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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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 3개월이 됐나? 일본의 지진 해일에 원전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들은지도. 그런데 처음 한 달 정도는 불안하더니 그맘도  잊혀지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을 한 건지,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느낌이다. 우린 그 보다 먼저 체르노빌 원전 사태를 접한 상태라, 분명 일본도 체르노빌 사태 만큼이나 심각할 텐데도 자제를 해서 그런지 아직 이렇다할 보도가 없다.  

솔직히 체르노빌도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에만 조금 요란했지, 그 이후 어느 정도 복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나의 무지의 소치다. 이번 일본 원전 사태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곳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즉 우리나라 모 방송국 기자가 그곳을 취재한 것이 얼마전 보도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문득문득 궁금했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함과 게으름을 탓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끔찍한 재난 앞에 사람이 집단으로 죽어 나감에도 그것을 단발성으로 끝내버리고마는 보도행태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걸 보고 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막연하게 체르노빌이 복구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게 아니었다. 거긴 이미 사람이 살지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사명감은 알아줄만은 한데, 왠지 그 기자가 조마조마 하면서도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래 머물렀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짧은 순간 취재를 했는데도 방사능에 오염됐을 것만 같기도 하고, 사지로 가는 걸 막지 못한 그의 아내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먹고 산다는 게 뭐길래,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나는 역시 제 3자 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체르노빌. 지금 그곳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기 보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안위를 더 걱정하다니? 

놀라운 것은, 그렇게 방사능이 오염된 곳은 몇 십년 내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00년 이상이 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년을 걸려서라도 회복이 되긴 된다는 건가? 아니면 회복불능이라는 말인가? 또한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졸지에 피난을 갔지만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나 책에서처럼 어린 아이의 피해는 치명적이어서 기형은 물론이고, 건강이 심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일본은 쉬쉬하지만 조만간 제2의 체르노빌 사태를 보는 건 시간 문제가 되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책은  이번 일본의 원전 사태 때문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된 것으로 아는데,  역시 저자가 전문 소설가가 아니고, 르포작가여서 그럴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체르노빌이 왜 그 같은 사태를 맞이하였는지 대한 입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묘사는 거의없고, 단지 그때의 피해 상황과 이반이란 소년과 그의 여동생의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상황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맥이 좀 빠지는 느낌든다. 그럴 경우 이야기는 다소 진부해지면서 감상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서일까? 읽다보면 당시의 급박했을 체르노빌의 상황을 읽는다기 보단, 나치를 배경으로 핍박 받고, 헤어질수밖에 없는 어느 유대인의 자전적 소설을 읽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국가가 재난을 당했을 때 국민은 얼마나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전 사태가 이슈가 되고 있을 때, 나는 마침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났기에, 원전이 왜 있어야 하는 거냐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질문도 사실은 일본이 아니었으면 전혀 묻지 않았을 질문이다. 그랬을 때 한 지인이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으로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줬다. 즉 석유만으로는 에너지의 필요를 다 해결할 수 없기에 필요하다고. 그것이 확실한가에 대해선 그도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냥 그런 줄 알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 나 역시 그런 교과서적인 답을 얻자고 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 후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 일본의 원자로를 모두 없애도 전력 사정에 전혀 장애가 없다. 러시아로부터 홋카이도를 경유해 파이프라인을 설치하여 천연가스를 이용하면 된다. 석유는 유한한 에너지지만, 천연가스는 지질의 심층부에서 무한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172p)라고 말하고 있다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확실히 새겨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말하자면, 원전만이 전부는 아닐진대 너무나 위태롭게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또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이렇게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마다 원자력을 보유하려고 하는 것은 뭐 때문일까? 눈앞에 뻔히 재난을 보고도 말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체르노빌이나, 일본이나 심지어 우리나라까지도 원자력은 절대 안전하다고 말했다. 지진도 몇 도에도 끄덕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일본같은 경우 지진이 워낙 강하게도 났지만, 어쨌든 그 자랑이 무색하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어딨겠는가?  설혹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안전하다고 해도, 우리 머리 위로 언제 북한이 쏘아올린 핵의 세례를 받을런지 알 수가 없다. 그랬을 때 우린 정부를 어느 만큼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그런 국가적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얼마나 침착하게 대응했는지.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원전을 보유하고 싶은지 국가가 국민에게 물어 보기나 했나? 그것이 국익을 위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먼저 차출이 되는 것은 관련자들이요, 남자들이요, 가장들이다. 책에서처럼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가장 패해를 많이 보는 사람은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고, 노인들이며, 여자들이다. 꿈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죽어갔던 그들. 피폭에 살아 남아도 불구자로 살아갈수밖에 없는 아이들.  우린 좀 더 안전하고도, 행복한 국가를 그들에게 물려줘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내 당대에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우린 마치 시한 폭탄 지구를 떠받들고 아틀라스의 후예들 같다.   

