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된 문장들
박범신 지음 / 열림원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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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제목이 그다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가도 알 텐데, 뭐든지 흔해지면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걸. 지난 몇 년 사이 이 '힐링'이란 단어가 얼마나 흔해졌던가? 그건 또 상업주의와 결탁을 해서 마치 자기네가 하는 것만이 힐링의 확실한 효과를 보장하는 양 선전을 하고 돈을 내라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훌륭한 것도 상업주의와 결탁이 되면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제목에서 이 단어만큼은 액면 그대로 사용하게 되길 원치 않았다.

 

하지만 왜 작가가 이 단어를 굳이 제목으로 하려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작가는 저항하고, 늙지 말아야 하며, 치유하는 사람이여야 한다. 나는 그것을 저자에게서 배웠다. 

 

지금도 생각이 난다. <은교>를 처음 읽었을 때를. 멋모르고 읽다 다리미에 데인 듯 했고, 결국 꺼풀뿐인 인간의 육체가 하도 덧없어 한줄기 눈물을 확 쏟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가가 말했던 '오욕칠정'이 과연 무엇인지 나 역시 두 눈 부릎뜨고 응시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동안 작가 주위를 맴돌며(작가의 다른 책을 읽고, 강연회를 쫓아 다니며) 작가가 말하는 오욕칠정이 뭔지를 알고 싶었다. 

 

이 책이 고마웠다. 나도 대중에 묻혀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아무리 애정하는 작가가 생겼다고 해도 세월 지나면 잊지는 않지만 조금은 저만치 밀쳐 두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시도 아닌 것이, 에세이도 아닌 것이 나의 주위를 환기시켜주었다. 작가는 그냥 메모장에 낙서처럼 써 놓은 글들을 그러모아 책을 낸다고 했다. 겸손의 말이겠지만 역시 낙서에도 급이 다르구나 싶었다.

 

누군가는 꼭 생의 비밀을 알 것만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겐 박범신 작가가 그랬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생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을까? 그런데 한 가지 이런 사람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그 답을 은근히 피해 갈 우려가 있다. 그래서 간첩이 간첩질을 하듯 아주 은밀하게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알아 본 바에 의하면 그의 안에 늙지 않는 괴물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열심히 쓰는 것도 이 괴물에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서 쓰는 것이란다.

 

그게 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글이 쓰고 싶어 죽겠는데 막상 쓰지 못하는 병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기 잘 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어쩌면 불을 훔쳤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독수리에게 심장을 뜯어 먹혔다던 프로메테우스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문학은 그에게 있어서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 했다. 가히 충격적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작가는 시대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본주의를 쫓는 글을 쓰는 것은 공해일 뿐이다. 내가 아는 박범신 작가는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인간이 얼마나 병들어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신의 고유의 문체로 문제를 제기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작가가 진짜 작가는 아닐지. 

 

책에서 작가는 매년 신을 만나러 히말라야에 오른다고 했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그의 작가 정신이 청년이지 그의 육체가 청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가 무릎에서 물을 뺀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노구에 다리가 아파도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이다. 왜 난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을까? 

 

나는 다리가 아픈 이후로 장시간 걷는 것을 극히 경계했고 여행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이렇게 나를 사려서야 무슨 꿈인들 제대로 이루어 보겠는가? 그는 작가는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디든 생생한 '현장'을 봐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것을 보면 어딘가에 가는 것을, 걷는 것을, 쓰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겠다.

 

이 책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짧은 단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특히 내가 읽었던 <은교>에 대한 단상을 보면 그 작품은 삶의 유한성에 맞춘 존재론적 소설이라고 했다. 나도 그것에 동감한다. 그러면서 난 얼마 전 읽었던 한 소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떻게 생각해도 아쉬운 소설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소설이 갖추고 있는 형식에 대해 생각해 본다. 너무 드라마적이지 않는가? 그걸 영화적 소설(쓰기)이라고 한다지. 그래서 현대 소설가들은 시나리오 작법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난 영화와 소설이 샴쌍둥이가 되가는 것에 대해 어떤 때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다가도 어떤 땐 영 못 마땅해진다. 이러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을 쫓아가는 것은 아닐지? 출판사의 마케팅 수법에 빠져 허우적대는 독자로 전락하는 건 아닐지? 도대체 드라마와 소설이 다른 것이 무엇이며, 뭐 때문에 소설 읽기의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드라마나 영화 보기가 소설 읽기 보다 몇 배 더 재밌고, 쉽지 않은가? 그러니 뭐 때문에 소설을 보겠는가? 그래도 분명 소설은 그것만이 가고 있는 고유한 사명이 있을 것 같은데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이 책에서 <은교>에 대한 단상을 발견한 것이다. 존재론! 그렇다 소설은 그래야만 한다. 그러므로 형식 보단 내용이 더 먼저여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SNS에 열심히 부응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고 여기는 문학지망생이 더러 있다. SNS는 문자문화가 아니다. 본격적인 작가수업을 하려면 오히려 멀리하는 게 좋다. 구술문화는 우리를 움직이게 할 뿐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트위터 등 SNS의 보편화로 문자문화는 오히려 실종됐다. 머물러 생각하는 일이 실종된 것이다. 턱밑까지 위험한 문명이 치고 들어와 똬리 틀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현상 너머의 이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문맹시대'이다(331p).  

