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 Sakw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강이관
주연 : 문소리, 김태우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화면이 거친게 누군지 초짜 감독이 만들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확들었다. 어찌보면 다큐멘터리 화면 같기도 하고 암튼 노련미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자꾸 보면 볼수록 무슨 유럽의 어느 영화 보는 것 같고, 뭔가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내용은 좀 빤하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연애는 좋은데, 결혼은 왠지 김빠지고, 재미없고, 일상적인 것.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결혼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처음엔 누구든 신혼은 행복하고 좋다. 그러다 살다보면 서로 대화의 단절을 느끼고, 결국 내가 요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해 결혼한 건가?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나에게 실망하고. 그런데 왜 또 하필 그 싯점에 헤어졌던 애인을 다시 만나서는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드는 걸까? 



더구나 그 애인이 예전엔 일방적인 통고로 헤어졌는데, 그때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며 반성까지 하며 다시 만나줄 것을 부탁한다.  

(사실 말은 쉽다고) 제3자가 볼 때 좀 찌질해 보인다. '헤어졌으면 쿨하게 헤어지는 거지 뭘 다시만나 찌꺼기로 남은 사랑에 불을 질러보려고 하는 걸까?'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무쪽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것이던가? 또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과의 대화는 점점 안되고 꼬인다. 왜 남자들은 뭐 하나를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 독신 때처럼 자기 멋대로 결정하는 것일까? 그것도 나중에 알 것 다 알게되면 가족을 위해서라고 하고, 말했으면 못하게 말렸을 것 아니냐? 구구하게 변명을 한다. 뭐 여자도 그럴 수 있다. 결혼이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이 상대방에겐 상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 받지 않으려면 사랑도 결혼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주인공 현정의 친정 역시 우리가 익숙히 보아 온 흔한 가정 형태다. 보통의 가정이 다 그런 모습 아닌가? 지나칠 정도로 스탠다드 하다는 느낌이다. 아버지는 명퇴를 했고, 동생은 취직이 안되 답답하고, 현정은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은 엄마가 있다. 너무 비슷비슷해 웃음이 나올지경이다. 무엇보다 답답하고 우울한 현정이 아버지의 안경을 대신 찾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 주며 울지 말라고 안경은 내가 찹아 보겠다고만 한다. 어느 아버지가 인자하고 마음이 깊어 이런 딸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준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아버지가 또한 우리 아버지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을 영화 속 현정은 치뤄내고 있는 줄도 모른다. 차라리 혼자라면 그 고독은 즐길 수도 있고 감내할 수도 있것 같다. 하지만 가족이 있고, 사랑으로 보듬어 줘야할 배우자가 있기 때문에 더 고독하고 답답한 건 어쩔수가 없다.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 상훈에게 자신이 왜 이혼하자고 했는지 아느냐고 물어봤을 때, 상훈은 순순히 이혼에 동의하며 자신이 결국 거짓말 했고, 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자책한다. 거기에서 또 한 번 답답함을 느끼는 현정.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혼자만이 느끼는 절대 고독은 누가 깊이 헤아려 주지 못한다.  

