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느낌 있다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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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득 아버지가 계신 안방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방문이 닫혀 있음에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느낌, 호랑이 같은 동물이 어떻게 해서든 살려고 기를 쓰는 느낌을......
-166쪽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으로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 -168쪽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을 많이 벌려 하고, 이름을 얻으려 하고, 아름다워지려 하는 이유는 모두 사랑 때문이 아닐까. 돈이 많을수록, 이름을 날릴수록, 아름다울수록 더 멋진 사랑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다양하고 복잡해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도 결국에는 자신의 짝을 얻기 위한 단순한 목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살다보면 그 목표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돈 버는 것, 이름을 얻는 것, 아름다워지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사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돈을 벌다보면 더 큰 욕심이 생기고 이름과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욕심에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207~209쪽

나에게 사랑이란,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에 살짝 닿았으면 좋겠다. 내 손으로 그 사람의 손을 꽉 잡아 놓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을 내 쪽으로 당겨서 깊숙하게 끌어안고 싶다......

이런 마음이다. 더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몸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 그러니까 사랑은 가장 동물적인 것이다. 내게 이것보다 정확하고 솔직한 정의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감정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저토록 계산적으로 살 수 있을까. 요즘은 다들 건강을 위해 '오가닉 리이프'를 지향한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식품을 먹고 친환경적으로 만든 제푸을 몸에 걸치려고 애쓴다.
그런데 우습게도 사랑은 이와 정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혀 '오가닉'하지 않은 삶이다. 자연과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이 자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210~212쪽

그러니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아마 평생 사랑다운 사랑도 해보지 못한 채 죽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잔뜩 병들어 있을 것이다. 다시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전까지 배고프 지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
진짜 사랑은 오가닉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열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외부 조건들을 잇고 서로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212~213쪽

우연히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올 때 짜릿함을 느끼는 것이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낮섦을 느끼는 것이다. 노력해도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초조함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다. 작은 오해로 크게 실망하고 멀어지는 순간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바로 진짜 사랑이다.
이렇게 사랑은 쉽게 빠져드는 감정인 동시에 어렵게 쌓아가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 향수처럼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붉은색 스프레이를 캔버스에 뿌려본다. 아직은 희미하지만 멀리 퍼질 것이라고 믿으면서......-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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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5-28 0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 그림도 잘 그리던데 글까지 잘 쓰고. 팔방미남 인가봐요.
인용해주신 구절만 봐도 마음이 끌리는데요?

stella.K 2011-05-28 10:37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사람 연기는 잘해서 싫지는 않은데 맡는 배역이 그래서
선뜻 좋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근데 이번에 책 읽으면서 정말 느낌이 좋은 남자란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사랑에 관한 부분에 대해 쓴 거 보고,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감탄했습니다.
사실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풍의 그림은 아니지만 정말 몰입해서
열심히 그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책 거의 다 읽어가는데 아껴읽는 중입니다.
기회되시면 함 읽어 보세요. 좋은 느낌을 받을 거예요.^^
 
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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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개월이 됐나? 일본의 지진 해일에 원전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들은지도. 그런데 처음 한 달 정도는 불안하더니 그맘도  잊혀지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을 한 건지,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느낌이다. 우린 그 보다 먼저 체르노빌 원전 사태를 접한 상태라, 분명 일본도 체르노빌 사태 만큼이나 심각할 텐데도 자제를 해서 그런지 아직 이렇다할 보도가 없다.  

솔직히 체르노빌도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에만 조금 요란했지, 그 이후 어느 정도 복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나의 무지의 소치다. 이번 일본 원전 사태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곳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즉 우리나라 모 방송국 기자가 그곳을 취재한 것이 얼마전 보도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문득문득 궁금했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함과 게으름을 탓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끔찍한 재난 앞에 사람이 집단으로 죽어 나감에도 그것을 단발성으로 끝내버리고마는 보도행태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걸 보고 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막연하게 체르노빌이 복구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게 아니었다. 거긴 이미 사람이 살지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사명감은 알아줄만은 한데, 왠지 그 기자가 조마조마 하면서도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래 머물렀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짧은 순간 취재를 했는데도 방사능에 오염됐을 것만 같기도 하고, 사지로 가는 걸 막지 못한 그의 아내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먹고 산다는 게 뭐길래,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나는 역시 제 3자 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체르노빌. 지금 그곳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기 보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안위를 더 걱정하다니? 

