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일본 - 일본 귀족문화의 원류
모로 미야 지음, 노만수 옮김 / 일빛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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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해도 나는 일본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서양의 싸구려 문화와 흡사하며 오타쿠 문화로 대별되는 것외엔 별 볼 일 없는 거라고일축해 버렸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오래 전, 내 친구와 어딘가를 함께 가는 버스 안에서 일본 소설을 가리켜 "백치미 같다"고 까지 표현했을까. 그것도 너무나도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몇 편을 읽고서 말이다. 그나마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주 일본적이지마는 않으며미국적인 요소들이 있어 읽어줬던 건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생각해도 참 얍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최근들어 나의 이런 일본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결정타를 맞은 건 미미 여사의 <모방범>과 김명민이 열연한 <하얀거탑>의 원작자가 일본인이라는 것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들을 발견했고, 그러다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일련의 일본 영화들을 보면서 나의 그런 콧대 높은 생각들이 완전히 꺽이는 느낌이었다. 왜 나는 일본을 그처럼 얕게 보았던 것일까.

그것은 10년 전쯤에 보았던 <웰컴 투 미스터 맥도날드>였던가? 하는 일본 영화를 본 것에서 기인하기도 했다. 그때 그 영화를 얼마나 재미없게 봤던지 그 영화를 마구마구 욕하면서 추천했던 지인을 한통속으로 몰아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더랬다. 그러니까 난 그때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의 문학이나 영화가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엔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 아줌마가 당당히 그 필명을 날리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앞서 말했던 일련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일본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몰랐다는 후회를 할 밖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난 지금이라도 일본 문화에 열광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라도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 되었고 그 관심 때문에 이 책도 관심을 갖고 읽게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일본의 그런 문화의 힘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걸까?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사무라이의 나라가 아닌가? 거기에 뭔가의 저력이 있을 거란 것이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나의 동인을 끌어 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책이 그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책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다. 일본의 귀족문화에 대해 이만큼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고, 읽으면서 나의 일본에 대한 생각은 지극히 표피적이었다는 걸 역시 또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20년쯤 전이었던가? 전여옥이 썼던 일본 인상기 <일본은 없다>란 책이 한때 베스트 셀러가 됐다는 것이 오히려 일본에 대한 무지의 소치를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 화끈거릴 정도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책은 그때 당시 속으론 우리나라의 민족사관을 자극한 것이며 겉으로는 애국주의를 자극한 일종의 퍼포먼스는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무렵 그 해프닝을 잠재 울 어느 일본학자가 <일본은 있다>란 책이 나와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내 말은 그만큼 일본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우린 어떤 사물이나 경향 특히 남의 것을 볼 때 너무 감상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좀 더 냉정하고 이성적일 필요가 있는데 일개 전직 기자가 쓴 책가지고 냄비처럼 열광하다니. 일본 사람이나 다른 여타의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순전히 호기심이지만 그 대열에 나도 끼었음을 고백한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그래.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을 알 수 있는 대중서가 얼마나 있었나? 거의 전무하지 않았던가? 그땐 문화의 시대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한 때였고, 막 일본의  대중문화 매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일본에 대한 연구서는 <국화와 칼> 정도가 전부였던 때에 어찌보면 전여옥 신드룸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일본에 대한 책들은 심심찮게 쏟아져 나온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일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책들이 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책이 아니라 역시 일본적 이미지 자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데도 별 감흥은 없었다. 그냥 아, 이런 흐름이 있었구나를 아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 뿌리 박힌 지울 수 없는 일본에 대한 묘한 느낌인데 그 특유의 여성스러움이 이 책에서 한번 더 확인되어진 느낌 때문인 것 같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는 우리나라의 신라 시대와 연대를  같이 한다고 한다. 이때 이미 귀족문화가 형성이 되었다고 하니 무시 못할 그 무엇이 있는 건 당연한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그것을 언제부터 볼 수 있는 것일까? 일본 문화의 시조가 그렇게까지 오랜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어디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걸까? 나름 궁금해졌다. 흔히들 한국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정조시대를 말한다면 헤이안 시대 보다 늦어도 한참 늦는 건데 설마 그렇기야 하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거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연구는 좀 더 깊어져야하고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로 미야 아줌마가 이런 책을 낼 정도라고 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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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사진에 박히다 - 사진으로 읽는 한국 근대 문화사
이경민 지음 / 산책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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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여전히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진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보아 온 사진들은 거의 대부분이 예술적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의 단순한 잣대로만 봐 왔던 것 같다. 하긴 내가 관심있어 하는 쪽은 대부분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사진이나 정물 사진들을 좋아하니까. 그런데 알고 보면 사진은 꼭 그렇게 풍광이나 정물, 사람의 다양한 표정만을 담고 있지는 않는다. 