그런데 현정은 옛 애인과도 헤어지고, 이제 겨우 이혼을 결심한 남편 상훈에게 전화해서 뜬금없이, 나 그동안 옛날 애인 만났엇다고 고백해 버린다. 그때의 상훈의 반응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다. 그에겐 정말 뜬금없어 보인다. 현정 역시도 뭐 때문이란 확실한 이유도 없이 "그냥"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싱거운 말인가? "그냥". 과연 인간이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설명 가능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몇개나 될까? 논리적으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훗날 의미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밑도 끝도 없이 나의 있었던 일을 고백해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다. 그런데 현정의 고백은 동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고백은 사실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배우자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조심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아니까. 그래서 결혼할 때는 결혼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은 다 묻고 결혼하라지 않은가? 그건 맞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금기에 도전해 왔다. 그런 얘기 좀 하면 어때? 그것은 어찌보면 결혼 이야기를 다시 써 나갈 새로운 시발점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현정은 옛 애인과도 완전히 끝냈고, 과거가 되버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는 것이다. 이미 과거가 돼버린 현정의 연애사를 남편이 받아줄 수 없다면 정말 이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 예전엔 애인의 일방적인 통고로 헤어져 혼란스럽고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했지만, 지금은 현정이 확실히 "No"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도 이별도 내가 먼저하면 모든 것은 의외로 깨끗하고 단순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나지 누구도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 엔딩이 나름 인상적이다. 침대에서 늘어져라 자고 있는 현정. 반면 상훈은 바람 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얼떨떨과 벌레 씹은 중간 형상이다. 그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대로 상훈을 끌어 들이는 그녀. 그녀는 남편을 꼭 끌어 앉으며 다시 혼곤한 잠에 빠져든다. 정말 별거 아니지만 나름 멋진 엔딩씬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뭔가 해피 엔딩인 것만 같다.  

제발 남편이든, 아내든 한때 튕겨내도 참고 인내하고, 다시 돌아올 때 모른 척 슬쩍 받아줘라. 이혼이 뭐 별거냐? 한때의 바람. 한때의 과거사 가지고 공격하고 비아냥거리지 말아라. 그건 배우자가 불륜한 것만큼이나 치사하다. 인간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현재를 사는 존재다.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사과는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인다. 현정이 전 애인과 정말 헤어질 것을 결심했을 때 차안에서 먹으라고 사 준 것뿐이다. 스쳐지나가는 듯한 영화 소품에 슬쩍 의미를 부여했다. 왠지 마음에 든다. 이렇게 감독은 별 것 아닌 것들에 심각하지 않으면서도 넌지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내가 가진 '초짜'라는 건 그 의미가 퇴색되어 보인다. 그런 것이 감독의 능력이고 재능이 아니겠는가?    

이 영화는 찍기는 오래 전에 찍어 놓고 빛을 못 보고 있다가 2007년 한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주목 받은 영화라고 한다. 정말 비운의 영화가 될뻔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 MBC <파스타>에 나오는 이선균 정말 앳되게(?) 나온다. 주름이 어쩌면 저렇게 없을 수 있을까?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 문소리를 위한 영화는 아닐까 싶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녀에게 무한 신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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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학 트랜드는 일기 아니면 편지가 아닌가 싶다. 

작년 말, 우연히 서핑을 하다 이 책을 발견했다.  

타이프 라이터를 (거짓말 조금 보태서)미치도록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표지가 참 근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막상 한대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조놈의 타자기가 우리나라에서 예전엔 비서들이 많이 썼지만, 미국 같은 나라에선 작가들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다. 왠지 지적 산물 같아 보이지 않는가? 물론 요즘 미끈하게 잘 빠진 노트북에 비하면 한참 뒤쳐지긴 하지만 아날로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물건처럼 탐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설명에 의하면, 작가가 길 위에서 만난 이방인들과 유랑의 기록 쓴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일기체로 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작년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고 지난 2000년에 나왔다고 절판이 됐고, 이번에 다시 나왔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이석원의보통의 존재 가 나와 한동안 눈길을 글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잘 알려진 존 파울즈의 일기집이 나왔는데 어떨지 몹시 궁금해진다.  

사실 일기란 상당히 개인적인 글로써 보는 사람의 관음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나는 중학교를 들어가던 해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충 허리쯤 올라오는 일기책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오해할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사실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또한 나는 한때 무엇인가를 쌓아 놓는다는 것이 싫어,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그게 없어진 것 같은데 예전의 B드라이브 디스켓에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그 디스켓은 가지고 있지만 예전에 썼던 B드라이브가 있는 컴퓨터가 없어진지 오래라 저장된 일기를 아마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도 같다. 하긴, 일기를 썼다고 해서 훗날 다시 보게 되는 경우는 없다.  

