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추리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그냥 붙은 말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이 소설은 추리로만 자신의 소설을 다 표현할 수 없어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소설을 쓴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역시 약간의 추리 기법이 여기서도 언뜻 보여진다. 

 

무엇보다 애거사 크리스트는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묘파하는 재주를 지닌 것 같다. 죽은 오빠대신 태어난 셜리. 동생이라 사랑하고 예뻐할 것 같지만 주인공 로라는 동생이 없어지길 바란다. 그래야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몇번이나 지신이 동생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는 어쩌면 가인과 아벨 콤플렉스의 또 다른 변형처럼도 보인다.  

 

이 부분을 읽는데 솔직히 나 역시 약간의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 솔직히 로라처럼 아기를 안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트리지는 않더라도 나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형제 또는 자매를 언덕 비탈에서 밀어 굴려버리던가, 방문 모서리 틈에 일부러 손가락을 끼게 만들어 다치게 만드는 일을 상상하거나 슬쩍 해 버리는 실수(?)를 누구든 하지 않나?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천사니 동심은 맑다는 둥 하는 말은 그렇게 되길 바라는 어른의 바람을 투사시킨 말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는 그 아이를 키운 부모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들도 어렸을 때 이런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사실 아기가 자라는 동안 부모는 가장 예민해져서 주의력이 최고조에 이를 것 같지만 의외로 그런 것에 취약하다. 비록 악의는 없다고 해도 은연 중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것이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간에. 그럼 그것이 아이들에겐 비수가 되는 것이다. 어린 로라를 두고 그녀의 부모가 뭐라고 말하는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라.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부모들은 언뜻언뜻 비교하는 말을 서슴없이 잘 한다. 무의식스럽게.

 

그러다 어떤 계기에 이런 아이들의 형제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질투가 사랑으로 바뀌는 일이 있다. 로라는 그 계기가 바로 화재였다. 화마 가운데에서 건져낸 내 동생! 위험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건져냈기에 내 동생은 미워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 줘야할 존재임을 깨닫는다. 거기엔 어떤 심리적 기저가 있는 것일까? 불에 데인 듯, 자신이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동생을 두고 그런 못된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러니까 타인이 없어져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양심이 불가항력적으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또 트라우마처럼 아니 어쩌면 원죄처럼 남아서 사랑인지 집착인지도 모를 사랑을 로라는 평생토록 동생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 소설에선 그다지 비정상적이지는 않다. 충분히 인지 가능한 거고 로라도 이것을 경계해서 마음엔 들지 않지만 동생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는 동생을 보며 셜리는 동생을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린다. 물론 결정적일 때. 그리고 그것은 그래야만 동생이 행복할 수 있다고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 이야기는 성경에 입각한 인간의 원죄 의식과 정죄 의식을 애거서 크리스티 특유의 방법으로 풀어낸 이야기 같다. 또한 그것은 지나치게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이지도 않으며 특유의 통찰과 사유와 은유로 풀어간 가히 명작이다 싶다. 어찌보면 로라를 사랑하는 루엘린은 성경에 다윗의 죄악을 깨닫게 했던 나단 선지자는 아니었을까?

 

인간은 어느 때 가장 교만해지는가? 우린 흔히 뭔가를 할 줄 알고, 인정 받을 때 교만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 교만의 최고 절정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다. 원래 교만은 인간이 신과 같아 질려고 하는 마음을 일컬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 주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인가?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해 주는 순간 그 마음이 이미 신의 마음과 같아져서 바로 그것이 교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 소설에서 한 마디로 잘 표현되어 있다. "왜 우리는 자기가 남들에게 최선이 뭔지 안다고 생각할까요?"(306p)라고. 그러고 보면 애거사의 사유의 깊이는 가히 참 놀랍다 싶다. 어떻게 그것을 이렇게도 명징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 

 

나는 앞의 2부까지는 로라와 셜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지다 왜 갑자기 3부에서 루엘린이 갑자기 나오는 것인지 다소 뜬금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봐야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그녀의 영리한 서술 방식에 새삼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랑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어디든 누구든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이 사랑이 참 쉽지가 않다. 사랑은 받을 때 보다 줄 때가 더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주는 사랑에도 함정은 있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짐 The Bunden'이라고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우리의 반감이라는 짐, 미움이라는 짐, 그리고 사랑이라는 짐 "을 신이 짊어진다고 말한다. 또 짧은 오솔길이라 생각하고 들어선 숲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모르며 밖으로 나가는 지점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발길을 돌릴지 계속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일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의미있는 말이다. 