 

작가는 확실히 기계적인 것, 자본적인 것을 거부하는 아날로그인이다. 하긴 원래 문자라는 게 아날로그가 아닌가?

 

저자는 천상 작가다. 무엇을 말해도 결국 작가에 대해서 말하고, 글쓰기에 대해 귀착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젊을 때 두 가지 약속을 했단다. 하나는 작가로 죽겠다는 것과 아내 곁에서 죽겠다는 것. 아직 그걸 지키고 사니 더 바랄 게 없다(326p)고 했다. 그러면 됐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박범신 식 '힐링'은 내가 아는 방식의 힐링과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것은 무한 긍정 에너지다. 그가 하는 말이 좋고 옳아서 고개를 끄덕에게 만든다. 가식이 없고, 이 말 한 마디 더해 어떻게 하면 부와 명예를 더 쌓을까 그런 것이 없어 보인다. 그의 문체 하나 하나는 자본주의를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또 크게 뭉뚱그려 보면 현실을 떠나 있지 않는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의 모든 아폴리즘 중 가장 압권은 역시 작가 자신의 문학 단상을 쓴 제일 마지막 대단원인 '열정은 사랑이다'인 것 같다. 그는 말했다. 

작가는 밀실에 존재하고 

작가의 사회적 자아는 광장에 존재한다.

밀실과 광장을 오락가락하는 게 작가의 삶이다.

소설은 광장을 지향하되 밀실에서 쓰니까(343p)       

이 말로 내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돈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더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했을 때 지지대가 없어 무너지는 삶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오지 않았던가? 힐링은 중요하지만 '누가 힐링을 하는가?'도 중요한 것 같다. 그건 의사일수도 있고, 상담사일 수도 있고, 작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지지않는 마음. 이것이 진짜 치유자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박범신 작가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리를 한 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이다. 사진과 함께 글이 듬성듬성 여백의 미를 느끼며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해 나 개인적으론 아주 만족스런 독서였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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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4-0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폴리즘을 좋아해요.
제 취미가 좋은 문장을 반복해 읽는 것이라서요.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수필과 소설을 쓰시는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젠 나이가 많으니까 다독을 하기보다 좋은 책 몇 권을 정독하고 싶다고요. 그리고 두꺼운 책보다 얇은 게 좋다고요.
저도 나이가 들어서 반복해 읽을 책을 하나씩 '목록 작성'을 해 놔야겠어요.
그럴려면 지금 열심히 다독해야 할 것 같아요.
SNS는 멀리 하란 말은 명심하고 말이죠.^^

stella.K 2014-04-03 14:02   좋아요 0 | URL
이 책 좋아하실 거예요.
전 아직 글씨가 듬성듬성한 책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꽤 만족스러웠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고, 음미해 볼 만한 글도 많고, 여백이 많지만 두껍고.ㅋ
언니에게 수필과 소설을 쓰시는 선배님이 계시다니 부럽네요.
누군지 살짝 알켜주시면 안 되요?ㅎㅎ

2014-04-05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5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원용 나의 현대사 2 - 전쟁의 땅 혁명의 땅 강원용 나의 현대사 2
강원용 지음 / 한길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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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고자 하는 것은 요즘 같이 기독교가 비판 받는 세상에서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판을 하는 쪽이나 비판을 받는 쪽이나 간에 말이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이 글을 쓰면서 저자인 강원용 목사를 두둔하는 글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같은 편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별로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사실 이 분이 지금도 살아 계셨으면 같은 기독교 진영 안에서도 비판을 받을 소지가 커 보인다. 왜냐하면 이 분은 나름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어디나 보수는 진보를 그다지 안 좋아하지 않는가? 그건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보수는 보수기 때문에 갖는 약점이 있다. 그건 본질 보단 비본질 다시 말해 전통이나 껍질 가지고 자꾸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사실은 저자만큼 보수적인 기독교인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북 출신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첫 세대에 속하신 분이니 얼마나 깐깐하게 예수를 믿었겠는가? 술, 담배를 금하는 것을 철저하게 따랐던 분이다. 그런 분이 미국 유학에서 기독교인이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더니 아예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 술을 마신다고 해서 구원 받을 것을 못 받고, 술을 안 마신다고 해서 구원 받을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든 본질을 지키고자 비본질이 너무 강조가 되면 주객이 전도가 되고만다. 저자는 그렇게 기독교 신앙안에서 자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미국 유학에서 배웠던 것이다. 말하자면 본질을 알면 그 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 개인적으론 기독교인 만이라도 술 담배를 경계하는 전통은 그대로 유지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도무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이런 것에서라도 좀 차이가 나야하지 않는가? 또 그런 표피적으로 나타난 것을 가지고 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기독교인이 술, 담배를 안하는 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만의 고유한 것이긴 한데 거기엔 옛 기독교 신앙 선배들이 몸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 하여 거룩하게 지킬 목적의식이 생긴 것이다. 또한 자신을 거룩하게 주님 쓰실 도구로 드리겠다는 일종의 신앙적 결기의 표현이 었던 것이다.