오래 전, 정말 일기를 꺼내 본 적이 있었다. 그래봐야 20대적에 10대 일기를 꺼내 본 것인데, 몇장 읽다 덥고 말았다. 어쩌면 그렇게 글씨를 못 썼던지. 그리고 왜 그리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때 내가 왜 일기를 쓰고 있을까에 회의적이기도 했다. 사실 글이란 게 정신적 정화 작용도 해 글을 쓰면 흩어졌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곤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보고 점검도 하고. 하지만 난 요즘 일기를 거의 쓰지 않고 있다. 게으른 것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블로그를 하게 되면서 따로 일기를 쓴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블로그에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아니다. 일기는 독백을 하지만 블로그에서는 독백과 방백이 적당히 혼재되어 있다. 즉 독백을 하는 것 같다가도 방백을 하고, 방백을 하는 듯 하면서 독백을 한다. 하지만 진짜 속 얘기는 블로그에다 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난 그렇다. 그렇다면 일기를 계속 써야할 것도 같은데 그러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게으름이고, 무엇인가 일기쓰는 행위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내가 이대로 앞으로 일기를 계속 쓸 수 없다면 자서전을 쓰게 될 것 같다. 마침 자서전 쓰는 법에 관한 책도 나와 있으니.  

        

그래도, 지금 내가 누군가의 일기를 읽고 싶다면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아닐까 싶다. 알려진대로 실비아 플라스는 한때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였으며, 그녀의 마지막 죽음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다. 가스 오븐에 자신의 머리를 넣고 자살을 했다니 말이다.  

처음 이책이 나왔을 때 읽을 자신이 없었다. 왠지 자살한 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저변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책은 판도라의 상자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난 아직도 이 상자를 열어보지는 못했고, 언제 열어 볼지도 사실 모르겠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우리의 영원한 일기는 안네 프랭크의 일기는 아닐까 한다. 한마디로 이책을 읽지 않았으면 일기를 읽었다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책을 두번 이상 거듭해 읽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중학교 때 이책을 읽었다. 그때의 감동과 안도감이란...! 나도 드디어 읽었다!는 것이긴 한데 그때 이후로 나는 이책을 재독할 마음은 지금까지 들지 않는다. 물론 다른 책들도 내가 재독하는 경우 거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책은 한번쯤 더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책이 있다. 하지만 이책은 항상 그 대상에서 빠져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안 읽었다면, <죽기 전에는 꼭 한번은 읽어줘야 할 책 목록>에는 빠지지 않고 들어가야 하는 책이 이책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것은 좋은 것이라고 떠들면서, 왜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난중일기><백범일지>같은 건 왜 읽어 볼 생각은 안하는지 모르겠다. 

 

 

 그 밖에, 

  이런 책들도 읽어주면 좋을 것도 같다. 부제로, 목적이 이끄는 일기쯤이 되려나?  

 

사실 일기란 비공개를 원칙으로 사적인 것일 것 같지만 꼭 그러치만도 않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그 첫날(그날이 몇년 몇월 몇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난 분명히 한번쯤은 생각했을 것이다. '훗날 내 후손이 이 일기를 읽어 준다면...' 그래서 허리까지 찬 일기장들을 아직도 태워버릴 용기를 갖지 못한지도 모르겠다.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책이 대체로 작고 얇기도 하지만 그렇게 치고는 상당히 잘 만든 책은 아닐까 싶다. 반정도 읽었는데 다 읽고나도 별 네개 이상 주는데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난 왜, 이걸 읽고 있는데 자꾸 옛 생각이 나는 걸까?   