조금 아쉬운 작품이긴 하지만, 저자는 핵발전이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을 어떤 비극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나는 이 책 말고도 체르노빌을 심층적으로 다룬 책들이 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원자력 피해를 입은 일본도 가감없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이 원자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겠는지, 세계적으로 고민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의 미래가 달린 문젠데 어떻게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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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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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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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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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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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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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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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한쪽 눈을 뜨다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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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어떤 일 때문에 한 중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렇게 중학교를 방문하기는 정말이지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느꼈던 당혹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책상 때문이었다.    

책상이 좀 낡기도 했지만 작은 듯도했다.  성인인 내가 보기에 작아 보이는 책상이 과연 아이들에겐 맞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도 작다고 생각하는데 생긴 게 그 모양이니 별 수 없이 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자라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자쪽이라면 다소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 또 하나 드는 생각은, 내 중학시절 썼던 책상과 의자를 나는 어떻게 느꼈던 걸까? 하는 거였다. 그땐 나름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새삼   '겨우 요거였어?' 하며 오히려 실망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같은 물건이라도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요는,  아이들에게 맞지 않을 것만 같은 책상은 교육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것이며, 나는 그 시절 학교를 그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대식 학교가 생긴이래, 교육은 한번도 사람에게 맞춘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람이 교육에 맞추어졌다. 그래서 벽돌공장에서 규격에 맞혀 벽돌이 찍혀 나오듯, 학교는 그렇게 규격에 맞는 인간만을 만들어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 규격에 맞는 인간이란, 즉 세상을 자유자제로 유영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우성인자이거나, 적어도 세상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인간을 의미한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여기서 잘 살아남는 자가 사회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이고, 여기서 도태되는 자가 사회에서도 도태될 확률이 높다. 즉 잉여인간. 루저가 되는 것이다.   

작가가 영섭의 시각으로 학교, 특히 교실을 야생의 사바나로 설정한 건 적절한 설정같다. 그리고 영섭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을 변신이 가능한 동물로 생각하는 건 씁쓸하지만 공감한다. 이는 어찌보면 그렇게 생각하므로 자신을 숨기려는 일종의 자폐적 성향 같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정글같은 교실에서 살아 남기란 쉽지 않을테니. 물론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적 사고일텐데, 일견 이해가 가면서도 역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숨기는 영섭에게 씁쓸한 연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랬던만큼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이 작품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기시감처럼 사춘기 시절, 그것도 중학시절과 맞닥트려질 수 밖에없었다. 그때 난 영섭이만큼도 영리하지도 못했다. 영섭은 그래도 학교를 사바나의 세계로라도 표현할 수 있었지, 하지만 난 도무지 이 학교라는 곳을 무엇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인 블랙홀 같은 곳이다가도, 그럭저럭 인간이 정붙이고 살만한 곳이란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되풀이 해 가며 살았던 것 같다.   

분명 이 학교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할텐데,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학교 갈 일이 끔찍했고, 무사히 학교를 다녀오면 그 사실에 안도했다. 학교가 주는 구속이 싫었고, 선생님의 폭압내지는 압제도 내겐 끔찍했다. 무엇보다 학교는 나 있는 그대로가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던 것 같다. 작품 속 태준을 보라. 그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닌데, 단지 공부 하나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난한 학교 생활을 하고있다. 어찌보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세상을 별 어려움없이 잘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느새 이들을 영웅시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공부에서만 앨리트지, 삶에 있어서도 앨리트는 아니지 않는가? 

난 지금도 학교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들어와서 첫 성적표를 받던 날이다. 다른 과목은 그냥 그럭저럭 점수를 맞았는데, 수학에서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아 전체 성적이 한참 아래로 곤두박질 쳐버린 것이다. 어떻게 수학 하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낮은 등수를 받아야 하는 건가? 나의 학교생활도 순탄치는 않겠다는 생각을 순간하게 되었고, 역시나 난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작품에서 누구도 영섭에게 사바나에선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 역시도 누구에게도 학교를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든 학교의 지도방침에 따라 올 사람은 따라오고, 못 따라오는 사람의 등에는 회초리 아니면 무관심만이 존재할 뿐이다. 거기서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책뿐이었다. 책은 나의 따분한 학교생활을 버티게 해 줬고, 학교가 주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그것 외에 내가 학교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작품 말미에 영섭이 변하여 모르는 아이들의 물건 갈취하고 장난을 쳐 보는 건 제목과 잘 어울리는 행동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은 순하다가도 돌출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난 그렇게 첫 성적표를 받아든 날, 속으로 뭔가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한 과목에서 낙제를 받았다고 이렇게까지 열등해야 하는가? 억울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에서 인정을 받는 이런 세상이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생각은 생각에서 머무를 뿐이었다. 그건 기준을 바꿔야 하는 문제인데 그러기엔 난 힘이 없었다.  그래서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 시절을 보냈다. 그때 누구든, 내가 수학을 못하는 것은 전체를 못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항상 못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시절을 조금 편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하나를 못하는 것에 대한 동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무엇으도 메울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고, 때문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눈을 떠야할 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작품에 나온 영섭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을까? 그저 앞만 보고 달리라고만 하지, 왜 달려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잘 달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하고 성적비관 자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죽기에는 그들의 젊음은 아직 저리도 아름다운데 말이다. 