 

저자인 강원용 목사가 별세한 것이 2006년인가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오늘 날 담배 소비와 주류 소비가 높은 걸 생각하면 그렇게 현실참여 의식이 강하신 분이셨으니 아무리 그런 것에서 자유하다고 해도 나부터라는 생각에 다시 금주와 금연을 실천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한때 정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독교에선 곱지않은 시선이 있었고, 본인 스스로도 오래 전에 정치를 떠났지만 정치계에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았다. 결국 그것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전신인 기독교 사회문화 연구소를 세우게 되는 계기도 했다. 여기서 저자을 보더라도 기독교의 현실참여를 기독교인은 어떻게 보는가 그 차이를 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의 현실참여가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나는 오히려 기독교의 현실참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즉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종교다. 사실 예전의 기독교는 현실참여의 종교였다. 사회와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는 대명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의 기독교가 비판을 받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간다는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소금의 짠 맛을 잃은 기독교라는 것이다. 그나마 선행을 많이하는 종교로 기독교가 뽑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좀 애매해지는 상황이다. 

 

그는 확실히 앞서간 선각자였다. 그는 왜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으며, 예배 중 대표기도를 하면 안 되는 것인가를 문제 삼기도 했다. 그게 60년대 일이니 무려 30년이 앞선 생각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오늘 날 우리나라에 여자 목사가 있는 것이겠구나 싶다. 그때 당시엔 문제 제기만 했을뿐 시기상조라하여 묻혀지기도 했단다. 

                       

특별히 1권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저자의 진솔한 고백에 읽는 나도 숙연했었다. 그런데 2권에서는 사랑하는 막내 아들을 어린 나이에 먼저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아비로서의 아픔이 절절하다. 어찌 가족을 잃는 아픔도 모자라 자녀를 잃어야 하는 아픔을 또 겪어야 하는 것인지 저자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아픔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런 아픔을 주시는 것도 뜻이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2권에서는 조봉암과 박정희의 저자 나름의 조명이 눈에 띈다. 특별히 저자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대통령이 될 운명 때문이었을까? 박정희는 저자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것은 그대로 적중했다고 하니 저자의 혜안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의 유학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닐까 싶다. 그래서 큰 물고기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 듯 싶다. 보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그만큼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 자신 부끄럽고, 작아지는 느낌이다.    

  

1권에 이어 내가 이 책을 즐겨 읽는 건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한국 현대사가 흥미롭기 때문이고, 저자의 실존적 고민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고민하고, 행동하는 저자를 통해 우리나라 기독교의 나아갈 바를 알아 갔으면 좋겠다. 품절이란 게 여전히 안타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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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3-2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의 유학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닐까 싶다. "
- 외국에서의 생활은 우리 나라의 생활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경험일 것 같아요. 비교 대상이 없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비교할 수 없으니 중요하죠. 생활의 비교는 곧 문화의 비교로, 삶에 대한 태도의 비교로도 이어지겠죠.

많은 나라를 다니며 각각 가지고 있는 문화를 접하면... 아마도... 꼭 있어야 하는 문화란 없을 것 같네요. 위에서 말하듯, 술 담배를 꼭 하지 않아야 하는 규칙(또는 습관 또는 문화)이란 없다고 느끼는 것처럼요.
저는 외국 여행 대신에 책으로 그런 걸 느껴요. 외국 작가가 쓴 소설을 보면 우리의 문화가 어떤 모습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보이거든요.

티브이에서 보니깐 외국 어느 도시에선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오히려 아이를 입학시켜 달라는 부모가 많대요. 자기 아이가 거기서 배울 점이 많을 거라는 게 그 이유였어요.
우리 같으면 그런 학교가 동네에 지어지는 것부터 집값이 떨어진다며 반대할 텐데 그렇지 않아서 훌륭하게 느껴졌어요. 아마 그런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자신은 장애인이 아닌 점이 얼마나 축복 받은 것인지에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겸손해지고, 장애인 친구를 돕는 마음을 자연스레 길러 봉사 정신에서 얻는 기쁨이 뭔지 알게 되겠죠. 신체적 결함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런 나쁜 환경과 인간의 관계 등 많은 것을 알아가겠죠.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는 거죠.

