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쓴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를 읽고 화가나 던져버렸던 적이 있다. 읽은 지가 좀 돼서 정확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날 여주인공의 이메일에 잘못 들어 온 어느 낯선 남자와 이메일 교환을 통해 사랑을 키운다는 일종의 연애 소설로 기억한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면서 이메일 교환을 통해 사랑을 키운다는 게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게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사랑에 대한 상상을 증폭시키다 영화 <파리대왕>의 마지막 장면처럼 여자 주인공의 남편이 끼어들어, 당신 여기서 뭐하냐며 여자의 의식을 깨우는 것에서 끝이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아닌가?). 그래서도 더더욱 그 둘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게다가 불륜이기도 하지 않는가). 모름지기 상대의 눈을 보고, 숨소리 하나도 느끼며, 서로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사랑이지 이메일을 사이에 두고 이게 뭐하는 건가, 디지털 시대엔 이런 식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봐줘야 하나 뭔가의 의문이 들었다.

 

 예전 아날로그 시대엔 펜팔이라는 것이 있어 서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도 편지 교환을 하고 사랑을 키우는 커플도 있다고 들었다. 솔직히 난 그때도 그런 사랑을 믿지 않아 펜팔이란 이름은 들었어도 어떻게 하는 건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도 그 비슷한 경험을 할 뻔 한 적이 있었다. 

 

사춘기 시절 책에 관심이 많아 모 출판사에서 독서회원을 모집한다는 조그만 문구 하나를 발견하고 거기에 간지로 끼워있는 엽서를 이용해 우리 집 주소와 내 이름을 적어 보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웬 모르는 남자들로부터 무더기로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내 이름과 주소가 그 출판사에서 회원을 상대로 정기 간행물을 속에 새로운 회원들의 신상정보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걸 보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준 것이다. 난  그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사람의 성격이 천차만별이라고, 편지도 제 각각이긴 하지만 하나 같이 자신을 어필하려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 도 했다. 내 이름 석 자만으로도 어떻게 그렇게 상상력을 발휘하는지 인간의 두뇌가 새삼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난 갑자기 받은 편지가 당황스러워 집에 놀러온 두 명의 친구에게 자랑 반, 고민 반으로 그 편지를 보여 주었다. 그 속엔  먼 제주도에서 까지 보내 준 편지도 있었는데, 친구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 편지들을 다 읽더니 개중 제주도 청년의 편지가 가장 순수하고 좋아 보인다며 이 사람한테 만이라도 답장을 써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 끝내 아무에게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답장을 한다는 게 어색했고, 왠지 그 사람들을 훗날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나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중 앞서 말한 제주도 청년은 정말로 미안했는데 그 후에도 서너 번 더 나에게 편지를 보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은 답장을 보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날은 어떠한 시댄가? 오늘도 인터넷 블로그에만 들어가도 몇 년째 얼굴 한 번 보지 않고도 댓글과 선물까지 주고받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시대가 올 줄 알았더라면 그때 그들에게 성실히 답장 보낼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그 시대 나의 로망이 애인과 편지를 주고받는 거였는데, 그것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도 어느 명사들이 자신의 배우자와 연애기간 동안 몇 백 또는 몇 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그것이 알고 보면 기록으로 다 남을 것들이 아닌가.        

 

 

언젠가 영화 <그녀 her>(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 테오도르가 너무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다가 우연히 인공 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영화)를 보면서, 그때 그 책을 읽다 던져버린 걸 잠시 후회한 적이 있다. 이건 뭐 한 술 더 뜨는 얘기 아닌가? 그래도 책은 온라인이란 기계 너머에 있는 사람과의 소통을 얘기하고나 있지. 이건 인간이 기계를 사랑한다는 얘기지 않는가? 그제야  새삼 내가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감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으니 나의 머릿속 운영체계야 말로 아직까지 디지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영화의 상상력만도 아니다. 홀로 외로운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는 대화  어플이 있다는 걸 얼마 전 한 예능 프로를 보고 알았다. 그런데 이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은 40이 넘어도 이성교제를 한 번도 못해 본 사람이 적지 않으며 그들을 위한 학원이 등장했다고 한다(이 보도는 10년 전에도 했던 것 같다). 인간소외가 극에 달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전에 인연은 한 번의 눈빛, 한 번의 옷깃의 스침만으로도 있을 수 있다고 배웠는데, 그건 옛날 순수문학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였나 보다. 

