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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일단 생각 보다 읽기가 녹녹치 않다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번역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책에서도 보면, '오늘 날 출판이 처한 참담한 상황이 너무 많은 출판사가 번역가에게 거만하게 굴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일축해버리는 유감스러운 풍조 등은 차치하더라도, 많은 독자가 번역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37p).'고 꼬집었다.
이 글을 대했을 때 나는 과연 번역자를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번역가를 조금이라도 이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었을까?
이런 것은 있다. 독자들 중엔 번역서를 안 읽는다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국내 서적은 잘 안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번역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느니 원서를 읽겠다든가 번역이 필요없는 우리나라 작가가 쓴 책을 읽겠다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나라 저자들은(물론 다 그런 건 아닐테지만) 시야가 좁고, 어떤 사고의 틀에 갖혀 있어 답답해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전자든, 후자든 책을 읽는 수준 꽤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그런 것을 파악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뭔가를 배우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닌가? 그 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촛점을 맞추지 않고 번역이 어떠느니, 저자가 어떠느니 하는 건 책을 읽는 자의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단지 이런 것은 있을 수 있겠지. 독자도 인간이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나와는 안 맞는 작가. 나와 안 맞는 작가는 그저 안 맞는 작가일 뿐이지 그 작가가 넓은 사고를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는 가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저자는 책에서 자국어로된 책들이 넘쳐나는데 남의 나라 책을 번역할 필요가 있냐고 물어 본다. 이런 질문이 좀 생뚱맞은 건 사실이다. 무슨 국수주의도 아니고. 그것에 대해 괴테는 이렇게 말했단다.
'한 나라의 문학이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 받을 수 있는 영향과 기여를 막는다면, 결국 그 나라의 문학은 스스로 고갈되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의 질은 낮아지기 마련이라고(33p). 나 역시 괴테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다 보면 가끔 어떤 독자의 혹평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번역본을 보고, 이게 번역이냐, 제2의 창작이냐며 비아냥을 보는 것이다. 만약 그 번역자가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괜히 내가 뜨끔해진다. 물론 그렇게 쓴 리뷰어의 진위 여부를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를 자국어로 옮기는 것이냐 아니면 이 책에서 말한대로 제 2의 창작으로 규정하느냐다. 책은 후자에 무게를 더 실어줬고, 나 역시 그것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번역엔 두 갈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원작자의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오리지널리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문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액티비스트다. 전자는 아주 미세하고 사소한 원문상의 차이까지 존중하여 번역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되살리려 힘쓴다. 후자는 자의적 정확성 보다는 조옮김한 음악과 같은 새 작품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훌륭한 번역가라면 양쪽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간의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라고 페비어는 썼다(59p).
이 글을 읽었을 때 번역가도 역시 녹녹치 않은 직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칭찬 보다는 욕을 더 많이 듣는 직업은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페비어가 말했던대로 전자와 후자의 조화 즉 50대 50의 조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번역하는 책마다 이 비율이 정확히 맞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어떤 책은 51대 49가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책은 40대 60 또는 30대 70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번역가는 그래도 비율에 맞추느라 노력했는데 독자가 그렇게 안 봐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얘기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번역서는 있어야 한다는 것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번역가나 독자나 출판사나 말이다. 중요한 건 서로의 신뢰도를 높여 나가는 것이겠지.
자주 나타나는 건 '번역투'란 조롱인데, 나는 솔직히 어떤 걸 두고 번역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저자는 번역을 제2의 창작으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작가들마다 자신의 특유의 문체가 있는 것처럼 번역자에게도 특유의 문체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에게 특유의 문체는 인정을 받으면서 번역가에겐 그것이 번역투로 조롱을 받는다면 좀 억울하긴 할 것이다.
단지 난 독자로서 그런 불만은 있다. 문체가 너무 조악한 경우다. 이 책의 원서는 어떻길래 번역이 이럴까?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그런 번역자가 다음에도 번역서를 낸다면 인정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드러나지 않을만큼 우리나라 번역의 수준은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80년 대 번역으로 그 이름을 알리며 번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던 제 1세대들, 안정효나 이윤기 또는 정영목 씨 이후 지금까지 번역 전문가들의 활약상은 가히 눈이 부시다고 생각한다. 또 좋은 번역자가 쓴 책만을 골라 읽는 독자의 안목도 세졌다.
그런데 이 책을 대하고 보니 분명 번역가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원작자의 이름에 묻혀 자기 목소리를 낼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번역가들에 대한 이해와 위상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인간을 보시고 인간의 언어를 흩어 놓으셨다고 했다. 그건 분명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긴 하지만 번역가들에겐 분명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나라가 책 출판 10위 안에 드는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번역된 책 보다 번역 안 된 책들이 더 많다. 그러니 번역자가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부디 원작자의 이름 뒤에 숨지 마시라.
재미있는 건, 저자는 책에서 자신의 '돈기호테 번역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번역을 하기로 해 놓고 그야말로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풉하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번역가도 이러는구나 싶었다. 솔직히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느낄 것이다. 글을 쓸 때 완벽하게 뭘 알아서 쓰지마는 않는다. 글을 쓰다보면 안개낀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때가 있고, 어떤 땐 시작부터 어떻게 시작하지? 하며 막막해 하다 쓰는 경우도 있다.
하다못해 책 한 권 읽고 리뷰 쓰는 일 조차도 바로 쓰지 못하고 여기 저기 인터넷을 한동안 주유하다 쓰는 것을 보면 베껴 쓰는 일이 아니면 모든 글 쓰는 일은 다 어렵다.
그리고 저자는 또 말한다. 번역을 잘 하기 위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야 했는가에 대해. 당연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랬다면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 연구자가 되는 것이겠지. 그리고 번역을 하다보면 운 좋게도 저자와 만나게 되는 최상의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럴 때는 저자와 함께 노래하는 기분이라고 적고 있다(95p). 그 기분이 어떨지 감히 상상해 본다. 그래서 번역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책이 200 페이지도 안 되면서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것 같다. 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번역자의 삶과 고충에 대해서도 좀 알아야할 것 같다. 읽어 볼만 하다.