저는 외국을 많이 다니는 여행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 외국 소설에서 그런 걸 배워야겠어요. ^^

stella.K 2014-03-30 12:36   좋아요 0 | URL
저는 학창시절 때 학교를 워낙에 싫어해서 공부를 충실히 하지 못한 걸
그다지 후회해 본적이 없는데 점점 나이 드니까 아쉽다는 생각을 해요.
특히 이런 책을 읽으면요.
중요한 일을 못 하잖아요.ㅠ
책이라도 열심히 봐야겠어요.ㅋㅋ

 
생각이 막힐 때 Break!
알렉스 코넬 엮음, 유영훈 옮김 / 안그라픽스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처음엔 이 책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이 어찌보면 (지나치게)심플하고 모던한 느낌이다. 부담없이 가볍게 읽기엔 좋은 책 같은데, 난 또 이런 책에 대한 편견이 있는지라 그다지 마음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읽어 볼 생각이 드는 건, 꼭 크리에이터들의 슬럼프 극복 방법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좀 엉뚱하게도)이 책을 통해 내가 모르는 크리에이터들을 알고 싶어서 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결론은 '이 책 좀 괜찮다' 싶다. 

  솔직히 크리에이터들에 대해 독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몇 가지 아이템들이 있긴 하다. 어떻게 그런 직업을 갖게 되었는가?, 어떤 교육 과정을 거쳤는가? 또는 어떻게 정상에 올라 설 수 있었는가? 그 정상에 오르기까지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었는가? 등등. 그런데 이 슬럼프 극복 방법은 앞의 기타 질문들에 살짝 묻어 가던가 빠지는 경우가 종종있다. 이 책의 작가는 이게 좀 아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예 이것을 화두로 삼을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

  독자로서 크리에이터들의 극복 방법을 아는 건 좀 흥미롭긴 하다.

무엇보다 그들도 인간이란 동질성을 느끼 게 해 준다. 그들은 항상 똑똑해서 하늘 꼭대기에서 전지전능한 작품만 내는 것 같지. 하지만 그들도 반드시 슬럼프가 있다는 것. 그런데 여기까지만 확인되면 이 동질성이 어느 만큼은 유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면 어떤 독자는 김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들은 극복했으니까. 적어도 극복하려고 노력하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크리에이터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건 이 차이다. 그들은 계속 뚫고 나가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서 머물던가 아예 딴 것을 알아 본다는 것의 차이.

  이 책을 읽으니 나도 나름 크리에이터 한 일을 해 왔고, 이 책이 '창의장벽'이라고 말하는 슬럼프를 나는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를 새삼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렇다 하게 전수할만한 극복 방법은 없어 보인다.

​  무엇보다 내가 볼 때 창의력을 요하는 직업은 별로 정상적여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주로 글쓰기를 해 왔는데,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미치도록 쓰고 싶다와 그 미치겠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양단을 늘 오갔던 것 같다.  

​  초기엔 나름 나를 혹독하게 다뤘던 적도 있다. 솔직히 이 '혹독'이란 말은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담대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겉은 강한 척 하지만 속은 무척 여린 스타일이다. 그러니 뭐든 실수는 거의 용납하지 못한다. 또한 잘 할 수 있는 일에만 나 자신을 올인하고, 그럴 수 없다면 아예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나도 욕심인지, 나의 한계가 어디까진지 알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 한때 무조건 창작학원에 등록했다. 첫날 선생님은 워크숍 작품으로 자신의 글을 한 작품 이상 제출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짧은 (자전)소설을 썼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A4 용지 10매 정도 되는 소설을 거의 두 달 가까이 붙들었던 것 같고, 그 알량한 소설을 쓰면서도 어찌나 스트레스였던지 당시 동생으로부터 물려 받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걸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일하다 스트레스 받아 투신하는 사람 마음이 어떤 지 그때 알 것 같았다.

  또 한 번은, 대본을 쓰고 있을 때였는데 연출가가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하도 주문이 많길래 그거 들어 주다가 대본을 7번인가 8번을 고치고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다. 물론 내가 병원에 간게 꼭 그 이유는 아니고 그 전부터 뭔가의 결함이 있었는데 그게 하필 그때 터져버린 이유가 더 크긴 하지만 그 이유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때 나는 두 경험을 통해 절대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 책에 나오는 어떤 크리에이터는 책상에 계속 머리를 찧어서라도 정면돌파 하라고 하는데 그건 확실히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며, 그러다간 과부하에 걸려 언제 또 병원에 실려 갈지 모를 일이다. 대신 요즘엔 '마감으로 자승자박 한다'던 그래픽 디자이너인 벤 베리의 방법을 선호한다.

 그는 이따금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작업을 끝내겠다고 공개 선언을 해버림으로써 인위적으로 다급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데, 효과는 만점(69p) 이라고 전하고 있다.