 

그 옛날 아직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 교회 주일학교 교사 시절 아이들 사이에서 다마고치가 유행했을 때 벌써 직감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때 나는 그게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장난감 같은 건줄 알았지 인간의 감정을 대체할 수 있는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그것의 위력을 알았더라면 훗날 책을 던져버린다던가, 영화를 보고 새삼 놀라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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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9-23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 허 > 재미있게 본 사람입니다. 전 영화 속 주인공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저 옛날에 늦가을에 파리 한 마리가 방안에 들어와서 열흘 넘게 있었던 적 있는데 나중에 친구 먹엇습ㄴ다. 제가 이름도 지어줬죠. 크로낸버그`라고.... 파리 이름을 크로낸버그라고 짓고 부르니 아.. 짠 하더라고요..ㅎㅎ

stella.K 2016-09-23 12:01   좋아요 0 | URL
ㅎㅎ 크로낸버그! 이름 좋네요.
하여간, 곰발님의 독특함은 알아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그런데 파리는 보통 며칠을 살까요? 정말 열흘쯤 살려나요?

사진 또 바꾸셨습니다.ㅎ

2016-09-26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9-27 19:3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2016-09-27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스트 Axt 2016.9.10 - no.008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뭔가의 개선이 있기 전엔 난 앞으로 이 잡지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김연수 작가 특집이라 어떻게든 보려고 했는데, 글씨가 작고 눈이 쉬 피로해 볼 수가 없다. 눈 나쁜 사람은 잡지도 맘대로 볼 수 없는 건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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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9-2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북으로 구입했슴다~ 이북은 미치도록 글씨가 작아요^^

stella.K 2016-09-23 11:33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왜 이리 작냐고요.
미칠 것 같습니다.ㅠ
대신 민음사에서 나오는 릿터를 이제야 보기 시작했는데
나름 괜찮은 것 같더라구요. 글씨도 적당하고.^^



붉은돼지 2016-09-22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DEN 이라는 잡지를 추천하옵니다.
4050을 위하여 글자크기 12포인트를 고집한다고 하옵는데, 이른바 젠틀맨 매거진이라고도 하더이다만은 레이디께서 보신다고 뭐 고발하고 그러지는 않을듯 합니다요. 중년남성지라고 맥심류는 아닌듯하고요 제가 맥심을 보지는 못했지만서두요....

stella.K 2016-09-23 11:36   좋아요 0 | URL
오, 바람직한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악스트 문학잡지라 보려고 하는 건데
제가 잡지는 잘 안 보는데 본다면 문학이나 보거든요.
젠틀맨 매거진이라니 나중에 함 봐야겠슴다.^^
 

 

얼마 전, 영화의 고전이라던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보았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별로 좋지 않아 프랑스 영화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선택이 꺼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도 보니 나쁘지 않다.

언젠가 <줄 앤 짐>도 봐줬으면서 왜 이 영화를 봐 줄 생각을 못했던 걸까.

 

누벨바그의 시조니 어쩌니 떠들어 대는 건 영화 평론가들의 몫이고, 관객들이야 결국 영화가 감동적이이냐, 아니냐로 만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 감동은 고사하고, 영화가 보게 만드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단 함격점이다.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왜 400번의 구타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년에게 행해지는 어른의 폭력을 그렇게 은유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웬지 감독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트뤼포 감독은 어린 시절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는 대체로 어린 아이의 악동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린 아이의 사악함을 밝히는 <파리대왕>이나 <케빈에 대하여> 같은 영화 보단 이런 영화가 훨씬 자연스럽고 좋다.