나는 우리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세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그물과 기준에 맞추어 살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기준이 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그 시절엔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과 장점을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였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정 받고 존중 받는다면 세상은 진정한 매니아의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에 장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매니아는 있을 수 있어도 루저는 없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힘없는 루저가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 공부 잘한다는 태준이까지도. 하지만, 새로운 기준으로 이들을 바라봐주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면 바람직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청소년의 내면을 시의적절하게 잘 표현해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사건이 있다든지 그래서 반전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냥 이들의 내면 세계는 현재진행형이며 가변적임을 암시해 준다.  

청소년을 괴물에 비유한다지. 어린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애매한 존재. 그들은 이제 한쪽 눈을 떴다. 한쪽 눈만 가지고는 세상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시기는 또 지나간다. 그러면 나머지 한쪽 눈도 뜨게 되겠지. 그들이 양쪽눈을 다 떴을 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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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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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고나니, 그물망에 갖힌 작은 새 한 마리가 연상이 된다. 그 새는 할 수만 있으면 높이 날아야 했다. 하지만 어떤 운명이 날지 못 하도록 그물망을 덧씌우고, 결국 그 그물에 갇혀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마커스는, 한 마리 새다. 그래서 읽고나면 웬지 우울하다. 

이야기 구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매사에 참견이 심하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아버지를 떠나 집에서 떨어진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다지  자신의 마음과 잘 맞지 않으며, 사귀게된 여자친구도 알고 봤더니 정신병력이 있는 불행한 아이다. 공부하는 건 좋지만, 종교적 규율을 거부하며 신앙 좋은 학과장 역시 마커스에겐 그다지 좋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머니도 아버지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해 아들을 붙잡고 징징거리기나 한다. 그런 마커스에게도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등으로 졸업해 졸업식 때 연단에서 졸업 연사를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들은 마커스에게 혼란을 야기할 뿐이고, 결국 원치 않는 한국전쟁 파병 행렬에 동참하게 되고,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하지만 필립 로스는 확실히 재담꾼이다.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능력만큼이 정말 탁월하다. 이를테면 1장에 해당하는 '모르핀을 맞고'는 2장의 '벗어나'에서 마커스가 생명 유지를 위해 모르핀을 맞으며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서술되어지는 마커스 자신의 1인칭 시점이고, 그런 마커스가 2장에서는 3인칭이 되어 전지적 시점에서 그의 생이 마무리 된다. 또한 어찌보면 반복되는 듯한 저 이야기의 구도가 점층적이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고 있어, 읽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공에게 감정이 이입이되며 연민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읽는 내내 인생에서 한번뿐인, 이 죽일 놈의 '청춘'을 뭐라고 정의했으면 좋을런지 몰라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인생을 하루 24시간에 비유한다면 20대는 아침 7시대에 해당하는 시간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20대를 살면서  인생이 너무 빨리 간다고 너무 조바심 내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이다. 듣고 보니 위로가 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여유와 관조적 태도로 20대를 살든, 인생에 있어 분산시켜야할 에너지의 총량 중 3분의 1을 20대에 집중시켜 살든, 청춘은 만져지지 않고 음미되지도 않으며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누구는 청춘은 아름답다고 했는데, 과연 정말로 청춘이 아름다웠을까? 누구는 청춘을 푸르름에 비유하고, 꽃에도 비유하고, 달콤 쌉싸름한 맛에도 비유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물어보고 싶어진다. 솔직히, 청춘을 지나오면 꼭 그렇게만도 비유될 수 없는 것이 청춘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는 맹물 같은 것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쓴 독약에 비유될 수도 있으며, 누구에게는 시큼 털터름함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청춘은 무엇에 비유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묻게 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꼭 주인공 같지는 않아도, 주인공에 동조하고, 감정이입을하고 싶어지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모 곁을 떠나고 싶어하는 자식의 마음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더 이상 나를 돌봐주셨던 부모님의 그늘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다.  마커스는 그래서 대학을 간다는 명목으로 집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각자의 청춘에게는 그것이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는 결혼으로 지금까지의 둥지를 박차고 나가기도 하고, 누구는 유학이나 이민으로, 누구는 일부러 직장을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잡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부모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다고 자유가 보장되는 것일까? 적어도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면 다른 의미로 '속박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을 향한 마커스의 부침이 제법 만만치가 않다. 그는 자유를 위해 홀로 있을 것을 선택하고,  구속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종교적 규율조차 거부했다. 그리고 낭만적 사랑과 명예로워지는 것만이 자신의 자유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택한 사랑은 너무나 건강하지 못하며, 명예를 지켜나가지도 못했다. 더구나 자신을 지지해 줄 것만 같았던 어머니조차 그에겐 힘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도 지키고 싶어했던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그 모양은  불안하고 불온하기 짝이 없으며,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도 아닌 혼란의 연속일 뿐이었다.  특히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이 알고 보면 뭐 밟은 것 같은 참담함이 되었을 때 되돌릴 수 없고, 그러나 되돌려야만 하는 것이 측은하고 불쌍하기까지 하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은가? 자유롭고 싶어선택한 결혼, 그래서 선택한 직장, 유학이나 이민이 더 나를 얽어매고 나를 속박한다. 하다못해 아무 것에도 매이고 싶지 않아 선택한 독신도 고독이 속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찌보면 우리에겐 애초부터 자유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태어남 조차도 내 자유의지가 아닌데 어디서 자유를 찾겠다는 말인가? 단지 우리에게 허락된 건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자족을 배우고, 인격의 성숙을 지향하고,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의 씨를 계속해서 퍼뜨리고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 밖엔 없는지도 모른다.  즉, 자유란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오히려 자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확실히 역설이다.   