놀라운 것은, 그렇게 방사능이 오염된 곳은 몇 십년 내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00년 이상이 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년을 걸려서라도 회복이 되긴 된다는 건가? 아니면 회복불능이라는 말인가? 또한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졸지에 피난을 갔지만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나 책에서처럼 어린 아이의 피해는 치명적이어서 기형은 물론이고, 건강이 심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일본은 쉬쉬하지만 조만간 제2의 체르노빌 사태를 보는 건 시간 문제가 되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책은  이번 일본의 원전 사태 때문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된 것으로 아는데,  역시 저자가 전문 소설가가 아니고, 르포작가여서 그럴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체르노빌이 왜 그 같은 사태를 맞이하였는지 대한 입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묘사는 거의없고, 단지 그때의 피해 상황과 이반이란 소년과 그의 여동생의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상황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맥이 좀 빠지는 느낌든다. 그럴 경우 이야기는 다소 진부해지면서 감상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서일까? 읽다보면 당시의 급박했을 체르노빌의 상황을 읽는다기 보단, 나치를 배경으로 핍박 받고, 헤어질수밖에 없는 어느 유대인의 자전적 소설을 읽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국가가 재난을 당했을 때 국민은 얼마나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전 사태가 이슈가 되고 있을 때, 나는 마침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났기에, 원전이 왜 있어야 하는 거냐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질문도 사실은 일본이 아니었으면 전혀 묻지 않았을 질문이다. 그랬을 때 한 지인이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으로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줬다. 즉 석유만으로는 에너지의 필요를 다 해결할 수 없기에 필요하다고. 그것이 확실한가에 대해선 그도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냥 그런 줄 알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 나 역시 그런 교과서적인 답을 얻자고 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 후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 일본의 원자로를 모두 없애도 전력 사정에 전혀 장애가 없다. 러시아로부터 홋카이도를 경유해 파이프라인을 설치하여 천연가스를 이용하면 된다. 석유는 유한한 에너지지만, 천연가스는 지질의 심층부에서 무한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172p)라고 말하고 있다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확실히 새겨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말하자면, 원전만이 전부는 아닐진대 너무나 위태롭게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또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이렇게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마다 원자력을 보유하려고 하는 것은 뭐 때문일까? 눈앞에 뻔히 재난을 보고도 말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체르노빌이나, 일본이나 심지어 우리나라까지도 원자력은 절대 안전하다고 말했다. 지진도 몇 도에도 끄덕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일본같은 경우 지진이 워낙 강하게도 났지만, 어쨌든 그 자랑이 무색하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어딨겠는가?  설혹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안전하다고 해도, 우리 머리 위로 언제 북한이 쏘아올린 핵의 세례를 받을런지 알 수가 없다. 그랬을 때 우린 정부를 어느 만큼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그런 국가적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얼마나 침착하게 대응했는지.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원전을 보유하고 싶은지 국가가 국민에게 물어 보기나 했나? 그것이 국익을 위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먼저 차출이 되는 것은 관련자들이요, 남자들이요, 가장들이다. 책에서처럼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가장 패해를 많이 보는 사람은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고, 노인들이며, 여자들이다. 꿈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죽어갔던 그들. 피폭에 살아 남아도 불구자로 살아갈수밖에 없는 아이들.  우린 좀 더 안전하고도, 행복한 국가를 그들에게 물려줘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내 당대에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우린 마치 시한 폭탄 지구를 떠받들고 아틀라스의 후예들 같다.   

조금 아쉬운 작품이긴 하지만, 저자는 핵발전이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을 어떤 비극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나는 이 책 말고도 체르노빌을 심층적으로 다룬 책들이 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원자력 피해를 입은 일본도 가감없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이 원자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겠는지, 세계적으로 고민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의 미래가 달린 문젠데 어떻게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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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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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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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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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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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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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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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교 - 고양이에게 배우는 마음공부
잇사이 쵸잔시 지음, 김현용 옮김, 이부현 감수 / 안티쿠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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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읽을 책이 산더미 쌓아놓고 이런 작고, 얉은 책이 눈에 들어올까? 모처에서 잘못 보낸 책이라 돌려보내던가, 받고도 시치미를 뚝 떼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또, 그 얉고도 작은 책을 읽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냥 넘어가나 싶어 결국 서평에 대한 양심적인 책무를 다하기로 했다. 