 

인간이 다루는 모든 이야기는 반면교사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 결핍이거나 사랑 과잉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배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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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0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문학으로서의 크리스티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이군요. 출판사가 번역본 제목을 잘 지었어요. ^^

stella.K 2015-06-04 17:18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야. 애거사 여사가 추리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사유가 나름 깊더군.
난 아직 여사님의 책을 못 읽어 봤는데 몇 권 더 읽고 싶어졌어.^^

페크pek0501 2015-06-0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재밌게 잘 읽었어요.

아주 오래전 이 작가의 추리소설에 반한 적이 있는 것 같고(기억이 가물가물~)
(이 작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티브이에서 많이 보기도 했죠. 그땐 이 작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많이 보여 줬던 것 같아요.
제가 우리 큰애한테 이 작가의 작품으로 영어 공부를 하라고 한 적도 있어요.
단문이 많고 좋은 문장이 많은 것 같아서요.

stella.K 2015-06-06 11: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ㅎ
예전에 많이 했었죠. 특히 오리엔트 특급이란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했었는데 전 그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안나요.
아마 안 봤을 것 같다는..ㅠ

2015-06-06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기침 2015-06-1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문판 전집을 부지런히 읽던 아주 오래전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ㅎ
삶...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좋고도 좋은 하루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5-06-11 13:08   좋아요 0 | URL
헉, 푸른기침님!
이렇게 홀연히 제 서재에 나타나 주시다뇨...
놀라고 반가울 다름입니다. 잘 지내시죠?
제가 이래서 서재질을 놓을 수 없나 봅니다.ㅠㅠ
님도 좋고도 좋은 하루하루 보내세요.
가끔 나타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푸른기침 2015-06-11 17:29   좋아요 0 | URL
서재질 놓으시면 미워할 겁니다. ㅎ
가끔씩 이런 곳에 마실 오는 재미는 있어야죠.
자주 나타난다고 성가셔 하지는 마세요.
봄날은 가고, 또 가나봅니다.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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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모로 독자를 자극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자가 그 이름도 유명한 줄리언 반스라는 것. 굳이 그의 책을 읽던지 안 읽던지 셜록 홈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니 그를 탄생시킨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게다가 굳이 하나를 더 얹자면, 코난 도일이 살았던 시대 배경이 빅토리아 여왕 즉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시대라는 점이 아닐까? 우리나라 역사 소설가들이 조선 시대를 즐겨 다루는 것처럼 영국의 소설가들은 바로 이 시대를 다루길 즐겨 할 것이다. 

 

사실 난 게으른 탓에 지금까지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접해 보지 못하다 이 작품 그것도 이제 겨우 1권을 읽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줄리언 반스의 작품 중 독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작품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 특히 그 작품을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독특한 구성을 언급하곤 하는데 하나 같이 말미에 가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고 왠지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르긴 해도 줄리언 반스는 상당히 지능적이고 똑똑한 사람일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도록 만들기가 쉬운가?

 

소설을 다 읽었을 때 갖는 독자의 반응이란 크게 두 가지 아닌가 싶다. 좋다. 잘 썼다. 괜찮네. 그런 긍정적인 반응 아니면 뭐야? 무슨 말 하려는 거야? 이런 거라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게 하던가. 그런데 딱 덮고나서 왠지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건 또 뭘까? 나름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을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오는 순간 또 들어 가고 싶은 심정 뭐 그런 걸까?