책에서 이 말이 좋다. 한평생 아버지과 함께 코셔 정육점에서 일해왔던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해 주인공 마커스가 이렇게 말한다. 정육점을 하려면 근육이 필요하다. 어머니에게는 근육이 있었다. 어머니가 우는 나를 품어 안아주었을 때 나는 그 근육을 느꼈다.(166p) 어찌보면 자유를 위한 날개에도 근육이 필요한 줄도 모르겠다.  하지만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른다고, 이것을 다 깨닫기엔 마커스의 젊음은 미처 다 피지도 못했다. 그런 젊음이 있는 것이다. 멋진 첫 비행을 위해 힘껏 날개짓을 쳐야하지만 날개짓을 제대로 쳐 보기도 전에 추락하는 새처럼. 이 이야기는 바로 그렇게 미쳐 다 피워보지 못한 젊음에 바치는 장송곡 같기도 하다. 그래서 다 읽고나면 우울하다.  너무 우울해 작가에게 따져 묻고도 싶어진다. "당신은 어쩌면 그리도 청춘에 대해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쓸 생각을 했소?"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가감없이 인생의 한 단면을 이야기 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에 쏟아지는 찬사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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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2-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도 이 책 읽었어요.
필립로스에 혹해서가 아니라,역자 정영목 님에 혹해서긴 하지만요~

다 피워보지도 못한 젊음에 바치는 장송곡이란 표현 넘 적절한걸요~^^

stella.K 2011-02-21 11:13   좋아요 0 | URL
뭐 정영목이야 워낙 유명한 번역가시잖아요.
원저자가 좋아선지 아니면 번역이 좋아선지
아무튼 글이 참 유려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필립 로스는 확실히 우울해요.ㅋ

blanca 2011-02-2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안 그래도 이 책 장바구니에 있었는데 주인공이 죽는 거라는 스포일러를^^;; 알려주셨군요. 스텔라님이 쓰신 청춘에 대한 느낌 동감합니다. 어떻게 살아도 결국 못 잡고 알지 못하고 휙 보내버리고 마는 것 같아요. 자유에 대한 대목도 그렇구요. 필립 로스는 어떻게근 삶이란 참 서글픈 거라고 얘기하는 것 같군요. 다음 책에 대한 기대를 한껏 더 부풀게 해 주셨어요^^

stella.K 2011-02-21 11:19   좋아요 0 | URL
솔직히 뒷부분 읽을 때까지 1인칭 소설인 줄 알았어요.
근데 뒷부분에서 벙쪘죠.ㅎㅎ
청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그때는 몰라요. 그죠?
더 나이들어 보면 알죠. 그땐 이미 청춘은 가고...흐흑!

필립 로스는 우울하긴 한데 더 읽고 싶게는 만들어요.
인생의 단면을 치장하지 않으면서 가차없이 쓰는 태도가
맘에 들었다고나 할까?