   나 역시 이 방법은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말만하고 실천이 없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긴 하지만, 사람이 무엇이든 입술의 열매대로 된다지 않는가?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자존심이 강해서 입술로 선언한 것은 대체로 행하는 편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진행된 일이 몇 건 된다. 사실 지금도 진행하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한데 사정상 여의치 않아 답보 상태에 있다. 그래도 민들레 홀씨 퍼트리듯이 일부러 여기 저기 쑤시며 내 계획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의도적으로 떠들고 다니는데 그러다 보면 언젠간 이루지 않을까?

  '인위적으로 다급한 환경을 만들라'는 벤 베리의 말은 더더욱이나 새겨 볼 필요가 있는데 크리에이터들 중엔 프리랜서들이 많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특성상 내가 원하면 일을 하고, 원치 않으면 일을 안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죽이는 프로젝트도 다급한 상황이 아니면 머릿속에만 있다 결국 시간 지나면 사장되어버릴 확률이 농후하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다급한 상황을 만들어 결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죽이는 결과든, 그저 그런 결과든 말이다.

  이 책에서 배울 것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과 도전을 잘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나 남에게나 잘 할 수 없으면 차라리 시작도 하지 말자는 얘기를 자주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난 왜 실수하면 안 되는 것일까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실수도 권리라면 권리일 수 있다.

  김병완이 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법칙>에서도 보면 천재들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천재들은 실패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처럼 많은 작품을 중  단 1% 만이 살아남아서 천재라는 타이틀은 안겨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 작가인 팀 네이비스는 말한다. 창의장벽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수를 많이 하는 거라고. 실수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한다고 믿는다. 예술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그만큼 나아지는 것이라고. 무엇보다 그는 실수를 통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한다고 했다.(120p) 

  흔히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 하는 건 내가 져야하는 책임을 감당하기 싫어서와 비난을 감내하기 싫어서는 아니겠는가? 하지만 실수는 남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 나는 결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실패를 통해 충분히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전에 '실패' 또는 '실수'라는 단어는 뺄 필요가 있다.                        ​

        

​  창의장벽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대해 각 크리에이터들이 하는 말이 조금 조금씩은 비슷하고, 또 조금 조금씩은 다르다. 그런데 이 책은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엉뚱하기도 한데 예를 들면, 데비 밀먼이란 작가는 창의장벽에 부딪히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쓴단다. 1. 충분한 수면을 취한다. 2. 질리도록 책을 읽는다(특히 고전을). 3은 건너 뛰고, 4. 더 잔다. 5. 일을 억지로 미룬다. 6번도 건너 뛰고, 7. 운다.고 한다. 부연 설명엔 울고 나서 더 운다(124p~)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요리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세탁을 하기도 한단다.

  나는 주로 어떤 방법을 쓰는가? 자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뭘 먹는 등 가급적 그 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려고 한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 일을 하고 싶어 미치겠는 순간까지 나를 팽팽하게 잡아 뒀다 거짓말 좀 보태서 잡아 먹을 듯이 일한다. 그러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난 아직도 죽지 않았어. 하며 스스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그래도 슬럼프가 오거나 말거나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꾸준이'의 방법을 따라 갈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창의장벽에 부딪히면 무엇을 하는가? 함께 나눠줬으면 한다.  

  

 ​  솔직히 이 책은 의도된 것이긴 하나, 좀 가볍게 씌여져 있다는 느낌은 피해 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창의장벽 또는 슬럼프와 그것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 각 크리에이터들의 노하우를 간략하게 소개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만족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크게 확대 해석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도 아직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고, 큰 의미에서의 위기관리를 위한 책은 아니니까 말이다. 단지 스트레스를 받고, 슬럼프를 겪을 때 어느 장을 펼쳐 읽어도 좋으리만큼 간략하게 써 놓은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자 단점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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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6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6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춘성어 - 인생을 움직이는 네 글자의 힘
최영갑 지음 / 맛있는책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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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펼칠 땐 왜 청춘성어인가 약간은 불만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이미 청춘을 지나쳤 버렸기 때문이다. 저 '청춘'이란 단어를 빼면 부담없이 읽겠는데 왜 앞에 저런 단어 하나 붙여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가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나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긴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 보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자신의 나이듦을 부정하기 보다 나답게 나이드는 것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이 먹기 싫어 발악한다느니 오해 받는 것 보다 훨씬 나은 것은 아닌가 싶다. 하긴, 인간 수명 100세 시대를 생각하면 내 나이가 그리 많이 든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나이가 딱 청춘은 아닐까?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고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뉘라서 젊은이에게 이런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말을 해 주겠는가? 정말 저자가 젊은이들을 사랑하는가 보다 싶다.