그맘 때 해 볼 수 있는 아이의 온갖 악행을 잘 다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른이 아이를 다루는 건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편견으로 대하고, 특히 무조건 왼손, 오른손 선택하게 한 후, 영문도 모르고 무조건 왼손을 선택하자 손목시계를 끄르고 왼손으로 주인공의 얼굴을 가격하는 감화원 교사와 그 가격을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 소년의 이미지는 우리가 어렸을 때 익히 보아온 광경이다.

 

나도 초등학교를 갓 들어가서 교실에서 신는 덧신을 운동화로 제때 갈아신지 못해 체육시간 내내 오도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서 있어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덕분에 체육시간이 끝나고 어머니 같은 담임 선생님한테 얼굴을 가격당한 일이 오버랩 됐다. 그때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고. 표정 관리 하느라 애를 먹었던 아픈 추억이.

 

그렇게 된 건 나를 너무 깔끔하게 키운 엄마 탓도 있고, 물건을 잃어버리면 엄마한테 혼날 거라는 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해 내야했던 시간이었다. 

 

솔직히 이 세상은 나 밖에 모르는 세상으로 채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세심하게 이해 받고 배려 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나를 누가 배려하고 이해해 준단 말인가. 그래서 무조건 어른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본보기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매를 맞아야 한다.

이 현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깨닫기 최적화된 곳이 학교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개인의 이해가 불허된 곳이다.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취급 받아야 하는 곳이 학교다. 그래서 난 학교를 좋아해 본적이 없다. 

 

그 학교의 시스템을 날카롭게 포착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공감이 가게는 보여주기도 한다. 어쨌든 영화는 잘 만들었다. 주인공의 그 나잇대 부려 볼 수 있는 객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자크를 좋아했던 묘한 대비가 잘 버무려졌다고 생각한다.  

최소 별 세 개 반은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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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9-19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0번의 구타가 아마 프랑스 속담에 나오는 이야기일 겁니다..
아이는 400번 맞아서 비로소 성장한다.. 뭐, 그런 말들.

stella.K 2016-09-19 16:01   좋아요 0 | URL
헉, 그런 뜻이었군요.
살벌합니다.
저도 400대쯤 맞고 어른이 되었을까요?
뭐 저는 여자애니까 한 200번쯤 맞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ㅋ

곰발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9 16:05   좋아요 0 | URL
전 틔뤼포 싫어하는 감독이라서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봤습니다..
저와 트뢰포는 궁합이 안 맞습니다.
특히 장 피에르 레오 같은 배우 질색임...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말이죠..

stella.K 2016-09-19 16:10   좋아요 0 | URL
헉, 그렇군요. 괜히 물어 보았나 봅니다.ㅠ

2016-09-1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9-19 16:15   좋아요 2 | URL
그래도 요즘 그런 게 보도가 되는 건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정말 우리 자랄 땐 그게 폭력인지도 모르고 지내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이는 때로 엄하게 가르칠 때도 있어야 하는데
이 엄하다는 것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 학교가 엄연히 돈 내고 다니는덴데 그런 폭력도 쓴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누가 폭력을 돈 내고 배웁니까?ㅉ

cyrus 2016-09-19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군요. 프랑스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소위 ‘맞으면서 커야 한다’ 식의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stella.K 2016-09-19 19:05   좋아요 0 | URL
옛날 영화라... 지금은 안 그러겠지?

근데 새벽에 오디오 파일을 들었니?
내렸다. 이제 그런 거 없다.ㅋ

기억의집 2016-09-1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국민학교때 선생님한테 애들 앞에서 따귀 맞은 수치스러운 기억이 있어요. 이 수치심이 수 십년을 괴롭히더라구요... 하핫.

