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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이야기 3 -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 ㅣ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3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옛날 대학원을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채플시간이었다. 한 교수님이 한참 설교를 하시는데 그 분이 정말 괴짜다. 동양 철학을 가르치시는 목사님이신데 마침 그날의 주제는 진정한 신앙 생활이란 무엇인가였다. 알다시피 교수님들의 설교는 정말 재미가 없이 딱딱해서 졸기 딱 좋다. 그날도 열심히 졸고 있는데 이분이 신앙을 노장 사상을 가지고 설명 하시기 시작했다.
"여러분 신앙은 도를 닦는 것과 같습니다. 학문도 도를 닦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채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비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뻔한 소리인지라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교수님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시더니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젠장 든게 있어야 비우지..."
참고로 강당의 마이크는 싸구려 마이크가 아니라 성능이 좋은 고가의 마이크였다. 당연히 그분의 혼잣말은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를 통하여 학생들의 귀에 전달되었다. 졸던 학생들마저 다 깨어 일어나 낄낄대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 때문인지 비운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고, 잊지 않게 되었다.
정점에 이르렀을 때 더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알고 비워낼 수 있는 것, 멈출 수 있는 절제의 미덕을 소유하는 것,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초 장왕의 가장 큰 장점이다. 로마인 이야기에 비견하여 춘추 전국 시대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저자의 의욕이 빛나는 책이다. 1~3권까지 다 봤으나 가장 먼저 3권을 리뷰로 올리는 것은 오늘 읽은 따끈따끈한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춘추 전국 시대에 관련한 책들이라면 중국의 책들을 그대로 번역하거나 혹은 고사를 이야기처럼 엮은 것들이 전부인데 이 책은 그러한 고정 관념을 깬다. 춘추와 국어, 좌전, 사기 등 여러가지 고전들을 비교하고 분석하여 가장 사실에 들어맞을 법한 것들을 취사 선택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것도 착실하게 각주까지 달고, 지도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이유도, 그리고 책을 읽는 속도가 스피디 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너무 착실하게 학자의 양심을 가지고 글을 쓴 나머지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재미는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1권은 제 환공과 관중을, 2권은 진 문공을, 3권은 초 장왕을 다루고 있다. 1권과 2권의 리뷰는 조만간 쓸 것이고 여기에서는 장왕에게만 집중하고자 한다.
항우로 유명한 초나라이지만 춘추시대에는 오랑캐로 분류되던 변방의 나라이다. 다른 나라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주 왕실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공"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초나라 만큼은 왕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주 왕실의 인정을 받으려다가 거절당한 분노 때문인지 초나라는 스스로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변방의 촌놈이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게 초는 꽤 괴씸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환공이 초의 북상을 막았고, 진 문공이 초와 성복에서 전투를 벌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3권 초 장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초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면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모습이 희미해진다. 여전히 명분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하지만 진 문공의 시대를 지나면서 천하는 각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입장으로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을 제어하기 위하여 제와 초가, 서방의 진과 초가 손을 잡고 초를 제어하기 위하여 초보다 더 변방에 있는 오와 진이 손을 잡는다. 그 안에서 온갖 전란이 끊이지 않고, 국제 정세는 복잡해 지기만 한다. 이 모두가 초장왕의 패업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초는 장왕을 통하여 중국 역사에 메이저로 등장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초 장왕은 제 환공이나 진 문공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현명한 신하들을 발탁한 왕이다. 그가 신하들을 발탁하는 기준은 오로지 실력에 있지 신분에 있지 않다. 이러한 그의 대범함이 그를 춘추시대의 패자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왕의 대단함은 패자가 되어서도 절제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정점을 찍었을 때 스스로를 비우고, 경계하는 것이 권력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전투에 승리하고도 그 전공을 과시하지 않았고, 나라를 빼앗고도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이며, 결코 명분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무를 창을 그치는 무(止戈之武)라고 하는 것이며, 저자가 노자와 쌍둥이와 같은 존재라고 조심스레 평가하는 것이다.
말은 쉽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한참 올라갈 때 내려올 준비를 하지 않아서 그대로 추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공만 꿈꾸는 이 시대 미련한 사람들에게 좋은 본이 된다. 저자는 관중을 현실적인 정치인으로 평가했는데, 나는 장왕도 관중에 못지 않는 현실적인 정치인으로 평가하고 싶다.
ps.148p 밑에서 2번째 줄 재방을=>제방을, 244p 무후와 문후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데 문맥상 문후가 맞는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