나는 말 보다 글의 힘을 더 믿는 사람이다. 사춘기 시절, 엄마와 아버지는 싸움이 잦았다. 지금 같으면 그걸 몇배 이해했을 것이다. 성이 다른 사람끼리 사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한번에 맞기를 바랄까? 그런데 보는 나는 참 많이 괴로웠다. 아버지와 엄마가 행복하지 못한 게 마치 내 책임 같아서 나는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께 보내 드린 적이 있었다. 처음엔 약발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식이 이렇게 컸구나 기득도 하고, 다 큰 자식한테 그런 편지를 받으니 무안도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넓은 마음으로 자식의 마음을 받아 드리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점점 약발을 잃었다. 자꾸 자식으로부터 당신의 잘못을 지적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셨을 것이다. 난 그후 아버지한테 편지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역시 부부의 문제는 둘이 풀어야 하는 것이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또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짝을 정말로 좋아했다. 물론 한때 싸우고 화를 낸적도 있지만, 그 아인 정말 똑똑하기도 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예쁘기도 했고, 상냥하기도 했다. 고맘 때 친구끼리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는데 나 역시 그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을 한동안 즐겼다. 그 친구는 꼭 편지 말미에 -너의 둘도 없는 친구, OO-라는 말로 맺음을 하곤 했는데, 난 한참 동안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잉? 이게 무슨 말이지?' 물론 오늘날로 치자면 자신을 나타내는 문장 같은 것인데 이해를 못했다기 보단 뜬금없어 보어도 보엿고, 건방져도 보였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얘도 나를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나에겐 이 친구 밖엔 친구가 없는 것일까? 편지를 받을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 친구와의 편지 교환은 제법 오래 갔던 것도 같다. 중학교 입학 초 정도까지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다. 학교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교복을 입은 그 친구의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에 내릴 수는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편지를 썼다. 뭐 이를테면, '그때 너를 우연히 봤는데 버스를 내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편지를 쓴다. 주저리 주저리......'썼겠지. 그건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아쉬우면 한 번이라도 약속을 정해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편지라는 매개체가 있어서 그런지 우린 서로 언제고 한 번 보자고 해 놓고 계속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한 번은 이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내가 꼭 편지를 보낼 때나 답장을 보내지 먼저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편지를 안했다. 그랬더니 정말 편지가 없었다. 나는 아쉽지만 그 친구에 대한 우정을 거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언제까지나 답장을 쓰는 번거로움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자발적이지 않으면 의무감으로 뭔가를 하는 건 나 또한 원치 않으니. 그래서 우리는 결국 멀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내 마음엔 언제나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 받을 상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그것은 지금도 앙금처럼 남아 있다.    

오래도록 동생 테오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반 고흐. 나도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다.(판형은 이게 아니다) 그때 읽으면서 둘의 형제애를 얼마나 부러워 했던지. 그런 것으로 봐서 어쩌면 인간 심리 저 밑바닥엔 편지를 언제든지 주고 받을 수 있는 소울 메이트를 진정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 친구 이후 한동안 그런 친구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 보다 네살 위인 언니가 재수 끝에 대학엘 들어가고, 교회 대학부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론 서너명 됐던 것으로 아는데, 희안하게도 언니는 내 친구를 몰라도, 난 언니 친구들이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남자친구를 모를까? 당시 나는 여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라곤 아버지와 오빠, 동생이 다였고, 설혹 또래 남자 아이를 안다고 해도 오빠뻘 남자를 아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향기'란 이런 거구나. 그 오빠들만 보면 설레는 뭔가가 있었다.  