이 영화 보고 제가 프랑스 정말 안 좋아하게 된 케이스. 저는 튀르포 자서전도 읽었는데, 트뤼포가 우리 나라 나이로 15살인가(자서전에는 14살이라 적혀있어요. 이 거 읽고 팔아서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중학생 나이입니다) 첫 경험을 합니다. 완전 충격이죠. 그 후 이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나오는 여자하고 관곌 다 맺더라구요. 솔직히 지저분하긴 했어요. 이 영화 시디 있는데 지금은 시디장치가 없어 더 이상 못 보지만 튀르포 영화 이거 말고 몇개 수집했어요. 전 프랑스 영화가 안 맞지 싶어요. 고다르는 졸립고, 프랑스적 감성이 전 딱히 별로더라구요. 지금까지 프랑스 영화 좋은 게 없었다는.

stella.K 2016-09-20 12:45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는 그 일 말고도 중학교 때
선생님 교사 수첩인가, 출석부로 맞은 적도 있는데
선생님 화난 건 그런다고쳐도 그게 그걸로 때릴만큼
중대사안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선생님이
나름 상냥한 분이셨거든요.

트뤼포의 그 일화는 좀 유명하죠.
그 얘기 들었을 때 분명 어린 시절과 뭔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해요.
저는 또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영화가 좋더라구요.^^

기억의집 2016-09-2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교때 칠판에 문제 낸 수학 문제 못 풀었다고 세게 등짝도 맞았어요. ㅠㅠ 그게 한이 되서 울 애둘한테는 수학 과외 엄청 밀어줬다는......

stella.K 2016-09-21 13:23   좋아요 0 | URL
헉, 저런... 역시 학교 트라우마는 제법 오래가나 봅니다.
그런데 이걸 아는 선생님이 몇이나 될까요?
그냥 늘상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겠죠.
지금은 그런 선생님 없겠죠?
체벌하면 문제 생기잖아요.

2016-09-21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1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한 것을 이 영화에서 맞닥뜨려지는 기분이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랑을 할까, 왜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잘 생기거나 예뻐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라면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상대의 뭔가의 특징과 기능이 자신과 연관성이 있을 때 사랑은 증폭되지 않을까? 그런데 또 드는 생각은 그런 이유 때문에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온당한 것일까? 다시 말하면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온해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에게서 그것이 없다면 사랑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영혼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우긴다면, 그건 한창 달아오른 불같은 열정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확실히 불온한 존재다. 가끔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니까. 가장 흔한 예는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구한말 우리나라 가요사와 결합하여 나름 장대한 서사시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특별히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서 잊힌 창법 정가를 복원했다. 아마도 이 정가는 이 영화에서 처음 접해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 기교가 얼핏 중국의 경극에 나오는 창법을 연상시킨다. 아니면 일본의 게이샤들이 불렀을 법한 창법이 혼합됐으려나? 아무튼 거기서 발전해 트로트가 탄생되기도 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배경은 가수 이난영이 한껏 자신의 존재를 드높이고 있을 때다. 그녀를 좋아해 따라하려는 당시의 가수지망생들과 조선 권번 출신 기생들도 많았을 것이다. 사랑도 시대를 잘 타고 나야하는 것일까? 점점 시들어져 가는 정가를 완벽히 구사하는 소율(한효주 분)과 당시 새로운 창법에 희망이 되는 연희(천우희 분)는 잘 나가는 권번의 둘도 없는 동무다. 이난영의 작곡자로 유명한 김윤우는 원래 소율을 사랑했다. 기교로 보나 기량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정가는 지는 창법이고, 연희는 정가를 버리고 새로운 창법에 탁월한 기량을 뽐내며 그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다고 윤우는 연희의 노래에 매혹돼 결국 소율을 배신하고 만다.

 

윤우에게 배신당한 소율이 당시 일본 경무국장의 애첩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윤우와 연희에게 휘두르는데, 한을 품은 여인의 서릿발이 제법 영화의 몰입도를 끌어 올린다. 이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연희는 소율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진 윤우를 찾으러 다친 몸으로 비오는 밤 소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선다. 그때 소율이 빗속에서 외친다. 나에겐 아무도 없다고. 우정도 사랑도 다 네가 가져갔다고. 그러자 연희는 반박한다.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너 자신이라고.

