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세트 - 전10권 - 개정증보판
시내암 지음, 이문열 평역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알라딘에서 50% 특가로 판매한다는 찌라시(!)를 보자마자 냉큼 주문해 버렸다. 이문열씨가 지금에 와서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보이던 간에 그가 평역한 수호지와 삼국지는 재미가 있다. 냉큼 구매한 후 읽기 시작해서 보름만에 다 읽었다. 그동안 여러가지 바쁜 일들도 있었고, 삼국지만큼 흥미진진하지도 않고, 스케일이 장대한 것도 아니며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헷갈려서인지 삼국지보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꽤 아기자기한 맛도 있어서 다음 권에 손이 저절로 가기에 한권 한권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호지를 어떻게 평가할까?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홍루몽을 중국 4대 기서라고 한다. 네 권을 모두 다 읽어봤는데, 나는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홍루몽의 순서로 재미있다고 평가를 한다. 서유기야 워낙 잘아는 "미스터 손"이 등장하는 판타지 장르의 책이고,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홍루몽은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와 애정관계를 중심으로 소설을 풀어 나가고 있다.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기록된 소설인 삼국지와 수호지가 그나마 비슷한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둘 사이에도 차이는 있다. 삼국지가 제갈공명을 신비롭게 묘사하고는 있지만 더 현실적인 측면에 치중하고 있다면, 수호지는 요술과 법술이 전투에 공공연히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인다. 같은 야사를 모아 놓은 부분들도 삼국지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수호지는 확실하게 티가 난다. 비유하자면 삼국지는 삼국사기와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면 수호지는 삼국유사와 비슷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까? 삼국지와 수호지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삼국지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이름을 떨치고 스러져간 메이저리거같은 스타들이라면 수호지의 등장인물들은 메이저리거가 되기를 동경하면서 트리플A에서 뛰고 있는 마이너리거라고 할 수 있다.  

  송강, 이규, 노준의, 무송, 노지심 등등 양산박의 108두령은 모두 사회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밝은 곳을 갈망하며,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지만 부패한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와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뇌물수수, 억지수사, 특권층 봐주기, 공무원 비리 등은 그 시대의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한 그들을 시대의 낙오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현역으로 남아 있기 위해 애를 쓰듯이, 양산박에 모인 108두령들은 녹림에 몸을 담고 도적질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조정의 부름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오매불망 조정의 부름을 기다리던 어느날, 드디어 조정의 부름을 받아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과거에는 도적이었지만 이제는 관군이 되어, 과거에는 사회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시스템에 포섭된 자들이 되어 조정을 위하여 일하기 시작한다. 비록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고? 과거에는 아무리 화려한 승리를 얻어도 반군이요, 어둠의 세력이지만 이제는 떳떳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시간 마이너리그 몸담으면서 훈련을 하며 올라온 선수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반짝 조커로 기용될 뿐이다. 실제로 송조정의 스타플레이어들은 따로 있었다. 동서남북 원정대를 꾸리고 반란군을 토벌하면서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들의 마지막은 토사구팽이 아닌가? 많은 두령들이 4차례에 걸친 원정 끝에 죽어 버리고, 그나마 남았던 두령들도 벼슬을 마다않고 야인이 되는 길을 택한다. 차마 그 길을 택하지 못한 송강을 비롯한 몇명의 두령들은 오래지 않아 송조정의 무능하지만 스타플레이어인 고구, 채태사 일당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송강은 불같은 성격의 이규를 불러 자기가 마신 독주를 마시게 하고 같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 뒤를 이은 수호지 후편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없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조잡하다. 그나마 괜찮은 것을 골라 내용을 소개한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감안해서 읽는다면 다른 판본들은 도대체 얼마나 조잡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이미 죽었던 이들이 멀쩡이 살아 있는 것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어이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다시 모인 108두령의 생존자들이 이준이 있던 곳으로 모이고, 섬라국의 대신들이 되어 잘먹고 잘산게 된다는 내용이다. 

  왜 그렇게도 108두령이 송조정의 부름을 기다렸는가? 자기 죽을 자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원정대를 자청해서 동서남북으로 내달렸는가? 송강은 왜 자신의 오른팔 이규를 속여 독주를 마시게 했을까? 왜 후대의 사람들은 무리해서 수호지의 후기를 달아 섬라국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냈고, 108두령의 생존자들을 그곳의 대신들로 만들어 버렸을까? 

  어떻게 해서든 다시는 사회 시스템에서 튕겨나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현실에서의 그들의 바램이 결국은 실패와 좌절로 끝나버렸기 때문에 이들의 염원을 섬라국이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설정하여 들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홍길동의 율도국이 그러하고, 임꺽정의 구월산 산채가 그러하며, 장길산의 운주사가 그러하듯이 언젠가는 깨어져버릴, 아니 현실에서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한 디스토피아일뿐이다. 그렇기 대문에 메이저리거를 꿈꾸는 아이너리거인 수호지 108 두령의 삶이 더 서글픈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고전의 힘이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묘사가 강하고, 더 직설적인 면이 있어서 그렇지 오늘 우리 현실의 모습을 너무 정확하게 담고 있다. 곳곳에서 고구와 고아내, 채태사가 존재하며 그들 때문에 사회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가는 108 두령들이 있고, 그나마 튕겨나가지도 못해서 짓눌리는 민초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택동이 수호지를 정치서적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무더운 여름 수호지와 보낸 시간들이 즐거웠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수호지를 기록하신 그분이 지금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이 작가의 사상과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이 꼭 들어 맞는 말은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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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8-2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호지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못 읽었습니다.
세인트 님의 글을 읽으니..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합니다.
네.. 수백년을 살아온 고전은 대단하다는 말씀, 동감합니다. ^^

saint236 2010-08-21 12:41   좋아요 0 | URL
조만간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읽어보려고요. 매년 한번씩 앞으로 10년 읽으면 10번은 읽겠지요? 고전은 그 정도는 읽어야 맛이 느껴지더라고요.

양철나무꾼 2010-08-2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국지는 이문열 걸로 10번은 읽은 것 같은데,
이 수호지는 이문열 거여서 한번도 안 읽었어요.

근데,첫 문장에 혹해...장바구니로 쏘옥~입니다.

그가 지금에 와서 어떤 글을 쓰고,어떤 정치적인 성향을 보이던 간에 그가 평역한 삼국지는 재미가 있었거든여~^^

saint236 2010-08-26 14:29   좋아요 0 | URL
수호지도 재미있기는 합니다. 단 개인적으로는 삼국지만큼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병아리 눈꼽만큼 삼국지가 더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