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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어렸을 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왔고(아버지께서는 늦게 신학을 하시고 목사가 되셨다.) 주일이면 당연하게 교회에 가는 것이요, 성경에 나오는 것들은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요즘과 세간의 주목을 받는 교회들과 같이 공격적이고 편협한 근본주의자는 아니셨다. 유교적인 집안에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셨던 지라 힘드셨지만 비기독교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 또한 자연스럽게 익히고 계셨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다 보니 나의 신앙 또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선배가 읽어보라고 던져주었던 이 책은 꽤 큰 충격이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이 책을 다 읽기까지 한 학기가 꼬박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30장 읽다가 집어던지고 50장 읽다가 집어던지고, 책을 다 읽기까지 몇 번을 집어던졌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충격적인 내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이단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왜 그리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민요섭과 아하스페르츠라는 두 주인공은 내게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을 던져 준 존재였다.
신학을 배우다가 마르크시즘으로, 운동권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종교로 마지막에는 다시 기독교로 돌아온 민요섭! 잘나가는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서 자기 민족의 신 여호와를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아하스페르츠! 둘은 민족적인 출신 성분도, 삶의 조건도, 시대적인 배경도 다 달랐지만 진지하게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자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작가가 민요섭의 이야기와 아하스페르츠의 이야기를 뒤섞어 진행하는 하는 것은 이러한 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리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부조리를 그냥 두는 무기력한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세상에 작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민요섭 궤적과 어릴 적부터 조금도 의심이 없이 믿어왔던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이집트로 바벨론으로 돌고 돌아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온 아하스페르츠의 삶의 궤적은 서로 다른 듯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대화에서 정확하게 일치하기 시작한다.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문답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시험을 적절하게 각색한 것이다. 물론 이 각색이 100%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이문열이라는 작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문호로 평가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를 적절하게 각색하여 적절한 자리에 배치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문열의 능력을 대단하게 평가하지만 말이다. 사람의 아들을 다시 펴서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인용해 보려고 했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여 대신 성경의 이야기를 인용해 본다. 인용된 성경은 쉬운 성경 버전이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심] 그 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내내 금식하셔서,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명령해 보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마귀가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시오. 성경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천사들에게 명령하실 것이다. 그들은 손으로 당신을 붙잡아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화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절하고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주겠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썩 물러가거라! 성경에 '오직 주 너희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를 섬겨라!'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에게서 떠나가고, 천사들이 예수님께 와서 시중을 들었습니다.(마태복음 4:1~11)
사탄은 예수에게 세 가지 요구를 한다. “배가 고픈가? 그럼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어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그리고 전혀 다치지 않는 기적을 보여라.” “세상을 가지고 싶은가? 나에게 한번 절하라.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작가는 이 세 가지 시험을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문답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대력 이렇다. “당신이 지금 배가 고프듯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배가 고프다. 당신은 그들에게 빵을 줄 수 있는가?”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라. 뛰어 내려라. 사람들이 당신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인 독립이다. 세상을 가지고 싶은가? 나에게는 남과 다른 식견이 있으니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당신을 보좌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아하스페르츠와 예수의 이 문답에서 아하스페르츠와 민요섭은 정확하게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 내가 만난다. 아하스페르츠가 던지는 질문의 요지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세 가지 시험이다. 첫째는 부에 욕구요, 둘째는 대중적인 인기에 대한 욕구이며, 셋째는 권력에 대한 욕구이다. 사람의 아들치고 이 세 가지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하스페르츠가 끊임없이 말씀이 육화된 당신이 우리에게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절규하는 것은 신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태생부터 인간인 우리들은 이 세 가지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거칠게 표현해서 귀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 책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민요섭의 방황도, 아하스페르츠의 절망도 결국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가 이 세 가지 유혹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롭지 못함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세 가지 욕구가 발현된 것이 지난 대선이고, 이 세 가지 욕구에 남보다 더 철저한 것이 MB정권이 아니겠는가? 지난 대선 우리가 도적적인 흠결을 무시하고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부자 되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부에 대한 욕구가 아니던가? 또한 성공하고 싶고, 이름을 날리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 대중적인 인지도가 아닌가? 하다못해 라면을 하나 사먹을 때도 맛이 아니라 대중적인 인지도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인맥과 학맥, 혈연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기반이 되지 않고는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1%이든지 99%이든지 상관없이 이 세 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세 가지 유혹을 무시하는 것은 사회와 연을 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 가지 유혹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다만 얼마나 그 세 가지 유혹을 통제할 수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 설 수 있다면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지만 멈추어 설 수 없다면 사상 최악의 괴물이 되어 버린다.
유혹에 가장 충실한 예로 나는 MB정부를 바라본다. 온갖 불법과 비리로 얼룩지면서도 왜 그렇게 부동산에 목을 매는가? 왜 그렇게 국가를 이익모델로 삼았다는 비판을 듣는가? 부에 대한 욕망에 철저하게 솔직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정부라 자처하면서 좌와 우를 가르고, 별 것 아닌 것에 목숨 걸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가? 왜 자원외교가 아니라 자위외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가? 대중적인 인기에 대한 욕망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왜 전 대통령을 전 방위적으로 압박하여 투신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는가? 물대포로 대표되는 강경 진압을 조자룡 헌 창 쓰듯이 하는가? 검찰과 경찰, 사법, 그리고 언론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교회 장로를 내세우는, 그래서 교계의 큰 목사님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하는 MB정부이지만 그들이 걷는 길은 예수의 길이라기보다는 아하스페르츠가 번민하면서 걸어간 길이다. 아니 아하스페르츠도 차마 마지막까지 가지 못했던 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이 정권에 가지고 있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사람의 아들! 이 말은 우리가 세 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이 세 가지 유혹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인지를 2007년 이후로 우리는 보고 있고 느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고민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요, 회개해야 할 큰 허물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민요섭의 길이 아니라 극단적인 아하스페르츠의 길로 가고 있음이 안타깝다.
ps 이문열은 딱 여기까지가 좋았다.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열국지까지도 봐줄만 하다. 그렇지만 선택 이후는 그에게 정말 실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