이 책은 나의 이런 단순한 잣대를 여지없이 깨 주는데 더 없이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은 사진이란 매개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사를 조명한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더불어 사진이란 물건이 우리나라 역사에 출연함으로 인해서 역사를 어떻게 바꿔왔는가라는 쌍방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은 때로 정치적 권력을 목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사회 문화적 변혁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기에 더 없이 좋은 도구였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하나 같이 제법 흥미롭다. 사진은 보도 자료로도 사용되기도 했지만, 특히 사진을 가지고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도 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황홀한)자살을 유도하기도 했고, 그 시대나 이 시대나 여전히 포르노그라피로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쓰였던 사진이긴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진은 아름다운 것 또는 어느 특정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만 쓰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보다 내밀하고, 심층적이며, 때론 인간의 욕망을 여지없이 까발리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진을 보는 눈이 좀 넓어진 느낌이다. 이 책은 사진으로 보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뿐만 아니라 사진의 사진사(史)로서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사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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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하악 - 이외수의 생존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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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결코 활자중독자는 아니다. 그래도 책은 항상 도톰한 두께에(너무 두꺼우면 기가 죽어버린다) 책장마다 웬만치 글자가 박혀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런 책이 다 좋은 책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책장마다 활자가 드문드문 박힌 책은 왠지 선듯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런 책이 꼭 나쁜 책이거나 별볼 일 없는 책이라고 할 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것은 분명 나의 책에 대한 편견일텐데, 오히려 반대로 활자만 많고 내용은 별거인 책 보다 활자는 드문드문 있는데 생각을 많이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면 후자가 더 좋은 책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책은 후자에 서 있다.

하지만 나 같이 아직도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 이 책을 손에 넣기란 또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느니만큼 이 책은 누가 읽어보라고 선물해 준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그 책을 선물해준 분께 고마움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눈이 편하다. 활자는 얼마 안되고 책장마다 우리나라에 왠 민물고기가 그렇게 많은지 민물고기가 종류별로 그려져 있다. 왜 그런지는 알 수는 없다. 아무튼 그래서도 읽기가 편했다.      

처음엔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할 수도 있겠다. 도대체 장르를 어떻게 정해야할지 모르겠다. 수필도 아닌 것이, 시도 아닌 것이 그냥 낙서집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낙서는 아닌 듯 싶다. 아니 우린 그동안 낙서를 폄하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또 어쩌면 이런 문인들의 낙서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범인들의 낙서는 별것 아닌 양 도외시 하는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이외수의 낙서는 재밌다. 아, 그런데 리뷰의 제목은 저렇게 달았으면서 낙서라고 하는 건 또 뭐냐? 읽다보면 견언집의 격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냥 읽다보면 웃음이 나온다. 어찌나 뼈있는 말을 해대시는지. 그래서 읽다보면 곱씹게 된다. 그러니 이외수식 아폴리즘이 생겨나는 것이다.

대단한 내공 같기도 하고, 저 '정도는 나도 생각했던 바 아냐?' 싶기도 하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갖게끔 하는 것이 또한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만큼 나는 이 정도의 생각도 못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런 생각을 가능케 해준 것이다. 그러니 그는 매번 책장에서 '생각 좀 하고 살라'고 꼬집어 대는 것 같다. 그것도 능청스럽게 눙치면서 말이다.