그중 C오빠가 있었다. 공부도 잘해 당시 우리 언니로선 바라볼 수도 없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외모는 좀 왜소하긴 해도 성격이 좋아 내 바로 위의 오빠와 나를 금방 사로 잡았다. 그 사로잡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편지였다.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그 오빠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주는 것이아닌가? 그것도 그냥 언니를 통해 주는 것도 아니고 우표 붙인 편지를. 나도 편지질을 해 보긴 하지만 이게 어디 보통 정성인가? 그렇지 않아도 조금만 틈이 있으면 편지를 주고 받는 상대가 있게 되길 바랐던 나는 그때부터 그 오빠와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너무 좋았다. 어떻게 길게 쓰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도 잠깐.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 오빠가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그냥 아는 오빠 이상의 인상을 친구의 동생에게 준 것은 아닐까, 주춤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자신이 그렇게 편지를 했던 것도 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단다. 그러면 그렇지. 그럴수도 있겠다는 의혹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의도를 알고는 나 역시도 그렇게 목적이 있는 친절이라면 사양하겠다고 생각하고 나 역시 그 오빠의 편지는 기다리지 않았고, 그 오빠 역시 더 이상 집에 놀러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 것으로 봐서 언니하고도 멀어지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때 그 오빠와 주고 받았던 편지와 다른 사람들과도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는데 어쩌면,(언제가 될런지 모르지만 다음 이사 때)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것 같다.  

오래 전, 내가 주일학교 교사를 했을 때 내가 맡은 아이들과 공개 일기장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지금처럼 인터넷 사이트가 발달되고 카페와 블로그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의 일이다. 그 시절 카페가 있었더라면 우린 거의 실시간으로 여러 생각들과 정보들을 공유했을 것이다. 거의 열몇 명에 가까웠으니 두권을 돌린다고 해도 한 사람이 한 주씩 가지고 있는다고 해도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 까지는 한참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일기며, 편지인 동시에, 낙서장 같은 것이었다. 팀 활동을 하면서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써 보자는 거였는데 별 내용은 없어도 나름 그것을 읽는 기쁨은 꽤 컸다.  

그래도 역시 편지는 동성끼리 주고 받는 것 보다 이성끼리 주고 받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가끔 결혼을 전제로한 남녀가 연애기간 동안 편지를 몇백 통을 받았다고 하면 어찌나 부럽던지. 그것을 변함없이 결혼 후에도 할 수만 있다면 부부문제란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편지도 성실해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말 보다 글이 더 힘이 있어 보이는데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얼마나 많이 가슴에 묻고 사는 것일까? 

앞서 말한 <정조의 비밀편지>의 보면, 어찰을 쓰지 않은 임금은 없었지만 정조만큼 어찰을 잘 활용한 사람도 없어 보인다. 편지 하나만 잘 써도 로맨티스트, 멋있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텐데 편지를 보낼 사람도 마음도 갖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까?  

                      

최근 이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 절판이었다가 새로 재출간 되었다. 이 책 역시 편지글로 쓰여졌다는데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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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2-2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이 글도 마치 일기장을 훔쳐 보는 기분으로 읽혀지는데요.

stella.K 2010-02-21 20:01   좋아요 0 | URL
오호! 빨리도 읽으셨네요. 그렇습니까? 흐흐.

Forgettable. 2010-02-2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alla님, 안녕하세요?
저도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일기글이나 편지글 읽는걸 즐기는데 이 페이퍼 참 좋으네요.
전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일기]를 몇달 째 읽고 있는데요, 이게 지겨워서가 아니라 자꾸 책장이 넘어가는게 너무 아까워서 자꾸 책을 덮게 되더라구요^^

stella.K 2010-02-21 21:58   좋아요 0 | URL
포게터블님, 반가워요.
사실 저 파울즈의 책과 <정조의 비밀편지> 때문에 쓰기 시작한 글인데
짧지 않은 글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2010-02-21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02-22 11:02   좋아요 0 | URL
<정조의 비밀편지>강연회가 토욜에 있군요.
가고 싶기는 한데 지금으로선 약속해 드릴 수는 없고,
나중에 가게 되면 살짝 연락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야클 2010-02-2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또는 일부러)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이 꼭 있을것 같아서 저는 일기를 안씁니다만. ^^

stella.K 2010-02-22 11:03   좋아요 0 | URL
그럴 줄 알았습니다.ㅎㅎㅎ

2010-02-22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2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2-23 00:1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실비아 플라스 영화 권해드리고 싶어요.
제가 언젠가 리뷰도 썼구요.
전 영화가 훨씬 좋았어요. 기네스 펠트로가 실비아에요.^^

