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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대니 보일 |
주연 : 데브 파텔, 프리다 핀토 |
지난 연휴 TV에서 이 영화를 해 주길래 (졸면서)두번째로 보았다. 작년에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썼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또 한번 쓴다.(또 쓰면 어때?) 두번째로 보니 영화가 또 다른 새로운 의미로 다가 온다.
이 영화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의 영화다. 배우들을 끊임없이 뛰게 만드는 감독. 거기서도 그러더니 이 작품에서도 또 뛰게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뜀박질'은 어떤 의밀까?

확실히 이 아이들은 뛰어야 사는 아이들이다. 신도 버렸다는 불가촉천민. 이 아이들은 뛰어야만 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자신을 쫓는 어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주는 어둠의 세력으로 부터, 가난으로 부터 뛰고 또 뛰어야 했다.
뛰어야 사는 또다른 영화가 있다. <말아톤>이다. 우리나라 영화고, 영화 속 초원이는 저 인도 아이들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물론 부자도 아니지만. 하지만 초원이에게도 또 다른 의미에서의 결핍이 있다. 바로 지능이 낮다는 것. 바로 이것이 또 다른 결핍이라 그의 엄마는 아들 초원에게 마라톤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은 초원이에겐 삶의 버팀목이자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또 다른 영화로는 <맨발의 기봉이>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내가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의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다. 늙고 병든 어머니를 위해 뛰었던 기봉씨.
그런데 참 그 이미지가 공교롭다. 왜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렇게 뛰어야 하고, 부잣집 아이들은 뛰지 않는 것일까? 부잣집 아이들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느껴야 하는 물질적 결핍이 없기 때문에 뛸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확실히 불공평하다.
영화 속, 살림과 자말의 뛰는 모습은 정말 나름 귀엽기도 하지만 제법 날쌔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뛰고 뛰어서 도달한 형제의 길은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자말은 결국 부와 사랑을 차지 하지만 살림은 어느 허름한 아파트 욕조에 돈을 뿌리고 총으로 자신을 죽였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다시 봐도 참 놀랍고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말의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퀴즈쇼의 정답을 얻고 부와 사랑을 모두 차지한다니. 이런 완벽한 플롯이 어디 있는가? 영화니까 가능했고, 또 영화이기 때문에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영화는 비루한 인간의 삶에 청량제 같은 구실도 해야하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어느 감상주의 감독이 만들었다면 부와 사랑. 둘 다는 차지할 수 없으니 일부러 틀린 대답을 하게 해 부를 이루지 못하는 대신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가던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대신 부를 차지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고 박박 우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영화의 여운이 오래 간다고. 그건 확실히 클리셰이며, 예전엔 통했을런지 모르지만 그랬다면 구태의연한 영화가 될뻔 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관객의 의중을 한 발 앞서 갔다. 이를테면, 자말이 푸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제에서다. 문제가 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퀴즈쇼의 진행자가 A,B,C,D 사지선다의 문제 중 B를 선택하도록 화장실에서 자말을 유도한다. 하지만 자말은 그 또한 함정이란 것을 알고 D를 선택해 결국 마지막까지 도달한다. 이는 확실히 원작에 힘입은 감독의 노련한 연출력이란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엔딩은 누가 봐도 그래야 했다. 즉 불가촉천민에서 퀴즈 영웅이 되는 것. 그리고 사랑의 영웅이 되는 것으로 말이다. 감독은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이야말로 그의 존재의 궁극적 이유라는 말에 충실했다고 본다. 안 그랬다면 불가촉천민은 결국 불가촉천민이라며, 운명론자를 자체했다면 감독의 옷을 벗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영화에서 "뛴다"는 것은 어떤 의밀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처해진(줄도 모르는) 운명을 거부하고 희망을 향해 뛰어 가는 시지프의 원형은 아닐까? 비록 희망 그 뒤에 또 다른 절망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저 바위를 산 위에 올려놓겠다는 시지프스처럼.
달려, 시지프스의 전사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