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의 고전이라던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보았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별로 좋지 않아 프랑스 영화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선택이 꺼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도 보니 나쁘지 않다.
언젠가 <줄 앤 짐>도 봐줬으면서 왜 이 영화를 봐 줄 생각을
못했던 걸까.
누벨바그의 시조니 어쩌니 떠들어 대는 건 영화 평론가들의 몫이고, 관객들이야 결국 영화가 감동적이이냐, 아니냐로 만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 감동은 고사하고, 영화가 보게 만드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단 함격점이다.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왜 400번의 구타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년에게 행해지는 어른의
폭력을 그렇게 은유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웬지 감독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트뤼포 감독은 어린 시절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는 대체로 어린 아이의 악동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린 아이의 사악함을 밝히는 <파리대왕>이나 <케빈에 대하여>
같은 영화 보단 이런 영화가 훨씬 자연스럽고 좋다.
그맘 때 해 볼 수 있는 아이의 온갖 악행을 잘 다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른이 아이를 다루는 건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편견으로 대하고, 특히 무조건 왼손, 오른손 선택하게 한 후, 영문도
모르고 무조건 왼손을 선택하자 손목시계를 끄르고 왼손으로 주인공의 얼굴을 가격하는
감화원 교사와 그 가격을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 소년의
이미지는 우리가 어렸을 때 익히 보아온 광경이다.
나도 초등학교를 갓 들어가서 교실에서 신는 덧신을 운동화로 제때 갈아신지
못해 체육시간 내내 오도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서 있어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덕분에 체육시간이 끝나고 어머니 같은 담임 선생님한테 얼굴을 가격당한
일이 오버랩 됐다. 그때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고. 표정 관리 하느라 애를 먹었던 아픈 추억이.
그렇게 된 건 나를 너무 깔끔하게 키운 엄마 탓도 있고, 물건을 잃어버리면 엄마한테 혼날 거라는 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해 내야했던 시간이었다.
솔직히 이 세상은 나 밖에 모르는 세상으로 채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세심하게 이해 받고 배려 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나를 누가 배려하고 이해해 준단 말인가. 그래서 무조건 어른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본보기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매를 맞아야
한다.
이 현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깨닫기 최적화된 곳이 학교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개인의 이해가 불허된 곳이다.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취급 받아야 하는 곳이 학교다. 그래서 난 학교를 좋아해 본적이 없다.
그 학교의 시스템을 날카롭게 포착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공감이 가게는 보여주기도 한다. 어쨌든 영화는 잘 만들었다. 주인공의 그 나잇대 부려 볼 수 있는 객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자크를 좋아했던 묘한 대비가 잘 버무려졌다고 생각한다.
최소 별 세 개 반은 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