블랑카님의 댓글을 받고 보니 내가 확실히 리뷰를 못 쓰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고마워요.^^

cyrus 2011-02-2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주인공의 죽음이 안타깝더라구요. 내용은 짧았지만
주인공이 겪어야했던 고민과 불안 그리고 죽음으로 마무리짓게 된 결말이
인상 깊었어요.

stella.K 2011-02-21 11: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내용은 안타까운데, 글은 참 멋지다는 생각을 해요.^^
 
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상 독재로 악명을 떨쳤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쉽게는 히틀러를 비롯해, 필리핀의 마르코스,  비참한 처형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줬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그는 죽을 때 눈도 재대로 감지 못했었다), 가까이는 박정희와 전두환, 김일성이나 김정일까지. 물론 지구상에 독재자가 이들 뿐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독재자들이 판을 치고 살고 있는지 우린 다 알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김정일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로 현재 위키백과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방금 전에 알았다.  

여기 우리가 기억할만한 또 다른 이름이 있으니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다.  그리고 그 인물은 2010년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의해 재탄생했다.  그는 왜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를 자신의 소설에 되살리려 했을까? 

왜 '염소들의 축제La Fiesta del Chivo'인가? 

스페인어 염소에 해당하는 단어 Chivo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한 것은 음모자들 사이에선 트루히요를 '염소'라 지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염소는 그냥 동물을 지칭하는 명사였을텐데 트루히요에게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는 트루히요의 과도한 성욕과 뛰어난 남성적 능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Fiesta  축제란 말로써 트루히요가 죽는 날 도미니카에 독재는 종식되고 커라란 축제가 벌어질 거라는 암시를 내포하며, 그것은 동시에 유혈 축제를 내포하기도 한다.  즉 말하자면 트루히요 음모자들끼라만 통하는 일종의 작전명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비슷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두고 그 작전명을 '여우 사냥'으로 지었다지 않는가? 이렇게 사람들은 상징성을 같는 이름내지는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은 다분히 독재자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음모자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트루히요의 인간적 면모를 지켜볼 수 있는 시선 하나. 그리고 이를 지켜봐야하는 친트루히요파와 음모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의 시각을 대표하는  우라니아 카브랄의 이야기. 무엇보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트루히요를 많이 연구했다고 하는데, 우라니아는 실제로 있는 인물이 아닌 가장의 인물이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어느 나라나 독재 치하에서는 여성들의 성적 압제로인한 상처를 간과할 수 없기에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개인적으로 우라니아의 부분을 가장 관심있게 읽기도 했는데,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그다지 크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어서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작가적인 한계는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가졌더랬다. 하지만 역시 작가가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트루히요의 시대 역시 페미니즘의 시대는 아니었고, 더구나 당시의 도미니카 같은 저개발 국가에서 여성이 주체적인 성의식을 갖는다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딸의 처녀성을 독재자에게 바치는 시대였다면 그건 정말 비극의 시대다. 아버지조차 이성을 잃어버린 시대를 산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는 도미니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에서 14살 어린 소녀가 무엇을 해 볼 수 있을까? 그나마 트루히요의 그늘에서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35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불구가 된 아버지께 자신을 증오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반전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독재 체제에서 탄압받는 여성과 치욕스런 국민의 삶을 대변하기 위해 우라니아를 설정했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의 관점에서 우라니아를 해석하고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옳은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우리도 바로 한 세기 전 우라니아로 살아야했던 치욕스런 시대가 있었고, 지금도 우라니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우리가 우라니아에 대해 아쉬움을 갖는다면, 그건 신화적이며 영웅적인 뭔가의 아우라를 우라니아에게서 끝끝내 발견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역시 우리는 허리우드식 스토리텔링에 너무 많이 익숙해져 버렸다.  

그들의 축제는 어디로 갔나?         

이 소설은 그다지 쉽게 읽혀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이야기가 길기도 하지만, 시간의 병렬을 해체시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 저 이야기를 하고 다소 혼란스럽게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점잖게 플래시백이니, 회상과 다양한 화자의 등장이니 목소리의 중첩이니, 한마디로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고 말하겠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 읽기는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익숙한 방법으로 읽히진 않는다는 소리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갖는 독특한 점은, 이야기가 사실적이지 않으며 우화적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각 등장인물의 특징과 심리상태와 대화에 주로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사실 독재자의 최후를 다룬 소설은 많다. 그런데 이걸 여느 작가가 썼다면 어땠을까? 감히 상상을 해 보건데, 아마도 이야기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재자를 죽이기 위해 사용된 무기는 무엇이며, 어떤 동선을 짜며, 살상자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이며, 암살이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의 시나리오. 그리고 독재자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등을  굉장히 꼼꼼하고 장엄하게 썼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예상되어지는 연출된 상황을 배체한 채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채워 나간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갖는 필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독재자의 암살과 그 이후에 대해 상당히 충실하게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독재자를 죽이는 것이다. 사실 누구 보다 죽일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진 존재다. 하지만 암살자는 무슨 테러 집단도 아니고, 자실 특공대는 더더욱 아니다. 꼭 죽이고야 말리라는 그 강한 의지 뒤엔 그에 못지 않은 강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독재자의 암살엔 반드시 종교가 함께 간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살상만은 안된다고 해야 옳을 가톨릭 신부들 조차 독재자의 암살에 가담한다. 이것은 비단 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정의의 이름 또는 신의 이름으로 독재자는 처단되어 왔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 것이며, 신의 왕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뭔가의 생각이 깊어졌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더 깊게 만들었던 건 투루히요를 처단한 로만 장군을 비롯한 가담자의 이후의 행동이다. 그들은 일단 독재자를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는 성공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나라에 더 혼란만을 가중시켰고 , 영웅이 되기는 커녕 더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역시 한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힌다는 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못되는 것 같다. 투루히요의 죽음에서 기쁨을 누리는 군중이 있는가 하면,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의 독재 체제가 무너졌을 때에도 똑같이 겪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축제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작품에 대한 인터뷰에서 암살자들은 암살에 성공하고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 두려워 했다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해 보다 