 

보는 나는 그 지점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너를 그렇게 만든 건 너라닛!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친구의 애인을 뺏어 놓고. 물론 그건 온전히 연희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죽일 놈은 윤우인지도 모른다. 사랑할 땐 언제고 뭐 사랑할 사람이 없어 내 친구를 사랑하냐고,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하니까 재밌냐고, 내가 소율이라면 따져 묻고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윤우와 연희가 조선을 떠나 이태리로 떠나려고 한 것을 알고, 그나마 일말의 동정심을 베풀려고 했으나 그 마음을 접은 채 연희를 더 어려운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그 비 오는 밤 일본 헌병의 총탄 세례를 받게 한다. 나중에 윤우 역시 석방되지만 연희의 뒤를 따른다.

 

이 영화는 굉장한 비극적 서사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남자의 사랑의 배신이 한 여인을 얼마만한 불행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예의 없이 한 여인의 마음에 불쑥 들어와 놓고, 떠날 때 역시 예의 없이 떠났다. 소율이 원래 그렇게 냉혹한 여인이 아니었다. 떠날 때 미안하다. 그동안 행복했노라고 진심어린 말 한마디 했더라도 그렇게까지 불행을 자초했을까? 그게 나 아닌 내 친구였더라도 말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그러나 사랑은 확실히 마법 같은 거다. 특히 소율과 윤우가 한창 좋았을 사랑은. 마법의 시간은 언젠가 반드시 깨게 되어있다.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이란 큰 과정 속에 사랑과 이별도 거쳐야만 할 과정은 아닌지? 우리 인간은 원래 사랑도 서툴지만 이별은 더 서툴다. 그래서 이별을 해 놓고 다시 사랑은 못할 것이라고 엄살을 떨기도 한다. 내가 어떤 식으로 사랑을 했는지를 알면, 어떤 식으로 이별을 하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윤우의 사랑은 그렇게 차원이 높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소율도 연희도 누구하나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다. 사랑한 것이라면 그 두 여인의 재주를 사랑했을 뿐이다. 거기에 조선의 마음어쩌고 뇌까리는 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 종반에 소율이 반쯤 미쳐서 윤우가 작곡한, 사랑, 거짓말이란 노래를 읊조리는 것은 진실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덕목을 많이 갖춘 영화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우리나라의 잊힌 창법 정가를 복원했고, 당대의 음반계를 엿볼 수가 있으며, 무엇보다 여인의 심리를 충실하게 표현했다. 그것은 오늘 날 이기적이고 시크 함으로 무장한 도회적 여성상과는 대조적으로, 소박하고 부끄러움으로 애인에게 어필하고자 했던 여인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정말 20세기 초반의 모던한 여성들은 그랬을 것만 같다. 무엇보다 사랑과 우정 그로인한 냉혹과 배신 소율 역을 맡은 한효주는 별 무리 없이 잘 소화해 냈다. 하루아침에 친구와 애인을 읽고 쓸쓸히 나이 들어간 소율의 캐릭터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노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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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된 영화를 보게되는 경우는 드물다.

벌써 영화의 방식이나 정서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보기가 버거운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년도는 1955년. 그나마 개봉년도는 2010년이다. 

왜 이런 영화가 60년도 더 돼서 보게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솔직히 이 영화도 제목이 특이해 선택되긴 했지만 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안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봤다. 그것은 영화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독교 신앙을 전면에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영화에서 신앙의 부분을 다룬다는 건 아주 오래 전에 잊혀진 방식임에 틀림없다. 혹 다룬다고 해도 풍자나 희화된 것으로나 다룰뿐이다. 또 다룬다면 너무 선교 마인드로만 다룰려고 하기 때문에 관객들로부터 외면 받기 쉽다. 