이책은 싸움에 관한 책이다. 싸움하면 얼핏 <손자병법>을 떠올리겠지만, 이런 책도 있었네! 하며 작은 탄성을 질러볼만도 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밑줄긋게 만드는 부분도 많았다.  한마디로, 작은 책의 위력을 톡톡히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대충 그런 것이다. 검술가 쇼켄의 집에 쥐를 퇴치할 고양이를 데려다 놔야겠는데, 다른 날쌔고, 카리스마 있는 고양이를 두고, 하필 살찌고, 늙은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고양이 모양은 그래도 범상치가 않다. 그 고양이는 병법을 아는 고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쇼켄은 그 고양이로부터 병법자의 마음을 전수 받게 되고 그것을 정리한 책이 바로 이책 <고양이 대학교>가 되겠다. 저자의, 늙은 고양이를 통해 병법자의 마음을 설명하게 한다는 발상이 기발하다. 그러면서, 육조단경이니, 노자니, 장자니 하는 동양철학의 온갖 진수들을 다 끌어왔다.  

내용을 보면 그런 말이 있다. 검술을 배우는 자는 먼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게 참 모순된 것 같지만 곱씹을만 하고, 제법 비장미까지 느껴진다. 왜 그럴까? 흔히 고양이와 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 늙은 고양이는 특징이 하나가 있다. 다른 여타의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해 아웅다웅 하는데, 이 늙은 고양이는 쥐가 피해 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위엔 쥐가 한 마리도 없다. 쇼켄은 바로 이것을 보고 늙은 고양이에게 한 수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고양이들은 쥐를 잡으려하나 잡지 못하면서, 왜 이 늙은 고양이는 쥐 조차 피해가는가? 그래서 그 주위는 항상 평온하다. 쥐가 고양이를 두려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쥐도 막다른 골목에서는 고양이를 문다. 결국 힘을 쓰면 상대도 같은 힘을 쓴다는 것인데, 그래가지고는 이기는 싸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지금까지 어떤 자세로 싸움에 임했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라. 내가 무슨 싸움닭도 아니고. 하지만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불가피하게 싸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렸을 땐 육두문자를 누가 더 얼마나 치열하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싸움의 우열과 성패가 좌우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철들고 나서는 그게 제일 낮은 수준에서의 싸움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상대가 어떻게 했는가를 증명하며 될수있으면 논리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구사하는 싸움의 방법이다. 뭐 그래서 대충 싸움을 잘한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여전히 싸움은 내겐 익숙하지도 않으며 썩 유쾌하지도 않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괜찮은 싸움의 기술 하나쯤 읽혀두는 것도 호신을 위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이책은 상당히 통찰적이다. 읽다보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목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결국 말하는 것은 한 가지다. 싸움의 가장 높은 경지는 무위가 되는 것이라는 것. 바람이면 바람과 하나가 되고, 물이면 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없다. 이것이 싸우는 자의 가장 높은 경지라는 것이다. 늙은 고양이는 바로 이것을 할 수 있었기에 쥐 조차도 그 주위를 피해갔던 것이다.  그럴 듯하긴 하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건 나를 피해간다.  하지만 이 무위평온한 상태는 또 얼마나 유지하기가 힘든 것인가? 어떻게 미워하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적이 나를 향해 공격해 오는데 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이걸 너무나 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를 가도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 아예 투명인간이려니 한단다. 말하자면 (개)무시한다는 말인데, 무위가 되는 것과 상대를 무시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이책 나름 좋긴한데 다 읽고나면, 그럼 뭐야, 싸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리송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도 싸움의 기술을 익히는데 처음부터 무위를 익히는 건 좀 재미없지 않을까? 다른 것을 알고 그것을 실험도 해 보고, 재미도 좀 보다가 싫증나면 그때가서 무위를 익혀도 되지 않을까? 물론 처음부터 싸우는데 힘 빼기 싫으면 바로 이 방법을 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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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조지 오웰을 읽는다는 것은 

<동물농장>이나 <1984>이 이미 명작의 반열에 오른지도 한 세대도 더 전의 일이건만, 나에게 있어 조지 오웰은 오래도록 다가가지 못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올해 이런저런 이유로 작가에 대한 나의 주저함을 깨는 개기를 맞이 하였다. 그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숨쉬러 나가다>를 읽게 된 것. 어느 책이든, 읽기 위하여 첫 장을 펼쳐 볼 때까지, 아니 첫 부분에 해당하는 10 페이지내지 20 페이지를 읽기까지, 과연 이책이 나에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 독서가 주는 특유의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에게 있어, 조지 오웰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만만치는 않다는 느낌이다.  