사실 이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었던 건, 어찌보면 이 책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의 기시감 때문이었다. 어릴 적, 나 역시 우리나라엔 대통령이 원래 단 한 분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신앙 같은 것이 되어서 앞으로도 이 분은 죽지도 않고 나라를 계속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분이 어이없이 죽고 나서야 나는 꿈에서 깨어났고 그것이 독재 때문이며 더 많은 혼란과 이전의 독재자 못지 않은 독재자가 나타나 민주화의 꿈은 좌절되는 줄만 알았다. 누구는 또 그랬다.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으니 이전의 독재자의 재림이 필요하다고. 또 누구는 그 독재자의 암살자가 사실은 처형되지 않았으며 지구 반대편 어느 섬에서 살고 있다고도 했다. 과연 괴담 아닌 괴담이고, 그만큼 사람은 자율적이지도 못하고 민주적이지도 못하며 뭔가에 기생해서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것은 이 소설에 그대로 녹아져 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궁금한 것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독재자를 암살했을 때 작전명은 뭐였을까? 독재자가 있는 나라의 역사는 확실히 슬프다. 그래서도 난 이 책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재의 북한의 상황 때문에도 이 책을 포기하지 못했다. 한 나라에 독재자가 있다는 건 불행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자기 세대를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뭐란 말인가? 3대 세습 체제가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이며 유일한 3대 독재 세습란 오명을 안게 되었다. 지금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체제에 시달림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과연 북한은 자생 능력을 상실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하게 만들었다. 이 악습을 보고도 암살을 꿈꾸는 사람이 없더란 말인가? 새삼 가슴을 쓸어 내렸다. 물론 독재가 있으면 반드시 암살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암살을 심판하기 전에 그것을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만큼 혁명에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며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끝이 어떤 결과를 낳던지간에 말이다. 그런데 북한은 자기네 나라의 독재를 청산할 의지도 없이 삼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집단 패닉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는 말을 적이 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의 의식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언젠가는 그 독재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것도 아주 어이없는 그 하나 때문에.  

이야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 이야기가 갖는 신화적 상상력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진실을 은폐한 거짓말 하나가 어떻게 나치즘을 붕괴시켰는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런 것처럼 이 소설이 갖는 신화적 상상력이 어느 나라의 독재를 어떻게 무너 뜨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도 작가는 사실주의를 배제하고 우화적이며 상징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을지 모른다. 이 소설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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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트루히요와 그의 아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가
떠올랐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유신정권 시절의 우리나라랑 오늘날의 북한 정권이
동시에 연상되는,, 어쨌든 참 대단한 소설인거 같아요 ^^

stella.K 2011-01-28 13:18   좋아요 0 | URL
어쨌든 독재의 모습은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런데 북한이 여타의 그것과 다른 건 그들 자체적으로 독재를 청산하지 못한채
독재자를 우상화하고 있다는 거죠. 어쩌면 좋을까 한숨만 깊어졌어요.ㅠ

근데 시루스님 밖에 없어요.뭐냐구요?
그냥 시루스님 조타구요!히히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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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에게 있어 화두는 늘 '남자'였다. 

가끔 그런 책을 만난다. 작가가 남잔데 작품 속 주인공이나 화자를 여자로 쓰는 경우. 또 그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여잔데 남자로 쓰는 경우. 그럴 경우 난 그 책을 의심부터 하고 본다. 여자를 잘 알고 쓰는 걸까? 또는 남자를 잘 알고 쓰는 걸까? 그냥 주인공을(또는 화자를) 그렇게 산정할 뿐 그것이 꼭 서로 다른 성을 잘 알아서 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성(性)을 바꿔서 쓰는 것일까?  그럴 때 작품의 완성도는 얼마나 더 할 수 있는 것일까?