 

사람은 나이가 들면 소설이 멀어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면 소설은 대체로 앉은 자리에서 완독을 하기가 쉽지 않다. 끊어 읽게 되기 때문에 다시 읽으려면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다시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어떤 소설은 비교적 상기가 쉬운 작품도 있지만 어떤 작가의 작품은 내가 기억하는게 맞나 되집어 만든다. 그런 책은 당장 읽을 때는 약간은 번거로울 수 있겠지만 긴 치매 예방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치매 예방을 위해 책을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나에겐 이 책이 좀 그랬다. 

 

읽으면서도 내가 지금 맞게 읽고 있는 것인가?  남의 나라 역사 배경과 추리 기법을  사용한데다 영국 작가의 특유의 장중하면서도 우아함이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아서 코난 도일의 일대기라고 하지 않는가? 어찌보면 경의라도 표하는 의미에서 내가 지금 제대로 읽고는 있는 것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읽어 본 바에 따르면 애석하게도 나의 이런 마음 자세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그걸 또한 잘 모르겠다. 이 책의 1권은 나쁘게 말하면 변죽만 올렸다고나 할까? 언제나 그렇듯 전략상 1권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제야 비로소 뭔가 보여줄 것 같은데 거기서 끝을 맺고 있으니.    

 

그런데 문제는 2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2권을 읽고 싶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나 개인으론 1권 읽기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건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왜 어떤 소설은 사건의 흐름과 전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소설은 꼭 배경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나머지가 가능한 소설이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후자에 속한다. 지금까지는 전초전 내지는 배경 설명을 다룬다. 더구나 아서와 조지는 한번 스쳐지나 가듯 만날 뿐이지 말도 섞지도 않고, 아서는 아서대로 조지는 조지대로의 삶을 보여주다 끝나 버린다. 그것도 끝에 가서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조지 에들러라는 이름이'하며. 요는 지금도 약간은 지루했는데 과연 2권은 1권의 지루함을 상쇄시킬만큼의 재미 내지는 반스가 이랬었구나 하는 나름의 감동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책에 대한 느낌은 여러가지여서 명성 그대로 나에게 감동으로 전해 오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확실히 좋은 책이긴 한데 감동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책도 있다. 독자들은 어떤 책을 읽건 전자의 책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읽는다.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고. 책을 읽는 도중 갑자기 카프카의 이런 말을 떠올린다면 독자는 기꺼이 그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굳이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사람의 다른 저작도 읽고 싶다는 충동을 받거나. 요는 나는 이 책 2권에서 이런 느낌, 이런 충동을 받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허겁지고 다시 1권을 들처보게 되거나 역시 반스구나 하며 다른 책도 보고 싶어지거나. 솔직히 반스는 너무도 유명해서 왜 이렇게 1, 2권으로 나눠 읽어야할만큼 길게 썼냐고 불평할 수도 없다. 덜 유명했더라면 그랬을까? 사실 1권만 보더라도 (조금 지루해서 그렇지)막힘없이 그 시대를 거의 완벽히 복원해 내고 있을뿐만 아니라 (번역자의 문투를 감안하더라도)문장 또한 유려하다. 이런 작품이 흠을 잡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사실 난 앞서 엄살을 부려 보긴 했지만 2권을 읽긴 읽어야 할 것 같긴 하다. <예감은...>처럼 다시 읽기의 충동이 가능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스의 이 소설은 기꺼이 읽기의 수고로움과 모험을 감내할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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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05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메트로랜드>를 읽어보셨어요? 저는 <메트로랜드>를 읽었는데 지루했어요. 그렇지만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stella.K 2015-05-05 18:10   좋아요 0 | URL
아니. 그것도 반스건가?
그래. 10 1/2장으로는 재밌다고 하더라.^^
 
팔월의 일요일들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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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호기를 부렸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프랑스 문학을 좋아한다는 것 하나를 믿고 이 책에 도전했던 나는 노벨상 수장작은 여전히 넘지 못할 사차원의 벽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에 그쳤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아도 노벨문학상은 항상 나에겐 넘사벽이었기에 해마다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소리겠지만, 문학이 아무리 훌륭해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고,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그저 선택되길 기다리는 문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해마다 누가 노벨 문학상을 받건 그건 개인의 영광일 뿐 나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거라고 못 박고 살아왔다. 그런데 프랑스 문학을 선호하는 내가 이 작품에서 나의 이런 생각에 스스로 발목잡힌 느낌이다. 왜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면서 노벨 문학상은 읽어 줄 수 없는 것인가? 좌절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너무 모호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을 평하는 사람들은 안개속을 헤메는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과연 이 안개속을 헤메는 듯한 모호함이 과연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원래 노벨 문학상의 오만함을 감안하더라도 독자와 소통할 수 없는 문학에 나는 가치를 두지 않았다. 하긴 그렇더라도 오만한 작가에 오만한 독자는 있게 마련. 오만한 독자가 보기에 나를 또 얼마나 하찮게 볼 것인가?