 솔직히,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같은 경우는 그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무엇보다 르포 문학이 주는  진실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읽으려 했던 이유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 또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읽기가 쉽지 않았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북했다. 차라리 문체가 어려운 것이라면 나았을런지도 모르겠다. 문체는 감정을 거의 배제한 채 건조했다. 물론,  읽는 중간 중간 조지 오웰 특유의 유머를 접할 수는 있지만 르포 문학의 특성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읽는 내내 거북하다. 그리고 내안을 맴돌며 물었던 것은, '내가 왜 이책을 읽고 있어야 하는 거지?', '도대체 조지 오웰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책을 썼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책을 읽고 있노라면, 언젠가 보았던 에밀 졸라의 원작 영화 <제르미날>이 생각이 난다. 그것 역시 탄광을 배경으로 했고, 탄광촌의 메마르고 퍽퍽한 삶과 갱도 안의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이 영화는 탄광촌의 억압된 분노가 결국 민중봉기로 이어졌던데 반해,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탄광촌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 것에서 끝나고 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은, 큰 물통에 물을 받아놓고 주인공의 일가족이 차례로 그 물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이다. 물을 한번도 갈지도 않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목욕을 하는 것이다. 물론 1800년대를 배경으로 했으니 그 시절에 수도시설이 뭐 그리 있었겠는가만, 그것도 하루종일 막장안에서 탄을 캐느라 새까매진 몸을 씼고 있으니, 한 사람도 다 못 씼을 물을 가족 전체가 돌아가며 썼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조지오웰도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묘사함에 있어서 한 수 위면 위였지, 결코 빠지지 않는다. 그나마 영화는 웅장한 스케일의 보는 맛이라도 있지, 책은 작가가 그야말로 한 자, 한 자 종이 위에 뿌려놓은 활자를 쫓아 가다보면 그 세밀함이 마치 일부러 끌어다 보는 것 같아 굉장히 부담스럽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느끼는 것 이상이나 또는 이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다. 자기 이상의 것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져, 정말 그럴까? 놀라고, 자기 이하의 것을 보면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그다마 이상의 것은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게 있어 다소의 평안함을 느끼지만, 이하의 것을 보는 건 괴롭고, 그나마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하는 위안 정도 삼는다고나 할까?  

나는 애초부터 부잣집에서 태어나보지 못한 관계로 있는 것을 자랑하며 살아보지 못했다. 대신 가난하지도 않아, 남의 도움을 받고 살거나 도적질은 더더욱 하며 살아보질 못했다. 그래서 극빈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책은 내가 읽기에 적지않은 부담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읽기가 편했던 것은 이책이 아니었나 싶다. 그도 읽다보면 줄거리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어, 몇번을 다시 돌아가 읽기를 반복하며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안정적이면서도, 오웰 특유의 유머가 있고, 또 어찌보면 몇 가지 사실을 제외하고 오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묘사가 섬세하고 인상적이다.  특히, 주인공이 지극히 소시민적이어서 나로선 감정이입이 훨씬 수월했다. 솔직히 주인공 조지 볼링의 삶이 우리 서민의 삶을 대변해 준다고 느끼지 않는가? 살이 쪄 놀림을 받긴 해도, 누구를 누르고 좀 더 나은 삶과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무엇엔가에 대해선 쭈볏거리며, 결혼하기 전 약간 샛길를 가긴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마땅한 처자와 결혼해, 애 낳고  밋밋한 삶을 살기는 영낙없는 우리네의 삶과 똑같은 판박이다.  

특히, 주인공은 중산층이다.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적당히 성공하고 싶고, 적당히 안주하고 싶어한다. 성공하려면 내가 부셔져야 하고, 안주하면 나른하고, 지루하다.  

이책에서 내가 끊임없이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의 뚱뚱한 몸과 전후의 사람들의 삶과 인식에 관한 문제였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만족스러울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 아내는 아름다웠지만, 결혼하고나서는 180도 달라져, 늘 가스비와 교육비 등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전전긍긍하는 여느 여염집 아낙으로 변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주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주인공 조지 볼링은 고향에로의 여행을 감행한다. 그것의 명목은, 잠시 숨쉬러 가는 거였지만, 그것도 엄밀한 의미에선 일탈의 또 다른 방편이다.                         

나는 결코 그곳에 다시 가지 못하리... 