 

나이가 드니 옛 사자성어가 매력적으로 다가 온다. 그래봐야 학창시절 꼴랑 한문이나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이 고작인데 이마저도 배우지 않았더라면 사자성어가 이렇게 매력적인 줄 어찌 알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알지못하는 사자성어가 이렇게 많았던가? 놀랍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사자성어는 몇 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외워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겠지만 외워둘 자신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굳은데다 원래부터 외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해하는 건 좋아하면서 외우는 건 싫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또 얼마나 될까? 사자성어는 옛 성현들이 살아보고 만들어 낸 고어인만큼 이해는 둘째치고 무조건 죽자고 외워둔다면 어느 순간 나의 삶이나 상황에 적합하게 맞아 떨어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런데 젠장. 우린 어쩌자고 그 젊은 날 사자성어 하나 제대로 외워 볼 생각 못하고 토익 점수에 민감하고, 스펙에 목매달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 사랑에 울고, 남 보다 괜찮은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청춘이 되어버린 걸까?

 

남의 나라 언어는 죽자고 외워 뭐하겠는가? 그래봤자 남의 나라 말일뿐인다. 사자성어는 우리의 인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외워두면 인성교육이 된다. 옛날에 서당에서 학동들이 훈장님이 외워 오라는 것을 못 외울 땐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았다. 

 

나는 학창시절 한문 하나 못 외웠다고 매 맞은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영어나 수학 못해서 매맞은 적은 있다. 왜 그랬을까? 한문 선생님이 인간성이 좋아서? 뭐 그럴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다른 과목에서 얻어 터질 것도 많은데 한문 정도야 중요한 과목은 아니었으니 선생님이 가급적 매를 드는 건 삼가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이 책을 덮을즈음 떠올랐다.

 

남 보다 조금 다른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가급적 외워 두라고, 외우기 어려우면 손 가까운데 두고 수시로 펼쳐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청춘을 산다면 어떤 사자성어를 금과옥조(오, 사자성어 나온다!)로 삼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종신지우(終身之憂)와 낙양지귀(洛陽紙貴)와 금구계이(金鉤桂餌)를 들겠다.

 

종신지우란 "죽을 때까지의 걱정"이라는 뜻으로, 평생의 근심이 될만한 일을 걱정하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 걱정하지는 말라(176p)는 뜻이란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나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 목숨 걸고, 불안해하며, 불만을 잔뜩 안고 살아왔던가? 큰 일을 이룰 사람은 그 생각하는 바가 다른 법인데 나는 늘 나의 이해관계에 민감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낙양지귀는 직역하면 "낙양의 종이 값이 오르다"란 뜻으로 문장이 좋은 것을 칭찬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즉 저자의 말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남에게 알려질 때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는 말로, 남은 일생을 책임질 10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젊은 시절 대본 쓰는 일에 청춘을 바치고 작년에야 비로소 내 작품을 대학로에 거는 쾌거(!ㅋ)를 이루어 냈다. 그러기까지 거의 2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물론 그 세월 동안 대본만 썼다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안 쓴 세월도 있다. 그렇다면 10, 5,6년만에 올렸다는 말도 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분야에서 욕심을 내 볼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그랬으면 나도 10년 안에 뭔가를 이루지 않았을까? 너무 욕심이 없었다. 하기는 주어지면 열심히 했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세월이 걸렸고, 그것도 그나마 누군가 옆에서 종용했던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의 인생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직은 청춘이라고, 앞으로 살아 온 세월만큼 살게 될 거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난 10년 안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인생을 낭비하며 살 수가 없다.

난 앞으로 이 10년 동안 뭘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한다.

 

또한 금구계이는 어진 사람의 인품보다 강한 것은 없다(88p~)이란다. 이건 정말 내가 닮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성품이다. 나는 이 험한 세상 나 스스로를 지키키 위해 얼마나 고슴도치를 자처하며 살아 왔던가? 난 이 어진 성품이 가면 갈수록 되질 않는다.

 

그 보단 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라고, 즉 상대를 쓰러뜨릴 때는 먼저 상대편의 힘이 되는 것을 무너뜨리라(31p)는 말이 눈에 더 들어오니 학문으로 도를 닦을려면 아직도 멀었지 싶다(그도 그럴 것이, 난 벌써 1년 남짓 나의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 하나를 어쩌지 못해 고민 중이니까. 그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성어가 바로 이것이다. 그 사람을 쓰러 트릴 계략으로 그 사람의 힘이 될 만한 것이 뭐가 있는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난 또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고, 그렇지 않아도 그는 이미 힘이 되는 것을 잃었다. 그런데도 저 성어를 보고 눈이 커지다니. 난 역시 소인배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정말 옛 선현들은 학문으로 도를 닦으려 했다. 물론 분명 열심히 공부하면 출세도 하고 일가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도를 닦은 것은 아니다. 

인성교육, 인성교육 말은 많이 하지만 우리나라 인성교육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젊은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다는 게 참 귀하다.