 

그런데 영화는 시종 순수하면서도 진지하다. 이게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되게 지루하고 진부할 수도 있는데, 신앙인들에겐 오래도록 잊혀진 신앙에 대한 감수성과 진지함을 건드려줘서 과연 오늘 날에도 이런 방식의 영화가 먹힐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마져 보게 만들었다. 영화 진행 방식은 좀 지루하다. 그냥 작가주의 영화 계열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분노의 날>은 17세기 마녀사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글쎄.. 영화의 구성상 전반부는 마녀사냥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하나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 같다.

 

노르웨이 한 마을에서 벌어진 한 초로의 여인을 마녀사냥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재판에 가담한 엄격한 목사 압살론. 그에겐 젊은 후처 안느가 있다. 이들 부부는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학교를 다니는 아들 마틴이 잠시 집을 다니러 와서는 안느와 사랑에 빠진다. 안느는 마틴을 사랑하면 할수록 남편 압살론이 죽기를 바란다.

 

그런데 앞서 마녀 재판에서 그렇게도 살기를 바랐던 초로의 여인이 죽으면서 그에 대해 저주를 쏟아 부어서일까? 또는 애정 없는 아내의 독한 말 때문일까 압살론은 아는 사람의 임종 예배를 다녀 온 후 심장마비를 일으켜 갑자기 죽고 만다. 한편 손자와 새 며느리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알게된 압살론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례식에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새 며느리를 마녀로 몰아 재판에 넘기려 한다.   

 

이 구도를 보면서 감독은 누구를 위한 마녀재판이냐고 묻는 것도 같다. 얼핏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집안 싸움처럼 보이기도 하고, 언제나 그렇듯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이 영화를 낮게 보는 것이고, 마녀사냥을 통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희생 되었는가를 돌아보게 만들고, 종교의 허울로 압살론이나 그의 두 여인이 보여준 사랑과 동정없음. 사랑은 없고 권력만 있는 종교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영화는 잘 보여준다. 더구나 영화는 누가 마녀인가를 더불어 묻고 있기도 하다. 그건 역시 관객의 몫이다. 전편 <오데트>는 따뜻한 인간애를 담고 있지만 이 영화는 다소 무거우면서 묵시적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한 둘이 아닌가 보다. 내가 처음으로 본 영화는 뤽 베송이 연출한 것을 오래 전 보았고, 얼마 전엔 잉그리트 버그만이 언제 이런 영화에도 나왔나 호기심에 보기도 했다. 두 영화 모두는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잔 다르크의 재판 과정에 온전히 포커스를 맞춘다. 더구나 영화는 무성 영화고, 대사는 그다지 많지 않으면서 음악으로 채운 당시로선 꽤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잔 다르크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재판 내용은 짐작으로도 알 수 있으니 생략하고, 뭐 그런 독설과 허위로 가득찬 재판에서 신앙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죽어간 어찌보면 순교자 잔 다르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점은 달리해 보면,  그녀는 남자들에 의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골출신의 조그만 소녀가 신앙 하나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그 사실 자체가 남자들로선 꽤나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재판 역시 남자로만 이루어져있고 온갖 중상모략이 난립한다. 그중 잔 다르크에게 동정을 보내는 이성적인 남자도 없지는 않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를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연민이 그 나머지를 채우고 있는 듯하다. 또 뱀 같이 혀를 날름거리며 어서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남자들의 표정이 굉장히 사실적이다. 

 

물론 잔은 화형을 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차한 목숨 하나 구한다고 있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종신형이다. 그럴 바엔 위증을 한 것을 자백하고 죽어 하나님 품에 안기겠다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대단한 신앙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감독은 종교란 관점에서 인간의 허위 의식을 까발렸다는 점에서 영화계의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나 루터를 연상케도 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에선 종교을 희화화 하는 경향이 간혹 보이곤 하는데, 그건 안 다루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옛날 영화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드레이어는 영화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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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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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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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6: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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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6: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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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6: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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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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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stella.K 2016-09-14 13:16   좋아요 0 | URL
그래. 너도 추석 행복하게 보내라.^^

페크pek0501 2016-09-1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도 받으시고...ㅋ 축하드려요.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stella.K 2016-09-14 13:1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언니도 즐거운 추석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