주인공에 감정이입도 이입이지만, 그의 일탈이 주는 행위도 적잖이 나의 관심을 글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작 주인공의 일탈이란 게 고향을 여행하는 거라니? 너무 건전해 귀엽기까지 하다. 적어도 그렇게 갑갑한 일상을 벗어난다면 근사한 곳으로의 여행이나, 모르는 사람과의 하룻밤 정사. 뭐 그런 것을 상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주인공은 기껏 기대감에 부풀어 고향을 갔지만, 그곳은 어렸을 적  자신이 뛰어놀던 곳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름 좋아했던 곳에 정신병원이 들어서지 않나? 옛 애인을 보는 것도 괴롭다.   

그것은, 이책의 말미, 즉 4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 부분을 읽고 있자니 나도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 생각이 났다. 특히 나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던 그곳이. 집 앞에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길 안 막히면 3,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그것을, 나는 한번도 작정하고 나서보지 못햇다. 물론, 그동안은 어딘가를 경유해서 가느라 그 언저리를 거쳐간 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그동네 골목 골목을 누벼볼 생각을 못하는 것은, 게을러서만도 아니고, 그것은 왠지 다시 돌아보지 못할 나의 용기의 부족같다. 그곳에 가면 왠지 어린 시절이 생각날 것 같아 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고, 너무 많이 변해버린 것에 가슴이 콱 막힐 것도 같아 갈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은 이 소설의 주인공을 닮아있고, 반은 주인공을 전혀 닮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어느 땐가는 나의 기억이 다 지워져버리기 전에, 내가 살아 온 곳에 대한 기억을 낫낫이 살려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자본주의의 변화속에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하고 있어, 나의 옛 기억조차 빼앗어 가버릴까 봐서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태어나고, 살던 곳의 풍경을 잊을까? 자서전을 쓸 마음이 있다면, 자기가 살던 곳에 대한 생생한 기억의 묘사도 빠트리지 말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살던 곳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내가 강남에서 산다고 하면 무조건 굉장히 잘 사는 줄 안다. 하지만 공히 말하건데, 이 세상 어디든, 가난한 동네에 부자가 살 수 있듯이, 부자 동네에 부자만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두고 싶다.  

또한, 내가 살았던 **동에서 무엇을 보든지 간에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동네는 70년대 중반만 하더라고 아스팔트도 깔려있지 않아, 비가 오거나, 눈이 녹는 봄이면 땅이 질척거려 도무지 한발을 내딛기가 힘들었고, 바람이 불면 황토 먼지가 말도 못했다. 실개천이 있어, 학교를 가려면 크게 깡총 걸음을 내딛어야 했고, 달구지를 맨 소가 똥을 싸며 지나갔던 곳이며, 가을이면 코스모스와 갈대가 흔들거리는 곳이었다. 또 집 뒤쪽엔 조그만 야산이 있었다는 것과, 밤이면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부엉이 같은 새가 울었다는 것도 말해두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당이 있고, 1 가구 1 주택이 기본이었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위로, 더 위로 

그런것이, 회색빛 아스팔트가 길을 메우고, 산도 깎였으며, 더 이상 소나 부엉이는 울어대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엔 할 수만 있으면 집들은 위로 또 위로 올라가기만 했고, 마당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그야말로 왜 있어야 하는지 그 존재 가치가 무색하게 조그맣게 있을 뿐이었다. 새로 지은 집에 그 많은 방들은 뜨내기들이나, 소위 '나가요' 언니, 오빠들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동네는 술집과 그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어버렸고. 물론 한 동네가 꼭 그것만을 위해 존재했던 건 아니겠지만,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강남 불패'란 말은. 자본주의가 위로, 더 위로 욕망을 키워나갈 때, 자본주의의 찌꺼기들도 더불어 그 욕망에 편입하지 못해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옛날을 그리워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70년 대, 새마을 운동으로 시작해서 80년 대 경제 중흥기를 맞이했지만, 그게 과연 좋은 것이기만 했을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때 우리는 확실히 잘 살게 된 것을 실감할 수는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삶의 질도 좋아졌는가엔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본주의 그 중심해 서지 못해 안달하는 것인가? 