이렇게 젊은 사람에게만 들려주는 사자성어 말고, 여성에게도 또한 더 나아가 저자의 인생론도 이런 형식을 빌어 들려줬으면 좋겠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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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일단 생각 보다 읽기가 녹녹치 않다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번역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책에서도 보면, '오늘 날 출판이 처한 참담한 상황이 너무 많은 출판사가 번역가에게 거만하게 굴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일축해버리는 유감스러운 풍조 등은 차치하더라도, 많은 독자가 번역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37p).'고 꼬집었다.  

 

이 글을 대했을 때 나는 과연 번역자를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번역가를 조금이라도 이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었을까?

 

이런 것은 있다. 독자들 중엔 번역서를 안 읽는다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국내 서적은 잘 안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번역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느니 원서를 읽겠다든가 번역이 필요없는 우리나라 작가가 쓴 책을 읽겠다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나라 저자들은(물론 다 그런 건 아닐테지만) 시야가 좁고, 어떤 사고의 틀에 갖혀 있어 답답해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전자든, 후자든 책을 읽는 수준 꽤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그런 것을 파악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뭔가를 배우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닌가? 그 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촛점을 맞추지 않고 번역이 어떠느니, 저자가 어떠느니 하는 건 책을 읽는 자의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단지 이런 것은 있을 수 있겠지. 독자도 인간이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나와는 안 맞는 작가. 나와 안 맞는 작가는 그저 안 맞는 작가일 뿐이지 그 작가가 넓은 사고를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는 가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저자는 책에서 자국어로된 책들이 넘쳐나는데 남의 나라 책을 번역할 필요가 있냐고 물어 본다. 이런 질문이 좀 생뚱맞은 건 사실이다. 무슨 국수주의도 아니고. 그것에 대해 괴테는 이렇게 말했단다.

'한 나라의 문학이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 받을 수 있는 영향과 기여를 막는다면, 결국 그 나라의 문학은 스스로 고갈되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의 질은 낮아지기 마련이라고(33p). 나 역시 괴테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다 보면 가끔 어떤 독자의 혹평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번역본을 보고, 이게 번역이냐, 제2의 창작이냐며 비아냥을 보는 것이다. 만약 그 번역자가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괜히 내가 뜨끔해진다. 물론 그렇게 쓴 리뷰어의 진위 여부를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를 자국어로 옮기는 것이냐 아니면 이 책에서 말한대로 제 2의 창작으로 규정하느냐다. 책은 후자에 무게를 더 실어줬고, 나 역시 그것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번역엔 두 갈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원작자의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오리지널리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문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액티비스트다. 전자는 아주 미세하고 사소한 원문상의 차이까지 존중하여 번역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되살리려 힘쓴다. 후자는 자의적 정확성 보다는 조옮김한 음악과 같은 새 작품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훌륭한 번역가라면 양쪽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간의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라고 페비어는 썼다(59p).

 

이 글을 읽었을 때 번역가도 역시 녹녹치 않은 직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칭찬 보다는 욕을 더 많이 듣는 직업은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페비어가 말했던대로 전자와 후자의 조화 즉 50대 50의 조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번역하는 책마다 이 비율이 정확히 맞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어떤 책은 51대 49가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책은 40대 60 또는 30대 70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번역가는 그래도 비율에 맞추느라 노력했는데 독자가 그렇게 안 봐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얘기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번역서는 있어야 한다는 것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번역가나 독자나 출판사나 말이다. 중요한 건 서로의 신뢰도를 높여 나가는 것이겠지.      

자주 나타나는 건 '번역투'란 조롱인데, 나는 솔직히 어떤 걸 두고 번역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저자는 번역을 제2의 창작으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작가들마다 자신의 특유의 문체가 있는 것처럼 번역자에게도 특유의 문체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에게 특유의 문체는 인정을 받으면서 번역가에겐 그것이 번역투로 조롱을 받는다면 좀 억울하긴 할 것이다.

 

단지 난 독자로서 그런 불만은 있다. 문체가 너무 조악한 경우다. 이 책의 원서는 어떻길래 번역이 이럴까?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그런 번역자가 다음에도 번역서를 낸다면 인정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드러나지 않을만큼 우리나라 번역의 수준은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80년 대 번역으로 그 이름을 알리며 번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던 제 1세대들, 안정효나 이윤기 또는 정영목 씨 이후 지금까지 번역 전문가들의 활약상은 가히 눈이 부시다고 생각한다. 또 좋은 번역자가 쓴 책만을 골라 읽는 독자의 안목도 세졌다.   

 

그런데 이 책을 대하고 보니 분명 번역가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원작자의 이름에 묻혀 자기 목소리를 낼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번역가들에 대한 이해와 위상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인간을 보시고 인간의 언어를 흩어 놓으셨다고 했다. 그건 분명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긴 하지만 번역가들에겐 분명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나라가 책 출판 10위 안에 드는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번역된 책 보다 번역 안 된 책들이 더 많다. 그러니 번역자가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부디 원작자의 이름 뒤에 숨지 마시라. 

