛불 시위자들)

  "농담하는 자 잡혀간다."(박정근, 시사IN 기사 제목)

  "꿈꾸는 자 잡혀간다."(송경동)

 

  이 외에도 잡혀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 바야흐로 자기 검열의 시대이다.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다. 그냥 소설을 써 보는 것이다."라는 꼼수로 자기 검열을 피해가지 않으면 잡혀가는 시대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집권자들이 통 크게 놀지 못한다. 통큰 것은 롯데마트에서 파는 피자 뿐이다. 그나마 통크게 놀던 치킨도 잡혀갔다.

 

  "송경동"

 

  낯선 이름이다. 솔직하게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도,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지 않게 시를 쓰고, 글을 쓰는 독특한 사람이라는 정도만 안다. 그 판에서야 유명한 사람인지 몰라도 나에겐 아주 생소한 사람이다. 그저 이 책을 통해서만 접했을 뿐이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절망이 선뜻 책에 손을 대지 않게 만든다. 그러다가 존경하던 선생님(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특별히 존경하는 교수님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페이스북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보았다.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소개하시던 그 분의 글 때문에 책을 펴고 읽었다.

 

  역시 제목 답게 답답하다. 절망스럽다. 사무실에서 보다가 꺽꺽 숨직이며 울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남몰래 눈을 깜박였다. 뻔히 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꿈을 꾸는 저자가 불쌍해서 울었고, 그 정도의 꿈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한 사회가 답답해서 울었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포기 하지 못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저자가 불쌍해서 다시 울었고,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생각 나서 또 한번 울었다. 이 글을 보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할까 겁이 나서 자기 검열을 떠올리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져서 마지막으로 울었다.

 

  그게 가능할 거냐고? 이건 단지 꿈일까? 그렇다라도 좋다. 진정한 문화 예술은 아직 오지 않은 꿈을 꾸는 일이니까. 퇴락한 시대를 핑계로 사람들은 가능치 않을 거라고 하는 것들을 상상하며,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오늘도 고단한 영혼의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일이니까. 가난하고 핍박받더라도 영혼을 팔지 않는 일이니까.

  모두 함께 다른 세상을 꿈꾸자. 꿈은 꾸는 순간 절반은 이루어지니까.(p 138)

 

  왜 난 송경동씨처럼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새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겁해 보인다. "꿈은 꾸는 순간 절반은 이루어지니까"라는 말이 눈에 아프게 들어와 박힌다.

 

  문득 언젠가 위에 언급한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하셨던 말이 생각이 났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은 글로 볼 것이 아니라 직접 들어야 한다. 시간이 되면 인터넷에서 찾아서 들어봐라." 책을 덮고 연설을 찾아서 들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유명한 연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부드럽고 아련한 목소리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할 것이라 상상했지만 실제 연설은 정반대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하는 내내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같이 섞여서 나온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옳소"하고 선동하는 것처럼, 감격하는 사람, 동의 하는 사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대로 담겨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목소리도 부드럽지도, 그리고 아련하지도 않다. 힘이 있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처럼 열변을 토한다. 아마 조현오 총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특유의 목소리로 "물대포 쏴"하고 외쳤을 지도 모르겠다. 메이저 언론에서는 "빨갱이 목사, 선동가, 폭력 시위 유발자"라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달면서 사회면 톱으로 다루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열정적이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격정적이다. 전율이 흐른다.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옆에서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데모하는 영상을 듣냐고 물어본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듣고, 생각 난 김에 인터넷에서 송경동씨의 추모시 낭독 영상을 찾아본다. 용산 참사 피해자들을 추모하면서 쓴 시를 낭독하는데 차마 마지막까지 듣지 못했다. 저러다 쓰러지면 어쩌나 싶은 걱정 때문이다. 피를 토한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나는 네번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다"는 시인의 절규가 새파랗게 날 선 칼이 되어 내 가슴에 박힌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그렇고 송경동 시인도 그렇고 아직 꿈을 포기 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렇게나 열정적인가 보다.

 

  이제 나도 조금 더 꿈을 꿔보기로 한다. 희망 고문? 좋다. 고문을 고문이라고 느끼는 것도, 아픔을 느끼는 것도, 절망감을 느끼는 것도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아직 내가 세상과 야합하지 않은 증거가 아니겠는가?

 

  밤새워 노래와 춤과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농담과 해학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환대와 우애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힘이 될 거냐고?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만큼 강한 것은 없다. 역사 이래 그 어떤 총칼과 억압과 배제도 '사람의 말들', '사람의 절규들', '사람이고자 하는 희망의 몸부림들'을 막지 못했다.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때론 외롭고 힘들더라도 그 길에 '사람'이 있다면 어디서든 빛이 비칠 것이다. --- (중략) ---  이 견딜 수 없는 절망들에 휩싸여 있는 게 너무나 힘들었던가 보다. 그 강인하던 눈에 눈물이 흐르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감고 있었다. 말은 안해도 얼마나 많은 절망과 패배가 쌓였으면 저럴까. 속으로 복받치는 분노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절망을 넘어보자고, 가장 아래에서 고통받으며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희망버스를 만들게 되었다. 거기 수많은 마음들을 얹어주신 분들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p 242 - 243)

 

  좌우 우를 나누고,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고, 네 편과 내 편을 갈라 파편화시키고 점령하는 이 시대에 사람이고자 하는 꿈을 꿔보련다. 대동하고, 화합하는 꿈을 꿔본다. 설령 희망 고문이 될지라도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많다면 그 또한 고문보다는 희망에 방점을 찍을 수 있지 않겠는가? 송경동 시인처럼, 마틴 루터킹 목사처럼 "I have a Dream still"이다.

 

ps. 다행히 이 책을 다 읽었을 때(2월 9일) 송경동 시인이 보석이지만 풀려났다.

      오타- 185p 밑에서 세번째 줄 퍼세트-> 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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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02-15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의 페이지에 마침 이런 말이 나오네요.
'인생의 비극이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지만,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은 치욕이라는 말인데, 역사 속의 위인이 한 말이 아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수영 선수가 한 말이라더라고요. 요는... 꿈이 있다는 게, 멋져요. 남은 인생을 던져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말 같아서.

saint236 2012-02-16 00:03   좋아요 0 | URL
꿈을 찾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라는 김예슬씨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습니다. 무슨 책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책은 널리 알려 사람을 이롭게 하셔야지요...

차트랑 2012-02-1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경동님의 시가 많은 분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나봅니다.
이러다가는 결국 읽고 말게되지요~

saint236 2012-02-15 23:51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 결국 시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오래 남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