조지 오웰은 평생을 파시즘과 싸워 온 작가다. 만일 그가 21세기를 다시 산다면, 그의 적은 자본주의와 인권이 되야하지 않을까? 나는 처음에 그가 왜 평생토록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글을 끊임없이 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비교적 부유한 환경속에서 자랐던 그는 어느 날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동경하던 버마에 가게됐다. 거기서 그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봤다. 그것은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로 각이 되었고, 가난한 자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그들을 대변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만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위건부두로 가는 길' 49P)  인간이 욕망을 갖고 있는 한 아래로 향해있는 쉽지 않다. 과부가 과부의 사정을 알듯,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이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지 오웰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 그들은 누구일까? 어떤 의미일까?  난 저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래로, 더 아래로 

일본이 얼마 전 그렇게 천재지변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얼핏, 일본의 부자들에 대해 기사를 본적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유목민적 기질을 발휘해, 해외 어딘가에 집을 사 놓고 그런 천재지변이 나면 그곳으로 피난을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년의 반은 해외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국내에 거주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에 큰 일이 나면 피해를 보는 쪽은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나 피해를 보는 것이지 그들은 안전하다.  더불어, 전쟁이 나도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건 그들이지,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과연 남의 나라 일만하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나라는 워낙에 전체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나라기 때문에, 나 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게, 우리나라 보단 훨씬 앞선다.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 난리통에도 질서 의식이 상당한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 나라에서 이런 말은 솔직히 일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우리나라나 어울리지.  

그렇게 나라의 궂은 일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엔 있는 집 자식들이 빛을 보거나, 덕을 본다면 억울해서 살맛이 나겠는가?  지금 이명박 정부가 비난을 받는 것은, 그의 정책이 없는 사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새삼 자본주의만이 살 길인가에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자본주의란 말 자체도 있는 사람의 사전에나 있는 말이다.  또한, 현빈이 모 드라마에서 뇌까려서 유명한 대사가 되어버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라는 말도 알고보면 자본주의에서 나온 말이고. 자본주의가 아닌 나라에선(그것이 비록 오지더라도) 이 말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따라 올 수 밖에 없었던 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제는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왜 자본가들은 없는 사람까지 같은 대열에 따라오게 만들고, 그들은 돌보지 않는가? 자본가와 없는 사람이 나눠져서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힘을 키우는 방법을 가르쳐서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본가들은 역시 이익집단들이다.  그들이 이익만을 앞세우지 않도록 견제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일 것임에도 오히려 뒷배를 봐주는 일을 자처하고 있으니 비난을 받는 수 밖에.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뛰는 기름값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물가를 생각하면 우리가 이런 세상을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쯤되면,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지금의 자본주의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까? 늘 생각하고, 늘 의심해 본다.  

그래도 조지 오웰은, 결코 21세기를 다시 살지 않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책을 읽었을 때나, 안 읽었을 때나, 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디스토피아. 암울한 세상에 대한 반추를 많이했던 작가여서일까? 그의 인생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고, 일찍 단명했다. 그가 오래 살았더라도, 그는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한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21세기를 다시 살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물론 다시 살 수도 없지만, 다시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해도 살지 않을 것이다. 그건 20세기에 파시즘이란 괴물과 평생을 씨름했는데, 자본주의와 또 싸우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설 <1984>의 빅 브라더만큼이나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영웅이라고까지 부를 것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웅은 혁명가의 것이지 작가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가이면서 작가일 수 없듯이, 작가이면서 혁명가일 수는 없다. 작가는 그저 작가일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전설로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지상에 조지 오웰이란 사람이 살다가 갔다. 비록 다른 시대에 살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그를 충분히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고,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읽기 전엔 그토록이나 쉽지 않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니 그에 대한 존경과 함께 묘한 연민이 느껴진다.  내친김에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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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5-1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년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랑 <1984> 그리고 에세이집을 읽어봤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조지 오웰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의 소설과 에세이들이 주로
사회비판적 성향이 많은데도 저 같은 경우에는 쉬우면서도 동시에 인상 깊게 읽었거든요.
조지 오웰을 좋아한다면 <위건 부두>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 같은 르포도
읽어줘야하는데 저도 간만에 오웰의 글을 읽어봐야겠습니다.

stella.K 2011-05-15 15:2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만일 조지 오웰이 21세기를 산다면
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았겠느냐구요.
하지만, 그는 파시즘과 평생을 싸웠다잖아요.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시대는 2차 세계대전의 시대
였고, 파시즘의 시대였지요.
그의 책이 근래 많이 나오는 건 뭐 때문일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그를 주제로한 에세이를 재대로 써야할 것
같아요. 이글은 어설픈 게 많죠?
그래도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요. 시루스님.ㅋㅋ