 

재미있는 건, 저자는 책에서 자신의 '돈기호테 번역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번역을 하기로 해 놓고 그야말로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풉하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번역가도 이러는구나 싶었다. 솔직히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느낄 것이다. 글을 쓸 때 완벽하게 뭘 알아서 쓰지마는 않는다. 글을 쓰다보면 안개낀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때가 있고, 어떤 땐 시작부터 어떻게 시작하지? 하며 막막해 하다 쓰는 경우도 있다.

하다못해 책 한 권 읽고 리뷰 쓰는 일 조차도 바로 쓰지 못하고 여기 저기 인터넷을 한동안 주유하다 쓰는 것을 보면 베껴 쓰는 일이 아니면 모든 글 쓰는 일은 다 어렵다.    

 

그리고 저자는 또 말한다. 번역을 잘 하기 위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야 했는가에 대해. 당연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랬다면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 연구자가 되는 것이겠지. 그리고 번역을 하다보면 운 좋게도 저자와 만나게 되는 최상의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럴 때는 저자와 함께 노래하는 기분이라고 적고 있다(95p). 그 기분이 어떨지 감히 상상해 본다. 그래서 번역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책이 200 페이지도 안 되면서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것 같다. 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번역자의 삶과 고충에 대해서도 좀 알아야할 것 같다.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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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1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하면 번역이 엉터리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직역'으로는 번역이 안 되니까요. 그렇다고, 문장을 '의역'으로만 옮기면, 이때에는 번역이 아닌 창작이 되니, 직역과 의역은 '오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말아요.

무엇보다도, 번역을 하려면, 제 나라 말을 잘 할 줄 알아야 해요. 영어를 잘 안다 한들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 번역가가 영어로 된 책을 잘 이해했어도, 이 책을 한국말로 읽을 독자한테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외국말을 전공해서 번역하는 사람이 꽤 많기는 해도, 막상 한국말을 함께 슬기롭게 익혀서 번역하는 번역가는 뜻밖에 퍽 적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쓰는 '비유'를 번역가가 공부하지 않으면, 번역이 엉터리가 될 테지요. 아무나 '이상한 나라 앨리스'를 번역하지 못해요. 영국이라는 나라가 흘러온 깊은 역사와 문화를 알지 못하면, 이 작품을 번역하지 못해요.

상품 해설서를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인문책이나 문학책을 번역한다면, 마땅히 작가를 잘 알지 못하고서는 번역이 제대로 안 되겠지요.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서 번역만 하기에 '번역투'가 생깁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서 창작하는 사람도 많으니...

stella.K 2014-02-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맞아요. 그래서 번역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나라에 원작자만큼 잘 알려진 번역자도 드물게는 나타나고 있으니
이 계통으론 좀 더 지켜봐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지막 말씀은 저도 좀 찔리네요. ㅋㅠㅠ

페크pek0501 2014-02-1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좋은 주제에 대해 쓰셨네요.
"저자는 책에서 자국어로된 책들이 넘쳐나는데 남의 나라 책을 번역할 필요가 있냐고 물어 본다."
-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 것 같아요.
당연히 남의 나라 책도 번역하고 읽고 해야죠.
남들은 우리를 아는데 우리는 남들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외국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그들만의 문화를 보는 게 재밌더라고요.
가령 우리의 명절이라고 할 만한 크리스마스에 그냥 시어머니께 며느리가 간단히 인사하고
밥 한 끼 먹고 마는 그런 문화 같은 것이라든지,
이혼한 부부가 마치 친구처럼 만나고 새로 결혼한 배우자를 소개하는 것이라든지...
아이와 외할아버지가 친구처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든지(아이가 할아버지의 이름도 부르잖아요.)그런 걸 보면서(또는 좋은 번역서를 보면서) 바람직하다고 할 만한 좋은 문화라면 외국 문화라 할지라도 우리가 배우고 흡수하는 게 좋단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좋은 문화를 형성해 나간다면 좋잖아요.
그러면 자연히 그와 대칭되었던 나쁜 문화들은 사라지겠죠.
물론 나쁜 문화는 우리 것이든 남의 것이든 비판해야겠지요. 사람도 비판...

(단, 남을 비판할 땐 '겸손하기'가 중요하다는 걸 요즘 새삼 느끼고 있어요.)
좋은 주제를 쓰셔서 님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하고 갑니다.
응원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stella.K 2014-02-18 18:51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리뷰엔 미쳐 쓰지 못했는데, 책에선 미국은 번역서를 잘 안 내기로
유명하다고 해요. 그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이죠.
미국은 그렇게 오만을 부리다가 언젠가 뒤쳐지게 될 거예요. 그죠?ㅋ

2014-02-18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