2010-02-22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2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호인 2010-02-2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우연히 시골 책장에서 고딩때 짤막하게 썼던 일기장을 발견하고 과거를 찾은 듯한 느낌에 설레였던 적이 있습니다. 일기를 쓴다는 것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묘한 감정이 들더라구요^*^

stella.K 2010-02-23 16: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일기란 게 참 묘한데가 있어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주소:  
http://book.idsolution.co.kr/index.php




하드보일드 실용주의, "사막" 독서 취향 
 

 


 

사막은 지구 표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기후대로, 매년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있다. 동식물의 생존에 무자비한 환경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사막엔 수많은 생물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가혹한 사막의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물과 에너지의 사용을 최소화 하기 위해 극도로 실용적이고 보수적인 행동 패턴을 보인다.

실용주의, 현실주의, 냉정한 보수주의. 이는 당신의 책 취향에게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 목마른 낙타가 물을 찾듯이:
    낙타가 사막에서 물을 찾듯이, 책을 고를 때도 실용주의가 적용됨. 빙빙 돌려 말하거나, 심하게 은유적이거나, 감상적인 내용은 질색. 본론부터 간단히. 쿨하고,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내용을 선호함.


  • 들어는 봤나, 하드보일드:
    책이란 무릇 어떠한 감정에 흔들려서도 안되며,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이성적으로 쓰여져야 함. 사실주의 소설, 다큐멘터리 기법의 역사책, 인물 평전 같은 건조한 사실 기반 내용을 좋아하는 편.


  • 문화적 유목민:
    사실주의 역사 책만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다양한 책을 섭렵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특별히 일관된 선호 기준이 없음. (아예 좋다 싫다 취향이 없는 경우도 있음.) 뭔가 볼만한 책을 찾기 위해 '방황'을 많이 하는 독자층.


당신의 취향은 지구 대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사막 기후처럼 전체 출판 시장의 상당수를 차지하며, 그 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로맨스 소설이나 시 같은 픽션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취향이기도 합니다.

다음의 당신 취향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은 작가들입니다.

빌 밸린저
그의 이름은 루, 두 번째 이름은 이제부터 이야기할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 생전에 그는 마술사였다. 기적을 만드는 사람, 요술쟁이, 환상을 연출하는 사람 말이다. 그는 아주 솜씨 좋은 마술사였는데도, 일찍 죽은 탓에 위에서 언급한 다른 이들만큼의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들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성취한 인물이었다.
첫째, 그는 살인범에게 복수했다.
둘째, 그는 살인을 실행했다.
셋째, 그는 그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 이와 손톱 中

베르나르 베르베르
"사람들은 하느님을 오해하고 있다네. 그 오해는 애초에 누군가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 가는 귀를 먹은 예언자 하나가 <하느님은 위무르(익살)이시다>라는 말을 <하느님은 아무르(사랑)이시다>라는 말로 잘못 알아들은 걸쎄. 모든 것 속에 웃음이 있다네. 죽음도 예외는 아니지. 나는 내가 소경이 된 것을 하느님의 익살로 받아들인다네."
- 타나토노트 中