늘 남자에 관해서만 쓰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가 나를 놀래켰던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언니의 폐경'과 '화장'이란 작품이었다. 그 두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 김훈이 여자에 관해서 쓴다는 것이 놀라웠고,  여자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쓰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웠다. 그런 작가가 이 작품에서 또 한번 여자를 등장시켰다.  그런데 그것이 장편이어서 그럴까? 앞의 두 작품은 군더더기 없는 단편인데 반해, 이 작품은 뭔가 모르게 버거워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세밀하지만 다분히 우회적이고, 여성성을 대표하는 감성적인 면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작들은('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의 경우)  초라한 남자의 공허하고도 처연한 울림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뭐랄까 결코 뜨겁게 덥혀지지 않은 아니 다 식어버린 밥상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작가를 떠올리면 늘, 가부장과 마초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그는 가부장이란 말은 인정하지만, 마초는 아니라고 못 박았다.  사실 '가부장'이란 여성에겐 다소 권위적이고 위협적일수도 있지만 그런 요소를 제거한다면,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다스린다는 신사적 의민데 어찌 그것을 '마초'와 견줄수있냐며 정색을 했다. 마초는 남자적 허세가 아니겠냐며. 듣는 순간 그도 과연 맞는 말이다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을 비롯해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또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하고 회의하는 남자다. 그리고 그것이 김훈 문학의 화두란 생각이 든다.  

관조적인 문체 

이 작품 역시 남자를 비껴가지 않는데, 이 전의 작품들은 남자가 화자가 된데 반해 이 작품에선 여자 조연주가 화자가 됐다는 것은 김훈 문학에 변화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 앞서 두 편의 단편은 여자가 여자를 말하고(언니의 폐경), 남자가 여자 대해 말하는(화장) 형식을 취하지만, 이 작품에선 여성의 시선으로 남자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그렇듯 관조적이다.  김훈의 문학은 늘 그랬다.  여타의 작가들은 인간의 욕망을 한 자락 펼쳐 보이고 그것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다 산화해 버리거나 또는 어느 지점에선가 돌이키고 선회하고마는(그것은 분명 작가 자신과의 타협일터)   지점에서 끝나 버리는데, 김훈의 문학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산화해버린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며,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거냐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하다못해 그의 소설에선 그 흔한 성애 장면 조차 나오지 않던가, 나오더라도 아주 건조하게 나올뿐이다 (칼의 노래). 이 작품에선 분명 누군가와의 성교로 아기를 임신했을텐데도, 여자는 끝내 임신한 채로 자살한 것으로 나오는 한 인물이 있다.   그처럼 그의 일련의 소설들엔 여자의 자리는 여간해서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자에 대해 썼다는 '언니의 폐경'이나 '화장'도 정말 여자에 대해서 썼을까? 이쯤되면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언니의 폐경'은 여자의 싯점에서 여자에 대해 쓴 것처럼 보이지만 폐경에 대해 썼다는 점에서 여성의 끝자락에 관해 쓴 것이고, '화장'은 남편의 싯점에서 자기 아내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는 식이다. 그러니 그 외피만 달라졌을 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여기선 단 두 여자만이 나올뿐이다. 화자인 조연주와 그녀의 어머니. 그나마 조연주는 직업상 전방부대에 예속했다. 거기서 남자들 특히, 안실장과 그의 아들 신우를 관찰하고, 죄수의 신분인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머니는 귀찮으리만큼 연주에게 전화를 해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보고로 일관한다. 그리고 그 안엔 아버지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내치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우유부단한 심정이 작품 전반에 건조하게 나타나 있다. 즉 작가는 이 두 여자를 통해 끊임없이 남자를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제기했던 '세밀하지만 다분히 우회적'이라는 건 어찌보면 그럴수밖에 없는 장치처럼도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엔 여성이란 애초부터 자리하고 있지 않으니까 여성성도 없는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여자를 모르기 때문에 감성적이지도 않다.  그러므로 김훈의 문학은 '남자의 문학'인 동시에 '관조의 문학'이다.    

결핍에서 완성으로       

애초에 작가가 작품 속에서 여자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했더라면 그의 문학은 생명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여성에게는 자궁이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합일을 이루었을 때 생명은 탄생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여성에겐 그다지 큰 의미도 역할도 주지 않았다. 생명 보단 죽음을 말하는 게 더 익숙하고, 충만 보단 결핍을 말하는 게 더 익숙해 보인다.  

