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화면이 거친게 누군지 초짜 감독이 만들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확들었다. 어찌보면 다큐멘터리 화면 같기도 하고 암튼 노련미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자꾸 보면 볼수록 무슨 유럽의 어느 영화 보는 것 같고, 뭔가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내용은 좀 빤하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연애는 좋은데, 결혼은 왠지 김빠지고, 재미없고, 일상적인 것.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결혼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처음엔 누구든 신혼은 행복하고 좋다. 그러다 살다보면 서로 대화의 단절을 느끼고, 결국 내가 요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해 결혼한 건가?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나에게 실망하고. 그런데 왜 또 하필 그 싯점에 헤어졌던 애인을 다시 만나서는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드는 걸까?
더구나 그 애인이 예전엔 일방적인 통고로 헤어졌는데, 그때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며 반성까지 하며 다시 만나줄 것을 부탁한다.
(사실 말은 쉽다고) 제3자가 볼 때 좀 찌질해 보인다. '헤어졌으면 쿨하게 헤어지는 거지 뭘 다시만나 찌꺼기로 남은 사랑에 불을 질러보려고 하는 걸까?'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무쪽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것이던가? 또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과의 대화는 점점 안되고 꼬인다. 왜 남자들은 뭐 하나를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 독신 때처럼 자기 멋대로 결정하는 것일까? 그것도 나중에 알 것 다 알게되면 가족을 위해서라고 하고, 말했으면 못하게 말렸을 것 아니냐? 구구하게 변명을 한다. 뭐 여자도 그럴 수 있다. 결혼이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이 상대방에겐 상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 받지 않으려면 사랑도 결혼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주인공 현정의 친정 역시 우리가 익숙히 보아 온 흔한 가정 형태다. 보통의 가정이 다 그런 모습 아닌가? 지나칠 정도로 스탠다드 하다는 느낌이다. 아버지는 명퇴를 했고, 동생은 취직이 안되 답답하고, 현정은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은 엄마가 있다. 너무 비슷비슷해 웃음이 나올지경이다. 무엇보다 답답하고 우울한 현정이 아버지의 안경을 대신 찾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 주며 울지 말라고 안경은 내가 찹아 보겠다고만 한다. 어느 아버지가 인자하고 마음이 깊어 이런 딸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준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아버지가 또한 우리 아버지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을 영화 속 현정은 치뤄내고 있는 줄도 모른다. 차라리 혼자라면 그 고독은 즐길 수도 있고 감내할 수도 있것 같다. 하지만 가족이 있고, 사랑으로 보듬어 줘야할 배우자가 있기 때문에 더 고독하고 답답한 건 어쩔수가 없다.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 상훈에게 자신이 왜 이혼하자고 했는지 아느냐고 물어봤을 때, 상훈은 순순히 이혼에 동의하며 자신이 결국 거짓말 했고, 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자책한다. 거기에서 또 한 번 답답함을 느끼는 현정.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혼자만이 느끼는 절대 고독은 누가 깊이 헤아려 주지 못한다.
그런데 현정은 옛 애인과도 헤어지고, 이제 겨우 이혼을 결심한 남편 상훈에게 전화해서 뜬금없이, 나 그동안 옛날 애인 만났엇다고 고백해 버린다. 그때의 상훈의 반응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다. 그에겐 정말 뜬금없어 보인다. 현정 역시도 뭐 때문이란 확실한 이유도 없이 "그냥"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싱거운 말인가? "그냥". 과연 인간이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설명 가능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몇개나 될까? 논리적으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훗날 의미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밑도 끝도 없이 나의 있었던 일을 고백해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다. 그런데 현정의 고백은 동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고백은 사실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배우자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조심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아니까. 그래서 결혼할 때는 결혼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은 다 묻고 결혼하라지 않은가? 그건 맞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금기에 도전해 왔다. 그런 얘기 좀 하면 어때? 그것은 어찌보면 결혼 이야기를 다시 써 나갈 새로운 시발점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현정은 옛 애인과도 완전히 끝냈고, 과거가 되버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는 것이다. 이미 과거가 돼버린 현정의 연애사를 남편이 받아줄 수 없다면 정말 이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 예전엔 애인의 일방적인 통고로 헤어져 혼란스럽고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했지만, 지금은 현정이 확실히 "No"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도 이별도 내가 먼저하면 모든 것은 의외로 깨끗하고 단순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나지 누구도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 엔딩이 나름 인상적이다. 침대에서 늘어져라 자고 있는 현정. 반면 상훈은 바람 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얼떨떨과 벌레 씹은 중간 형상이다. 그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대로 상훈을 끌어 들이는 그녀. 그녀는 남편을 꼭 끌어 앉으며 다시 혼곤한 잠에 빠져든다. 정말 별거 아니지만 나름 멋진 엔딩씬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뭔가 해피 엔딩인 것만 같다.
제발 남편이든, 아내든 한때 튕겨내도 참고 인내하고, 다시 돌아올 때 모른 척 슬쩍 받아줘라. 이혼이 뭐 별거냐? 한때의 바람. 한때의 과거사 가지고 공격하고 비아냥거리지 말아라. 그건 배우자가 불륜한 것만큼이나 치사하다. 인간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현재를 사는 존재다.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사과는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인다. 현정이 전 애인과 정말 헤어질 것을 결심했을 때 차안에서 먹으라고 사 준 것뿐이다. 스쳐지나가는 듯한 영화 소품에 슬쩍 의미를 부여했다. 왠지 마음에 든다. 이렇게 감독은 별 것 아닌 것들에 심각하지 않으면서도 넌지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내가 가진 '초짜'라는 건 그 의미가 퇴색되어 보인다. 그런 것이 감독의 능력이고 재능이 아니겠는가?
이 영화는 찍기는 오래 전에 찍어 놓고 빛을 못 보고 있다가 2007년 한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주목 받은 영화라고 한다. 정말 비운의 영화가 될뻔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 MBC <파스타>에 나오는 이선균 정말 앳되게(?) 나온다. 주름이 어쩌면 저렇게 없을 수 있을까?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 문소리를 위한 영화는 아닐까 싶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녀에게 무한 신뢰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