위화
"이 자식들아, 니들 양심은 개에게 갖다 주었냐. 너희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다니. 너희 아버지는 피를 팔아서 번 돈을 전부 너희들을 위해서 썼는데,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가 피를 팔아 키운 거란 말이다. 생각들 좀 해봐. 흉년 든 그해에 집에서 맨날 옥수수죽만 먹었을때 너희들 얼굴에 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어서 너희 아버지가 피를 팔아 너희들 국수 사 주셨잖니. 이젠 완전히 잊어먹었구나...(중략)...일락이 네가 상해 병원해 입원해 있었을때.집안에 돈이 없어서 너희 아버지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면서 피를 파셨다. 한 번 팔면 석 달은 쉬어야 하는데, 너 살리려고 자기 목숨은 신경도 쓰지 않고, 사흘 걸러 닷새 걸러 한번씩 피를 파셨단 말이다.송림에서는 돌아가실 뻔도 했는데 일락이 네가 그일을 잊어버렸다니...이자식들아 너희 양심은 개새끼가 물어 갔다더냐."
- 허삼관 매혈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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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기드문 취향이었나?-_-a
    from my little room 2010-02-19 14:23 
    취향 설명 다른 취향 보기   열대우림 외곽에 위치한 사바나 기후는 독특한 건기가 특징. 수개월간 비 한방울 없이 계속되는 건기 동안 사바나의
 
 
 

쓰다 가즈미가 쓴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성공한다>에서는 고독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그 하나는 론리니스loneliness다. 사회와의 관계성이 단절되어 힘들고 어둡고 외로운 '소극적 고독'이 그것이다.  

나머지 하나가 '적극적인 고독'인 '솔리튜드solitude'다. 솔리튜드는 삶에 빛과 자신감을 부여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면서 쓰다 가즈미는 '론리니스'를 어두운 고독이라고 하고, '솔리튜드'를 밝은 고독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관게로부터 격리된 외로움을 수반하는 감정이 '론리니스'이며, 심신을 재생시키기 위해 본연의 자기다움을 찾고자 하는 긍정적인 고독이 '솔리튜드'다.  '론리니스'의 시간은 안절부절못하는 고립의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사람들을 애타게 타인을 찾는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123쪽  

아는 까페에 지인이 올려놨길래 가져왔다.
나는 지금, 론리니스인가, 솔리튜드인가? 

그런데 <고독>이란 저 말에 가슴이 콱 미어졌다. 그런 것으로 봐 후자 보단 전자인 듯 싶기도 하다. 탈출을 모색해 봐야 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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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2-19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리튜드, 자발적 고독이군요.
전 이것인 것 같은 때가 많아요.3=3=3

stella.K 2010-02-20 11:08   좋아요 0 | URL
저도 솔리튜드가 맞기도 해요.
사람 많고 시끄러운데는 딱 질색이니...ㅎ
 
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대니 보일
주연 : 데브 파텔, 프리다 핀토

 지난 연휴 TV에서 이 영화를 해 주길래 (졸면서)두번째로 보았다. 작년에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썼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또 한번 쓴다.(또 쓰면 어때?)  두번째로 보니 영화가 또 다른 새로운 의미로 다가 온다. 

이 영화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의 영화다. 배우들을 끊임없이 뛰게 만드는 감독. 거기서도 그러더니 이 작품에서도 또 뛰게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뜀박질'은 어떤 의밀까?  



확실히 이 아이들은 뛰어야 사는 아이들이다. 신도 버렸다는 불가촉천민. 이 아이들은 뛰어야만 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자신을 쫓는 어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주는 어둠의 세력으로 부터, 가난으로 부터 뛰고 또 뛰어야 했다.  

뛰어야 사는 또다른 영화가 있다. <말아톤>이다. 우리나라 영화고, 영화 속 초원이는 저 인도 아이들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물론 부자도 아니지만. 하지만 초원이에게도 또 다른 의미에서의 결핍이 있다. 바로 지능이 낮다는 것. 바로 이것이 또 다른 결핍이라 그의 엄마는 아들 초원에게 마라톤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은 초원이에겐 삶의 버팀목이자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또 다른 영화로는 <맨발의 기봉이>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내가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의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다. 늙고 병든 어머니를 위해 뛰었던 기봉씨.