은비뫼 2011-05-15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이던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었었어요. 별재미는 없지만 조지 오웰의 힘이 있어서인지 자꾸 읽게 됩니다. 셰익스피어 인 컴퍼니에서 하고 많은 책 중 파리와 런던의~ 이 책을 잡은 적이 있어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

stella.K 2011-05-15 15:2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은비뫼님. 조지 오웰의 책을 읽는다는 건
어렵지는 않는데 다소 지루하고, 그런데 덥고나면 자꾸 생각이나요.
중독성이라고나 할까? 암튼 매력있어요.
<나는 왜 쓰는가>를 사 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cyrus 2011-05-2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만 그런게 아니었군요, 저는 <동물농장>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1984년>과 <버마 시절>은 약간 지루한게 있더라구요,
이제 <숨 쉬러 나가다>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 ^^

stella.K 2011-05-20 22:56   좋아요 0 | URL
에이, 댓글을 또 달고 있어요.ㅎㅎ
일단 작가 자체가 그리 유쾌한 작가는 못되죠.
저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 처음 읽은 건데 지루한 것도 지루한 거지만,
너무 처참한 지경이어서 읽기가 괴롭더라구요.
그래도 <숨쉬러 가다>는 위건 보다는 편하게 읽혀요.
이런 작가를 쉽게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작품의 재미의 유무를 떠나 조지 오웰이 위대한 건 그의 작가정신인 것 같아요.
많은 글을 썼지만, 주제 의식이 분명하잖아요. 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
무엇보다 치열하게 썼고.
행복한 작가는 못 됐지만, 자기사명은 충분히 완수한 훌륭한 작가란 생각이
이제야 들더라구요.^^
 
[101명의 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끔, 책의 내용에 평하기 보단 책 자체를 평가하고 싶은 책들이 있다.  

솔직히, 우리가 뭐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봉은 더 더욱 아닐진데, 왜 만날 책을 읽었단 이유만으로 서평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건데? 책이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 좋은 건 아니지 않는가? 읽는 독자도 책에 대해 할 말은 많다. 책을 안 읽는 사람 보다 읽는 사람이 몇배 더 멋있지만, 그 고상함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말만 해대는 사람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시나리오를 공부했을 때, 수강생들의 워크샵 작품을 읽고 평가를 해야하는 숙제가 사명처럼 주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때 유독히 좋은 말만 하는 수강생이 있었다. 내가 볼 땐 그게 그 사람의 성향이고, 성격이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좋은 가정 분위기에서 반듯하게 자라, 천성적으로 싫은 말 못하는 사람이다. 뭐 나름 젠틀해서 난 그런 사람 좋은데, 공부할 때 그런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된다.  어떻게 이 덜 떨어진 작품에 좋은 말만 해 댈 수 있느냐? 비록, 들을 땐 아파도 좋은 말 보다, 필요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영화판에서 진정한 전우다. 이것은, 그 시절 나의 사부님이 누누히 강조했던 말이다.  

내가 어쩌다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그 시절 수강생들의 한참 덜 떨어진 작품에 비견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확실히 아쉽고, 안타깝고, 쫌만 더 잘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말을 속시원히 까발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책은 그 이름도 자랑스런, '알라딘 평가단'에서 받은 책이 아니던가? 서평은 서평이고, 평가는 평가다. 폐일언하고, 나는 이 책에 대해 평가만 하련다.   

사람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을 때, 어떤 말을 먼저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까? 나쁜 말 먼저 듣고, 좋은 말 듣는 게 그래도 좀 낫지 않나?   

그래서 말인데, 솔직히 난, 이 책 받아 들었을 때 짜증부터 확 밀려왔다. 만화면 다 용서된다는 건가? 나도 지금 보다 10년, 아니 5년만 더 젊었어도 찌증 같은 건 내색도 않고 열심히 읽고,  어떻게든 느낀점을 말해야지(이게 우리식의 서평 아닌가?), 했을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예전 같으면 만화가 하급 문화 행위쯤으로 비하됐지만, 지금은 제9의 예술이라 하여, 누가 만화 본다고 해서 결코 비난하면 안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볼 때 솔직히 자위하는 소리 같다. 만화의 길은 아직도 멀고도 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짜증이 밀려왔다는 건 공교롭게도, 글씨가 너무 작고, 촘촘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내가 초두에 말하지 않았던가? 난 용가리 통뼈가 아니라고.  아직 안경은 안 썼다지만, 나도 적지 않은 나이이고 보면, 이런 책은 읽기가 참 난감하다. 만화면 다 용서되냐고 좀 전에 물었는데, 사실 용서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 만화는 아이들이나, 청소년, 젊은이들만 읽어야 하는데? 그 보다 더 나이든 세대. 할머니, 할아버지도 읽으면 안 되는 건가? 가끔, 만화 생산자들, 만화는 매니아들을 위한 것이라는 구태 의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만화가의 길은 외롭고, 고독하다고 온갖 똥폼은 다 잡는다. 자기네들 바운더리를 스스로 정해놓고, 누구한테 덤태기를 씌우려 하는 건가?  