외모가 좀 독특해서 그렇지 욕심없이 선량하게 살 그에게도 유명세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지 종종 악풀러의 악풀 세례도 받는 가 보다. 그것에 대한 반론도 통쾌하다. 최근 자살한 일급 모여배우가 죽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녀의 자살만큼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게 평소 책 좀 읽고 살지. 죽은 사람만 안 됐지 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책을 화장실에 갈 때마다 앉아서 조금 조금씩 읽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집이 최근에 신문을 끊은 탓도 있긴 하지만, 화장실에서 읽으면 이 책을 읽는 쾌감이 배가가 되는 느낌이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길지 않은 문장에 녹여낼 수 있단 말인가? 시원하다!(확실히 언어를 배설물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보다.)

저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갖는 인식(어쩌면 편견일 수도 있는)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사고가 자유롭다. 또한 말이 자유롭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나이 정도면 컴퓨터상에서 떠도는 언어들, 이를테면 캐안습이니 즐이니, 조낸이니 하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게 이런 언어들을 쓴다.

이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켜내야할 작가가 국적 불명의 은어나 사용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같은 연배의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고가 자유롭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통할 수 있는 것 같아 더 좋아 보인다. 그것을 반영하듯 요즘 그가 하는 말들이 인터넷상에서 상종가를 친다고 한다.

우리가 은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말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각 나라마다 시대마다 은어는 있으며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그때문에 그 나라의 언어의 권위가 실추되었다는 자료는 읽어 본 적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신경증적인 영어 교육 열풍 때문에 우리말이 실종위기를 맞을지도 모르는 그것을 더 경계해 할 것이다. 일제시대 때야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려 모국어가 말살당했지만, 지금은 누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가 언어 식민지화를 자처하고 있다. 우리가 핏대를 세워야 할 것은 이런 것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이외수, 그가 어떻게 언어를 구사하는지 그의 언어의 세계로 빠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한마디로  이외수 만세!!!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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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흙 2008-11-07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이외수라는 작가가 지나치게 폄하된다는 생각을 할 때 있어요. 물론 그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지 않아 젊은 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그를 어떻게 달리 받아들일지는 저 자신도 잘 모르지만, 그는 적어도 치열하게 글밥을 30년 먹고 살아온 작가이니까요.

stella.K 2008-11-08 11:18   좋아요 0 | URL
저도 소설은 안 읽어봐서 뭐라고 말은 할 수 없지만 파란흙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독특하죠. 우리가 문학을 보는 안목이 넓어져야 그의 작품도 인정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어젠 잘 들어가셨죠? 댓글 다신 시간을 보니 바로 쉬지도 않고 컴 앞에 앉으셨나 봅니다.^^

진달래 2008-11-1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릴 적에 이외수 작가의 책 한권으로 이미 많은 편견을 갖고 있는데,
그래도 그의 멋(!)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라구요. ^^*
그의 글씨, 낙서, 그림 모두 좋아요... *^^*

stella.K 2008-11-14 11:37   좋아요 0 | URL
이 책 참 좋죠?^^
 
오셀로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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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나는 어느 극단에서 하는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햄릿>를 본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려운 부분은 거둬내고 오직 햄릿에 촛점을 맞춰서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나름 재밌고 볼만한 연극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연극이 원전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해석과 새로운 버전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한다고 해도 희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서는 연극 자체는 불가능 할 것이다.

그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극으로든 영화로든 몇번을 마주하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셰익스피어는 지난 몇 세기를 거치면서 잠들 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해 보게된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럴테니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번쯤은 묵념이라도 하고 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햄릿도 그렇지만 오셀로 역시도 비슷한 맥락에서 비극임을 심감케 한다. 인간이 원래 객관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에도 또 다른 사람이 개입하게되면 많은 오해를 낳게 만들 수 있다. 오셀로 역시 그렇지 않은가? 오직 이아고의 꾐에 빠져 사랑하는 데스데모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그는 역시 갈대 같이 약한 자 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찌보면 그는 한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보는 눈을 좀 달리해서 셰익스피어의 여자들을 보자. 데스데모나는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 끊임없는 모성으로 오셀로를 사랑하는 요조숙녀다. 어찌보면 셰익스피어 할배는 모성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햄릿의 오필리아는 또 어떠한가? 오필리아와 데스데모나는 같은 꼴이다. 햄릿을, 오셀로를 너무 사랑하다 미치거나 목이 졸려 죽는다.