그런데 참 그 이미지가 공교롭다. 왜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렇게 뛰어야 하고, 부잣집 아이들은 뛰지 않는 것일까? 부잣집 아이들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느껴야 하는 물질적 결핍이 없기 때문에 뛸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확실히 불공평하다. 

영화 속, 살림과 자말의 뛰는 모습은 정말 나름 귀엽기도 하지만 제법 날쌔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뛰고 뛰어서 도달한 형제의 길은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자말은 결국 부와 사랑을 차지 하지만 살림은 어느 허름한 아파트 욕조에 돈을 뿌리고 총으로 자신을 죽였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다시 봐도 참 놀랍고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말의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퀴즈쇼의 정답을 얻고 부와 사랑을 모두 차지한다니. 이런 완벽한 플롯이 어디 있는가? 영화니까 가능했고, 또 영화이기 때문에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영화는 비루한 인간의 삶에 청량제 같은 구실도 해야하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어느 감상주의 감독이 만들었다면 부와 사랑. 둘 다는 차지할 수 없으니 일부러 틀린 대답을 하게 해 부를 이루지 못하는 대신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가던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대신 부를 차지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고 박박 우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영화의 여운이 오래 간다고. 그건 확실히 클리셰이며, 예전엔 통했을런지 모르지만 그랬다면 구태의연한 영화가 될뻔 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관객의 의중을 한 발 앞서 갔다. 이를테면, 자말이 푸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제에서다. 문제가 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퀴즈쇼의 진행자가 A,B,C,D 사지선다의 문제 중 B를 선택하도록 화장실에서 자말을 유도한다. 하지만 자말은 그 또한 함정이란 것을 알고 D를 선택해 결국 마지막까지 도달한다. 이는 확실히 원작에 힘입은 감독의 노련한 연출력이란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엔딩은 누가 봐도 그래야 했다. 즉 불가촉천민에서 퀴즈 영웅이 되는 것. 그리고 사랑의 영웅이 되는 것으로 말이다. 감독은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이야말로 그의 존재의 궁극적 이유라는 말에 충실했다고 본다. 안 그랬다면 불가촉천민은 결국 불가촉천민이라며, 운명론자를 자체했다면 감독의 옷을 벗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영화에서 "뛴다"는 것은 어떤 의밀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처해진(줄도 모르는) 운명을 거부하고 희망을 향해 뛰어 가는 시지프의 원형은 아닐까? 비록 희망 그 뒤에 또 다른 절망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저 바위를 산 위에 올려놓겠다는 시지프스처럼.  

달려, 시지프스의 전사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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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2-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팠던 영화인데 놓쳤네요

프레이야 2010-02-1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연휴끝날 하더군요. 영화관에서 봐서 또 보진 않았어요.
영화 속 뛰는 장면은 그러고 보니 하나의 의미가 되네요.
추격신이라든지, 정신적 방황을 의미하는 뛰기, 어떤 의미의 탈출이라든지..
아니면 '말아톤'에서처럼 달리기가 하나의 목표이든지..
이 영화 속 저 어린 아이들의 골목 달리기는 역동적으로 보이기도 하더군요.
마지막 장면의 발리우드 스타일 때문에 좀 깨던 영화였어요.^^

stella.K 2010-02-1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도 영화가 발리우드란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 같은 경우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인도라는 것뿐 실제로 제작은
영국이 했을 거예요.
얼마 전, 본 '블랙'은 감독은 확실히 인도 감독인 것 같은데
스타일은 발리우드죠. 특히 영국풍이란 느낌인데
아마도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 그대로 영화에 반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요즘엔 이런 인도 영화가 각광을 받고 있어서인지
익숙한 허리우드 영화 보는 것 보다 훨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양적 정서도 녹아 있어 깊이도 느껴지구요.
아, 그런데 프레이야님과 영화 얘기할 수 있어서 좋으네요. 흐흐

novio 2010-02-25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뛴다'는 의미의 분석에 예리하시네요. 즐감했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