이현세 만화를 보고 자랐던 세대가 이제 50을 바라보고, 60이 머지 않았다. 그들 중엔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하여 이미 오래 전에 만화 졸업한 사람이 부지기수겠지만, 왜 만화가 젊을 때 한때의 향수로 취급 받아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누가 봐도 판형의 면에서, 나이많은 사람에겐 그다지 어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개된 화가의 그림을 실사로 집어넣는데, 그게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엄지 손톱만 하거나, 그 보다 좀 크거나 했다. 뭐 안 보는 것 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그  보단 그렇게 작은 사이즈 인쇄가 가능하다는 게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그림은 모름지기 문화재급으로 보는 것이 제일 좋다.  예를들어, 루브루 박물관전을 우리나라에서 했다 하면,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어도 솔깃하다. 왜 그런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될 수 있으면 큰 화면에서 또렷히 보는 것이 좋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보는 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모독하는 것인줄도 모른다. 다행히 책에 실렸던 화가들이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망정이지, 알았더라면, "당신 내 그림 가지고 뭐하는 거야?"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2page를 더 추가해 그 화가의 주요작품을 좀 크게 볼 수만 있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부제가, '2page로 보는 화가 이야기'라고 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화가에 관한 책은 이 책 말고도 많이 나온 줄 알고 있다. 과연 이 책이 경쟁력 있게 만들었다고 자부하는지 묻고 싶다.  

그래도 이 책, 나름 특이할만한 것은 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화가가 101명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모르는 화가가 이렇게 많았나? 우리가 아는 화가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만든다. 마치 이 책을 보고나면, 미술계도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는 건가?(없으라는 법 없겠지만) 몇 명 밖에 알지 못했다는 것에서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이렇게 많은 화가를 알필요가 있을까? 양극단을 오가게 만든다. 또한 이책의 장점이라면, 한 화가에 대해서 그 인생의 시작과 함께 20대, 30대, 4,50대 뭘 했는지를 만화적 상상력과 함께 간략하게 알아 볼 수 있게 해놨다는 점, 그리고 화가 연표와, 그 화가가 지향했던 작품 경향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 볼 수 있게 했다 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떤 설명이나, 해석 같은 것은 기대하면 안 된다.  그냥 백과사전 식이다. 일부러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 같이 미술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책 같다(물론 내용면이 그렇다는 것. 도판이나 판형을 생각하면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순전히 서양화가를 중심으로 다뤘다는 것이다.   

책의 도판이나 판형을 생각하면 나로선 그리 높은 평점은 줄 수가 없지만, 왠지 저자의 공력은 좀 높이 사 주고 싶긴 하다. 별점을 준다면, 3개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도 꿀꿀한데 미술관이나 나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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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05-1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랑 ,가요.
 
 그림이라는 거, 볼 줄도 모르고 아는 것도 없지만
 손 잡고 옆에 함께 서 있어 줄 수는 있어요.
 가방도 들어 줄 수 있구요. 나 힘 쎄요.
 

stella.K 2011-05-12 18:2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래요. 나중에 가게되면
연락 드릴게요.
저 가방 들어주는 사람 무지 좋아해요.ㅋㅋ

은비뫼 2011-05-12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도 그림도 정말 이렇게 작은 책 보기 힘들듯.. 그렇죠? ^^
책 읽으며 미술관가서 정말 큰크기로 그림을 시원하게 보고 싶어지더랬습니다.
눈 좀 쉬게요. 하핫.

무스탕 2011-05-1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보다 스텔라님 평가가 더 빛나는 책이네요. ㅋㅋㅋ

stella.K 2011-05-13 10:58   좋아요 0 | URL
ㅎㅎ 이게 웬 일이랍니까? 어쨌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