오늘 날 이런 인물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의 작품에서 보는 건 그가 여자를 어떻게 그렸느냐가 아닐 것이다. 셰익스피어 할배는 남자를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고, 인간이 갖는 보편적 심리 즉 질투와 파멸, 죽음 등에 촛점을 맞추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할 수 없음을 얘기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날은 21세기고 데스데모나나 오필리아는 그닥 매력이 없는 존재들처럼 느껴진다. 그럼 점에서 셰익스피어는 마초라고 해야하려나? 물론 그 시대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여자가 박제된 시대다. 오죽했으면 여자는 연극 배우로 쓸 수다 없어 남자에게 여자 역할을 맡겼던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여자가 작품에선 그다지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 주자. 그런 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한번 이 이야기를 완전히 뒤짚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아직 본적은 없지만 햄릿이 아닌 오셀로가 아닌 오필리아나 데스데모나의 싯점에서 재해석한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접고라도 우리가 셰익스피어 그 이름 앞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시 같은 수사의 현란함과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통찰을 여지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서사가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오늘 날에도 끊임없이 만들어 지는 것처럼 그의 작품도 세대를 거듭해 번역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가장 최근에 번역된 책으로 알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일반 독자고 고로 셰익스피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번역이 더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간간히 작품을 읽어 본 짧은 독서 이력이긴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가 번역을 했던지 간에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을 번역한 번역자들의 수고와 노고 대해 헛투로 보아서는 안될 것 같다.

묵직한 계절 이 가을에 (다소 어렵긴 하지만)셰익스피어가 풀어내는 수사의 현란함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연극 한편 감상하면 금상첨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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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8-10-26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리뷰를 보며..제인 오스틴을 떠올립니다.
오스틴을 여자 세익스피어라고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여자의 관점에서 쓰여진 작품...그 당시에 파격적이었다는게 이해가 되더라구요.
네...묵직한 이 가을에 세익스피어 속에 빠져보고 싶네요.


stella.K 2008-10-27 10:5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제인 오스틴! 언제고 한번 독파해야겠슴다. 고맙습니다.^^
 
[심리학, 습관에게 말을 걸다] 서평단 알림
심리학, 습관에게 말을 걸다 - 손톱을 물어뜯는 여자, 매일 늦는 남자
앤 가드 지음, 이보연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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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만에 심리학에 관한 책을 읽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인간의 습관에 관한 것을 심리학으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을 읽으려니 나의 습관은 무엇인가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습관을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를테면 샤워를 아침에 하는가? 저녁에 하는가?
한동안 붐이었던 아침형 인간인가, 저녁형 인간인가에 대한 분류,
생각부터 하고 행동을 하는가 아니면 일단 행동부터
저지르고 보는가? 커피를 즐겨 마시는 것 등등
자잘하고도 개인 취향적인 면하고 깊은 연관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것도 습관으로 봐야하는 것인가?
좀 놀랍고 당황스러운 부분들도 꽤 있었다.
예를들면, 성도착증 같은 것이라든지 강박장애라든지,
볼펜을 물어 뜯는 것 등
이런 것들은 습관이라고 보기 보단 이상심리학에서나 다룰 법 하지 않는가?
아무튼 이런 것들은 습관이란 관점에서 보는 저자의 시각이 조금은 독특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간의 습관에 대한 세분화와 그것에 대한 소개에 그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자는 습관과 그것을 고치기 위해 강연도 하고 치료도하며 나름 바쁘게 사는 사람인 것 같긴한데, 자신의 안 좋은 습관을 고치기 위해 이책을 들었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그냥 이러 이러 한 것들을 습관으로 보고 있고, 이것을 습관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것과 고치기위한 나름의 방법등을 코멘트하는 정도에서 한정하고 있어 인간의 습관을 별로 깊이있게 다루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냥 습관에 관한 개괄이 알고 싶다면 읽을만 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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