그 부자에게 아내이며 어머니인 여성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닮은꼴 부자의 결핍은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이어서, 본래부터 결핍 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결핍에 젖어서 살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지할 수는 없었고, 그들 부자의 결핍은 그 결핍을 인식하는 능력조차 결여된 결핍이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유전적으로 파생되어나온 또다른 생명이 그 결핍의 운명을 답습함으로써, 그 결핍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 아버지와 아들의 닮음이었다.(241p) 

 하긴, 꼭 김훈 작가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대부분의 작가는 희망 보단 절망을 얘기하고,  기쁨 보다는 고통을, 드러난 것 보단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하기 좋아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작가의 생래적 특성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왜 글을 그렇게 쓰냐고 묻지 않는다. 싫으면 안 읽으면 그만인 것이지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문학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훈 작가 역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학적 세계를 완성에 가는데, 그야말로 그는 결핍에서 충만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결핍 그 자체를 완성해 가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어줍잖은 충만, 명확하지 않은 확신, 불안한 행복, 그런 얼치기적 언어로 된 글은 쓰고 싶지 않은 그의 자존심 같은 것은 아닐지? 그런 것 보단 작가가 알고 깨달은 결핍, 공허, 허무 등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가도 독자도.

작품, 다르게 보기 

사실 작가의 작품들은 뛰어난 문체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를 짙게 깔고 있어서 읽고나면 한동안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다시 읽기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그것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며, 남자 보단 여자가 더 읽기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을까?).  중독이다.  그렇게 읽으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왜 그리도 남자 이야기만을 하는 것일까? 물론 남자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쯤 작품을 대하고 보니 남자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이 열린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남자 이야기 또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일정한 패턴 내지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확실히 이것의 또 다른 측면에서 남자를 이야기 하고, 아버지를 이야기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왜 남자는 힘, 영웅 등 지구를 떠받히는 존재로 그리느냐는 것이다.  남자도 얼마나 연약한 존재고, 모든 위험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며, 자유롭고 싶어하는지를 작가는 매번 새롭지만 일관 되게 조명해 왔다. 그것은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이기도 하다.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느꼈던 건 가정과 사업을 이끌어가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가 무시로 생각 났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어렸을 때 전날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우연히 마주치게된 아버지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가끔은 만취 상태인 경우가 있고 그런 때가 되면 기도는 좀체로 하시지 않는데, 그날따라 무엇 때문인지 그러고 계셨던 것이다. 뭔가 큰 일이 아버지에게 닥친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그때 이후 아버지는 다시 평정을 되찾으신 것으로 봐서 위기는 넘기신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때가 그 이후에도 몇 번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으셨던 때가 얼마나 많으셨을까? 남자에게는 저마다의 동굴이 있다는데 결혼과 동시에 그 동굴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가장의 책임만이 남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책임을 아는 남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아보인다.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낳아보면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 처음부터 가장이 되지 못한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자와 여자가 합일의 경지에 이르면 생명을 잉태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안한 것이고 결핍된 것인가?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완성을 향해 나가는 거라고 하지만, 무엇을 위한 완성이고, 어디로 가는 완성인지 모른다. 설혹 완성을 향해 간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먼저 죽게 되어 있고,  같이 살비비고 살면 남성성과 여성성이 마모가 돼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경우,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인칭으로 보지 않고 낮선 벌레 보듯하며 시도때도 없이 딸에게 전화해 그 관찰한 바를 보고하고 있지 않는가? 이토록이나 삶은 스산한 것이다. 그렇게 애정없는 결혼 생활에도 아버지가 돌아가니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운다. 깨달음은 죽음의 순간에 온다더니 아버지가 불쌍한 존재임을 어머니는 그때 깨닫는가 보다. 이렇게 작가의 결핍을 완성시키며 나가고 있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작품 사이 사이 나오는 곤충과 꽃들에 관한 이야기가 재밌다. 또한 아버지의 장례 장면중 화장해 타고난 뼛가루를 고슬한 밥에 소금과 함께 묻혀 새의 먹이로 주는 사찰 의례가 독특하고 새로웠다. 작가의 이런 공부와 노력이 더해져 나름 작품을 읽는 맛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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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12-2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핍을 인정하고 그걸 무엇으로 채우려고 애쓰지 않는 것,
그게 김훈의 글에 늘 느껴져 스산한 풍경을 떠올려줍니다.
저도 별 넷으로 했지요.^^
연말 무던히 잘 보내고 계신지요.
갈수록 가고 오는 시간에 무덤덤해짐을 느껴요.ㅎㅎ

stella.K 2010-12-30 14:17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은 좀 그랬지요?
반복적인 문장도 많고.

그러게요. 제가 프레이야님께 좀 소원했죠?
죄송해요.ㅜ

양철나무꾼 2010-12-30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님도 이 책에서 그의 결핍을 읽으셨군요~^^

stella.K 2010-12-30 11:0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데 이 작품을 보니까 비로써 그의 문학이
하나로 정리가 되더라구요. 결핍의 문학이었고, 관조의 문학이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