 

하지만 분명한 건 파트릭 모디아노는 매력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를 가리켜 기억과 시간의 작가라고 하지 않는가? 원래 기억은 모호한 법이다. 같은 사건이라고 해도 사람들 저마다 기억하는 것이 다르고 의미 부여가 다르다. 이것을 그만의 언어로 육화시킨다는 건 확실히 매력적이고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만해도 얼마 전 좀 우스운 일이 있었다. 예전에 연극을 할 때 함께 일했던 연출가 N과 새롭게 뭔가를 해 보려고 했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함께 할 때는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안달할 정도였는데 지나놓고나니 좋은 기억만 남는 것을 보면 분명 N은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하지 않은 세월이 10년이고 보면 그동안 그도 많이 다듬어졌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실제로 나를 대하는 태도도 예전만 같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이 중요한 '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달라져야 우린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 보다 즐겁고, 의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툭하고 비어져 나와 나의 감정을 자극했고, 내가 그와 함께 다시 일하려고 했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 안에 잠자고 있는 야생마 같은 기질을 건드린 거란 걸 알았을 때 난 시간을 되돌려 옛 기억의 블랙홀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온갖 잡다한 감정들이 꿈틀대며 튀어 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문득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를 그리워 하면서도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도 더불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 것처럼 일에서 만나고 알게된 관계도 세월 지나면 잊혀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알았던 것이다.

 

나의 그 기억은 분명 또렷하고 유쾌한 것만은 아닌데 그래도 훗날 N과 같이 다시 일 해 볼 생각을 했던 것을 보면 내가 그를 아주 싫어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그가 확실한 그인 건 맞는 것일까? 지금의 N은 뭐고 과거의 그는 또 뭐란 말인가? 뭐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나 역시 파트릭 모디아노는 아니어도 기억의 작가란 타이틀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좀 우스운 얘기긴 하다. 

 

아무튼 파트릭 모디아노는 분명 나에겐 어려운 어려운 작가지만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자기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한 작가임은 틀림없다. 그런 작가를 나는 언제쯤이면 '아, 이런 작가였어?! 하며 놀람과 환영의 마음으로 내 안에 모셔들이게 될지 모르겠다. 훗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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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0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소설은 전체적으로 문체가 관념적인데다가 문장이 길어서 읽기가 참 힘들어요.

stella.K 2015-04-02 11:16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야.ㅋ
그래도 어떤 프랑스 문학은 읽히는 게 있거든.
이 책 읽으면서 만만히 볼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겠더군.
그래서 난 노벨문학상이 싫기도 해. 순전히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너무 어렵거든. 펄벅이 문학상을 받을 때만해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은데...
아무튼 이 책은 제목은 매혹적이긴 한데 함부로 권할 순 없을 것 같더군.헤~
 
영원의 수업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판미동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수산나 타미로는 나에겐 낮선 작가다. 이미 여러 권의 작품을 내놓았고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데 나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서간문 형식을 취했다고 하는데 어찌보면 일종의 서사시처럼도 읽힌다.  그래서 문장이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그렇지. 사람은 몇몇개의 형용사와 명사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속에 안주하길 바란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또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그속에 안주하도록 되어 있지 못하다. 소설속 주인공처럼 또는 그 보다 더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랬을 때 소설속 주인공은 어떻게 그 고통을 벗어나는가 그 과정을 시적인 언어로 그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에겐 불행은 가장 행복할 때나 평안할 때 또는 이제 겨우 살만하다 싶을 때 다가오지 않는가? 이렇게 얘기하면 각본 같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불행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다는 건 진리다. 가족중 그렇게 불의의 사고가 아니더라도 같이 살다 평안속에 사별하게 되어도 그것 자체만으로도 슬픔이고 불행이 된다. 떠난 사람은 떠난 것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에겐 많은 숙제가 남는 것이다.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때 신은 있는가? 우린 그 슬픔을 견디고 잊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아마도 이 질문이 작가에겐 제목대로 '영원의 수업'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도 꼭 책의 주인공처럼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 그런 슬픔이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대부분은 시간이 가면 잊혀진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삶은 그러한 고통속에 또 다른 차원의 성숙으로 가는 티켓을 숨겨두고 있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이 수업의 목적은 아닐까?

 

삶 자체는 평안히 살기 위함도 아니고, 고통 자체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 삶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수업이 될 것이다. 인생은 평생 배우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던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인생이고, 사는 것 아니 살아내는 것 자체가 수업이라면 그건 배울만한 것이 될 것이다. 난 이 수업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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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3-1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업이란 말이 좋습니다.
늘 인생 수업 중이에요.

stella.K 2015-03-13 10:41   좋아요 0 | URL
오, 언니! 이 짧고 못 쓴 리뷰에 댓글 달아 주시고
황송하옵니다.ㅎ
저는 학교 수업은 젬병인데 그 나머지는 다 수업 받는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ㅋㅋ
 
블론드 1
조이스 캐럴 오츠 지음, 강성희.송기철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우연히 마릴린 먼로의 전기 다큐를 보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마릴린 먼로도 먼로지만 저자가 워낙 유명한 작가라 작가의 필체에서 나오는 그녀를 어떻게 형상화 했을지 궁금했다.

 

글쎄.. 간단한 소회를 남기자면, 캐롤 오츠가 글을 이렇게 쓰는구나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읽기 전부터도 결코 만만찮은 페이지 수를 자랑하는만큼 글은 뭔가모를 유장함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어렵다거나 지루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딱히 빠져들만큼은 아니다. 그래서 약간의 지루함은 또 감안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지루함이란 또 어디서 오는 것일까? 1권은 주로 마릴린 먼로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 그리고 그녀가 막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의 상황에 집중되어 있다. 사생아에 엄마 손에서 자라지 못하고 조부모의 손에서 어느만큼 자라다 고아원에 보내진다. 거기서 양부모에게 넘어가긴 하지만 그마저도 엄마, 아빠라 부르지 못하고 이모와 삼촌이라 부르며 자란다. 16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지만 남편이 2차 대전 참전하므로 파탄에 이른다. 그렇다고 먼로가 그걸 아주 슬프게 여겼던 건 아닌 것 같다.

 

알겠지만 마릴린 먼로의 실제 이름은 노마진 베이커다. 그 이름이 어떻게 마릴린 먼로가 되었는지 보여주고 1권은 끝을 맺고 있는데, 내가 아무래도 관심 있어하는 건 그 이후인 것 같긴하다. 이를테면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밀러와의 결혼은 어땠을까? 그녀는 그를 어떻게 느꼈을까? 그 이후 몇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나머지는 2, 3권에서 다뤘을 것이다.

 

그런데 1권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2, 3권에 도전하는 게 약간은 자신이 없어졌다. 전기나 전기소설은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주변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이나 사람들을 아는것이 더 묘미일 수 있는데  과연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 졌다. 그래도 한 가지 경의를 표하고 싶은 건 작가의 우직함이다. 어떻게 해서 먼로의 전기 소설을 쓸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일생을 웅숭 깊게 그래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어 줄만 하다. 기회있는대로 나머지 책에도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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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3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은 억지로 다 읽을 수 있는데 문제는 3권 이상이면 독서 진도가 느려지거나 아예 중도 포기해요. 읽을 책이 너무 많으니까요.. ^^;;

stella.K 2015-02-14 11:3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웬만치 재미있지 않으면 나도 3권은 벅차더라.
2권은 어떻게든 읽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알라딘내에서만 하더라도 3권까지 읽고 리뷰 쓴 사람이
거의 없어.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